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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수 있는 은혜 Ⅲ(2008년 12월21일, 대강절네번째주일)

하늘기차 | 2008.12.21 15:25 | 조회 1778


볼 수 있는 은혜 Ⅲ

2008년 12월21일(대강절네번째주일) 요14:5-11

오늘은 대강절 네 번째 주일입니다. 그 동안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은혜가 귀하다 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지난 주에는 여호수아를 통해 이전에 가보지 못한 길로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전에 가보지 못 한 길이라는 것이 있나요? 늘 우리가 가던 길 아닌가요? 이 세상에 새 것이 어디 있나요? 해 아래 새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전에 가보지 못한 길이라는 것은 바로 이제는 나의 계획과 생각, 뜻이 아니라, 학연과 혈연과 지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즉 그 길을 가기위해 성결하라는 것입니다. 깨끗하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말씀드리는데 이 성탄의 기간 중에 우리가 꼭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마1:21의 말씀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너는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입니다.

성탄절에는 생각나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먼저 싼타클로스, 동방 박사, 마굿간, 큰 별, 소나무, 양말, 초... 영광, 찬양, 빛... 그런데 그 모든 성탄에 관련 된 것들의 중심에 ‘죄 용서로 말미암은 구원의 기쁨’이 있습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할 때에 천사가 찬양합니다. 무엇이라고 찬양합니까?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는 기뻐하심을 입은자들의 평화”입니다. 이 하늘의 영광과 땅의 평화에 다리를 놓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그런데 이 영광과 평화의 사이에 바로 죄의 문제가 있습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영광이요 평화인 것입니다. 세례 요한 은 예수님을 소개할 때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했는데, 그 앞에 무어라고 어린양을 설명 했습니까? ‘세상 죄를 지고 가는’이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인 사람의 병을 고쳐준 것이 원인이 되어 예루살렘 성전 지도자들 앞에 끌려가게 됩니다. 그 때에 사도 베드로가 이런 말씀을 합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합니다. 이 말씀에대해 사람들이 여러 가지 말들을 합니다. 이리 가도, 저리 가도 결국 도착점은 다 똑같지 않나 하면서 모든 종교는 다 같지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을 얻을만한 이름은 하나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인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그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방시킬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왜 죄에서 우리를 구원해야 할까요? 죄가 우리를 죽게하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수요저녁 예배 때에 느헤미야서를 공부하는데, 지난 수요일에는 9장 말씀을 통해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9장 마지막절을 보면
“이 모든 것을 돌이켜 본 뒤에, 우리는 언약을 굳게 세우고 그것을 글로 적었으며, 지도자들과 레위사람들과 제사장들이 그 위에 서명하였다”고 되어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자신의 뒤를 돌아보았다는 것입니다. 뒤를 돌아본 내용이 바로 느헤미야 9장의 내용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심. 모세. 출애굽. 광야. 가나안 등에대한 고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9장의 내용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무어라 할까요?

16절에 보면
“그러나 우리 조상은 거만하여, 목이 뻣뻣하고 고집이 세어서, 주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습니다.”고 합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표현을 한 마디로 한다면 29절에 “죄를 지었습니다”입니다. 지키기만 하면 살게 되는 법을 주셨지만, 오히려 그 법을 거역하여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36절은 그 죄의 결과에대해 말씀합니다. 무어라 하고 있습니까? ‘오늘 이처럼 종살이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절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이 다 모여서 금식하면서, 굵은 베 옷을 입고, 먼지를 뒤집어 썼다는데, 이렇게 하는 이유는 2절에 나오는 말씀처럼 자신들의 허물과 조상의 죄를 자백하기 위한 것입니다.

