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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2008년3월30일, 부활절둘째주일)

하늘기차 | 2008.03.30 13:12 | 조회 2131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2008년3월30일(부활절둘째주일) 눅24:1-11

지난 주일에 부활은 무덤에서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납양특집도 아니고, 미래의 SF이야기도 아니고 지금 동시대의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의 부활이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요11장에서도 보면 실제 예수님이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베다니로 향하던 중에 나사로의 누이 동생인 마르다를 만나게 됩니다. 그 때 마르다가 예수님에게 “주님,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집에 있던 마리아도 예수님을 만나러 오는데, 그 때 마리아도 역시 마르다와 같은 말을 합니다. 32절입니다.“ 주님,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마리아든 마르다든 아니 모든 인간은 죽음 앞에 어느 누구도 바로 설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편 두 자매에게서 공통적으로 보여지는 것은 “주님이 계셨다면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주님에대한 깊은 신뢰가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두 자매의 신앙이 죽음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주님이 계셨다면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은 주님이 오라버니 나사로의 병을 고칠 수 있었다는 것인데, 지금은 죽어서 아쉽다는 것입니다. 주님도 죽음 앞에서 어찌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오라버니가 살아날 것이다.” 그러자 마르다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그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내가 압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그렇습니다. 마르다가 말한 그것이 바로 우리의 종교입니다. 아니 종교 생활인 것입니다. 마지막 날, 그러니까 내가 죽은 다음 아주 먼 미래에 모든 것을 회복할 그 때에 부활할 것이라는 것을 유대교 회당에서 배웠고, 그렇게 믿는다는 것입니다. 종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고 계십니까? 25절 말씀을 같이 읽어보기로 하겠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도를 이야기 하거나, 설명하거나, 부활의 진리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주님 스스로 부활이시며, 생명이십니다.

그런데 종교에 익숙한 우리는 자꾸‘미래에 다시 오실 때’라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지금 마리아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내가 부활이고, 생명이라 하십니다. 그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주에 부활은 자기자리에서 자기의 모습 드러내는것,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에게 주신 자기 존귀함을 자기 삶의 자리에서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아름다움을 우리는 봄에 여전히 자기자리에서 자기 모습 피워내는 꽃들을 통해 맛보는 것입니다. 부활이 자기 존귀함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다른 사람 다른 피조물의 존귀함도 우리 곁에서 드러나는 것일진데, 그렇다면 그것은 바로 조화인 것입니다. 부활은 조화입니다.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과, 원수와, 가난한 자와, 병든 자와...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조화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어 죽으시고, 그리고 그 시신이 무덤에 안치되시어 큰 돌 문이 그 무덤을 막아 놓았습니다. 예수를 갈릴리에서부터 쫓아왔던 여인들이 그 임종과 장례를 끝까지 지켰습니다. 그리고 돌아가 예수님의 시신에 바를 향품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안식일을 지킵니다. 오늘 읽은 누가복음의 본문 말씀 중 예수님의 시신을 처리하는 모습입니다.

익숙한 솜씨로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안치하고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돌아갑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 이것이 우리들의 삶이요, 문화요 관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시신을 안치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큰 돌로 무덤의 입구를 봉할 때 우리 모두는 죽음을 확신합니다. 제자들은 모두 이 전 자신의 일자리를 찿아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익숙하게 자신들의 일에 젖어 들면서 예수님과 함께 했던 일들을 없었던 것으로 지워버립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며 겪은 사건들은 실로 놀랍고 기이한 엄청난 사건 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에대하여 이야기 할 때 늘상 주장하는 모세의 이적을 능가하면 능가했지 결코 못하지 않은 놀라운 일들을 예수님을 통해 보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어 죽자 모두 자기가 이 전의 살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없었던 일로, 아니면 추억에 남겨있는, 또는 가슴 깊이 새겨 둘 정도의 일이 되었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아니라 다시 고기잡는 어부가 되어 버렸습니다.

부활이 없는, 생명이 없는 삶의 모습입니다. 교우 여러분! 아무리 놀라운 신앙의 체험, 굉장한 기적의 은사, 병고침의 은사라 할지라도 부활이 없으면 모두 죽음이요, 어두움입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이렇게 부활 없는 신앙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눈에 보이고 만지는 것을 믿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부활은 믿지 못합니다. 예수님 시신이 누워있는 무덤을 막아놓은 큰 바위돌을 보고는 믿지만 그래서 어떻게 옮길까 염려하고 걱정하지만 무덤 안에는 없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부활을 믿지 못하는 것은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우리의 삶의 체계가, 전체가 불신앙, 즉 부활을 믿지 못하는 틀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일용할 양식을 위한 삶의 틀입니다. 우리는 돌이 떡이 되길 원하는 삶의 체계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물이 포도주되는 신앙의 틀을 좀처럼 찿기 어렵습니다.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사는 신앙의 틀이 “부활이 없다.”는 삶의 틀 속에 좀처럼 자리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여인들이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보고 당혹해 할 때에 천사들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자 가운데서 찿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고 하면서 무어라고 하는가 하면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합니다. 그러자 8절 말씀에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무덤에서 돌아가 사도들에게 그 모든 것을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무덤에 갔을 때 무덤은 비어 있었고, 예수님의 시신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믿지 못합니다. 그러나 천사들의 이야기를 듣고 말씀을 통해 예수의 부활을 기억하고 믿게 됩니다. ···부활은 믿음입니다. 특히 이 여인들과 같이 말씀을 기억하여 말씀을 통해서 믿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15:3 이하에서
“내가 전해 받은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드렸습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과,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성경대로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셨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갑자기 어느 순간 벼락같이 하나님께서 만들어낸 순간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오래 전부터 말씀을 통해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예언대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을 봅니다. 성경은 예언을 이루기 위해 나귀를 탔다고 합니다.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할 때도 보면 “선지자의 말씀을 이루려 하신”다고 합니다. 헤롯이 살아있는 동안 아기 예수가 이집트로 피난 갈 때에도 이것은 주께서 예언자를 시켜서 말씀하신 바 "내가 이집트에서 내 아들을 불러냈다"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었다고 합니다.

