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View Article

돌이켜 예배드리자(2007년8월12일, 성령강림주일후열한번째주일)

하늘기차 | 2007.08.12 15:35 | 조회 2066


돌이켜 예배드리자

2007년8월12일(성령강림주일후열한번째주일) 역대하6:34-42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비참한 노예생활을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해냅니다. 그런데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끌어내기 위해 바로에게 갔을 때 모세는 바로에게 무엇이라고 이야기 합니까? 출3:12에 보면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네가 이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낸 다음에, 너희가 이 산 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때에, 그것이 바로 내가 너를 보냈다는 징표가 될 것이다."고 합니다. 4:23에도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바로에게 전할 말의 내용을 언급하고 있는데
“내가 너에게 나의 아들을 놓아 보내어 나를 예배하게 하라고 하였건만, 너는 그를 놓아 보내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너의 맏아들을 죽게 하겠다."고 합니다. 거듭 5;1에서 모세가 바로에게 말하는 장면 중에 ‘...나의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나의 절기를 지켜야 한다.’고 광야로 나아가는 명분이 제사, 즉 예배입니다. 이에대해 바로는 8절에서 ‘그들이 게을러서 그들의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러 가게 해 달라고 하면서 떠든다’고 합니다.

8:1에 보면 물이 피로 바뀌는 끔찍한 재앙 직후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바로에게 이야기합니다. “나의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예배할 수 있게 하여라”고 합니다. 한 바탕 이 소동을 겪은 후에도 8:20에서 하나님은 바로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 예배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바로는 눈 하나 깜짝하지를 않습니다. 7번째 우박 소동을 겪은 후에야 바로는 9:27에서 “이번에는 내가 죄를 지었다. 주께서 옳으셨고, 나와 나의 백성이 옳지 못하였다.”고 하는데, 여전히 이스라엘을 예배드리러 광야로 보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박 소동이 있은 후에야 바로는 신하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집트가 망하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급기야 10:8에 보면 “너희는 가서 주 너희의 하나님께 예배하여라”고 합니다. “그런데 갈 사람이 누구냐?”하고 반문을 합니다. 그러자 모세가 우리 모두 가족과 가축들 까지 라고 하니 바로가 발끈합니다. 너희 속셈이 그것이구나 하며 장정들만 가라고 하면서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립니다. 그러자 메뚜기가 그나마 남아있던 곡식을 깡그리 다 먹어치우는 재앙이 내리는데, 그래도 바로가 여전히 고집을 피면서 이스라엘을 내 보내지 않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9번째 재앙인 어두움을 내립니다. 이 재앙은 이집트의 최고의 우상인 태양신에대한 승리입니다. 그동안의 재앙도 모두 이집트의 신에대한 싸움이었습니다. 첫 번째 재앙도 나일의 신, 대지에 물을 공급하는 물의 신에대한 우상과의 싸움이었던 것입니다. 바로는 태양의 신을 덮어버리는 재앙에 겨우 고개를 숙이는데, 그럼에도 여전히 양과 소는 남겨두고 가야한다고 합니다. 단지 아이들만 데리고 가라고 합니다. 그러자 모세가 10:25에서
"임금님도 우리의 주하나님께 바칠 희생제물과 번제물을 우리에게 더 보태 주셔야 합니다.우리는 우리의 집짐승을 한 마리도 남겨 두지 않고 다 몰고 가겠습니다. 우리는 그것들 가운데서 주 우리의 하나님께 바칠 제물을 택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기에 다다를 때까지는, 우리가 어떤 것을 바쳐야 할지를 알 수 없습니다."

바로가 열이 머리 꼭데기 까지 올랐습니다. 물러가서 다시는 자기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합니다. 그 때는 죽는 줄 알라고 합니다. 그러지 모세도 역시 말합니다. 자기도 다시는 바로에게 나타나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것이 10장 뒷 부분에 나옵니다.

결국 이스라엘이 애굽을 빠져나와 예배드릴 수 있었던 것은 10번째 재앙으로부터였습니다. 처음 난 것의 죽음입니다. 처음 것이란 바로 나의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예배하는 자로서 이 바로와 가장 극명하게 대비되는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바로는 하나도 내어놓지 않으려 하다가 결국 첫 번 째 것,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 놓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신앙의 여정 속에 가장 소중한 아들을 하나님께 침묵 속에 드립니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뻐하시고 대신 희생양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주님도 자신의 생명을 아버지 하나님께 내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렸습니다.

예배에 대한 많은 논문과 방식과 과정이 있고, 생활 속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예배의 핵심은 결국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에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의 것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잠시 이 세상에 살며 빌렸다가 돌아 갈 때는 다 두고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지금 나에게 있는 것이 나의 것이라는 위대한 착각 속에서 열심히 땀흘리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착각 속에 별의 별 일이 다 생깁니다.