성경은 죄의 열매를 죽음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죄는 우리를 살지 못하게 합니다. 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을 살지 못하게 한다는 것 보다는, 그러니까 세상에 대하여 살지 못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육신의 몸으로 육신의 것을 나누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는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하나님을 등지니 어둡고, 공허하며, 무질서합니다. 그런면에서 이 대강절에 주님을 바라며 기다린다는 것은 우리에게 값진 것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외에는 전부 계몽적입니다. 글쎄요 사전적인 의미는 ‘어린 아이나 무식한 이를 깨우처 줌’입니다. ‘정신의 몽매한 상태를 개발하여 개화로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모든 종교가 계몽적이라는 말은 애써 노력하면 좀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 종교는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자기 수련이 있습니다. 비밀한 수련법, 비밀한 의식도 그래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의 의식이나, 훈련이나, 기도를 보면 어리숙합니다. 다른 종교와 비교해 볼 때 의식이나 자기 수련하는 것을 보면 어린이 장난 하는 것 같습니다.

하여간 그러나 기독교는 계몽적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죄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묵상, 명상, 적선, 헌신, 공과를 통해서 어떤 질적 변화가 일어난다고 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29절의 말씀처럼 ‘죄를 지었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이 죄가 우리를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하신 첫 번째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간혹 다른 종교와 대화하지 못하고 독선적인 것 처럼 보이는 것도 바로 기존의 종교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느9:2절을 보면 “모든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을 글자 그대로 받으면 얼마나 배타적입니까? 그러나 이 말씀에는 이스라엘을 우상숭배의 죄로부터 보호하며, 인도하며, 궁극에 하나님의 뜻을 세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구별인 것입니다. 이러한 구별을 종교적으로 말하면 ‘성별’입니다. 거룩하게 구별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택하여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게 한 이유도 바로 우상숭배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지금 21세기의 시대에도 온 인류가 고통받고 있는 것은 바로 물질 맘몬의 우상 숭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성서는 이것을 분명히 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갈대아 우르에서 돌아섰고, 믿음의 많은 선배들이 그렇게 죄에서 돌아 서서 참 자유를 얻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 안에서 우상으로부터, 죄로부터 돌아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은혜를 사모하라 하였습니다. 볼 수 있기 위해서는 깨끗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죄 사함의 은혜의 자리에 서야합니다. 이 말이 그저 듣고 지나갈 말이 아닙니다.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신7:7,8에 보면
“주께서 너희를 사랑하시고 택하신 것은, 너희가 다른 민족들보다 수가 더 많아서가 아니다. 오히려 너희는 모든 민족 가운데서 수가 가장 적은 민족이다. 그런데도 주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너희 조상에게 맹세하신 그 약속을 지키시려고, 강한 손으로 너희를 이집트 왕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시고, 그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어 주신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은 우리가 깨끗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준영이가 학교에 같다가 오면 옷이 항상 흙탕입니다. 교회에 오면 양말, 바지 한 벌은 준비해야합니다. 온통 옷이고, 양말이고 오물로 범벅입니다. 더러워져도 엄마 아빠는 준영이를 사랑합니다. 깨끗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아빠요, 자식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에게 깨끗이 하라, 스스로 성결하라고 했을까요? 우리가 순결해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늘 변함이 없으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순결하지 않고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는 것을 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함께하시는 그 감동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왜 광야에서 원망과 시비의 떡을 먹으며 광야를 헤메다가 모두 죽을 수 밖에 없었을까요?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하지 않았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셨는데, 동행하셨는데, 인도하셨는데, 지켜주셨는데, 그 함께하심, 그 인도하심, 그 도우심의 귀함을 모르고, 하나님의 그 선하심, 긍휼이 여기는 것을 모르고, 그래서 감사와 기쁨, 평화의 떡이 아니라, 원망과 불평, 시비, 분노, 퇴락, 폭력의 떡을 먹은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맛보지 못하고 모두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이유는 한 가지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본다는 것일까요? 요14:8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 빌립이 답답했던 모양입니다. 빌립이 예수님에게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주님이 “나를 본 사람이 곧 아버지를 본 것인데 네가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느냐?”하면서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을 믿지 않느냐?”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아버지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믿지 않느냐?”하고 반문하십니다. 그러니까 보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래도 빌립은 답답해합니다.

