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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하고, 쫓고, 싸우고, 얻자(2008년6월15일, 성령강림주일후다섯번째주일)

하늘기차 | 2008.06.15 14:43 | 조회 1851


피하고, 쫓고, 싸우고, 얻자

2008년6월15일(성령강림주일후다섯번째주일) 딤전6:6-12

오늘 말씀 딤전6:12을 보면 “영원한 생명을 얻으라”고 합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디모데를 불렀다고 합니다. 그러면 영생이란 무엇일까요? 글자그대로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렇다면 죽지 않는다는 것인데, 천 년, 만 년 몇 겁을 산다는 것일까요? 진시황제가 죽지 않고 영생을 얻기 위해 불로초를 구하려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과연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교회 할머님들이 이렇게 앉아 계시는데, 영원히 사는 것이 좋을까요? 아마 지금의 이 모습으로는 영원히 산다는 것이 지겹지 않을까요. 한 10, 20대 청소년들, 청년들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것이 좋을까요? 예를 들어서 이성 친구와 사랑을 나누는 상황이라고 한다면...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죽지 않고 계속 사랑에 빠져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이 좋을까요? 그렇지도 않을 겁니다. 예를들어 술이나, 마약 중독에 거렸거나, 도둑질이나 하고, 강도질을 하며 영원히 산다면 그것 좋을까요? 아니지요 오히려 누군가가 이런 상황을 멈추게 해 주면 좋겠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생이라는 말은 먹고 마시는 삶에대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먹고 마시는 생활의 무한한 연장, 삶의 양적인 길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질적 생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에 기도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요17:3입니다. 늘 기억하는 말씀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안다는 것은 나의 생각, 나의 의지, 이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아는 것입니다.

말씀드렸지만 우리는 영생을 자꾸 양적으로 길게 사는 것으로 바라보는데, 예수님께서 5병2어로 5천명을 먹인 기적 후에 한적한 곳으로 가셨을 때사람들이 그 곳에 까지 예수님을 찿아 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따끔하게 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찿은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에 이르도록 남아 있을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일하기 좋아하는, 무언가 해야 하나님께서 좋아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한 사마리아 여인을 수가성 우물가에서 만났을 때에도 한참 여자와 이야기 하던 중에 마침 제자들이 동네로 들어가 음식을 구하여 예수님께 드릴 때에도 보면, 예수님은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서 있는 지평과 사람들이 서 있는 지평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90년도 제가 고기교회에 처음 부임했을 때에는 환갑 잔치를 마을 이 곳 저 곳에서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7순 잔치도 별로 잘 안 하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수명이 이전 보다 더 길어졌다는 것입니다. 저희 때 틀리고 우리 자녀들 세대에는 더 틀리겠지요, 아마 120살 까지 산다는 것이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면서 늘 병치레를 한다면
그렇게 오래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할머님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면 늘 강건하시기를 위해 기도를 드립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기회만 주어진다면 몇 백 년, 몇 천 년을 살고 싶어합니다. 나이만이겠습니까? 힘을 얻을 수만 있다면 이 세상을 쥐락 펴락 할려고 합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한계를 넘어서는 무한한 힘,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 같은 초월적인 것을 늘 염원합니다. 아마 유한한 인간에게 이러한 바램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나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고 있습니다. 성경은 유한한 우리의 본래의 모습이 보기에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에게 찿아 와서 하나님 같이 되라고 합니다. 한계를 뛰어 넘으라고 합니다. 바로 욕망입니다. 욕망은 누리고자 하는 바램입니다. 그러니까 지금도 부족함이 없는데, 그 이상의 것을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망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전적 의미는 바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욕망은 누리고자 한다면, 소망은 바라는 것입니다. 이 바램도 그냥 바램이라고 한다면 바로 누리고자 하는 것으로 넘어가서 한 순간에 욕망이 되기가 십상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성령 안에서의 소망이라 합니다.

