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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리시는 영( 2008년8월 3일, 성령강림주일후열두번째주일)

하늘기차 | 2008.08.03 16:06 | 조회 2329


살리시는 영

2008년8월 3일(성령강림주일후열두번째주일) 롬8:5-11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육신의 일을 쫓으면 죽음이며,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법도 따를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령에 속한 것은 생명이며, 평화이고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있으면 우리는 산다고 합니다. 살아있든지, 죽어있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생명과 죽음에대한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서는 생명과 죽음에대해 육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의미로 봅니다. 그러니까 호흡이 멈추고, 심장이 멈추면 세상은 이것을 죽음이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과의 단절을 죽음이라 합니다. 생명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 될 때 우리는 죽음입니다. 그러니까 살아있다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지어져 있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역사상 인간에 의해 창조되고, 생각되어지고, 축적되어온 것들이 하나님과 관계 없다면 그것은 죽음입니다. 우리는 역사상 항상 인간의 문명이 극대화 될 때에 세기적 위기, 그리고 전쟁으로 치닫는 모습을 보아왔습니다. 여기에는 종교도 역시 한 몫을 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십자군 운동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 하지만 내적으로는 역시 인간의 욕심의 표출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자연적 행위가 사실은 생명없는 죽음의 꽃을 피운다는 것입니다. 마치 그것은 홍적기 시대에 멸종한 메가케로스라고 하는 사슴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슴은 뿔이 크고 아름다워 멀리서 보면 그 자태가 참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사슴은 바로 이 아름다운 뿔 때문에 결국 멸종당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 아름다움이 이 사슴에게 치명적인 해를 끼쳤다는 것입니다. 장소를 이동하다가도 쉽게 숲의 나뭇 가지에 걸리고, 맹수를 만날 때에도 뿔이 무거워 도망 갈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을 찬양하다가 결국 멸망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찬양하고 위대하다고 하는 물질 과학 기계 문명이 이와 같지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 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조카 롯과 함께 갈대아 우르를 떠나 정처없는 나그네 길을 갑니다. 여러 우여 곡절이 있었지만 아브라함은 많은 부를 축적하였고, 조카 롯도 역시 적지않은 재산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갈라서야 할 때가 되었을 때, 조카 롯은 소돔 성이 있는 곳을 택하고 아브라함은 헤브론의 상수리나무 숲을 택합니다.

결국 나중에 소돔성은 그 죄악으로 인해 유황불로 멸망하게 되는데, 그 때에 그 멸망하는 소돔 성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롯의 가족들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롯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창19:29을 보면 하나님이 롯을 살린 것은 아브라함을 기억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또 소돔성이 멸망할 때에 그 멸망에대한 소식을 알았던 사람은 아브라함인데, 그 때 그 소식을 알릴 때 창18:17에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대해 무어라 말씀하고 있는가 하면 ‘내가 앞으로 하려고 하는 일을, 어찌 아브라함에게 숨기랴?’고 합니다. 하나님과 깊은 관계 속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롯의 삶은 바로 우리의 삶과 닮은 꼴입니다. 롯이 소돔을 선택한 것은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도 편리함,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것을 따라 우리의 삶을 결정합니다. 다시 말하면 눈에 보기에 좋은 것을 택합니다. 실제 창13:10에서 롯이 택한 땅에대한 말씀을 보면 온 땅에 물이 넉넉하고, 여호와의 동산 같고 이집트 땅과 같았다고 합니다. 롯이 선택한 땅이 얼마나 좋은지를 이야기 해 주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택한 땅에대한 이야기를 볼라치면, 어떤 말씀이 기록되어 있을까요? ‘지금 보는 땅을 주겠다는 것과 자손을 티끌과 같이 하겠다는 언약의 말씀입니다. 땅에대한 칭찬은 하나도 없습니다. 단지 18절에 보면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숲에대해 이야기 하고 있고 거기서 하나님께 예배드렸다는 말 밖에 없습니다.

롯은 나름대로 일상의 합리적 선택을 하였지만 그것만으로는 생명을 얻는 자리에 서 있지 못합니다. 우리의 이성은 어두운 힘의 유혹에 쉽게 무너지고 연약해 집니다. 쉽게 절망하고, 좌절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일희 일비합니다. 그러면서 점점 무뎌지기도 하고, 스스로 정한 가치를 잃어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입니다. 많은 것을 가졌다고 좋아할 것이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생명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택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거기에 생명이 있습니다.

시편에 보면 종종 ‘아삽의 시’라는 부제가 달려있는 것을 봅니다. 아삽은 레위 지파 사람으로서 다윗시대의 성전 성가대의 지휘자였습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드려지는 예배를 위한 찬양을 많이 기록하였습니다. 그중에 시73은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생명의 지혜를 보여줍니다. 시 내용을 보면 악인이 형통한 것을 보면서 왜 선하게 살려는 사람은 부유하지 못하고, 악하고 꾀 많은 사람, 재리에 밝은 사람들은 잘 사는 지에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이러한 의문은 우리의 질문이기도 하면서 또 성경의 많은 인물들이 이와같은 질문을 하나님께 하는 것을 쉽지않게 봅니다. 욥, 예레미야, 하박국 등 말입니다.

