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View Article

볼 수 있는 은혜 Ⅳ(2008년 12월28일, 성탄절후첫째주일)

하늘기차 | 2008.12.28 15:17 | 조회 1915


볼 수 있는 은혜 Ⅳ

2008년 12월28일(성탄절후첫째주일) 빌2:5-9;4:4-7

볼 수 있는 은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보는가 하면 은혜를 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깨끗해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깨끗해야 항상, 늘, 언제나, 변함없이 신실하게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성결하여야 합니다. 깨끗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도 마음이 깨끗한 자가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에 관심이 없으면 볼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빌립이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하자 볼 수 있다 없다 하다가 자연스럽게 사랑으로 넘어간 것입니다. 관심입니다.

요14에서 15장으로 넘어가면서 예수님은 사랑에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어떤 사랑이냐하면 요15:9-10의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너희가 나의 계명을 지키면, 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나의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다”그러니까 계명을 지키는 사랑입니다.

마음이 깨끗해야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마음을 깨끗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요15:3에서도 말씀하고 있고, 히4:12에서도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말씀해 주시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사랑이 말씀에대한 사랑으로 넘어가면 스스로 깨끗게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말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행인것은 도를 닦고, 고행을 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해야 하나님이 함께 함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우리가 깨끗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이고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공로가 없습니다. 그래서 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한 것입니다.

마음이 깨끗해야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말은 마음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은혜는 마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민21:4에 보면
“백성이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홍해 길로 좇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 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였다고 합니다. 마음이 길 때문에 상하였습니다. 우리가 읽고 있는 표준 새번역이나, 개정개역이나, 공동번역이나 대부분의 외국어 성경은 대부분 ‘참지 못하고’, ‘ 조급하여’, ‘참을성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스스로 감당하지 못할 때 우리는 참지 못합니다. 조급해 집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흐름이나 풍조는 항상 우리가 감당할 만큼 만만치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상하게 됩니다. 마음이 상하면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마음이 상했다는 것입니까? 길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같은 길을 가더라도 어떤 사람은 참지 못해 분노하며 조급해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여유가 있습니다. 보는 것에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떠나 광야로 나아간 것은 약속을 따라 가나안을 향하는 여정이었습니다. 약속을 따라서 라고 했는데 약속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 아닙니까, 끝까지 말씀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가야하는 길은 그렇게 쉽지 않은 길이었습니다. 그 길은 약속을 놓아버리면 결코 나아갈 수 없는 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길에서 약속을 보지 못하고 자꾸 길에서 오는 상황들, 조건들만 계속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먹을 것이 없다, 물이 떨어졌다, 춥다, 덥다, 질병, 맹수들, 적들...

