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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돌이켜 회개하고(2007년8월25일, 성령강림주일후열세번째주일)

하늘기차 | 2007.08.26 18:57 | 조회 2416


마음을 돌이켜 회개하고

2007년8월25일(성령강림주일후열세번째주일) 역대하6:34-42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 건축을 완성하고 하나님의 율법궤를 지성소에 모시고 난 후 하나님께 드린 기도의 내용입니다. 이 본문은 열왕기 8장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언뜻 생각하기에 왜 같은 내용을 2번씩이나 반복하여 기록할까 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 이유가 있습니다.

열왕기서는 소위 신명기적 역사라고 부릅니다. 왜 그렇게 부르냐 하면 신명기서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의식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역대기서, 그리고 에스라, 느헤미야서는 역대기적 역사라고 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완전히 멸망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붙들려 갔던 주전 586년 이 후 포로생활에서 다시 돌아온 역사가들에 의해서 기록된 성경입니다. 그래서 신명기적 역사에 해당하는 사무엘서에 나타나는 다윗의 모습은 왕으로서의 국가의 정치적 구심점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시대적으로는 이스라엘 영토가 확장되고, 그 힘이 커지는 왕국의 위세를 보여주면서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으로 사랑을 받으면서도 약점이 있는 왕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역대기서를 기자는 정치가로서의 왕 다윗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 때는 더 이상 이스라엘이 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다읫의 군사적 업적과 왕국의 위세는 찬양받고 있지만, 더 중요한 문제는 여호와 신앙입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 중에 이스라엘을 하나로 묶은 것은 국가 의식이 아니라, 여호와를 따르는 신앙이라는 점을 역대기 기자는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아직 기도에 익숙치 않은 분들이 종종 묻는 말입니다. “어떻게 기도하는가?” 왕상 8:54에 보니까 “솔로몬이 무릎을 꿇고서 하늘을 바라보며, 두 손을 펴고, 이렇게 간절히 기도”했다고 합니다. 기도하는 모습을 통해 어떻게 기도해야 할 지의 마음자세가 보입니다.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엘리야가 호렙산에서 바알의 거짓 예언자와 싸워 이긴 직후, 엘리야가 오직 자기만 홀로 남았다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엘야에게 “하나님께서는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자를 7천이나 남기었다”고 합니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쉽게 말해 항복한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나는 이제 나의 뜻대로가 아니라 무릎을 꿇는 상대에게 모든 권한을 이양한다는 것입니다.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았다는 것은 바알의 뜻에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솔로몬은 하나님께 무릎을 꿇습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초대 교회의 순교자 스테판 집사가 하나님을 모독한 죄로 군중들 앞에 나와 돌 맞음을 당할 때, 무릎을 꿇었습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합니다. 기도의 첫 마음 가짐은 “절대 굴복” 니다.

또한 솔로몬은 하늘을 향해 손을 폈다고 합니다. 이것은 무장해제를 뜻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세상 다 살고, 그리고 하나님에게 갈 때 우리는 손을 폅니다. 그동안 웅켜잡았던 것들을 이제 더 이상 웅켜 잡을 수가 없습니다. 손을 편다는 것은 나의 것이라고 하는 것에서 놓임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을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는 절대굴복, 절대의존에 바탕을 둡니다. 그런데 오늘 역대기하 6장 말씀을 볼 것 같으면, 어떠할 때 기도를 해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1절에 보면 주님의 종인 나와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바라보며 기도할 때... 22절 주님의 제단 앞에 나와서... 24절 뉘우치고 주님께로 돌아와서... 26절 주님의 이름을 인정하고, 그 죄에서 돌이키거든... 그리고 32절 먼 곳에서 이리로 와서... 37절 마음을 돌이켜 회개하고... 38절 그들이 사로 잡혀간 원수의 땅에서라도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주님께 회개하고...이 성전을 바라보면서 기도하거든 이라고 합니다.

