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View Article

죽은 개나 다름없는 저(2007년5월20일, 부활절7번째주일)

하늘기차 | 2007.05.20 14:29 | 조회 2320


죽은 개나 다름없는 저

2007년5월20일(부활절7번째주일) 삼하9:5-13

다윗에게는 요나단이라고 하는 생명을 나눌 만한 친구가 있었는데, 블레셋과의 길보아전투에서 아버지 사울과 자기 형제들과 함께 전사하였습니다. 그런데 요나단에게는 므비보셋이라고 하는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두 다리를 저는 신체장애자였습니다. 므비보셋이 5살되던 때에 할아버지 사울과 아버지 요나단이 길보아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유모가 급히 그를 안고 도망가다가 떨어뜨려 그만 두 다리를 못쓰는 불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왕권을 회복하고 어느정도 안정기에 접어들었을 때, 불연 듯 사울의 가족들에대한 소식이 궁금하여, 특히 요나단의 가족에대해 신하들에게 물어보게 되었습니다. 마침 요나단의 아들이 살아있는데, 두 다리를 저는 신체장애인이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다윗은 당장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샛을 불러오게 합니다. 므비보셋은 갑자기 다윗이 자기를 부르자 가슴이 덜컥했습니다. 자기 할아버지 사울이 그렇게 괴롭혔던 다윗이 아닙니까? 덜덜 떨며 다윗에게 나아갑니다. 그런데 다윗이 “네가 무비보셋이냐? 겁낼 것 없다, 내가 너의 아버지 요나단을 생각해서 네게 은총을 베풀어 주고 싶다. 너의 할아버지 사울 왕이 소유했던 모든 토지를 네게 돌려주고 그리고 언제나 나의 식탁에서 함께 먹도록 하여라!”고 합니다.

그 때 므비보셋이
“이 종이 무엇이기에 죽은 개나 다름없는 저를 임금님께서 이렇게 까지 돌보아 주십니까?”라고 합니다. 그 후 므비보셋은 예루살렘에서 다윗의 왕자들과 함께 생활하며 다윗과 함께 식탁을 같이 했다고 합니다.
므비보셋이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은혜를 받을 때 어떻게 받습니까? 은혜라는 말에는 선물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감사로 받습니다.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므비보셋에게 은혜를 베푸는 다윗은 사실 이미 므비보셋의 아버지인 요나단에게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 받은 은혜가 생각나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을 돌보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것을 마음에 두지 않고, 요나단이 자신에게 베푼 은혜를 마음에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은혜는 선택인지 모르겠습니다.

신약성경에 감사라는 뜻을 가진 단어 중에‘유카리스티아’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의 뜻은 ‘은혜가 새롭다’, ‘마음의 물줄기가 달게 흐른다’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마음의 샘을 팔 때에 단 물이 나는 샘을 팠습니다. 쓴 샘에서는 쓴 물이 날 수 밖에 없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미움을 사서 쫓겨다니는 신세가 됩니다. 다윗은 선지자 사무엘에게 왕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그 때의 나이가 18세입니다. 그리고는 헤브론에서 30세에 왕으로 정식 추대를 받을 때 까지 12년 동안을 쫓겨다니는 생활을 합니다.그 유배 생활 속에서 다윗은 사울을 미워하며 그를 결국 살해할 수도 있었지만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미움의 샘은 닫아버리고, 은혜의샘을 팠습니다.

교회에서 난을 키울 때 대장동 하우스 물이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신비디움이라는 품종 중에 흰 꽃을 피운는 백운이라는 교배종이 있었는데 중간묘를 키우는데 잎에 반점이생기고, 까맣게 탑니다. 나중에 보니 물에 질소성분이 많아서 그렇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질소성분이 풍부한 발효 깻묵을 분에다 듬뿍 얹었으니 난이 제대로 클 수 없습니다. 물이 나쁘니 난을 잘 키우기가 어려웠습니다. 물이 좋아야 작물이 쑥쑥 잘 자랍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서 자꾸 쓴 물이 나오면 살기힘들어집니다.


