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View Article

참 성령의 사람( 2007년8월25일, 성령강림주일후열네번째주일)

하늘기차 | 2007.09.02 18:26 | 조회 2120


참 성령의 사람

2007년8월25일(성령강림주일후열세번째주일) 롬8:5-11

오늘 말씀 8절에 보면
“육신에 매인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육신에 매였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도 그 육신이 바라는 것은 십자가를 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 하나님께 마지막으로 기도할 때 육신의 안타까움을 고백하였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으시니,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그러나 이어서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여 주십시오”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말씀의 성령에 속한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조차도 육신의 생각이 끊임없이 떠오르지만, 예수님은 육의 생각을 쫓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을 따라갑니다. 이것을 ‘성령에 속한’, 또는 ‘성령에 붙들린’ 사람이라고부르는 것입니다.

에이! 예수님이나 할 수 있고, 바울같은 성자나 그렇게 할 수 있지 할지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훌륭한 운동 선수들을 보면 하루 아침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는 반복 훈련을 통해 그 길을 따라 감으로 오늘의 결과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영표 선수 이야기를 얼핏 들었는데, 학원운동이 보면 항상 승부에 잡착하기 때문에 그 나이 때에 맞는 꼭 필요한 훈련보다는 오직 이기는데 목적을 두고 연습하여 개인의 기본기를 제대로 익히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영표를 지도했던 코치는 영표에게 외국의 유명한 선수들의 몸 동작을 하나 하나 짚어가며 쉬지 않고 연마를 했다는 것입니다. 헛다리집기도 그렇게 해서 배운 기술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훈련도 그렇습니다. 성령의 사람이라는 것이 내 안에 늘 성령이 있고, 그래서 내가 늘 기계적으로 로봇처럼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도 육신의 생각이 늘 있었지만 영적 감동에따라 아버지의 뜻을 바라보는 삶을 늘 끊임없이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소유하고 맛보고 느끼며, 즐기는 삶도 우리에게 마땅하고, 중요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 평화, 나눔, 용서, 화해, 관용과 배려와 같은 하나님 나라의 기쁨이 없다면 그 인생 너무 공허하지 않은가요? 이러한 열매들이 마치 밤 하늘의 별과 같이 우리의 삶, 마음 가운데 반짝 반짝 빛나야 하지 않겠나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14:17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감동에 따르지 않고는 이 감동, 이 영적 삶의 기쁨을 맛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최근 이 시대에 가장 많이 회자된 말 중의 하나가 영성이라는 말입니다. 그 전엔 녹색, 웰빙, 행복...등이었는데, 요즈음은 부쩍 영성에대한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회자되는 것을 봅니다. 아마도 사회주의 사회의 붕괴, 그러면서 신 자유주의의 거대자본주의로 인하여 가속이 붙은 선정적인 상업주의, 물량주의, 천박한 자본주의에대한 회의, 또 교회의 교회 다음의 상실 등에서 오는 박탈감, 소외감에서 오늘 이 시대가 영성에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영성이라는 말의 의미는 참 폭 넓고, 그리고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쉽게 하나님과 개인이 갖는 어떤 신앙의 경지, 방언과 같은 성령의 현상, 또 신앙을 떠나서 어떤 초월적인 힘과 통할 수 있는 신비한 능력... 이렇게 되면 모든 종교, 비 종교가 다 통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런데 문제점은 통상 그런 영성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이 세상을 초월한 어떤 것, 그러니까 이 세상은 타락했고, 부정한데, 이 세상은 악한데, 그래서 이 세상을 초월한 어떤 실제를 자기 내면 속에서 경험하는 것, 깨닫는 것. 또 세속을 벗어난 삶. 기도와 수행. 초월적 존재와의 합일. 황홀한 신비체험 등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영적 추구의 논리를 가만히 보면 2원론적입니다. 인간은 영과 육으로 되어있고, 육체는 일시적이며, 비천하고, 영적인 것은 영원하고, 고귀한데, 그래서 인간은 일시적으로 육체라는 감옥에 갖혀 있어 항상 불완전 할 수 밖에 없는 존재로 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뛰어난 사람은 이 세상 모든 욕망과 문제들에 초연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소위 도사입니다.

그러나 성서가 말하는 영성은 다릅니다. 성서는 인간을 본질적으로 영과 육을 따로 구분하고 있지 않습니다. 영과 육을 하나로 이해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여러분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몸이 결코 비천할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합니다. 교회사적으로 몸을 천시하는 사람들을 보면 열광주의나, 영지주의, 이단들입니다. 이들은 영적 깨달음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육체는 가치 없는 죽으면 훌훌 벗어버릴 껍데기입니다. 그래서 쉽게 금욕주의나 쾌락주의로 빠집니다. 그리스도의 육신도 부정합니다. 예수님의 육체도 껍데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몸을 입으신 육으로 오신 예수님의 피흘리심, 찢기심, 고통, 모두 그대로 이 땅을 벗어나서는 이야기 할 수 없는 예수님의 죽으심입니다. 언젠가 미국의 한 사이비 종파가 UFO와 접선하기 위해 집단 자살을 꽤한적이 있습니다. 또 사실은 인간 보다 뛰어난 문명을 가진 외계인이 우리의 창조주이며, 죽음을 통해 육을 벗어나 먼 우주로 이동해 우릴 창조한 외계 문명과 만난다는 것입니다. 2원론입니다.

