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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서야 제 정신이 들어서 Ⅲ(2007년7월 8일, 성령강림주일후여섯번째주일)

하늘기차 | 2007.07.08 16:07 | 조회 2128


그제서야 제 정신이 들어서 Ⅲ

2007년7월 8일(성령강림주일후여섯번째주일) 눅15:11-24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돌아 가지만, 아들로서가 아니라 품꾼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버지에게 돌아 갈 수 있는 것은 무엇을 열심히 잘해서 그래서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대로 아버지의 자녀이기 때문에 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버지가 나를 끌어 안으실 때 그 사랑을 깊이 받는 것입니다. 창조주이시며, 주권자이신, 죄 가운데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15장 포도나무 비유에서 예수님은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면 기쁨이 넘친다는 것입니다. 이 기쁨 즐거움의 자리까지 다가서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면 큰 아들이 밭에 있다가 돌아옵니다. 집에 다 왔는데 잔치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어제도 오늘 아침에도 아버지 한테 아무런 언질도 받지 않았는데 잔치가 벌어지니 의아해 합니다. 그래서 종에게 무슨 일이 있느지 물어 봅니다. 동생이 돌아와서 살진 송아지 잡고, 잔치를 벌인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큰 아들은 화가 났다고 합니다. 28절에 보니“집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집 밖으로 나와 달랩니다. 그러나 큰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나는 이렇게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겼고, 명령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는데,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는데 그런데 재산을 다 말아 먹은 아우를 위해서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다구요? 그러자 아버지가 말씀합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다. 그런데 너의 이 아우는 죽었다가 살아났고,내가 잃었다가 되찿았으니 즐기며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형은 그 아버지의 기쁨에 동참하지 않습니다. 그 기쁨을 모릅니다.

여기서 우리는 형의 모습이 동생의 모습과 별 차이가 없음을 봅니다. 형은 아버지 품에 있으면서도, 아버지의 뜻을 헤아려 그 뜻을 따르는 기쁨 보다는 자신의 일에 매여 있습니다. 겉만 자식이지 속은 품꾼입니다. 교회 사택에서 살 때 아이들하고 마당에서 종종 놀던 기억이 납니다. 언젠가 베드민튼을 치는데, 잘 치지 못합니다. 그래도 자꾸 나하고 치자구 하니 같이 치는데 랠리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준영이가 베드민튼 채를 들고 칠 준비를 하고 있으면, 들고 있는 채에 딱 맞게 공을 던져줍니다. 그래야 준영이가 한 번 칩니다. 그리고 내가 한 번 치고, 잘 하면 준영이가 한 번 더 칩니다. 규칙을 따지면 준영이는 0 점입니다. 그러나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신이 났습니다. 아주 재미 있어하며 즐거워 합니다. 아버지가 아들하고 노는데 규칙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저 함께 있으면 즐거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재미가 붙으니까 “아빠! 나하구 시합해 ”합니다. 시합이 될 수가 없는데 시합을 하자구 합니다. 그래서 시합을 하는데 잘 되지 않습니다. 그나마 아빠하고 즐거웠던 것은 아빠가 잘 맞추어 주어서 즐거웠는데, 시합을 하자구 하니 이기려고 덤벼드는데 땀을 뻘뻘 흘려도 2번 이상을 랠 리가 되지 못합니다. 이기려는 욕심에 힘은 힘데로 들고, 지니까 기분도 나빠지고, 나중에 울먹입니다. 처음에 그냥 아빠랑 함께 노는 것이 더 재미있었습니다.

재미있게 삶을 살아가야 하는데, 삶의 재미를 잃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가끔 우리 교회에 찿아오는 대학 동창 친구가 하나 있습니다. 강원도에 살고 있는데, 작년에는 청계산에서 극적으로 만난적도 있습니다. 부모 덕에 아주 풍요롭게 사는 친구입니다. 처음 만났을 때, 그 친구가 저에게 물었던 질문이 아주 인상적이어서 지금도 생각이 납니다. 그 친구가 “ 야! 너 지금도 술 하냐? ”하고 묻습니다. 그래서 “아니, 못 해, 그저 포도주 한 두 잔 정도 하지”그랬습니다. 그러자 이 친구 또 한 마디 합니다. “너 목사가 좋으냐?” 합니다. 그것도 측은한 눈 빛으로 말입니다. 아마도 즐기지 못하는 것에대한 애초로운 눈 빛이었던 같습니다. 그래서 “그래 나는 목사가 좋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 번에는 또 이렇게 묻습니다. “너 목사 하는 것이 즐겁냐? ”합니다. 그래서 그래 “ 목사하는 것이 즐겁고, 기쁘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친구가 “ 그래, 그럼 됐다”하고 더 이상 묻지 않더라구요.