어떻게 하면 솟아나는 쓴 물 나는 샘을 막을 수 있을까요? 큰 바위 돌로 입구를 막아버릴까요? 그렇게 하지요, 큰 돌로 막고 아예 레미콘 불러다 콘크리트로 봉합을 해 버릴까요. 그런데 얼마 후에 다른 쪽에서 바로 그 쓴 물이 또 터져 나옵니다. 한 번 난 샘, 물 길은 막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쓴물을 마시지 않을 수 있을까요?

우리 교회에 우물이 두 군데 있었습니다. 아래 하우스 까지 하면 3군데, 그리고 논 꼭데기에도 샘이 하나 있어 4군데입니다. 그런데 교회 마당 벚나무 아래 있던 우물을 메꾸었습니다. 왜냐하면 물이 바닥이 났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좋은 물을 주던 우물이 말라버렸습니다. 왜 말랐을까요? 교회 앞을 보면 아시겠지만 부동산, 그리고 음식점 건물이 세워지면서 그 건물 주인들이 비싼 장비를 들여 샘을 500m 이상 팠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 물이 말라버렸습니다. 물길이 그리로 옮겨간 것입니다. 그래서 물이 말라버렸습니다.

영적인 샘도 마찬가지입니다. 쓴 물이 난다고 쓴 물 막으려하면 일 납니다. 그러지 마시고 그 물은 그 물대로 그대로 놓아두십시오, 그리고 시원한 생명의 샘을 파 보세요. 그러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쓴 물이 이상하게 말라버립니다. 미움, 적개심, 원망과 불평, 욕망, 거짓, 폭력의 물, 나를 그렇게 힘들게 했던 물이 말라버립니다. 왜냐하면 옆에 생명의 샘을 파서 물 줄기가 그리로 나 버렸기 때문입니다. 샘은 사용하지 않으면 물이 말라버립니다. 그래서 계속 사용하여서 물줄기가 다른 곳으로 바뀌지 않도록 게속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야 오염되지 않고은시원한 물을 풍성하게 계속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영적 샘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러니 쉬지말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와 부활의 샘을 계속 퍼 올리시기 바랍니다.

신32:6에 보면 모세가 가나안 바깥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모아 놓고 마지막 찬양을 하는데, 그 때
“어리석은 백성아, 이 미련한 민족아, 너희는 어찌하여 주님께 이처럼 갚느냐? 그는 너희를 지으신 아버지가 아니냐? 너희를 만드시고 일으키신 분이 아니시냐?”하면서 안타까워 합니다.
이스라엘은 광야 길에 붙들려 하나님 주신 은혜를 보지 못하고, 길만 보았습니다. 은혜의 샘을 파야 단물이 흘러 나오는데, 길로부터 생겨나는 것만 보고 원망과 불평, 시비의 샘을 팝니다. 그러니 쓴 물이 늘 흐릅니다. 언약의 샘, 말씀의샘, 은혜의 샘, 성령의 샘을, 영적 샘물을 파야합니다.

광야길로 나선 이스라엘은 결국 광야길에 붙들려 하나님 주신 은혜를 보지 못하고, 광야 길만 보였습니다. 물도 없고, 밥도 없고 ... 또 없는게 무엇입니까? 없는 것만 보이지, 있는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만을 생각하지 나에게 무엇이 있는지를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다 주었다는 것입니다. 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거짓말을 하던지,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던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가만히 들여다 보면 이스라엘이 물이 없고, 식량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있긴 있는데, 자기가 원하는 먹거리가 아니었던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만나와 메추라기인데, 이스라엘은 가마솥에서 펄펄 끓는 고기덩어리 생각도 난 것입니다. 민11:5 이하에 보면 공짜로 먹던 생선, 수박, 부추, 파, 마늘이 눈에 선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만나 밖에 없고, 이제 입맛 마저 떨어져서 질력이 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먹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날마다 먹는 만나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날마다 입니다. 이것은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뜻이고, 감사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아침에 만나를 보면서 말씀의 삶, 은혜의 삶을 보아야 하는데 보지 못했습니다. 결국 광야에서 발목을 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다윗이 은혜를 베풀 때 므비보셋이 무어라 했습니까? “이 종이 무엇이기에 죽은 개나 다름없는 저를 임금님께서 이렇게 까지 돌보아 주십니까?”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 입은자의 모습입니다. 자기낮춤입니다. 자기비하가 아닙니다. 감당할 수 없는 선물을 받은 것입니다. 비하는 자기 자존감을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비굴하지요. 그러나 자기낮춤은 자신의 전 존재로 하나님 앞에 자원하는 마음으로 겸손히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이 옳습니다’입니다. ‘모든 주권이 당신에게 있습니다’입니다.