콘텍트라는 영화를 본적이 있습니다. 고도의 지능을 가진 생명체의 실존을 믿고 외계와 접촉을 하려고 하는데, 먼 우주로부터 이상한 메시지를 받습니다. 그 메시지에는 외계로 갈 수 있는 우주선의 설계도가 있어서 우주선을 만들어 시간과 차원 이동을 통해 미지의 세계로 여행을 떠날 수가 있습니다.
환상적인 여행을 떠나 어릴 때 헤어진 아버지와 만납니다. 그런데 이것은 주인공 혼자의 체험입니다. 그 우주선은 그만 바다에 추락하고 맙니다. 주인공의 경험은 단지 환상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우주선은 몇 분 밖에 작동하지 않았는데, 우주선 카메라가 잡은 영상의 시간은 무려 18시간이나 됩니다. 화면은 지지직 거리는 파장만 있지만 지구의 시간으로는 잴 수 없는 어떤 시간 이동이 실제로 일어났음을 암시해 줍니다.

마치 구원이 이 지구를 벗어난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합니다. 이 영화속에 담겨져 있는 상징적 코드를 보면 다분히 종교적이며, 소위 영성에대한 암시도 들어있는 것을 봅니다. 무엇이냐 하면 그 외계의 생명체를 믿고, 그와 접촉하고, 그 외계인의 메시지를 받고, 그 메시지를 해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면 좁고, 답답한 이 지구, 전쟁과 분쟁, 기아, 환경 오염으로 망가져 가는 이 세상을, 병들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이 육신을 벗어나서 미지의 세계와 접촉하고, 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줍니다. 생존경쟁의 치열함 속에 힘들어하는 현대인에게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는 어떤 윤리나, 어떤 종교적 행위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지극히 평화롭게 보이고, 마치 천국이 여기구나 할 정도의 표정으로 우리들에게 다가옵니다. 실제 그러한 집단의 대표의 모습을 보면 마치 천사 같고, 도사 같은 모습인 것을 봅니다.

그러나 그 구조를 찬찬히 살펴보면 원시 무속 신앙의 신접과 별 차이가 없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외계의 생명체는 신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에 등장하는 외계와 통할 수 있는 주인공 소녀는 무당입니다. 또한 외계의 세계와 현 세상을 연결시키는 우주선 그리고 통신을 가능케하는 과학기술, 사이버 기술은 무당의 신접하는 춤과 굿 판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2천년 전 초대교회 영지주의자들이 몸을 떠나 영혼이 천상의 빛과 합일하여 육체에 붙들려 있는 각 개인이 빛을 깨달아 신령한 세계와 합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오늘날 외계인과의 접촉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시대만 다를 뿐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몸을 벗어나 영으로 얻는 구원이 아니라 몸의 죽음과 몸의 부활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어떤 능력이나, 초월을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영성은 어떤 기도의 방법이나, 명상, 선, 금식, 은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무시할 수 없는 도구요 과정이요, 형식일 뿐입니다. 그 이상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영성은 감람산에서 드리는 기도의 모습입니다. 이 곳을 벗어나고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어떻게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따를 것인가?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이 삶의 방향이, 삶의 모습이 하나님의 뜻에 합한가? 결국 나의 이 모습을 아버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는가 하고 물어보는 그 삶의 모습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자기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로서 자기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코자 하는 그 진지함, 그 뜻을 버리지 않으려는 하나님 앞에서의 그 합당함, 마땅함이 주님에게 있는 것입니다.

