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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을 품고 즐거워합니다( 2008년 11월 9일, 성령강림주일후스물여섯번째주일)

하늘기차 | 2008.11.09 16:21 | 조회 1968


소망을 품고 즐거워합니다.

2008년 11월 9일(성령강림주일후스물여섯번째주일) 롬5:1-2

창6:6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것을 후회하며 마음 아파하십니다. 그러면서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쓸어버리겠다고 하십니다. 무슨 하나님이
이랬다, 저랬다 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노아의 홍수는 이야기입니다. 마치 호랑이가 담배 피울 때 이야기인데 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하면 아이들이 귀를 귀울이듯이 우리도 하나님께서 홍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어떤 말씀을 주시려는지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벌써 흥미로워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편지는 편지로, 역사는 역사로, 문학은 문학으로, 묵시는 묵시로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경의 맛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6:11 이하에 보니 사람들의 하는 짓거리가 과관입니다. 지난 주 주보 쪽지에도 글을 올렸지만 사람들이 패괴합니다. 새번역에는 세상이 썩었고 무법 천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노아의 홍수나 소돔 고모라의 심판이 그냥 단순히 타락해서가 아니라 패괴해서라는 것입니다. 사전적인 의미를 보면 부수고 무너뜨린다는 것입니다. 황폐해지고 폐허가 된다는 것입니다. 무법천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폭력이 난무한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힘있는 자들의 이유 없는 폭력과 전쟁, 잔혹한 학살과 습격과 폭력이 난무하는 '무법한 폭력세상'을 보시면서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한 것입니다. 지난 쪽지글에서 최용우 전도사님은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을 받은 이유는 '동성연애'와 '음란'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실상은 자기의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천사와 롯을 폭력으로 굴복시키려 했던 그 '강포'함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득, 명분, 자존심을 위해 자기보다 약한 자를 힘으로 억압하는 사태가 그치지 않는 한 하나님의 심판을 막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지난 주에는 온 세계가 미국을 주목하였습니다. 버락 오바마가 많은 상황들을 뒤 엎고 대통령 당선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8년간 미국이 전세계에서 자행한 패괴함을 잘 보았습니다. 그 힘, 잔인함을 우리는 잘 압니다. 결국 2001년 우리는 또 하나의 무자비한 폭력을 보았습니다. 바로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만일 부시가 무기한 집권을 한다면 이 세계가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무지한 가공할 폭력을 전 지구상에 펼쳐 놓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의 미국의 유아기적인 전 세계를 향한 행태에 입에서 쌍욕이 나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마음인 것입니다. 휴~ 하고 한숨도 나오고, 열이 꼭데기 까지 올라 싹 쓸어버려 하는 것 말입니다. 지금 이명박 정권을 통해서 자행되는 거침없는 폭력도 어찌 그리 부시를 닮아가는지 답답합니다. 하여간 여러분들도 하나님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무슨 하나님이 저래 하면 ‘아니, 이것은 이야기야’라고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창6:8에 보면 ‘그러나 노아만은 주님께 은혜를 입었다’고 합니다. 은혜를 입었다는 것은 다시말해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구원일까요? 이것은 폭력으로 폐허가 되고 황폐해 가는 세상 속에서 폭력과 관계하지 않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출33:13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계명을 받으려고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산 아래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리를 이집트에서 건져주신 신이라고 잔치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러면 안되는 것인데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집트의 처참한 노예 생활 속에서 건져낸 것을 생각하면 바로 코 앞에서 그러면 안되는데 그렇게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못하고, 귀한것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 말입니다. 소중한것 지켜야할 것 지키지 않는 우리의 얄팍한 마음, 얇은 귀 말입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아 내려오면서 그 모습에 기가막혀 합니다. 받아온 십계명을 페데기처 버렸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 절대절명의 간구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이스라엘을 모두 죽게 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하지 않겠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회막에서 하나님과 얼굴을 대하여 대면을 하고, 이스라엘은 모두 회막 밖에서 무릎을 꿇고 통곡을 하며 회개를 하였습니다. 그 때 나누었던 모세와 하나님의 대화는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말합니다. 출33:12,13입니다.
“보십시오, 주께서 저에게 이 백성을 저 땅으로 이끌고 올라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누구를 저와 함께 보내실지는 저에게 일러주지 않으셨습니다. 주께서는 저에게, 저를 이름으로 불러 주실 만큼 저를 잘 아시며, 저에게 큰 은총을 베푸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시다면, 제가 주를 섬기며, 계속하여 주님께 은총을 받을 수 있도록, 부디 저에게 주의 계획을 가르쳐 주십시오. 주께서 이 백성을 주의 백성으로 선택하셨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14절입니다.
“내가 친히 너와 함께 가겠다. 그리하여 네가 안전하게 하겠다”하십니다. 모세가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간곡히 부탁을 하자 하나님께서 함께하겠다고 하십니다. 은혜를 입는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함께한다는 것입니다.