전체적으로 돌아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난주 말씀에서도 출애굽기 앞 부분의 바로와 모세의 이야기는 사실은 예배에대한 것이라고 했는데, 바로가 상징하는 사탄에게 붙들려 노예생활하는 애굽에서 돌아설 수 있는 길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인데, 그 때 어떻게 예배드리는가 하면, 아니 지금도 우리가 진정 하나님께 예배드리려면 지금 나를 붙들고 있는 것에서, 내 안에 있어서 나를 붙들고 있는 바로에게서 돌아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돌아서지 않는 예배는 예배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오늘 말씀에 언제 돌이키라 하나요? 34절에 보면 백성이 적과 싸우러 나갈 때 하나님께서 어느 곳으로 보내시던지 주님의 이름을 기리려고 지은 이 성전을 바라보며 기도하라고 합니다. 적이나, 상황을 보지말고, 하나님을 보라는 것입니다.

36절에 보면 백성이 죄를 지어 원수에게 사로잡혀 가더라도, 싸워서 이기면 좋으련만, 패배해 붙들리면 노예가 될텐데, 그래서 탄식하며, 자기 연민에 빠져, 신세한탄하며, 자기 부정하고, 원망과 시비를 가리려 할텐데, 그 때에 하나님께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라는 것이지요.

왕상8:50에 보면 원수에게 사로잡혀 갈 지라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사, 적들로 포로된 자들을 불쌍히 여기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서 아프카니스탄에 억류된 청년들이 간절히 생각이 납니다. 이 청년들을 위해 돌아서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43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멸시하는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이름을 깨달아 성전을 바라보며 부르짖어 간구하면 다 들어주셔서 모든 백성이 주님의 이름을 알게하신다고 합니다.

대하 6:29절에 보면 천재지변이 일어났을 때에도 한 사람이나, 혹은 주님의 백성 전체가 재앙이 닥쳤다는 것을 마음에 깨닫고 성전을 바라보며 두 팔을 펴고 간절히 기도하거든 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기도하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러면 왜 돌아가야 할까요? 왜 오늘 말씀은 성전 제단 앞에 나아와야 한다고 할까요? 20절에 보면 “이 곳은 주님께서 주님의 이름을 두시겠다고 말씀하신 곳입니다.”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그 곳에 계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지금은 눈에 보이는 성전은 없어졌습니다. 교회당을 성전으로 쉽게 이야기 하는데, 특히 교회 건축을 할 때 성전건축하자고 하는데, 그것은 성서적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미 장소적 의미의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다 깨어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3:16절에서

“여러분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성전이요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라고 합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 가운데 찿아오셔서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십니다. 그러니까 좋은 마음은 성전이고, 나쁜 마음은 성전이 아닌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마귀 같은 마음 상태이든, 천사 같은 마음 상태이든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에 찿아오셔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감동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전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는 곳이면 어디든 성전입니다.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그리로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감동으로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돌아서지 않으면 기도할 수 없습니다. 모양으로 기도할 수는 있어도, 내용적으로는 하나님 함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로 회개라고 하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고는 기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부메랑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호주의 원주민들이 사냥할 때 사용했던 도구입니다. 손에서 떠나 목표를 향했던 부메랑이 던진 사람에게 다시 돌아옵니다. 어떻게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요? 만들 때 돌아오게끔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던졌는데 돌아오지 않으면 그건 부메랑이 아닙니다. 결국 폐품처리를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과 함께 해야 참 평화와 안식을 얻을 수 있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죄가 우리와 하나님, 그리고 인간들 사이에,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가 멀어졌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동쪽으로 가야할 사람이 서쪽으로 향해 있다면, 동쪽으로 돌이켜야 합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재미동포 실업인이 북한과의 산업협동을 위해 북한에 여러번 왕래를 하였는데, 마지막 회의를 마치고 북한 측에 고향을 한 번 찿아 가 보았으면 좋겠다고 요청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43년 만에 고향을 찿아 갔다고 합니다. 혹 자기가 살던 집이 있는가 하는 설레이는 마음을 가지고 어느 한 집을 찿아 가서 그 집 문 앞에서 기웃거리는데, 지붕이 초가에서 스레트로 바뀌었고, 싸리 담장이 돌 담으로 바뀌었지만 영낙없이 자기 집이었다는 것입니다.

