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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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창조하시는 주님(2008년6월22일, 성령강림주일후여섯번째주일)

하늘기차 | 2008.06.22 14:37 | 조회 1961


지금도 창조하시는 주님

2008년6월22일(성령강림주일후여섯번째주일) 창1:1,2;요1:1-4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기 전에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무질서하며, 텅 비어있으며, 어두움 속에서 질서와 충만함과 밝음을 만드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는 데는 꼭 육 일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하루를 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말씀으로 창조하셨는데, 매 일 마다 창조하신 후에는‘보시기에 좋다’고 말씀하셨고, 사람을 만드신 후에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세상과 사람들을 보며, 지금의 이 사회와 역사를 보며 소망을 잃지 않고 좋다고 말하는 것은 더구나 사람을 보고 심히 좋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이 세상 속에서 주를 찬양하며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며 좋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그렇습니다. 하박국 당시 이스라엘은 부정과 부패, 빈부의 심각한 간극, 우상 숭배 등으로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을 때, 하박국은 그러한 시대의 아픔을 보며 믿음으로 살겠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비록 외양간에 소가 없고, 포도 나무와 무화과 나무에 소출이 없을 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하면서 믿음으로 이 시대를 살겠다고 ‘마치 사슴이 산등성이를 치달아 오르는 것과 같은 삶을 살겠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두움 속에 빛을 내셨습니다. 그리고 텅 비어 공허하고 무질서한 혼돈 속에 해와 달과 별, 공중의 새, 땅의 채소, 온갖 식물들, 짐승들, 물고기 등 온 세상을 충만케 하셨으며, 그 충만한 것들에 질서를 주셨습니다. 밤과 낮, 4계절,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그리고 혹성, 은하계, 온 우주의 무한한 것들이 충만하여 질서있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혼돈을 질서로, 공허함을 충만함으로, 어두움을 밝음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나 욕심과 교만함, 불순종으로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고 사망이, 어두움의 권세가 이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모든 것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혼돈과 어두움, 그리고 공허가 생겨났습니다. 오늘날에도 이 공허와 무질서와 어두움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공허, 허전함을 메꾸기 위해 눈에 보이는 것들을 자신에게 가득 체우고 주렁 주렁 메 달고 다닙니다. 짐입니다. 세상의 많은 것들로 그 공허함을 체워보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비어있는 허전함을 메울 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공허함은 영적 공허함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아이들에대한 교육의 정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듭니다. 초등학교에서도 우열반을 정하였다는 보도를 신문에서 읽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중고등학교를 갑니다. 중학교에서 서울에서는 학원이 심야반을 할 수 없어서, 강북지역의 어느 학원은 의정부의 어느 사설 학원을 임대하여 버스를 대절해서 학원 아이들을 그 곳으로 실코 가서 학원아이들을 새벽 1신가 2시 까지 가르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정도 되면 이것은 지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싶습니다. 그렇게 공부해서 특목고에 가고, 대학에 가서 대기업에 들어가고, 결혼해서 자식 낳고, 늙고 병들고 죽습니다. 결국 죽기위해 사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런 학원을 운영하고, 어느 시의회에서는 그러한 야간 심야 사교육을 합법적으로 시의회에서 인정해 주려 하고,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지 이러한 천박한 이기적 전세계적인 신자유주의의 경제 질서 속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 남기위해 이러한 체계에 힘들어 하는 부모의 모습을 봅니다.

최근에 불거진 소고기 문제, 대운하, 의료, 수도, 철도 T.V 방송국 민영화 등 모두 같은 방향입니다. 천박한 거대 자본의 이기적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사람들이 모두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모두가 이러한 물질을 최우선으로 하는 우상숭배의 가치체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물질만능의 가치체계에 빠져서 살아가는 우리는 마치 아메바 같이 단순 반복적인 삶에 몰입해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 밖에 모릅니다. 윤리도, 가치도 이웃도 없습니다. 옳고 그른 것에 대한 판단도 흐려집니다. 그러니 근심, 불안, 걱정 등 어두움이 우리들의 일상이 되어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보기에 좋았던 창조의 의미를 잃어버린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물질 숭배의 세속적 가치의 벽에 갖히어 어둡고, 무질서한 공허한 매우 버거운 삶을 살아갑니다.