다윗도 사울에게 한창 쫓길 때 스스로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의 옷자락을 베어 높이 들어 보이면서 당신을 죽일 수 있었지만 나는 당신을 죽이지 않았습니다.라고 하면서 “이스라엘 왕이여 누구를 잡으려고‘한마리 죽은 개를 쫓아다닙니까? 하면서 자신을 ‘죽은개’라고 합니다. 다윗이 스스로를 낮추고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에서도 자신을 벌레요, 흙 먼지로 ‘스스로 낮추어’ 부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지극히 낮추는 것은 좋습니다. 여기서 단 샘이 솟아납니다.

‘스스로 낮추는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 주님의 마음입니다. 빌2장은 예수님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이 마음에서 참 맛있는 생수가 솟아나는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 어른이 한 분 돌아가셨습니다. 바로 강아지 똥의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님입니다. 일화가 있습니다. 어디 한 두 가지 이겠습니까만? 이오덕 선생님이 돌아가셨을 때 권정생 선생님은 장례식에 참여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장례식에 안가냐고 했더니 가도 그를 볼 수 없으니 갈 일 없다고 했답니다. 선생님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강아지 똥을 보면 그 분이 이 세상 사물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작은 풀, 돌멩이 하나 하나가 권정생 선생님에게는 모두 살아있습니다. 그래서 따스합니다. 권정생 선생님은 홀로 게신 집 안의 생쥐 한 마리도 자기 가족으로 여기며 사셨습니다. 권정생 선생님의 하나님의 눈물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거기에서 눈빛도 노랗고, 털 빛깔도 노란 돌이 토끼는 풀무꽃풀, 댕댕이 덩굴, 취 나물, 등을 맛있게 먹으려다가 무서워 떠는 풀들을 보고 차마 먹지를 못합니다. 하늘에 떠 있는 해님에게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고 하소연 합니다. 그러자 햇님이 참 착하다구 하면서 그래도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 죽을텐데 하니까 차라리 죽는게 나아요 합니다. 그러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햇님도 얼굴이 새빨개진체 서산 너머로 넘어갔습니다. 별이 반짝이는 밤이 되었습니다. 하늘을 보며 돌이 토끼는 하나님께 묻습니다. “하느님은 무얼 먹고 사셔요?” 그러니까 어두운 하늘에서 부드러운 음성이 들립니다. “보리수 나무 이슬하고 바람 한 줌, 그리고 아침 햇빛 마시고 살지”합니다. 그러자 하느님 그럼 나도 그렇게 살도록 해주세요 합니다. 그러자 하느님은 그렇게 해주지 합니다. 그러나 아직은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이 너처럼 그렇게 남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세상이 오면 금방 그렇게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잠시 침묵이 있은 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애타게 기다리는데도 사람들은 기를 써가면서 남을 해치고 있구나”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돌이 토끼 얼굴에 물 한 방울이 떨어져 내립니다. 바로 하나님의 눈물입니다.

