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View Article

솟아나는 생명의 샘(2008년3월 9일, 사순절다섯번째주일)

하늘기차 | 2008.03.09 14:55 | 조회 3131


솟아나는 생명의 샘

2008년3월 9일(사순절다섯번째주일) 요4:7-14
오늘 말씀 14절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여인과 대화를 하시면서 영원히 목 마르지 않을 생수를 주겠다고 하니까 이 여인이 그런 물이 있으면 나에게 달라고 합니다. 또 요7:37-38에도 보면 예수님은“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 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생수, 물은 성령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엊그제 글쎄다 모임에서 ‘INTO THE WILD'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크리스토퍼 매캔들레스라는 한 청년의 실화를 영화화한 것인데 한 미국의 유능한, 앞 길이 촉망되는 젊은이가 모든 삶, 기득권과 문명을 뒤로하고 원시, 즉 알라스카로 떠나, 그 원시림 속에서 홀로 살아가는 이야기인데 결국 나중에 먹을 것이 귀해지면서, 야생의 식물을 먹다가 그만 독초를 잘 못 먹고 죽어가는 한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문명을 등지고 원시의 알래스카로 떠난 이유는 물질 만능 사회에대한 저항 그리고 위선적인 부모에대한 회의 때문이었는데, 알래스카로 향하며 사람들을 만나고, 어려움을 겪으면서 2년여에 걸친 여행을 통해 알래스카에 도착합니다. 그 여행 중에 한 할아버지를 만나는데 그 때 부모의 이중적인, 위선적인 삶에 분노하는 이 청년에게 할아버지는 하지만 용서해라 그리고 사랑해라 니가 사랑할 때 하나님이 빛을 내려 주실거야”라고 이야기 해주면서 서로 이해하고 나누는 삶이야 말로 가장 복되고 아름다운 삶이라는 메시지를 들려줍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이 청년은 알래스카로 들어갑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에‘행복은 나눌 때 진정한 가치가 있다’는 진리를 깨달으며 독초로 인해 죽음을 맞이합니다.

동 시대를 살며 늘 느끼는 것은 오늘 우리 사회가 아니 지구 전체가 물질가치 우선의 신자유주의적 세계관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몇 일 전에도 일제고사를 보아 아이들을 무한 생존경쟁의 싸움터로 내어 모는 학교 교육의 현실을 보면서, 1등이 되어야 살 수 있는 신자유주의의 물량만능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어떻게 살아야 복된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분은 그렇게 이야기 할수 있을 것입니다. 또 신자유주의 이야기야 할 지 모르겠지만