만일 영성이 성전 기도, 금식, 묵상, 율법준수,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라고 한다면 가장 뛰아난 영성가는 아마 바리새인들이었을 것입니다.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박하와 향의 십일을 구별하고, 안식일법을 완벽하게 지켜내며, 정결법을 따라 늘 몸을 씻는 모습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왜 금식하지 않느냐는 요한과 바리새파 제자들에게
“혼인 잔치에 온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을 자기들 곁에 두고 있는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이 땅에 온 것을 결혼 잔치에 비유하면서 기쁘고 즐거운 천국잔치를 벌이자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베푼 첫 번째 기적이 가나의 혼인 잔치 기적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결혼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파장을 해야합니다. 어찌보면 우리 인생의 모습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결혼은 시작도 하기 전에 파장인 경우도 적지가 않은 것을 봅니다. 하여간 요즈음 참 기쁨, 참 평화, 참 사랑의 맛을 잃어버린 시대입니다. 물질은 넘치는데 공허합니다. 마치 가나의 결혼 잔치집과 비슷합니다. 이제 한 창 흥이 올라야 하는데, 포도주가 떨어진 것입니다. 그 곳에서 예수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이전의 포도주와는 질이 다른, 맛과 향과 빛이 다른 포도주를 예수님께서 내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잔치집의 물이나, 물동이가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있어도 잔치와는 무관하였고, 아무런 도움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포도주가 떨어져 파장할 수 밖에 없는 그 결혼 잔치에 예수님이 찿아 오신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있을 것 다 있습니다. 좋은 아파트, 좋은 자동차, 김치 냉장고, 컴퓨터, 빔 프로젝트, 홈 빠, 대형 T.V 그런데 마치 가나의 결혼 잔치 집의 물과 물동이 같습니다. 다 있지만 축제와 잔치를 위해 아무런 생명력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에 주님이 오셔야 합니다. 참 영성은 바로 주님을 내 안에 초청하여 주님과 함께 생명의 잔치를 벌이는 것입니다. 어떤 종교적 행위나, 적선 보다도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지금 이 곳에 오시어서 함께 생명의 춤 판을 벌이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을 삶의 한 복판에 모셔 와야합니다.

혹 모시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요? 교만, 이기심, 편견, 자기 연민, 게으름, 나쁜 삶의 습관과 관행, 용서치 못함, 분노 등 ... 이제 그 모든 것들을 뒤로하고 예수님을 모시고 지금 여러분의 삶의 한 복판에서 신나게 생명의 잔치, 축제, 춤판을 벌이시기 바랍니다.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
979개(43/49페이지)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하나님은 잊지 않으신다(2016년9월4일) 사진 첨부파일 관리자 14643 2016.09.09 08:30
공지 나는 주의 사람이니(가야금, 대금 동영상) 첨부파일 하늘기차 25974 2007.10.16 12:24
공지 망대에 오르라(창립40주년 기념 예배 설교,유경재 목사) 고기교회 26354 2006.05.31 22:16
공지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하늘기차 24946 2005.09.02 16:30
135 [일반] 더 깊은 사랑(2007년9월23일, 성령강림주일후열일곱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703 2007.09.23 13:37
134 [일반] 하늘의 자유 → 사랑의 종노릇(2007년9월16일, 성령강림주일후열여섯번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410 2007.09.16 14:39
133 [일반]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2007년9월2일, 성령강림주일후열다섯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247 2007.09.09 14:22
>> [일반] 참 성령의 사람( 2007년8월25일, 성령강림주일후열네번째주일) 첨부파일 [1] 하늘기차 2121 2007.09.02 18:26
131 [일반] 마음을 돌이켜 회개하고(2007년8월25일, 성령강림주일후열세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414 2007.08.26 18:57
130 [일반] 돌이켜 예배드리자(2007년8월12일, 성령강림주일후열한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067 2007.08.12 15:35
129 [일반] 시장하셨다(2007년8월 5일, 성령강림주일후열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145 2007.08.05 16:40
128 [일반]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나의 백성( 2007년7월29일, 성령강림주일후아홉번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847 2007.07.29 15:21
127 [일반] 예수님이라면 어디에 사실까?(2007년7월22일,이태후 목사)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3237 2007.07.23 16:11
126 [일반] 1907 평양사경회 사진 첨부파일 류민환 2248 2007.07.18 17:41
125 [일반] 그제서야 제 정신이 들어서 Ⅲ(2007년7월 8일, 성령강림주일후여섯번째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129 2007.07.08 16:07
124 답글 [일반] [re] 그제서야 제 정신이 들어서 Ⅲ(2007년7월 8일, 성령강림주일 선물 1578 2007.07.20 09:25
123 [일반] 그제서야 제 정신이 들어서 Ⅱ(2007년7월 1일, 성령강림주일후다섯번째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1887 2007.07.01 17:14
122 [일반] 그제서야 제 정신이 들어서 1(2007년6월24일, 성령강림주일후네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108 2007.06.24 15:05
121 [일반] 산 소망(2007년6월17일, 성령강림주일후셋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011 2007.06.17 14:58
120 [일반] 알지 못하는...(2007년6월 3일, 성령강림주일후첫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1960 2007.06.03 14:00
119 [일반]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우리를 위해(2007년5월27일, 성령강림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091 2007.05.27 13:15
118 [일반] 죽은 개나 다름없는 저(2007년5월20일, 부활절7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321 2007.05.20 14:29
117 [일반] 산 위에서 배 만들기(2007년5월13일, 어버이 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518 2007.05.13 13:55
116 [일반] 주님을 모시고 사는 가정(2007년5월 6일, 어린이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167 2007.05.07 08: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