그래서 유한하다는 것은 아름답고 선하다고 언젠가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무한하면 소망도, 절제도, 기쁨도, 사랑도,,, 의미가 없습니다. 충만함의 기쁨, 나눔의 기쁨도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유한하게 창조되어 넘침의 기쁨, 그 넘침을 나누는 즐거움, 바랄 수 없는 가운데에서의 바라는 믿음, 절망 속에서의 소망하는 기쁨, 미움 속에서의 사랑, 싸움과 전쟁 속에서의 평화 등 등 얼마나 아름답고, 귀중한 삶의 가치가 보석 처럼 우리 안에 감추어져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생애에 이 귀한 것을 다 맛 보기에도 부족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의 보석, 돈으로 살 수 없는 보물을 우리 일생에 케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롬14:17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영생이라는 것은 잘 먹고, 잘 살며, 웰빙하며 우리의 나이가 한 살, 두 살, 점점 먹어 천 년, 만 년, 몇 백 만년을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유한한 우리의 삶 속에 보석 같이 감추어진 믿음, 소망, 사랑, 온유, 절제, 평화, 인내... 내 마음의 보석 상자 안에서 하나 둘씩 케내는 기쁨인 것입니다.

약5:7에 보면 ‘주님께서 오실 때 까지 참고 견디십시오’라고 합니다.언제 까지 참고 견디는가 하면 주님 다시 오실 때 까지 입니다. 그러니까 참고 견디는 일은 하나님 나라의 일이지 세상 나라의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일은 바로 그 하나님 나라의 일이지 세상 나라의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만찬을 베풀며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기 전에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끝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욕망이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도 무한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세상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꾸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세상의 일 먹고 마시는 눈에 보이는 일을 바랍니다.

한 번은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와서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 해야 합니까?’하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번을 일곱 번이라도 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18:21-35) 그리고는 하나님 나라의 비유에대해 이야기 하셨습니다. 하늘 나라는 마치 자기 종들과 셈을 가리려고 하는 어떤 왕과 같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용서는 하나님 나라의 일이지 세상 나라의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최근 제가 빌4:4 이하의 말씀을 좋아하는데 특히 와 닿는 구절이 관용하라는 것입니다. 관용하라는 것은 남을 용서하고, 배려하고,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해준다는 그런 말씀인데, 그게 그렇게 쉽나요? 하나님 나라의 일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일이라는 것이지요. 4:4에 기뻐하라 합니다. 그렇습니다. 내 마음에 내적 기쁨이 있어 그 기쁨이 넘칠 때 나는 다른 사람을 넉넉히 배려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의 기쁨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일은 바로 그 하나님 나라의 일, 영생의 일, 그러니 예수님이 말씀 하셨듯이 하나님을 아는 일, 믿음으로 아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 것은, 이 영생에 관한 것에대해서 우리는 가르치고, 배우고, 훈련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자녀가 성장하면서 우리는 그에 맞는 교육을 아이들에게 시킵니다. 초등, 중등, 고등, 대학, 필요하면 박사 과정도 계속합니다. 마찬가지로 영생에대한 하나님 나라의 일도 자꾸 듣고, 배워 훈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훈련에대해 이야기 하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데, 그것은 군사 훈련 같은 지겨움을 연상하기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훈련에대해 그리고 영적 싸움에대해 이야기 할 때 그것은 비유이지 내용은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들어 사도 바울은 종종 신앙을 달리기에 비유해서 면류관을 얻고자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달리기에서는 1등하는 사람에게 금메달을 목에 걸어주듯이, 신앙의 달리기에서도 1등 한 사람에게만 상을 주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는데, 사도 바울은 신앙을 설명하려고 달리기를 비유로 내세우지만 실제 신앙의 달리기에서는 1등한 사람에게 상을 주는 것이 아니라, 딤후 4:7에서 보듯이 ‘내 달려갈 길을 마치고’라고 하면서 달리기를 완주한 사람에게 면류관을 줍니다.