얼마 전에 인간은 죄로인해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이게 되었다고 말씀을 드린적이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진노 중에 가장 무서운 것이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저의 말이 아니라 바울 사도가 롬1에서 인간의 죄에대해 이야기 할 때 ‘사람들이 마음의 욕정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셨다’고 하였습니다. 지금급하게 진행되고 있는 지구온난화 문제도 그 버려진 인간의 모습 중에 하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그냥 버려두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 사함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바울은 롬6:11에서 우리를 향하여 죄에대해서는 죽고 하나님을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았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물고기가 죽으면 물에 둥둥 떠내려 갑니다. 그러나 살아있으면 작은 송사리라도 물결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죽어있으면 그 세상의 파도에 휩쓸립니다. 바로 이 무질서함과 공허함, 그리고 어두움이 우리를 뒤 흔들어놓습니다. 이 어두움과 공허함과, 무질서는 바로 죽음의 힘, 죄의 힘이 아니겠습니까?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이 죽음의 권세를 감당할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에대한 말씀의 순종으로, 인류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 죽음을 단 번에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부활하셔서 빛으로, 질서로, 충만함으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세례 문답을 할 때 꼭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느냐는 질문입니다. 그러면 고개를 갸우뚱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복음의 핵심인데 이러면 질문자는 참 난처해 집니다. 그러면 저는 또 묻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것을 믿습니까?’그럴 경우 고개를 끄떡입니다. 그러면 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을 그리고 인간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창조하셨습니다. 생명을 창조하신 분이 왜 죽은 자를 살리지 못하겠습니까 하고 이야기 합니다.그러면 그 때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대한 믿음을 고백합니다. 창1:1은 참 중요한 구절입니다. 창1:1을 믿으면 그 다음부터 계시록 까지의 성경 내용을 전부 믿을 수가 있지만, 창1:1을 믿지 못하면 성서 속의 많은 말씀에 걸려 넘어집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다가 읽은 본문에대한 의구심이 생길 때 창1:1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셨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창조의 신앙 보다는 구원의 신앙이 먼저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처음 체험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구출해 낸 하나님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끌어내어 광야로 인도하고 가나안을 정복하게 하신 하나님, 아직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보다 확실한 신앙을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였다는 창조의 신앙을 확실하게 갖게 된 것은 바벨론 포로기 때였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리고, 소망도 끊기고, 하나님께 드리던 예배도 드리지 못할 때에 우상 숭배로 인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 밑둥에서부터 흔들릴 때에 이스라엘에게 소망을 준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신앙이었습니다.

오늘 창세기 말씀에 언급되고 있는 공허, 혼돈, 어두움은 바로 바벨론 제국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 그대로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파멸 속에서 이스라엘에게 힘을 주고 희망을 준 것은 바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하는 창조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보다 훨신 전에 창조의 신앙은 싹이 텃는데 언제인가 하면 이스라엘이 사사시대에서 전제 군주시대로 넘어가면서 왕이 생기기 시작할 때 부터였습니다. 왕권이 사울과 다윗, 그리고 솔로몬으로 그리고 남과 북으로 왕권이 갈리는 시기에 이스라엘은 가나안 정착 이래 유래 없는 큰 변화와 격동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다윗의 부국강병책으로 나라의 영토가 넓어지면서 계속 전쟁이 끊이지 않았으며, 왕권을 획득하기 위해 쿠테타, 살해, 복수가 왕권을 중심으로 끊이지를 않습니다. 압살롬, 아도니아,이스보셋, 요압, 아브넬, 아사헬, 그리고 여로보암과 르호보암에의해 남북이 갈라설 때까지, 이스라엘은 끊임없는 전쟁과 권력 투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빈부의 격차는 더 커지고, 그래서 같은 동족끼리 빚을 값기위해 서로 주종관계가되고, 성적인 타락과 우상숭배 그리고 물론 기쁨과 감사로 성전을 건축하고, 궁전을 건축하였지만 그 큰 국책사업은 백성들의 삶을 궁핍케 하였습니다.

하나님 신앙의 가치, 윤리 가 무너지고 폭력과 불신과 거짓과 우상숭배가 백성들의 삶에 자리하였습니다. 그야말로 혼돈과 공허와 어두움만이 가득한 시대였습니다. 렘4:23에 볼 것 같으면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모습이 창1:2의 창조 이전 상태와 맞아 떨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라고 합니다. 다윗 왕조를 중심으로 하던 시대이건, 아니면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유배를 갔던 시대이건 그 당시의 상황은 혼돈과 공허와 어두움 뿐인 것입니다.