알다시피 숭례문을 방화한 분은 자기 땅의 토지보상에 불만을 품고 방화를 했다고 합니다. 물질가치 우선의 사회, 황금돼지 저금통이 일상화된 사회 속에 그래서 물질이 유일한 가치인 것 처럼 몰아가는 사회에 갇혀있는 사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시험을 잘 못 보아서 스스로 생명을 잃는 아이들의 모습도 봅니다. 보험금을 타기 위해서 가까운 사람의 살인을 청부합니다. 낙동강에 페놀을 방류하기도 하고, 운하를 파서 배를 산으로 끌어 올리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인정되는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INTO THE WILD는 저에게 큰 감동이었습니다. 물질 만능의 이기적인 사회를 거부하고 진리를 찿아 떠난 청년이 다시 나눔의 삶, 용서의 삶의 소중함을 깨닫고 다시 문명의 사회로 돌아오고자 하면서 그 귀한 생명을 잃는 그 안타까움에 감동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간간히 신문에 회자되는 생명의 강살리기 기도회가 종교인들을 중심으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 목공방에 기꺼이 오셔서 우리들과 함께 하시는 이진형 목사님이 지난 화요일 대운하가 건설되면 세워질 조령 제3관문 아래 주차장에서 있던 기도회에 참여하여 지난 화요일에는 쉬었습니다. 이 기도 모임은 한 겨울 영하 10도 이하로 떨어지던 날에 시작되어 100일 동안 걸으며 하는 기도회입니다. 저는 이 걷는 기도회를 동영상으로 보면서 물길 따라 걷는 그 모습이 성령의 움직임, 인도하심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배를 산으로 올리는 발상에대해 물의 순리를 따라 물의 흐름을 따라 걷는 생명의 강을 살리는 기도회 모습은 함께 나누는 삶의 영적 의미를 은유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렇게 막히고 어둡고 혼돈한 시대적, 사회적 현실 속에서 어떻게 이러한 천박한 자본주의의 물질만능의 시대적 흐름을 거슬러 생명의 역동적인 삶, 축제와 사랑과 나눔의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럴 때 오늘 읽은 성경의 이 사마리아 여인도 예수님 당시의 역시 그러한 막히어 버린 시대 속에 고립된 삶을 살아가는 안타까운 여인이었습니다.그런데 이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자기 존귀함,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 가치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본질을 보여주신 주님을 만날 때 마음은 흐르기 시작합니다. INTO THE WILD에서 주인공이 결국 부모와 물질만능의 시대의 닫힌 사회 속으로 다시 돌아가려 했던 것은 바로 용서와 사랑, 그리고 함께하는 사람과 나누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삶의 가치라는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그렇게 흐르는 것입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이 기존 사회 속에서 건강하게 서지 못하게 한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먼저 예수님이 처음 이 여자를 만났을 때 물을 달라고 합니다. 그 때 이 여자가 무어라고 대답을 하는가 하면 “선생님은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어떻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라고 질문을 합니다. 이 여자와 예수님을 가로 막는 첫 번째 벽입니다. 계급의 차이 인가요? 자기의 신분이 비천해서인가요? 영호남의 지역 갈등인가요? 아니면 노사간의 계급, 빈부의 갈등, 남과 북, 아니면, 세대간?, 성격? 생활습관? 유대인들이 그러놓은 선에 갇히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자에게 시치미를 떼고 "네가 하나님의 은사를 알고, 또 너에게 물을 달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았더라면, 도리어 네가 그에게 청하였을 것이며,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내가 먹을 물을 달라고 하는것이 이상하냐? 아니다, 오히려 네가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해야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예수님의 이 말을 잘 못 알아 듣습니다. 이게 지금 은유거든요. 저는 작년부터 글쎄다 문학책 읽기 모임에 참여하면서 느낀건데 문학의 재미가 바로 은유를 풀어내는것이거든요, 그런데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자꾸 읽어보니까 책 속에 감추어진 은유가 조금씩 보이는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 예수님도 이 여자에게 은유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이 여자가 예수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직설적인 것은 대화 상대에게 상처를 줍니다. 왜냐하면 삶의 진실 앞에 바로 설자가 없거든요? 부끄럽거든요. 뭔가 변해야 하고, 회복이되어야 하는데, 잘 안되거든요, 그 온전치 못한 삶이 직접으로 노출이 되 버리면 서로가 멱살을 잡을 수 밖에 없고, 쌍 소리나오고, 원수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좀처럼 연민의 정을 가지고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결코 직설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자청년에게 예수님은 직설적으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고 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 사두개인 등과 같은 사람들에게는 직설이 아니라 독설을 퍼붓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여간 이 여인은 예수님이 무엇을 이야기 하는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이 여자는 자신이 갖힌 굴레 속에서 이야기를 합니다. “선생님, 선생님에게는 두레박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떻게 나에게 생수를 구해 주시겠습니까?”합니다. 주님은 이미 먹는 물에서 생명의 근원이 되는, 복된 삶의은혜, 삶의참 기쁨의 바탕, 생명의 물로 이야기가 넘어가는데, 이 여자는 감이 오질 않습니다. 그래서 한 마디 더 합니다. “선생님이 우리 조상 야곱보다 더 위대한 분이라는 말입니까? 그는 우리에게 이 우물을 주었고, 그와 그 자녀들과 그 가축까지, 다 이 우물의 물을 마셨습니다.”고 합니다.

두 번째로 이 여자가 예수님에게 마음 문을 열지 못하는 또 하나의 벽이 있습니다. 무엇인가요? 바로 야곱의 우물입니다. 교우 여러분! 성령의 샘에서 물을 길어 올리려면 이제 “야곱의 우물”은 닫어버려야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있어서 야곱의 우물은 그 여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될 귀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상적부터 자신 뿐만 아니라, 온 마을, 온 선조들을 먹여 살렸던 그 우물은 이제 그만 닫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에게 솟는 샘, 영생하는 샘이 터질 수 있습니다.

나의 삶을 유지해 주는, 우리 가족을 먹여 살리며 나를 지탱케 해 주는,그런데 그 주변 환경이나, 함께하는 사람이 싫고, 밉고, 원수같지만 먹구 살기 위해 그냥 놓지 못하고 붙들고 있는 야곱의 우물을, 살기위해 차마 땡 볓이 내리 찌는 한 낮에, 사람이 없는 시간을 골라 물을 뜨러 나오는 야곱의 우물, 그 물을 떠 올리는 두레박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나의 삶의 경험, 신앙의 경험, 가치관, 판단을 내려놓아야 샘이 솟아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장벽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가장 큰 장벽입니다. “네 남편 데려 오라는 것입니다.”자신을 무기력하게 하였으며, 삶의 희망을 잃어버리게 한, 나를 힘들게 하고 우울하게 하며, 절망케 하는 그래서 스스로를 거칠게 하는, 폭력적인 언사, 언행의 근원인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예수님께서 물어보십니다. 네 남편을 데려 오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 여인이 예수님께 편한 마음으로 이야기합니다. 참 예수님 놀랍습니다. 이 가장 깊은 삶의 이야기를 이렇게 편하게 이야기 할 수 있게 하십니다. 그러자 이 여자가 이야기 합니다. “나에게는 남편이 없습니다.”그러자 예수님이 그 여인을 인정해 주십니다. “남편이 없다고 한 말이 옳다. 너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남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제대로 말하였다." 고 하십니다.