무슨 선문답 하는 것 같은데, 사실 그 친구가 저한테 단도 직입적으로 ‘좋으냐?, 즐거우냐?’했을 때, 속으로 이 친구가 헛 살지는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친구 책 읽는 것이 좋아 지금도 강원도 인제 원시 숲 속 좋은 전원 목조 주택을 크게 짓고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를 몇 번 만나면서 느낀 것은 그 친구의 즐거움이 먹고, 마시고, 친구 만나고... 그렇게 즐기며 살아가는데, 공허하더라구요. 물론 그런 즐거움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금욕주의 하자는 것도 아니구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렇게 사는 즐거움도 있지만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즐거움, 기쁨을 맛보자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즐거움을 하나님과의 관계회복, 하나님과의 만남에서부터 오는 그 기쁨, 즐거움, 평화에대해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할 때에, 예수님은 허리에 수건을 동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다가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기시고는 수건으로 닦아주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송구스러워서 발씻기를 사양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요13:8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발을 씻기려하자 말씀드렸듯이 7절에 보면 베드로가

“주님, 주님께서 내 발을 씻기시렵니까?”라고 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는 일을 지금은 네가 알지 못하나, 나중에는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중에 알게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베드로는 예루살렘에 올라 오기 전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이 ‘내가 누구냐?’라는 질문에 ‘주는 그리스도시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똑 부러지게 신앙을 고백하여 주님의 칭찬을 흠뻑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직후 예수님께서 이제 내가 고난과 핍박을 받고 십자가에 달리어 죽게 될 것이라 할 때에 베드로가 한 마디 합니다.

“주님, 안됩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됩니다.”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꾸짖으십니다.

“사탄아,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 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아마 베드로는 뒤로 물러섰지만 무척 섭섭했을 것이고, 도대체 선생님이 왜 저러시나 했을 것입니다. 아마 속으로는 “아니! 주님! 누가 주님 걱정 해 줍니까? 나만큼 주님 생각해 주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구 하세요!”했을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얼마 있지 않아서 예수님이 변화산에 올라가십니다. 여기서 에수님과 제자들은 황홀한 신비 체험을 합니다. 예수님은 이 체험을 아무에게도 이야기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때 한마디 한 사람이 있습니다. 베드로입니다. 베드로가 여기에 초막을 셋을 짓겠다고 합니다. 눅9:33은 이러한 베드로에대해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말하였다.”고 합니다. 아마 이 당시 쯤 되었을 때에는 베드로는 거의 예수님과 한 마음이라는 상당한 자긍심을 갖고 있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변화산 위에서 내려왔을 때, 산 아래에 있던 다른 제자들이 한 귀신들린 아이 때문에 쩔쩔매고 있을 때, 예수님이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며 안타까워 하실 때, 베드로는 함께 신비를 체험한 그 고귀함을 가지고 산 아래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을 멸시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 맞아 믿음이 적기 때문에 그런거야 나는 엘리야, 모세와도 만났는데 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만은 끝까지 예수님을 잘 모셔야지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서 바로 예수님은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나누었던 것입니다. 만찬 후에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에게 친히 말씀을 하시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아라 사탄이 밀처럼 너희를 체질하려고 너희를 손아귀에 넣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나는 네 믿음이 꺽이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주님, 나는 감옥에도, 죽는 자리에도, 주님과 함께 갈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었어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시험에 넘어가지 말 것을 말씀하십니다.참으로 베드로는 십자가를 향하여 나아가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겸손히 기도했어야 했습니다. 자신의 연약함, 힘없음, 그래서 주님 저와 꼭 함께 있어달라고 기도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즈음의 베드로의 기세는 1당 100이었고,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 생명까지도 내어 놓을 수 있는 자리에 까지 나아간 것입니다. 그래서 감옥에 까지도 함께 가서 기꺼이 주님을 지켜주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무어라 말씀하십니까?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한다.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베드로는 가야바 재판정 문 앞 뜰에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3 번째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 할 때 예수님은
“여보시오, 나는 당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소”합니다.
이 말은 베드로가 변화산에서 초막 셋을 짓겠다고 했을 때의 베드로의 모습이었습니다. 성경은 베드로가 초막 셋을 짓겠다고 했을 때 베드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초막 셋을 짓자고 했을 때 아마 베드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내 손으로 라는 슬로건의 제일 앞에 서 있는 자로 스스로를 인식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그동안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지냈는지, 어떤 행동을 하고 살았는지 전혀 모르고 살았습니다. 자신의 결연한 의지와 선생님에대한 누구보다도 뜨거운 사랑의 열정으로 지내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베드로의 모습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닭이 3번 울 때 깨닫게 됩니다. 그의 모든 것은 한 순간에 다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이야말로 사실 베드로는 이제 복음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유월절 만찬 때 예수님께서 발을 씻는 것을 거부하는 베드로에게 “내가 하는 일을 지금은 네가 알지 못하나, 나중에는 알게 될 것이다.”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았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릴 수는 있어도 예수님이 자기 발을 씻는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습니다.