이러한 집착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바로가 나를 놓아주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재 작년에 제가 청솔모 사진을 찍은적이 있습니다. 샤워장 옆에서 마침 옥수수 하나를 통째로 먹고 있었습니다. 사진기를 들이 데고 2m까지 접근했는데도 달아나지를 않드라구요, 맛있게 먹는데 미안하기도 했지만 덕분에 사진을 실감나게 잘 찍었는데, 그 옥수수 때문에 잘 못하면 붙잡혀 생명을 잃겠는데도, 먹이에대한 집착 때문에 위험이 닥쳐와도 피하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출애굽기 앞 부분의 바로와 모세의 이야기는 사실은 예배에대한 것입니다. 바로가 상징하는 사탄에게 붙들릴 것인가, 아니면 애굽에서 돌아서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것인가 하는 것인데, 여기에서 양다리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바로가 기를 쓰고 예배를 막는 것은 애굽의 국가체제의 바탕이 지금 히브리 노예들을 바탕으로 하는 것인데 이것을 양보했다간 자신의 권력체계도 무너지고, 이집트를 떠 받드는 경제의 기저가 무너지는 것이기 때문에 바로가 죽기 전에는 절대로 이스라엘을 놓아줄 수 없는 것입니다.

영적인 의미에서도 역시 한 영혼이 세상의 일상에 속해 있다가 돌아서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사탄에게 패배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한 영혼이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할 때 사탄은 얼마나 집요하게 방해를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니 한 사람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로 인도한다는 것은 기적같은 일이 아니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엡2:1-3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러분도 전에는 범죄와 죄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그 때에 여러분은 범죄와 죄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살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을 따라 살았습니다. 우리도 전에는 그들 가운데서 모두 육신의 정욕대로 살고, 육신과 마음이 바라는 대로 행하여,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날 때로부터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이전의 삶의 모습, 아니 지금도 이 모습을 여전히 가질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삶에서 우리를 꺼내어 흠 없게 하시고, 자녀로, 상속자로 삼으시고, 찬미와 영광 돌리는 자로 세우셨습니다.

영성지도자 교육을 받을 때, 지도 신부님이셨던 정일우 신부님께서 자기는 신학을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라 어찌 어찌 하다가 이렇게 신부가 되었다고 하면서, 신부가 되어 별로 기도도 하지 않았는데, 신부되고 처음 피정을 갔을 때, 지도 신부님이 자기에게 기도 말씀으로 주신 말씀이 계3:20 말씀이었다는 것입니다.
“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말씀을 들려주시면서

한 참 기도를 하는데, 잡념만 생기고, 기도도 잘 안되고 그래서 그런 것을 카톨릭에서는 분심이라고 하는데, 그러는 중에 예수님이 문에 서 계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별로 원치는 않지만 예수님 들어오라고, 그러니까 예수님을 영접한 것인데, 그런데 문 밖에 예수님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곁에 환자들, 거렁뱅이들 등 한번도 자기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만날 이유도 없는 사람들도 함께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 신부님이 “아이구 예수님 나는 그저 예수님이나 들어오시면 좋겠으니, 옆에 있는 사람은 들어오지 말라구 하세요”했는데, 글쎄 이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무더기로 들어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신나게 놀고 춤추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고 나서 예수님과 작별인사를 하고 함께 햇던 사람들 하고도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한 쪽에 누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다 갔는데 한 사람이 쪼그리고 구석에 앉아 있는데 새까맣더래요, 가만히 보니까, 그게 누구인가 하니 그래요, 마귀에요, 마귀 새끼가 그 신부님 속에 들어 앉아 가지고 그동안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고, 말씀도 잘 듣지 않게 했고, 기도도 물론이요, 이웃에대한 관심, 관용을 베풀거나, 배려하지 못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이야기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 마귀가 내 몸 어디엔가 어떤 실체로서 있다고 생각하면 이 건 정말 넌센스이지요. 영적 실체입니다. 인격적 존재입니다. 이 마귀가 집착에서 벗어나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 듣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서영이, 준영이가 종종 사탄, 마귀에대해 궁굼해 하면서 납양특집에서 나오는 귀신 이야기를 하는데, 그런 귀신은 없다고 해도 친구들이 자꾸 보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는 아파트가 원래 공동 묘지 여서 어떤 사람이 그러는데 보았더라 카드라고 이야기 하는데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구요. 그런 시기가 있으니까 아직 인격이 성숙되지 않았으니 그렇게 밖에 이해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롬7:17,20에서 보면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라고 이야기 합니다. 죄는 본래 “살인하고, 미혹하며, 거짓말하는 영”이라고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창4:7에도 보면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우리 안에 찿아와 우리를 죄에 휘둘리며 살아가게 합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부름 받고 돌아선 사람은 예배하는자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죄의 권세, 죽음의 영적 힘인 마귀는 늘 우리 안에 살면서 일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했듯이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는데, 우리 뿐만아니라 예수님에게도 찿아가 태어날 때부터 십자가에 달리시는 자리에 까지 끊임없이 괴롭힌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죄는 죄의 일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쪽에 관심 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 받은 백성입니다.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죄의 일에 착념하지 말고, 설사 어두움, 절망, 우울, 원망과 미움, 불만의 일들이 안과 밖으로 찿아 온다고 할지라도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합당한 일을 바라보고 그 길을 따라 나가야 합니다. 그럴때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능력으로 우리와 함께하심니다.