창4:9에 보면 가인이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인 후에 하나님께서 카인에게 묻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그 때 카인이 대답을 합니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이까?”합니다. 전형적인 죄의 모습입니다. 무관심, 증오, 미움, 분쟁, 싸움 원수맺기입니다. 네 남편 데려 와라! 네 자식 데려 와라! 네 시부모, 올케 데려와라! 너 괴롭히는 직장 상사 데려 와라! 하고 주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그제서야 이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다시 보게됩니다. 선생님은 예언자이십니다 하면서 예수님이 누구인지 조금씩 알아갑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장벽이 있습니다. 바로 종교적인 장벽입니다. 왜 뜬금없이 예배이야기가 나왔을까요? 이 여자는 이제 더 이상 예수님과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더 이상 사생활 침해를 받고 싶지도 않고, 여기서 더 나아갔다가는 그동안의 삶을 다 돌려 놓아야 할 판이니 복잡해 집니다. 그러니까 너와 나는 출신성분도 다르고 하니 이만 하자는 것입니다. 여자는 “우리 조상은 이 산 위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네 사람들은 예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존경스러운 당신은 예루살렘으로 가고, 나는 이 곳에 있겠다는 것입니다. 너는 너구, 나는 나라는 것입니다. 대화가 끊어지려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자여, 나의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 위에서도 아니고 예루살렘에서도 아닌 데서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올 것이다.”하시면서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고 하십니다.

드디어 결론 부분에 다달았습니다. 슬쩍 꼬리를 내리려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은 영으로 예배하라고 합니다. 오늘 이 시대를 보아도 여기도 예배당, 저기도 예배당입니다. 어느 빌딘에 가서 보면 한 빌딩에 두 교회가 있는 것도 보입니다. 교회 홍수입니다. 그래서 무슨 교회가 이렇게 많아 하면서 교회의 존귀함을 닞춥니다. 비하합니다. 그러면서 교회 신앙을 우습게 여깁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의 온전치 못함을 이야기 하면서, 교회를 비판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외면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영으로 예배하라 하십니다. 앞에서 말씀드렸지만 예수님은 성령을 흐르는 물에 비유하였습니다. 강물은 빨라지기도 하고, 느려지기도 하고, 돌아 가기도 하고, 아래로 뚝 떨어지기도 하고, 멈추기도 합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영으로 예배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영,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기 까지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즉 우리에게로 흘러 영의 감동으로,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하는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요?

생수의 강이 배에서 흐른다고 하면서 바로 깊은 마음에서부터 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마음 일까요?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빌2;5에서 사도 바울은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럿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고 하면서 무어라 합니까?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낮추셨습니다. 죽기까지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습니다.

혹 가까운 사람과 싸움이 있었다고 하지요. 그런데 화해를 하려고 스스로의 뜻이나, 의지를 굽히면 서로 대화가 되는데, 내가 낮추면 상대방의 마음이 낮아진 쪽으로 흘러넘쳐 옵니다. 그러니까 내가 낮추어 상대방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낮추면 낮아진 쪽으로 상대방의 그 마음이 나에게 흘러 온다는 것입니다. 마치 물처럼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낮아지니까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흘러들어 가는 것입니다.

성령이 강 같이 흐른다는 것은 바로 사람의 마음과 마음이 막힘이 없이마치 강처럼 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원수에게, 미운 사람에게, 왕따 당하는 친구에게, 병든 사람과 마음이 통하는 것입니다. 돈이 오직 유일한 가치인 사람에게는 그 마음의 강이 흐르질 못합니다. 왜냐하면 가로막혀 있기 때문입니다. 폐쇄적이 됩니다. 그러니까 배가 산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 가치에 일렬 종대하여 패거리를 쳐 외적인 큰 힘을 키우는데 결국 무너질 수 밖에 없는 허구의 탑을 쌓아 올리는 것입니다.