아삽은 고백합니다. 악인은고난도 없고(5절), 그들의 번성함은 예상했던 것 보다 더 하고(7절), 하늘을 처다 보며 욕설을 퍼 붓고, 사람들에게 마음대로 지껄이고(9절) 건강도 좋고,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다’(4절)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은 눈물 속에서(10절), 하나님의 지혜와 섭리를 의심하며(11절) 악인이 왜 부유하고 편안한지 알 수가 없다고 하나님께 묻는다고 부르짓습니다. 아마도 아삽은 동시대를 살면서 바로고, 정직하게 의로운 삶을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산 것 과는 달리 세상을 바라보면 참으로 변한 것 없이 여전히 부정하고 부폐한 사회였던 것 같습니다. 지금 아삽은 굉장히 절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의인의 성공의 기준은 세상의 부나 성공이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선,악의 문제를 넘어 서있는 영적인 길, 즉 하나님이 함께하시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삶의 가치가 있습니다. 아삽은 이러한 진리를 깨닫고 이 시편 73편에서 그 감동을 찬양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28에 보면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것이 복’이라고 합니다.

아삽이 이런 깨달음을 어떻게 얻을 수 있었을까요? 1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야, 악한 자들의 종말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삽은 삶의 곤고함, 원통함, 낙심 속에서 위로와 희망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성소였습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예배를 드리는 장소를 택하였듯이 아삽은 성소에서 하나님과 만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찬송한 ‘죄짐맡은 우리 구주’는 죠셉 스크라이븐 이라는 사람에의해 만들어진 찬송입니다. 그런데 이 죠셉 스크라이분은 아일랜드 태생으로서 장래가 촉망되는 믿음이 신실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삶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즉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던 약혼녀와 결혼을 할 즈음 결혼 하루 전에 약혼자가 불의의 사고로 죽게됩니다. 그 충격에 이 사람은 사관학교에 들어갔으나 몸이 허약하여 더 이상 훈련을 받을 수 없게 되어, 모든 것을 뒤로하고 카나다로 이민을 갑니다. 그 곳에서 그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며 약혼녀를 잃은 아픔을 조금씩 고쳐가던 중에 한 여인을 알게 되어 결혼을 준비하였는데, 이 여인이 또 병으로 죽게됩니다.

죠셉의 마음은 점점 더 큰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어떤 친구의 위로도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정도로 심각한 우울증에 걸렸습니다. 그런 와중에 설상가상으로 고국의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편지를 받게됩니다. 어떤 삶의 희망도 다 접고 절망과 슬픔, 고독으로 하루 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러던 중에 그는 하나님께 조용히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죠셉의 기도를 응답해 주셨고, 이에 감사하여 죠셉은 어머니에게 찬양의 시를 썼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부른 찬양인 것입니다.

1절) 죄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 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세 주께 고함 없는 고로 복을 얻지 못하네 사람들이 어찌하여 아뢸 줄을 모를까

2절) 시험 걱정 모든 괴름 없는 사람 누군가 부질 없이 낙심 말고 기도 드려 아뢰세 이런 진실하신 친구 찾아볼 수 있을까 우리 약함 아시오니 어찌 아니 아뢸까

3절) 근심 걱정 무거운 짐 아니 진 자 누군가 피난처는 우리 예수 주께 기도드리세 세상 친구 멸시하고 너를 조롱하여도 예수 품에 안기어서 참된 위로 받겠네

이 찬송은 지금도 절망한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살리는 노래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사람을 살리는 것은 육이 아니라 영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육신의 일을 쫓으면 죽음이며 성령에 속한 것은 생명이라 하였습니다. 8절에 보면 육신에 매인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9절에 보면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아계시면 우리는 육신 안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상황, 어려움을 인정하고, 왜곡되고 뒤틀린 것을 반듯하게 펴고, 혼란 가운데에서도 나아갈 길을 보며, 궁색하거나 구차하지 않고, 어렵고 힘든 속에서도 나누고 베풀며, 그리고 그러려면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야 함은 물론입니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고, 없는 것은 없다고 하면서 되어지는 일, 되어질 일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바로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감동시키며 일하시는 것입니다.

딤후1:7,8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한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우리 주님을 증언하는 일이나, 주님을 위하여 갇힌 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복음을 위하여 고난에 참여하십시오”
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면 그 다음부터 고생 끝 행복 시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응력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지금 현재의 삶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아삽도 세상 돌아가는 꼴이 성에 차지 않아 어떻게 화끈하게 바꿔주셨으면 하는 울분이 있었는데, 하나님은 ‘하나님이 가까이 있는 것이 복’이라 말씀하셨습니다.

행 10:38에 보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께 성령과 능력을 부어 주셨습니다. 이 예수께서는 두루 다니시면서 선한 일을 행하시고, 악마에게 억눌린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에게 성령을 부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는 그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나안 곳곳을 두루 다니며 성령의 감동을 따라 선한 일, 즉 하나님 아버지의 선한 뜻을 따라 하나님 나라의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마귀에게 억눌린 사람들을 고쳐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주님께서 일하시니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갑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 롬8:4에도 보면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우리가,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이루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고 선한 일을 했다고 하는데, 성령을 따라 살면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이루게 하신다고 합니다. 지난 여름성경학교 마지막 날 저녁 2부에서 좋은 영상을 보며 모두들 행복해 했는데, 그 때 함께 영화를 보던 이 섭님과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일을 이루고 세우는 것의 동력이 윤리일 수는 없지만 그 세워진 일이 무너질 때 보면 윤리가 무너지는 것을 볼 수 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성령을 따르면 율법을 이룬다고 합니다. 예수님도 성령으로 선한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쪼록 교우 여러분 성령을 받고 선, 악 간에 삶의 행위들을 넘어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건설자들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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