종윤씨가 종종 말을 타는 것을 보는데, 말은 말 탄 기수의 지시에따라 움직입니다. 기수가 오른쪽으로 가라면서 고삐를 틀면 오른쪽으로 갑니다. 왼쪽으로 고삐를 틀면 왼쪽으로 갑니다. 그런데 사탄은 우리의 마음을 타려고합니다. 그런데 주로 어떤 마음을 타려고 하는가 하면 우너망, 욕심, 미움, 절망, 자포자기, 게으름, 나쁜 습관, 인위적 종교행위, 냉소...등의 마음을 잘 잡아 타고는 좀처럼 내리지를 않으려고 합니다.

이전에는 마귀에게 우리 마음 자리를 내 주었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이제는 아닙니다. 지금은 은혜의 사람이며, 구원 받은 백성입니다. 사랑이신 그래서 불쌍히 여기시며, 스스로를 낮추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권자이십니다. 그러니 혹 우리의 마음이 여전히 옛 것에 붙들려 있지는 않는지요? 여전히 집착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이제는 돌아 섭시다. 돌아 서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자로 나아갑시다.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
979개(43/49페이지)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하나님은 잊지 않으신다(2016년9월4일) 사진 첨부파일 관리자 14642 2016.09.09 08:30
공지 나는 주의 사람이니(가야금, 대금 동영상) 첨부파일 하늘기차 25974 2007.10.16 12:24
공지 망대에 오르라(창립40주년 기념 예배 설교,유경재 목사) 고기교회 26354 2006.05.31 22:16
공지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하늘기차 24946 2005.09.02 16:30
135 [일반] 더 깊은 사랑(2007년9월23일, 성령강림주일후열일곱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703 2007.09.23 13:37
134 [일반] 하늘의 자유 → 사랑의 종노릇(2007년9월16일, 성령강림주일후열여섯번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410 2007.09.16 14:39
133 [일반]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2007년9월2일, 성령강림주일후열다섯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247 2007.09.09 14:22
132 [일반] 참 성령의 사람( 2007년8월25일, 성령강림주일후열네번째주일) 첨부파일 [1] 하늘기차 2120 2007.09.02 18:26
131 [일반] 마음을 돌이켜 회개하고(2007년8월25일, 성령강림주일후열세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414 2007.08.26 18:57
>> [일반] 돌이켜 예배드리자(2007년8월12일, 성령강림주일후열한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067 2007.08.12 15:35
129 [일반] 시장하셨다(2007년8월 5일, 성령강림주일후열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145 2007.08.05 16:40
128 [일반]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나의 백성( 2007년7월29일, 성령강림주일후아홉번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847 2007.07.29 15:21
127 [일반] 예수님이라면 어디에 사실까?(2007년7월22일,이태후 목사)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3237 2007.07.23 16:11
126 [일반] 1907 평양사경회 사진 첨부파일 류민환 2248 2007.07.18 17:41
125 [일반] 그제서야 제 정신이 들어서 Ⅲ(2007년7월 8일, 성령강림주일후여섯번째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129 2007.07.08 16:07
124 답글 [일반] [re] 그제서야 제 정신이 들어서 Ⅲ(2007년7월 8일, 성령강림주일 선물 1578 2007.07.20 09:25
123 [일반] 그제서야 제 정신이 들어서 Ⅱ(2007년7월 1일, 성령강림주일후다섯번째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1886 2007.07.01 17:14
122 [일반] 그제서야 제 정신이 들어서 1(2007년6월24일, 성령강림주일후네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108 2007.06.24 15:05
121 [일반] 산 소망(2007년6월17일, 성령강림주일후셋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011 2007.06.17 14:58
120 [일반] 알지 못하는...(2007년6월 3일, 성령강림주일후첫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1960 2007.06.03 14:00
119 [일반]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우리를 위해(2007년5월27일, 성령강림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091 2007.05.27 13:15
118 [일반] 죽은 개나 다름없는 저(2007년5월20일, 부활절7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321 2007.05.20 14:29
117 [일반] 산 위에서 배 만들기(2007년5월13일, 어버이 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518 2007.05.13 13:55
116 [일반] 주님을 모시고 사는 가정(2007년5월 6일, 어린이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167 2007.05.07 08: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