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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서야 제 정신이 들어서 1(2007년6월24일, 성령강림주일후네째주일)

하늘기차 | 2007.06.24 15:05 | 조회 2107


그제서야 제 정신이 들어서

2007년6월24일(성령강림주일후네째주일) 눅15:11-24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가 아버지에게 자기에게 나누어줄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각 자의 몫을 나누어 줍니다. 그러자 둘째 아들은 자기 몫을 챙겨 먼 나라로 떠납니다. 무엇인가 스스로 해 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허랑방탕하게 그 가진 재산을 다 허비했다고 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그제서야 제 정신이 들어서’입니다. 한글개역에는 ‘스스로 돌이켜’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비 집을 떠나 먼 나라로 가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결국 돼지를 치는 자리에 까지 다달았고, 그 돼지의 음식을 먹고 싶은데, 아무도 주는 사람이 없을 지경까지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둘 째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 자기가 누리고 싶은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가 아니었습니다. 점차 부자유함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오히려 아버지 안에서 자유함이, 참 자유함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자유롭게 떠났지만 결국 돼지와 같은 짐승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17절에 그제서야 제 정신이 들었다고 합니다. 돌아섰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내가 왜 이렇게 되었지 내가 돼지의 열매를 찿는 지경이 되었다니 하며 스스로 자신이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돌이켜 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고 창조된 영적 존재입니다. 하나님께로 향해 있는 존재입니다. 단지 먹고 마시는 눈에 보이는 물질에 만족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둘 째 아들은 그동안 자신이 추구했고, 누렸던 것들, 그러나 이제는 그 모든 것을 다 잃고서야 인생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둘 째 아들은 그제서야 아버지께 돌아 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둘 째 아들은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아버지의 물질에 더 생각이 미치는 것 같습니다. 17절에 보면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꾼들에게는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라고 합니다. 둘 째 아들의 관점은 여전히 물질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있는 풍요로운 양식 그리고 그것을 먹을 수 있는 품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생각했지만 아버지의 참 사랑은 전혀 생각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둘 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아들로서 찿아가는 것이 아니라 종으로, 일 꾼으로 아버지에게 찿아가려 합니다. 왜냐하면 먹을 것을 풍족히 얻기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 돌아온 아들을 어떻게 맞이합니까? 22절에 보면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꺼내서, 그에게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너는 단지 일꾼이 아니라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종되었던 아들을 자유한 아들로 다시 맞이한다는 것입니다. 반지를 끼웠다는 것은 아들임을 인증하는 것입니다. 신발을 신겼다는 것은 그 당시 노예들은 신발을 신지 않았으므로 이것은 자유인으로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좋은 옷을 입혔다는 것은 아버지의 아들의 명예를 회복하여, 존귀한 자가 되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의 말씀의 제목을 통상적으로 탕자의 비유라 하지만 엄격히 말해서 아버지의 변함없는 사랑이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본문에서 둘 째 아들은 아버지께 향하면서“품꾼의 하나로”삼아달라고 말하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큰 아들 역시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늘 아버지 품 안에 있으면서도 아버지와 하나되지 못하는 큰 형의 모습을 봅니다. 그러니까 29절을 보면 아우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또 그 돌아온 아들을 죄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잔치를 벌이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형이 말하는 중에 “나는 이렇게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다”고 불평을 토로합니다. 지금 그렇게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따르고, 그리고 열심히 섬기는 것이 은혜인 줄을 모릅니다.

21절에 보면 아들은 아버지에게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어서 이제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멀리서 돌아오는 그를 보고 아들인줄 알아 보시고 달려가 목을껴안고, 입을 맞춥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 이제 더 이상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면목이 없을 지경까지 떨어졌지만, 아버지는 지금껏 한 번도 아들을 종으로 여긴 적이 없습니다. 돌아온 아들을 이전과 같은 사랑으로 품어주는 모습을 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돌아왔지만 아버지의 품을 떠난자의 관행을 버리지못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아버지 앞에서 품꾼으로, 종으로 무엇인가를 해야 아버지에게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일을 열심히 해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나를 아들로 인정해 주시기 때문에 아버지 안에 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옛날 저의 친구 중에 부모가 동대문에서‘황해정’이라는 큰 한식집을 경영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 친구는 종종 가계에 가서 일을 돕곤 하였는데, 음식도 나르고, 그릇도 씻고,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기도 했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식당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그 집에서 먹고 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종업원들은 일을 하기 때문에 먹고 자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 친구는 아들이기 때문에 먹고 자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버지에게 돌아간다는 것은 품꾼이 아니라 아들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종 성도들의 신앙 생활을 보면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의 품꾼으로 서 있는 성도들이 여전히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 품꾼으로 살다가 아버지 생각이 났습니다. 세상의 생존경쟁의 틈바구니에서 눈치보며 허세를 부리고, 사소한 것에 시비하며, 소위 내 것에 손해라도 날라치면 목에 핏 줄을 세워가며, 다른 사람보다 못하면 그것이 속상하고, 분하고 다른 사람이 잘 된다 싶으면 질투가 나고, 세상의 일에 일희일비하며 분노, 후회, 원망, 복수심, 탐욕, 적개심, 허영심, 거짓, 폭력, 미움...이 반복됩니다.