이 때에 이 창세기를 기록한 신앙인은 그 속에서 이스라엘의 모든 것을 다시 회복해야 하겠다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출하신 하나님에대한 신앙을 다시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시작을 할 것인가? 그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였다는 것에서부터 시작을 한 것입니다. 바알신이 아니라, 아스다롯이 아니라, 바벨론이나 앗수루 같은 거대한 제국의 신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킨 하나님이 이 세상 우주 만물을 창조했다는 신앙을 고백합니다. 창세기를 기록할 때에 아무도 하나님이 하나님이 이 우주 만물을 창조한 것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은 신앙의 고백인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였다고 하는 이 신앙은 이스라엘이 가장 어려웠던 때에 고백되어진 신앙입니다. 그렇다면 교우여러분 지금의 오늘 이 시대는 어떠한가요? 여러분의 가정은 어떤가요? 주님을 중심으로 질서가, 충만함이, 밝음이 있습니까? 아니면 지금 이 시대를 흔들어 놓는 혼돈과 공허와 어두움으로 가득차 있습니까? 그렇다면 무엇으로 절망하며, 무엇 때문에 번민하십니까? 이스라엘이 그 당시의 혼돈과 공허와 어두움에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신앙으로 삶의 희망, 평화, 기쁨을 찿았듯이 이제 우리도 이 창조의 은총으로 그 빛됨과 그 충만함과 그 질서를 찿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요1:3에서 보면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같이 동참하였다고 합니다. 글자 그대로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그가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골1:15에서도 사도 바울은 이 세상 모든 만물이 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주를 위해 창조되었다고 하면서 모든 창조물 보다 ‘먼저 나신 분’이라고 하면서 만물이 주님 안에서 창조되었다고 합니다. 세상 만물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는 땔레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골1:18절은 무어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하면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교회의 머리가 되셨는가요? 그 내용을 설명하는 중에 20절 말씀에서 무어라 하는가 하면 함께 읽겠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만물을 창조하신, 그리고 온 우주 만물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세상이 창조되었는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온 우주 만물이 자기와 화해를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하면 교회의 머리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이 무슨 말인가 하면 이 세상 우주 만물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인데, 그러나 더 중요한 새로운 관계가 형성이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총을 통해 만든 관계로서 그것이 바로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18절에서 ‘그분은 교회라는 몸의 머리이십니다.’라고 합니다.

혼돈, 공허, 어두움에서 질서를 세우고 밝게 하시며, 그리고 충만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통해 질서, 빛, 그리고 충만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창조의 질서가 교회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엡1:23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이 이해하기가 다소 좀 번잡한데, 실제 각 번역 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나름대로 종합해 보면 ‘만물을 충만케 하시며 완성케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그리고 경륜이 교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골1:24에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체운다고 까지 하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창조, 즉 질서, 빛, 충만의 역사가 교회를 통해 이루어 지고 있습니다. 간혹 교회를 비하하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안티 기독교라는 인터넷 사이트도 적지가 않습니다. 교회의 문제점이 심심치 않게 공영 방송을 통해 자꾸 드러나 교인들을 부끄럽게 하기도 합니다. 교회와 교인의 정체성이 흔들립니다. 그러나 엄연히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세워 나가고 계십니다.

실제 2차대전 당시 독일의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의 참혹함 속에 교회는 존재했었습니다. 러시아에 복음을 전하러 들어갔다가 2차대전이 발발하여 스파이로 몰려 시베리아의 벌판에서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살아남은 치첵 신부의 고백을 보면 역시 그 속에 교회가 있었고, 그 교회를 통해 치첵 신부는 생명력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군사 독재 시절 끝까지 남아 독재와 싸웠던 것은 교회였습니다. 작은 교회들이, 목회자들이 군사적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정의를 외쳤으며, 구속의 공갈 협박에도 굴하지 않았던 역사가 있습니다. 지금도 참혹한 전쟁과 내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는 제3세계의 고통 받는 나라들의 자리에 교회는 희망입니다. 회복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는 지금 교회를 통해 동 시대 전 세계 구석 구석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창조해 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비록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는 교회를 장엄하고도 엄숙하게 말씀드렸지만, 지난 주 우리가 저녁에 함께 보았던 ‘카모메 식당’이라는 영화를 보면 그 식당은 우리 나라로 치면 그저 평범한 김치찌개를 주 메뉴로 하는 간이 식당에 불구한데, 그래서 그곳에 찿아 오는 손님들이 지역의 노동자들, 노인들, 청소년들인데, 그 속에서 서로의 삶의 애환을 나누고,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모습을 보니, 그 평온한 여유스러운 모습을 보니 그것이 바로 교회의 사랑스러운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렇게 고기교회로 모였는데, 어떻게 보면 그저 예배드리고, 공동체 식사를 함께 하고, 차 한잔 하면서 사는 이야기도 나누고 할 때, 별 특별한 것도 없어 보이지만, 바로 그 자리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서로 삶의 정보도 나누고, 그래서 어떻게 보면 세상의 나쁜 정보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힘겹게 일상을 보내다가, 교우들과 함께 말씀, 예배, 기도 찬양, 교제를 통해 좋은 정보, 생명의 은혜를 함께 나누는 것이야 말로 진정 귀한 교회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교회를 통해서 혹이나 여러분의 삶이 어둡거나, 공허하거나, 그리고 무질서 하다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으로 말미암은 교회의 새로운 창조 질서의 능력에 힘입어 밝고도 풍요로운, 그리고 아름다운 질서의 삶을 회복하며 세워나가는 교우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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