그러니까, 남 보다 더 잘, 빠르게 뛰어서 상을 주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완주한 것에 상을 줍니다. 달리기 경주를 빌려와서 신앙의 여정을 설명하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의 경주에서도 훈련은 그렇게 혹독한 군사훈련을 연상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세상에서 우리가 생존 경쟁을 위하여 배우고, 경험하고, 거기서 생겨난 이기심, 거칠어진 마음들을 하나씩, 하나씩 바꾸어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영적 훈련은 그동안 하나님 밖에서 생각하고, 느끼며 살던 사람이 이제는 하나님 안에서 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유한한 시간 속에 사는 사람이 양적인 것이 아니라, 질적인 연원한 시간의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영생을 얻으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하나님의 사람아! 하시면서 피하고, 쫓고, 싸우라고 합니다. 그러면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피하고, 쫓고, 싸우라는 말씀은 영적 훈련입니다. 외 영적 훈련일까요? 빌2:12을 보면 마지막 구절에서 구원을 이루라고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면서 구원을 이루라고 합니다. 이루라고 하면 무언가 해야하는 것 아닌가 하겠지요? 그렇습니다. 믿음의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일을 기꺼이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니까 구원은 몇 날 몇일 몇시에 예수 구원 아멘 하면 그다음에 딩동댕 하고 천당이 아니라, 롬8:30에서 보듯이 신앙은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이미 정하신 사람들을 부르시고, 또한 부르신 사람들을 의롭게 하시고, 의롭게 하신 사람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은 신앙의 전체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정하신 사람을 불러 죄가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의롭다고 인정하여 죄 용서를 받은 사람이, 구속의 한 없는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주님 다시 오실 때에 아담과 하와 이후 범죄함으로 잃어버린 영광을 다시 회복하는 것입니다. 바로 영광의 자리까지 나아가는 길이 바로 거룩의 과정이요, 훈련의 과정이요, 하나님 나라를 향하는 성도들의 삶의 길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것을 피하고, 쫓고, 싸워 영생을 얻으라 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이 되어 진행되고 있고, 확장되어 가고 있지만, 아직은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 하나님의 나라는 완전하게 될 것입니다. 망가진 모든 것들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회복이 될 것입니다. 바로 그 회복이 될 때 까지 피하고, 쫓고,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생이고, 구원인 것입니다.

한가지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끝이 있나요? 아니면 없나요? 어제 T.V에서 ‘케나디’라는 5살 아이에대한 것을 보았습니다. 이 아이는 전 세계적으로 100여 명밖에 보고되지 않은 희귀병'원발성 왜소증'을 앓고 있는 아이입니다. 아이가 인형 같이 작습니다. 아이를 보면 너무 귀엽고, 그 눈이 얼마나 맑은지, 사람들은 천사라고 합니다. 그러나 한 편 내용적으로 그 엄마와 3살된 남동생이 그렇게 함께하는 삶이 녹녹치 않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엄마는 캐나디 뿐만아니라, 3살된 남 동생도 돌보아야 하는데, 어찌보면 3살박이 남동생아이가 더 돌봄을 받아야 하는데, 누나 때문에 항상 2차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두 아이가 잠 든 후에야 잠시의 조용한 휴식을 갖는 엄마의 모습을 보며 안스러웠습니다.

이런 삶의 녹녹치 않음이 비단 케나디의 엄마에게 만 있겠습니까? 이러한 우리의 만만치 않은 삶에 끝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예! 당연히 끝이 있습니다. 시작이 있으니 끝이 있지요. 바로 이 시작과 끝의 사이가 신앙의 삶이요, 구원의 삶이요, 하나님의 나라의 공간이라는 것입니다. 아니면 지옥일 수 있고, 무력함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이 사이는 세상의 일로 체워질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일로 체워져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성령을 요청하고, 마땅히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광야로 나아가 가나안으로 향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광야 40년 동안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사람이 먹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의 삶의 여정 속에서, 어떻게 시작하였든지, 어떤 출발점에 서있는지, 이미 한 참 진행이 되었든지, 현 과정, 진행은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끝을 향한 아름다운 마므리를 준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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