종종 말씀드리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는 만나라는 것이 그렇게 영양가가 뛰어나고, 맛이 괜찮은 먹거리는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민11:5에 보면
“이집트에서 생선을 공짜로 먹던 것이 기억에 생생한데, 그 밖에도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이 눈에 선한데”하면서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백성들의 이런 분위기가 어디서부터 시작이 되었는가 하며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떠날 때 함께 따라왔던 사람들의 불평에서부터였습니다. 4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섞여 살던 무리들이 먹을 것 때문에 탐욕을 품으니’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도 역시 징징대며 불평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일이 잘 될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인생이 어찌 좋은 일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일이 잘 될 때가 아니라 일이 꼬이고, 막히고, 문제들이 엉뚱한데서 터질 때입니다. 그럴때 이제 트집거리를 찿게되고 누구 때문이라는 명분을 세우고, 옛 날을 회상하게 되고, 그리고 그 상황에 몰입되어 주저앉아 버리는 경우를 봅니다. 이스라엘이 무너진 것도 결국 평소에는 괜찮지만 어려워지면서 함께 따라온 사람들 하나님 신앙과 무관한 사람들의 말이 먹히기 시작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최소한 성도들은 우리 인생의 길을 가는 동안 길 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 더 보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은혜를 보지 못하니까, 사주 팔자니. 신통하다는 점쟁이에게 찿아가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는 것을 보아야 하는데 점을 보려고 합니다. 얼핏 들은 이야기인데 교인들도 점을 보러 간다고 합니다. 이것이 다 길만을 생각하고, 길 만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길이 없다고 하는데 없는 것이 아니라 길이 있는데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길로 인해 참지 못하고 답답해 하고, 상처를 받는다고 하는데 참을 수 없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영적 결핍’을 의미합니다. 교우 여러분 길이 없는 것이 아니라 길이 있는데 그 길이 너무 힘이드는 것 아닙니까? 내가 감당키 어렵습니다. 또 한참 가다 보면 지금 가는 길이 방향을 제대로 잡은 것인지, 그래서 방향도, 목적도 희미해지고, 그러다 보면 주님의 도우심, 인도하심, 섭리와 경륜, 동행하심은 보이지 않고 길의 열악함만 보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향하다가 주저앉은 이유입니다. 주시는 만나를 감사와 은혜로 먹어야 하는데, 원망과 불평과 시비하며 먹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시내 산에 도착하여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는 동안 이스라엘은 산 아래에서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절하고 먹고 마시며 한창 난장을 쳤습니다. 이 광경을 본 모세가 하나님께 받은 10계명이 세겨진 돌판을 던져 부수어 버립니다. 모세는 우상 숭배를 주도한 자들을 처형하고 그리고는다시 하나님께로 올라갑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이스라엘과 함께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도중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진노할까 염려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모세는 회막으로 들어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더러 혼자 가라면 어떻게 합니까? 만일 주께서 우리와 함께 가지 않는다면 우리도 갈 수 없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은혜가 아니면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함께하지 않으면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게할 것을 약속합니다.

인생의 길에 은혜가 없으면 참지 못하여 상처를 받고 주저 앉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이 은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은혜를 볼 수 있는 것은 마음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은혜에대한 마음이란 어떤 마음일까요? 감사하는 마음 아닌가요? 받은 것에대한 마음은 감사이지요. 이 감사라는 말에 유카리스티아라는 헬라어에는 ‘은혜가 새롭다’, ‘마음의 물줄기가 달게 흐른다’라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교우여러분 나의 마음을 어디에 두느냐 하는 것은 인생의 길에 있어서 참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라는 말 뜻에 마음의 물 줄기가 달게 흐른다고 합니다.

인생 길에 있어서 이렇게 바로 단 물이 솟아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쓴 물이 나오면 먹을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홍애를 건너자 마자 애를 먹은 것이 물 때문이었습니다. 3일 만에 물이 떨어져 물을 구하는 중에 물 웅덩이를 발견하였는데 물이 써서 먹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그 쓴 물을 단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우리도 우리 인생길에서 먹을 물을 위해 샘을 파야 하는데, 이 마음의 샘을 팔 때 단 물이 나는 샘을 파야합니다. 이전 난을 키울 때 애를 먹은 것 중에 하나가 물이었습니다. 물이 좋으면 난이 잘 자라지만 물이 나쁘면 난이 쉽게 병들고, 바이러스에 감염됩니다.

마찬가지로 그래서 우리도 마음의 샘을 팔 때에 기다리지 못하고, 분노하며, 원망하며, 미워하는 샘을 파기 시작하면 그 길이 힘들어집니다. 자기만 힘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사람들도 같이 힘들어집니다. 그러나 말씀의 샘, 은혜의 샘, 언약의 샘, 마르지 않는 사랑과 평화 감사의 영적 샘을 파면 삶의 기쁨이 찿아옵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행복, 행복 하면서 행복 타령을 하는데, 이 행복의 샘은 마치 건수와 같아서 가물면 금방 말라버립니다. 잘 나갈 때야 물이 펑펑 솟는 것 같지만 건기가 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물이 말라버립니다. 성경은 행복이 아니라 기쁨에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15장 포도나무 비유에서도 이렇게 계명을 지키는 하나님 사랑을 하라고 하는 이유는 기쁨을 주기 위해서 라고 합니다. 기쁨은 열매입니다. 행복은 열매가 아니지요, 자기가 소유한 것 누리는 것 말고, 그러니까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자기 많이 가진 만큼, 적게 가진 사람은 적게 가진 만큼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열매 맺는 기쁨이 성도들에게 넘쳐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생명을 나눌 만한 친구 하나가 있었는데, 그는 바로 사울왕의 아들인 요나단이었습니다. 요나단은 스스로 왕이 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아버지 사울이 시기가 가득하여 다윗을 죽이려고 했을 때 여러번 다윗의 생명을 구해준 적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왕권을 장악하고, 그리고 나라가 안정되 가기 시작할 때 문득 사울의 가족들 생각이 난 것입니다. 특히 요나단의 가족에대해 신하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마침 요나단의 아들이 살아있는데 두 다리가 저는 신체 장애인이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다윗은 요나단의 아들인 무비보셋을 속히 불러오게 합니다.