감회가 새로워 잠시 머물러 서 있는데, 왠 할머니가 옆에 다가오길래 물어보았답니다. 제가 43년 전에 이 집에서 살았는데 했더니, 그 할머니가 나는 이 곳에서 50년 살았수다 하더랍니다. 그래서 그럼 43년 전에 이 집에서 살던 김 아무개를 잘 아시냐고 물었더니, 잘 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잘 아느냐고 하니까? 바로 내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너무 기가막히고 마음이 설래어 조심스럽게 “어머니!”하고 불렀답니다. 그랬더니 이 할머니가 너무 놀라기도 하고, 정신이 퍼떡 나서 자기를 다시 찬찬히 돌아보는데, 그제서야 “내 새끼!” 하며 자기를 끌어 안드라는 것입니다.

이 어머니가 그 때까지 죽지 않고 기다린 것은 아들을 보기 위해서 였다고 합니다. 얼마 안 있어 그 어머님 이내 돌아가셨다고 소식이 왔다고 합니다. 이 할머니는 6.25 이후에 자식 잃고, 50년 동안 죽지 못하고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이제나 오려나, 저제나 오려나 하루 하루를 기다림 속에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마음인 것입니다.

이 실화를 통해 느끼는 것은 우리 하나님은 한 사람도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을 잊어버리지 않으시고 돌보시며, 바라보시고,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한 영혼에대해 쉽게 포기하고 그리고 금새 잊어버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야기 하나를 더 하겠습니다. 'Tie a yellow Ribon around the oak tree'이라는 노래가 있는데, 이 노래에는 원래 오 헨리라는 유명한 미국의 단편소설 작가의 단편을 노래한 것입니다. 사연이 있습니다. 죄수가 감옥에서 3년동안 복역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어찌되었는지 고향의 아내로부터 소식은 끊어지고, 그래서 마지막으로 출옥하기 직전에 고향집 아내에게 편지를 합니다. 드디어 고향으로 가는 버스를 탑니다. 그 버스에는 3 쌍의 젊은 연인들이 타고 있어서 참 즐겁게 여행을 하고 있었는데, 바로 이 출옥한 남자의 분위기에 앞도 되어 버스 여행이 다소 썰렁해질 즈음에 서로 음식도 나누고, 대화를 하는 중, 이 남자의 애틋한 사연을 듣게됩니다.

"내가 오랫동안 집을 비워야 하는 형편인 만큼 만일 그렇게 오래도록 나를 기다릴수 없다고 생각되든지, 아이들이 자꾸 아버지를 찾고 혼자 사는 것이 괴롭고 고생이 된다 생각 되면 나를 잊어달라고 했소. 재혼을 한다고 해도 나는 충분히 이해 할 수 있다고 말이오. 나를 그냥 잊어 달라고 썼소, 그 뒤로 아내는 편지를 하지 않았소. 3년 반동안이나.....그러나 그 여자는 훌륭한 여인이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고향집 사랑하는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지금 버스를 타고 고향으로 가고 있는데 만일 지금이라도 내 죄를 용서하고 나를 받아준다면 집 옆 참나무에 노란색 리본을 하나 걸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안달려 있어도 좋고, 그러면 말 없이 버스를 타고 지나가겠다는 사연이었습니다.

노래의 가사를 보면 이 사람이 도저히 창 문 앞을 볼 수 없어 운전기사에게 참나무에 노란색의 리본이 걸려있는지 보아달라고 간곡히 부탁하는 애절한 가사가 2절에 나옵니다. 버스가 고향집 앞으로 다가 갈 수록 버스 안은 엔진의 시끄러운 소리 밖에는 들리지가 않습니다. 얼마간의 정적이 흐르다가 그 정적이 깨진 것은 바로 3쌍의 젊은 여인들의 내지르는 탄성이었습니다.

길가 어느 집 옆 참나무에 노란색 리본이 하나가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참 나무 전체가 온통 노란색으로 물들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버스를 걸어내려온다는 내용입니다.

왜 이 이야기가 이렇게 아름다운지, 결국 모든 것을 용서하고 기다려주는 아내의 마음이 담겨있는 참나무 가지를 온통 물들개 한 수백의 노란색 리본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우리 하나님의 기다림입니다. 주님은 이런 참 기쁨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지금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참으로 이 복역을 마친 사람처럼 돌아서서 간절히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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