몇 분들과 목공에 관심을 갖게 된지도 벌써 1년이 다 되어갑니다. 아래 목공방 준비가 조금씩 되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저는 우드아카데미라는 목공학교에서 목공을 배운지 벌써 5개월이 되어갑니다. 아직도 너무 부족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 목공을 배우면서 조금씩, 천천히 목공에 눈을 떠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통해 배운 것 중에 중요한 것은 어느 한 가지도 그냥 대충 넘어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목공에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1/20 mm의 오차를 넘어서지 말아야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 오차 범위를 넘어가면 지금 진행되고 있는 과정에 어딘가에 문제가 생겨 결국 그 만들고자하는 것을 만들 수 없는, 결국 2, 3등 품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는 불량품을 만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배운 것 중에 중요한 것은 그 1/20 mm의 오차를 찿고, 넘어서지 않을 것, 넘어서 버리면 다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오차를 넘어서지 않으려면 그 대패날, 대패집, 몸의 균형이 일정해야하는데 그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어디가 문제인지 잘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1/20 mm의 차이는 사람이 볼 수 있는 가시권의 마지막 선이라는 것입니다. 좀 처럼 보이지가 않습니다. 지 지난 토요일에는 그 오차를 넘어서 버렸기 때문에 오전에 학교에 가서 하루종일 대패날만 갈고 서성이다가 돌아 왔습니다. 그래도 그 오차 범위를 찿아내고, 그 오차 범위 안에서 작업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다른 단계로 넘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빌립이 그렇게 답답해 한 것 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답답해 하는 빌립에게 무어라 말씀하셨나요?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을 믿지 않느냐?”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을 보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어떻게 보면, 빌립식으로 접근하면 죽었다 깨어나도 보지 못 할 것입니다. 이것은 빌립의 질문이 잘 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식으로는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볼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이 대화를 이어나가면서 이제 사랑에대해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나님 아버지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니까 보이는 것입니다. 사랑은 다시 말하면 관심입니다. 전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관심을 가지니 그제서야 보이기 시작합니다. 말씀드렸지만 1/20mm 오차 이것 눈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내가 볼 때 죽었다 깨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선생님한테 그랬습니다. 하도 대패가 안되어 도통 보이지가 않습니다 했더니 그럼 가게에 가서 큰 돋보기를 사서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자꾸 보자고 하니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목공네 더 깊이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변함없는 끈질긴 노력...
시간이 필요하고, 더 많은 관심 사랑입니다. 그러면 사랑이 어떻다는 말입니까?

빌립도 답답하지만 예수님은 더 답답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요14:20입니다.
“그 날에 너희는,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또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21절을 말씀하셨습니다.
“내 계명을 받아서 지키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요, 나를 사 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 사람을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드러낼 것이다.”

이 빌립과의 대화는 계속 이어져 요15장의 포도나무비유로 넘어가는데 계속 이 주제입니다. 요15장에 보면 “내 안에 머물러 있어라”, 또는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는 말이 몇 번 나오냐 하면 11번 나옵니다. 그러니까 본다는 것은, 마음이 깨끗한자가 본다는 것은 사랑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 입장에서야 깨끗해야 늘 변함없는 하나님을 볼 수 있지만 하나님 입장에서는 늘 우리를 관심 가지고 함께하시고 동행하시고 인도하시는데, 너희도 그렇게 하면, 그래서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있으면 보인다는 것입니다 관심입니다. 사랑입니다. 1/20 mm 오차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관심 열정과 기쁨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도 바로 하나님 사랑 안에서 하나될 때 그 기쁨 충만하고 은혜가 충만한 것입니다.

이 대강절 기간이 스스로 성결하여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살 떨리는 주님의 사랑으로 생명, 평화, 자유의 은혜가 넘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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