여기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섰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하나님의 그 사랑, 그 평화, 그 은혜가 아니라, 아버지의 창고에 있는 양식을 보며 품꾼으로 일꾼으로 다가섭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사랑으로 품어주려는데, 아들은 여전히 세상에서 품꾼으로 일하던 방식을 그대로 가지고 아버지의 창고의 양식을 받아 먹으려고만 합니다. 아버지 품에 돌아 왔지만 여전히 사고 방식이나, 존재 양식, 그리고 생활의 모습은 여전히 품꾼입니다. 여전한 욕심, 소유욕, 내 것에대한 애착에 변화가 없습니다. 그러니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일꾼입니다. 신앙이 있으나, 없으나 여전히 불안, 분노, 원망, 시비, 적개심, 허영심, 허풍...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한 면에서 큰 아들도 별 차이가 없습니다. 늘 아버지 품 안에 있으면서도 아버지와 하나되지 못하는 큰 형의 모습을 봅니다. 그러니까 29절을 보면 아우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또 그 돌아온 아들을 죄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잔치를 벌이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형이 말하는 중에 “나는 이렇게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다”고 불평을 토로합니다. 지금 그렇게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따르고, 그리고 열심히 섬기는 것이 은혜인 줄을 모릅니다.

우리가 바로 그렇습니다. 돼지 우리처럼 되어버린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는데, 우리는 여전히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을 얻고자 품꾼으로 때를 쓰고 잇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 안에서의 평화, 안식, 사랑을 누리는 아들로서 아버지 품에 안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이 자리에 함께한 우리 모두는 이제 품꾼이 아니라 아들입니다.

어느 감동적인 아버지와 아들의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아들 릭이 태어날 때 탯 줄이 목을 감아 뇌에 산소 공급이 중단되었습니다. 뇌성 마비와 경련성 전신 마비로 혼자 움직일 수도 말 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태어난지 8개월 후에 의사는 아이를 포기하라고 했습니다. “식물 인간이 될 겁니다.”라면서요, 하지만 그들은 아들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릭이 컴퓨터로 의사 소통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정도의 간단한 단어를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 것은 “달리다. 달리고 싶다.”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아들과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열 다섯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와 함께 8Km 자선 달리기 대회에 나갔습니다. 그들은 완주했고, 끝에서 두 번째로 골인을 하였습니다. 릭은 경기 후에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아버지 오늘 난생 처음으로 제 몸의 장애가 사라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나 1981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 첫 줄전에서 코스 1/4 지점에서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듬해인 1982년 42.195 Km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완주에 성공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최고 기록은 놀랍게도 2시간 40분 47초입니다. 마라톤을 시작한지 4년 뒤, 아들은 더 큰 꿈을 가지게 됩니다.

아들의 소원은 철인 3종 경기에 나가는 것 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수영도 할 줄 몰랐고, 6살 이후엔 자전거를 타 본 적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그런 일은 절대 불가능 하다고, 그것은 미친짓이라고, 아이를 더 힘들게 할 거라고,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철인 3종 경기에 참여합니다. 세계 최강의 철인들 틈에서 아버지는 허리에 고무 보트를 묶고 3.9Km를 수영하고, 아들을 태운 자전거로 180.2Km의 용암지대를 달리고, 아들이 탄 휠체어를 밀며 42.195 Km의 마라톤을 완주했습니다.

아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버지가 끌어주는 보트나 자전거에 누워 있는 것 뿐이었습니다. 모두가 돌아오고 한 참이 지난 후에야 아버지와 아들이 들어옵니다. 아들은 말합니다. “아버지가 없었으면 할 수 었었어요”
이 말을 들은 아버지가 말합니다. “네가 없었다면 아버지는 하지 않았다”
철인 3종 경기는 아침 7시에 출발하여 밤 12시 까지(17 시간) 들어와야 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기록은 16시간14분 이었습니다. 이들은 철인 3종 경기를 6회 완주했고, 최고 기록은 13시간 43분 37초입니다. 아들과 아버지의 도전은 계속 되어 42.195 Km 마라톤 완주 64 차례, 단축 3종 경기 완주 206회, 1982년부터 2005년 까지 보스턴 마라톤 대회 24년 연속 완주 그리고 마침내 달리기와 자전거로 6,000Km 미국 대륙을 횡단하였습니다.

맨 마지막에 아들이 컴퓨터로 쓴 글은 빌4:13 말씀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릭은 1993년 보스턴 특수교육 분야 컴퓨터 전공으로 학위를 받았습니다. 릭은 컴퓨터를 통해 말합니다.
“아버지는 나의 꿈을 살현시켜 주었다”
“아버지는 내 날개 아래를 받쳐주는 바람이다.” 아버지의 나이 65세, 아들의 나이는 39세 두사람은 더 큰 도전을 위해 오늘도 달립니다.

비록 아버지 릭과 딕의 모습은 바로 지금도 살아계시는 참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우리늬 관계를 아름답게 보여줄 살아있는 상징물이라 생각했습니다. 무엇을 하려 하지 말고, 이제 돌아서서 참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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