므비보셋은 갑자기 다윗이 자기를 부르자 이제 죽었구나 했을 것입니다. 자기 할아버지 사울이 그렇게 괴롭혔던 다윗 아닙니까? 덜덜 떨며 다윗에게 나아갑니다. 그런데 다윗이 뜻 밖의 이야기를 합니다.
“네가 므비보셋이냐? 하고 묻습니다. 예, 임금님의 종, 므비보셋입니다. 다윗이 그에게 말합니다. "겁낼 것 없다. 내가 너의 아버지 요나단을 생각해서 네게 은총을 베풀어 주고 싶다. 너의 할아버지 사울 임금께서 가지고 계시던 토지를 너에게 모두 돌려주겠다. 그리고 너는 언제나 나의 식탁에서 함께 먹도록 하여라.”고 합니다. 은혜입니다. 므비보셋이 다윗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그러자 므비보셋이 ‘이 종이 무엇이기에 죽은 개나 다름없는 저를 임금님께서 이렇게까지 돌보아 주십니까?’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를 입은 자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바로 단물을 내는 마르지 않는 샘의 근원인 것입니다. 마음 중에 감사하는 마음이야 말로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의 근원인 것입니다. 영적 마음의 문은 감사로부터 열리는 것입니다. 빌4:6-7의 말씀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감사를 통해 생명의 마르지 않는 영원한 샘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행복이라는 금방 마를 가짜 샘 파지 말고 영원히 마르지 않는 기쁨을 주는 감사의 샘을 팝시다. 그러니까 므비보셋이 다윗 앞에서 스스로를 낮추어 ‘죽은 개나 다름없는 저’라고 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다윗이 사울에게 쫓길 때, 스스로 사울을 죽일 기회가 왔음에도 그의 옷자락 만을 베어 높이 들어 보이면서 당신을 죽일 수도 있었지만 나는 당신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이스라엘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이스라엘 왕이여 누구를 잡으려고 한 마리 죽은 개를 쫓아 다닙니까?”하면서 자신을 ‘죽은 개’라고 합니다. 다윗이 스스로를 낮추고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에서도 자기 자신에 대해 스스로 벌래요, 흙 먼지라고 하면서
‘스스로 낮추’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스스로 낮추는 모습이야 말로 이제 은혜의 자리에 머무는 것입니다. 외식하여, 종교적인 모양으로가 아니라 우러나와서 스스로를 낮출 때 우리는 하나님 볼 수 있는 마음의 샘을 파는 것입니다. 이 샘을 파야 영원히 목마르지 않습니다. 이 마음의 샘을 파야 하나님이 나와함께 하시며, 지키시고, 인도하심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낮추는 마음은 누구의 마음입니까? 에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예수는 십자가를 통해 스스로 낮추는 것이 어떤 것인 줄을 보여주셨습니다.
빌2에 보면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아까 행복이 아니라 기쁨이라 했습니다. 행복은 요즈음 welling이라는 개념과 어울려 사용된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가져서 즐겁고 행복한 것이지요, 그러나 성경은 기쁨에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져서 기쁜 것이 아니라 공로없이 받아서 그리고 그 은혜 나누어서 기쁘고 감사한 것입니다. 이 기쁨, 이 감사는 끊임없이 재생산되는데, 왜냐하면 결코 마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느 곳에선가 이 은혜의 샘은 솟아나옵니다. 흐르던 은혜가 이 쪽에서 막히면 다른 쪽에서 솟아납니다. 그러나 어디서 솟아납니까? 스스로 낮추어 은혜를 은혜로 보는 사람에게서 그 샘은 다시 솟아나기 시작합니다. 바로 감격, 역동성, 생명력, 축제의 기쁨의 샘입니다.