베들레헴에서의 탄생, 그리고 나사렛에서의 성장도 모두 선지자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말씀 하나, 하나가 전체의 통일성을 갖고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도 당연히 말씀에 따른 것입니다. 하물며 부활신앙은 더할나위 없이 말씀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경대로’라고 부활장인 고전 15장에서 말씀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15장에서 부활에대해 이야기 할 때 볍씨가 벼가되는 변화로 부활을 설명합니다. 참 신비스럽습니다. 그런데 볍씨가 벼 되기위해 농부는 봄부터 땀을 흘립니다. 지금 우리동네 농사가 다 사라졌지만, 벌써 지금 쯤이면 볍씨 튀우고, 한창 모판에 흙담아 볍씨심어 못자리 하고,더워지면 비닐을 걷었다가, 다시 씌우고, 또 비닐에 구멍 뚫어 환기를 시키기도 하고, 병충해 예방도 하고 로타리 쳐서 논에 물대고, 거름주고 바빠집니다.

그런데 농부가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볍씨가 싻을 튀우기 까지 모든 노력을 다 하지만 정작 볍씨가 벼되는 것은 인간의 몫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구인가요? 바로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들 예수님은 그 귀한 아버지의 뜻을 깨달아 아버지 하나님께 순명합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고백했듯이 말씀대로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부활입니다. 죽음이 부활하는 것을 사도 바울은 마치 볍씨가 벼되는 생명의 신비로 비유하였습니다. 이 부활의 신비는 역시 자신의 노력과 수고가 아니라 아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죽음으로, 아버지의 뜻에 따르려는 순종에 결국 죽고, 그 죽음을 부활로 아버지 하나님이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볍씨가 100% 다 벼가 되지 않습니다. 신실한 농부가 순전히 노력을 해도 볍씨가 벼 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왜그러냐 하면 그 중에는 쭉정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속이 비어있는 볍씨는 벼가 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신앙이 없다면 그것은 쭉정이와 같은 것입니다. 볍씨의 속이 비어있는 것을 쭉정이라고 한다면, 우리들에게 있어서 쭉정이는 무엇일까요? 바로 말씀이 우리 안에 없다는 것입니다.

교우여러분 말씀아닌 것은 전부 쭉정이요 죽음입니다. 말씀없는 쭉정이로는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생명의 신비, 물이 포도주 되는 변화는 없습니다. 그러면 말씀이 우리 안에 그냥 있나요? 그렇지 않지요. 말씀은 순명, 순복, 나의 생명 내어놓는 순명을 통해 말씀이 내 안에 있게 됩니다. 말씀이 내 안에서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3장에 보면 뱀이 여자를 유혹하면서 선악과를 먹으면 절대로 죽지 않는다고 합니다.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선악과를 먹으면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동안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한 삶이 죽은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이 사탄에게는 죽은 삶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기 죽어 살은 죽은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우리에게 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동안 죽었는데 이제 살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의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한 그 선악과를 먹으면 산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아담과 하와는 잘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 생명의 삶을 맛 보며 잘 산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사탄인 뱀이 아담과 하와에게 그렇게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하면서 살라고 꼬득이는데 그 사탄이 산다는 그 삶은 불순종의 삶이요, 그러니까 욕망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삶의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한계가 있어서 아름다운 것입니다. 무한하지 않은 것에서 오는 절제와 그 절제를 가득 체우는 풍요와 나눔이 있고, 서로와 서로 사이에서 주고 받는 조화의 아름다움과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창 밖을 보면 바로 그런 자연의 다양함의 아름다운 조화를 봅니다. 또한 부족함에서 오는 소망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그 한계, 그 부족함을 끝없는 욕망으로 뛰어 넘으라고 합니다. 이 세상의 창조주이며,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뛰어 넘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눔이 아니고 자기 혼자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부등켜 안습니다. 그러니 벽이 생기고, 싸움과 분쟁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탄이 말하는 삶과 죽음은 성경이 말하는 산다는 것, 죽음과 정 반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 복음 15장에서 포도나무 비유를 들면서 “가지가 포도 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 같이 ”라고 하면서 내 안에 머물러 있어야 열매를 맺을 수가 있다고 합니다.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쓸모 없는 가지처럼 버림을 받아 말라 버린다고 합니다.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태워버린다고 합니다. 곧 죽음입니다. 그러면 주님 안에 머물러 있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랑 안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 또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것을 요15:10은
“너희가 나의 계명을 지키면, 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나의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다. ”고 합니다.
11절 말씀을 또 같이 읽기로 하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나의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교우여러분 오늘은 부활 둘째주일입니다. 이 부활의 아침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하여 주신 말씀이 우리 마음 한 가운데에 있어 그 말씀의 열매를 통해 기쁨이 넘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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