복음은, 은혜는 하나님께 고맙습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의 모든 것 어느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다, 생명, 건강, 직장, 친구, 언어와 행동의 작은 습관들... 어느 것 하나 빼 놓지 않고 지금까지 지내 온 삶 모두 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나의 삶을, 나의 모든 것을 철저히 구원해 주셨다는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예수를 위해 죽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나를 위해 죽으셔야 한다는 것을 닭이 울 때 깨달은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대해 이야기 할 때, 안됩니다 십자가라니 말도 안됩니다 라고 하면서 그 십자가를 예수님에게서 멀리 뛰어 놓으려고 했지만, 바로 그 십자가의 사랑이 나를 구원했다는 것을 베드로는 깨달은 것입니다.

최근에 남한산성이라는 제목의 소설책을 글쎄다 동아리에서 함께 읽었습니다. 거기 인조가 등장하는데, 완전 꼭두각시입니다. 광혜군 때의 당파 싸움에서 이긴 쪽이 꼭두각시로 내세운 왕입니다. 그러니까 왕좌위에 왕을 앉혀놓고는 자기 할 일을 다하는 것입니다. 청나라 군사를 대항할 것인가 막을 것인가, 강화도로 피신할 것인가, 아니면 님한산성으로 들어갈 것인가 왕을 왕좌에 거룩하게 모셔놓고 치열하게 자기 논리와 방법론을 가지고 자기 일을 합니다. 한치의 오차없이 왕에게 충성을 다합니다. 이것이 진정 나라와 왕, 그리고 백성을 위하는 길인가 의구심이 납니다.

오늘 교회도 예수님 거룩한 십자가에 놓아두고 자기 할일 마음껏 하는 것은 아닌지, 눈물, 콧물 흘려가며, 기획하고, 비죤을 세우고, 건축하고, 세미나 하고, 다양한 수준에 맞게 열심을 다해 성경공부, 신앙훈련에 전력투구 하는데, 주님은 모르는, 그러니까 믿음의 일이 아닌, 인간의 생각을 하나님의 일이라 하면서 전력투구 하고 있지는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교회가 여러 가지 목표와 비죤을 세웁니다. 그래서 현수막도 걸어놓고, 구호도 외치고, 철야 기도에, 여러 가지 운동을 전개해 나갑니다. 그러한 상황을 바라보면서 나에게도 하나의 목표, 꿈이 있음을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구호나, 현수막이나, 철야 작심기도나, 어떤 운동으로 될 수 없는, 되서도 안되는 그러한 목표가 있습니다. 바로 빌3:12의 말씀입니다.


“내가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요, 또 이미 목표점에 이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에게 한 가지 바램이 있다면, 우리 교회에 목표가 있다면 바로 주님이 나를 사랑하는 그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시대를 향하신, 이 남과 북으로 나뉘어진 이 나라를 향한, 교회와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영적 감흥이 있는데, 그 거룩한 영,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부터 오는 내적 감동에 충실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나님은 광풍이나, 지진이나, 천지의 진동과 같이 그렇게 요란스럽게 우리에게 찿아오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 약하고, 부족하며, 힘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은 미세한 음성으로, 작은 바람처럼 우리에게 세밀하고도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오셔서 말씀하시고 깨우쳐 주십니다.

그럴때 우리는 기꺼이 ‘예’하며 그 감동을 따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감동을 따라 인도하시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쫓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신앙으로, 조심스럽게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겸손히 묻고 답하는 삶의 자리로 나아가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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