인간극장에서 강남 역삼역 3번출구에서 행복김밥을 파시는 김철한씨에대한 것을 방영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이분은 가계에 찿아오는 손님한 분 한 분을 허두루 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손님들이 단골이라고 합니다. 손님들마다 일일이 다른말과 표정으로 반갑게 인사하며 머리핀이나 넥타이 등 아주 작은 부분까지 달라진 것에 대해 관심을 보여줄 뿐 아니라 입맛까지 알아서 시금치가 들어간 김밥, 치즈가 들어간 김밥등 좋아하는 김밥을 권해준다고 합니다. 또 가족이 서로를 아껴주면서 알콩달콩하게 사는 부부의 모습도 아름답구. 두 분 지내시는 모습이 참 드라마 속의 주인공들 같더라구 합니다. 그리고 "저야 김밥이 많이 팔리면 좋지만 모든 분들이 집에서 따뜻한 밥 드시고 다니는 세상이 오길 바래요"하는 이야기도 참 푹은하고 따뜻합니다.

그 분에대한 이야기를 들으니 소박하고, 겸손합니다. 겸손하니까 손님들의 모습이 정겹게 보이는 것입니다. 머리핀도 보이고, 넥타이도 보이고, 그러니 찿아오는 분들의 얼굴 표정도 보이겠지요. 이 김밥집은 김밥만 파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나누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김밥집 아저씨의 배려하는 마음이 그대로 찿아오는 손님들에게 전달이 됩니다. 그 배려하고 관용하는 마음이 다른 사람에게 흐릅니다. 빌4:4 이하에 보면 기뻐하라 하면서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라고 합니다. 관용은 말씀드렸지만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삶에대한 기쁨이 없으면 남에대한 배려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 기쁨의 생수가 어디에서 흘러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감동으로부터 우리에게 넘칩니다.

교우 여러분 지금은 사순절 기간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기위해 힘들어 하신 기간입니다. 우리도 바로 이 기간에 주님의 십자가, 낮아짐, 버리심, 죽기 까지 말씀에 순종한 주님의 마음을 따르는 기간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
979개(41/49페이지)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하나님은 잊지 않으신다(2016년9월4일) 사진 첨부파일 관리자 14571 2016.09.09 08:30
공지 나는 주의 사람이니(가야금, 대금 동영상) 첨부파일 하늘기차 25921 2007.10.16 12:24
공지 망대에 오르라(창립40주년 기념 예배 설교,유경재 목사) 고기교회 26294 2006.05.31 22:16
공지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하늘기차 24886 2005.09.02 16:30
175 [일반] 살리시는 영( 2008년8월 3일, 성령강림주일후열두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329 2008.08.03 16:06
174 [일반] 목자이신 임금(2008년7월27일, 성령강림주일후열한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053 2008.07.27 15:10
173 [일반] 전심으로 향하자(2008년7월20일, 성령강림주일후열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087 2008.07.20 18:43
172 [일반] 약속하신 말씀을 이루어 주시기를(2008년7월13일, 성령강림주일후아홉번 첨부파일 하늘기차 2105 2008.07.13 16:26
171 [일반] 어리석은 것 (2008년7월 6일, 성령강림주일후여덟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1886 2008.07.06 16:03
170 [일반] 새롭게 하는 삶( 2008년6월29일, 성령강림주일후일곱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1861 2008.06.29 17:32
169 [일반] 지금도 창조하시는 주님(2008년6월22일, 성령강림주일후여섯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1962 2008.06.22 14:37
168 피하고, 쫓고, 싸우고, 얻자(2008년6월15일, 성령강림주일후다섯번째 첨부파일 하늘기차 1852 2008.06.15 14:43
167 [일반] 지금 서 있는 은혜의 자리(2008년6월 8일, 성령강림주일후 네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1963 2008.06.08 13:44
166 아름다운 교회(2008년6월 1일, 성령강림주일후 세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149 2008.06.01 15:15
165 [일반] 믿음으로 바로 서자(2008년5월17일, 성령강림주일후 첫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088 2008.05.18 15:09
164 [일반] 아름다운 우리 가정(2008년5월11일, 성령강림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167 2008.05.11 13:39
163 [일반] 사랑받으며 자라는 자녀(2008년5월 4일, 어린이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094 2008.05.04 16:21
162 [일반] 참되게 깨달은 그 날 부터(2008년4월27일, 부활여섯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1914 2008.04.27 21:19
161 [일반] 주님이 주시는 멍에(2008년4월20일, 부활다섯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452 2008.04.20 14:21
160 [일반] 엠마오로 가는 길(2008년4월 6일, 부활세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488 2008.04.06 17:12
159 [일반]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2008년3월30일, 부활절둘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131 2008.03.30 13:12
158 [일반] 생명의 환희, 부활 (2008년3월23일, 부활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128 2008.03.23 13:40
157 [일반] 하나님의 어린 양(2008년3월16일,종려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310 2008.03.16 13:28
>> [일반] 솟아나는 생명의 샘(2008년3월 9일, 사순절다섯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3132 2008.03.09 14: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