스스로 낮추어 감사의 샘을 팝시다. 그 마음으로 하나님이 나와함께 하시는 것을 보며 기뻐하는 삶을 살며 전파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
979개(40/49페이지)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하나님은 잊지 않으신다(2016년9월4일) 사진 첨부파일 관리자 14566 2016.09.09 08:30
공지 나는 주의 사람이니(가야금, 대금 동영상) 첨부파일 하늘기차 25918 2007.10.16 12:24
공지 망대에 오르라(창립40주년 기념 예배 설교,유경재 목사) 고기교회 26292 2006.05.31 22:16
공지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하늘기차 24883 2005.09.02 16:30
>> [일반] 볼 수 있는 은혜 Ⅳ(2008년 12월28일, 성탄절후첫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1916 2008.12.28 15:17
194 [일반] 볼 수 있는 은혜 Ⅲ(2008년 12월21일, 대강절네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1779 2008.12.21 15:25
193 [일반] 볼 수 있는 은혜 Ⅱ(2008년 12월14일, 대강절세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1798 2008.12.14 14:09
192 [일반] 볼 수 있는 은혜 Ⅰ(2008년 12월 7일, 대강절두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1785 2008.12.07 16:38
191 [일반] 빈들에서(2008년 11월30일, 대강절첫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1993 2008.11.30 16:52
190 [일반] 하나님을 바라라(2008년 11월23일, 성령강림주일후스물여덟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1902 2008.11.23 14:12
189 [일반]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2008년 11월16일,성령강림주일후스물일곱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886 2008.11.16 14:24
188 [일반] 소망을 품고 즐거워합니다( 2008년 11월 9일, 성령강림주일후스물여섯 첨부파일 하늘기차 1969 2008.11.09 16:21
187 [일반] 지금은 감사할 때(2008년 11월 2일, 추수감사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061 2008.11.04 09:21
186 [일반]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 2008년 10월19일, 성령강림절후스물세번째주 첨부파일 하늘기차 2714 2008.10.19 15:56
185 [일반] 하나님의 열심(2008년 10월 5일, 성령강림절후스물두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127 2008.10.12 14:19
184 [일반] 끝까지 견디는 사람(2008.10월 5일, 성령강림절후스물한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082 2008.10.05 16:16
183 [일반] 꼴찌들의 행복(2008년9월28일, 성령강림주일후스무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075 2008.09.29 21:01
182 [일반] 시대를 분별하는 종말의 신앙(2008년9월21일, 성령강림주일후열아홉번째 첨부파일 하늘기차 2179 2008.09.21 17:10
181 [일반] 말씀을 지켜 행하는 지혜(2008년9월14일, 성령강림주일후열여섯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186 2008.09.14 15:25
180 [일반] 은혜의 잔치에 참여케 하는 믿음(2008년9월 7일, 성령강림주일후열일곱 첨부파일 하늘기차 1895 2008.09.07 14:08
179 [일반]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2008년8월31일, 성령강림주일후열여섯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1913 2008.08.31 18:38
178 [일반]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2008년8월24일, 성령강림주일후열다섯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293 2008.08.24 18:07
177 [일반] 씨뿌리는 농부가 아니라 사람(2008년8월17일, 성령강림주일후열네번째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641 2008.08.17 17:59
176 [일반] 어린 소녀 하나(2008년8월10일, 성령강림주일후열세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183 2008.08.11 1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