언젠가 이현주 목사님과 함께 드리는 드림 예배에서 권정생 선생님과 함께 예배를 드렸는데, 그 때 권정생 선생님께서는 “모두가 자기는 잘하고 옳은데 상대방이 문제라고 한다”고 하면서 그것이 불화와 고통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는 죽어서 가는 천당 생각 하고 싶지 않다. 사는 동안만이라도 서로 따뜻하게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역설하면서, 인간사의 일들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다 ‘인간의 짓’이라고 분명히 못을 밖습니다. 그러나 권정생 선생님은 “하느님은 언제나 ‘인간이 하는 것’을 보고 계신다”며 “그렇기에 홀로 있어도 나쁜 짓을 할 수 없고, 착한 일을 했어도 으스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시던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권정생 선생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사셨습니다. 스스로 낮추는 샘을 파셨습니다. 생명의 은혜가 죽는 날까지 선생님으로부터 끊임없이 솟아납니다. 우리도 미움과 욕심과 싸움, 분노, 폭력의 샘을 파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스스로 낮추는 샘, 은혜의 샘, 감사의 샘을 파기 바라겠습니다.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
979개(43/49페이지)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하나님은 잊지 않으신다(2016년9월4일) 사진 첨부파일 관리자 14642 2016.09.09 08:30
공지 나는 주의 사람이니(가야금, 대금 동영상) 첨부파일 하늘기차 25974 2007.10.16 12:24
공지 망대에 오르라(창립40주년 기념 예배 설교,유경재 목사) 고기교회 26352 2006.05.31 22:16
공지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하늘기차 24945 2005.09.02 16:30
135 [일반] 더 깊은 사랑(2007년9월23일, 성령강림주일후열일곱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703 2007.09.23 13:37
134 [일반] 하늘의 자유 → 사랑의 종노릇(2007년9월16일, 성령강림주일후열여섯번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410 2007.09.16 14:39
133 [일반]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2007년9월2일, 성령강림주일후열다섯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247 2007.09.09 14:22
132 [일반] 참 성령의 사람( 2007년8월25일, 성령강림주일후열네번째주일) 첨부파일 [1] 하늘기차 2120 2007.09.02 18:26
131 [일반] 마음을 돌이켜 회개하고(2007년8월25일, 성령강림주일후열세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414 2007.08.26 18:57
130 [일반] 돌이켜 예배드리자(2007년8월12일, 성령강림주일후열한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066 2007.08.12 15:35
129 [일반] 시장하셨다(2007년8월 5일, 성령강림주일후열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144 2007.08.05 16:40
128 [일반]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나의 백성( 2007년7월29일, 성령강림주일후아홉번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847 2007.07.29 15:21
127 [일반] 예수님이라면 어디에 사실까?(2007년7월22일,이태후 목사)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3237 2007.07.23 16:11
126 [일반] 1907 평양사경회 사진 첨부파일 류민환 2248 2007.07.18 17:41
125 [일반] 그제서야 제 정신이 들어서 Ⅲ(2007년7월 8일, 성령강림주일후여섯번째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129 2007.07.08 16:07
124 답글 [일반] [re] 그제서야 제 정신이 들어서 Ⅲ(2007년7월 8일, 성령강림주일 선물 1577 2007.07.20 09:25
123 [일반] 그제서야 제 정신이 들어서 Ⅱ(2007년7월 1일, 성령강림주일후다섯번째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1886 2007.07.01 17:14
122 [일반] 그제서야 제 정신이 들어서 1(2007년6월24일, 성령강림주일후네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107 2007.06.24 15:05
121 [일반] 산 소망(2007년6월17일, 성령강림주일후셋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011 2007.06.17 14:58
120 [일반] 알지 못하는...(2007년6월 3일, 성령강림주일후첫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1960 2007.06.03 14:00
119 [일반]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우리를 위해(2007년5월27일, 성령강림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091 2007.05.27 13:15
>> [일반] 죽은 개나 다름없는 저(2007년5월20일, 부활절7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321 2007.05.20 14:29
117 [일반] 산 위에서 배 만들기(2007년5월13일, 어버이 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517 2007.05.13 13:55
116 [일반] 주님을 모시고 사는 가정(2007년5월 6일, 어린이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167 2007.05.07 08: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