모세도 그렇고, 노아도 그렇고 바로 은혜를 입는다는 것은 바로 그 폭력이 난무하는, 그 우상으로 가득한, 귀한 것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그래서 지켜야할 것 을 지키내지 못하는 세상을 하나님이 함께 헤쳐 나가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땅히 누려야 할 것을 누리며 드러내야 할 것을 드러내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나는 이러한 삶을 소망을 품고 자랑하는, 즉 즐거워하며 기뻐하는 삶으로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면 이것은 불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특징은 즐거워 하는 것입니다. 이 즐거움이 어디에서부터 오는가 하면, 바라는 것에서, 즉 기다림에서 오는 것입니다. 3절에서 보면 환난 가운데에서도 즐거워 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기다림 때문에, 바라보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이 기다림 속에 4절 말씀처럼 인내, 단련된 인격, 희망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이 세상을 사노라면 좋고 기쁜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슬프고, 아프고, 절망적이고, 고통스러워, 좌절하여 삶의 저 밑 바닥까지 떨어져 회복할 수 없을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됩니다. 자기 마음이 찢기어 고통스러워 저 사람 때문에 나의 인생이 망쳤어, 저 사람이 우리 가정을 망쳤어, 사람 때문에 마음의 상처의 골이 깊이 패였습니다. 도저히 메꾸어 질 수 없는 골이 패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며 즐거워 하는’ 사람은 그 아픔, 그 상처를 품어 안읍니다. 끌어 안읍니다. 아픈 상처에 대하여 누구 때문이라 하지 않고, 오히려 왜 하나님께서 이 시험을 나에게 주실까 하고 물으며 하나님을 바랍니다. 하나님을 소망합니다. 사운드 오브 뮤직이라는 아름다운 뮤지컬 영화를 여러분들 잘 아실 것입니다. 주옥같은 노래들이 흘러 넘치는데, 그 중 제가 더 좋아하는 곡 중에 하나는 주인공 마리아가 수녀원에서 대령의 집으로 가정교사로 들어간 날 비바람이 치고, 천둥 번개가 치자 큰 아이고 작은 아이고 모두 마리아의 방으로 뛰어들어옵니다. 그 때 마리아가 그렇게 노래합니다. 나는 이렇게 무섭고 두렵고 어려울 때 이런 생각을 하지 하면서 'my favorite things'라는 노래를 부릅니다.

장미 꽃 위에 떨어진 빗 방울, 그리고 고양이의 수염
반짝이는 동으로 된 주전자, 그리고 털실로 짠 따뜻한 장갑
여러 가닥의 끈으로 묶은 갈색 종이로 포장한 짐꾸러기
이런 것들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인데... 어려움이 닥치고, 슬퍼질 때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생각하면 금방 그 아픔이나, 걱정, 두려움은 사라져 하며 노래를 부릅니다. 참 좋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도 어렵고 힘들 째 이렇게 마리아처럼 좋은 생각을 해 봅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는 즐거움을 갖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늘의 영광을 소망할 때야 비로서 성도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늘의 영광이 어떨지 상상을 해 보셨나요? 언젠가 말씀을 드린적이 있습니다. 고전15장 부활 장에서 사도 바울이 온갖 피조물의 영광에대해서 이야기 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 아름다움은 무어라 표현 할 수 없을 정도로 저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버금가는 각 피조물들, 땅은 땅, 별은 별, 돌 뿌리는 돌 뿌리대로, 물고기는 물고기, 짐승은 짐승, 하물며 사람이야 더 말 할 나위가 없는 그 영광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봅니다.

이 영광의 소망 안에 바로 인내, 연단의 즐거움, 기다림의 즐거움이 있습니다. 성도들은 반드시 이 과정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영광을 함께 누릴 수 있는 성도로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99세가 되어 2번째로 아브라함과 믿음의 약속을 다시 갱신할 때 무엇이라 말씀하신 주 아십니까?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완전해 질 수 있을까요?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 어떤 과정을 겪었나요? 여러 삶의 어려움, 시험, 위기, 아픔,,,을 통해 아브라함은 결국 하나님이 인정하는 온전한 신앙의 사람으로 세움을 받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합니다.

한 번은 어느 바리새인 부자 청년이 예수님에게 찿아와 영생에대해 물은적이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그 부자 청년에게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데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를 주라!”고 합니다. 이 부자 청년은 결국 그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모세와 노아는 은혜를 입었는데 왜 이 청년은 그 귀한 주님이 친히 주시는 은혜를 입지 못했을까요? 땅에 발이 묶였기 때문입니다. 세상 재물에 밑둥부터 붙들려 있습니다. 생명이 물질 보다 귀한 것을 알려면, 이 묶인 발이 풀리려면, 삶의 밑둥부터 흔들려야 생명이 물질 보다 귀한 것을 압니다. 죽었다 살아나야 합니다. 시험과 어려움,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고난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찿을 수 밖에 없는 자리에 까지 내 몰릴 때, 죽을 일, 기가 막히는 일에서 이제 인내하며 연단하며, 소망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는 이 소망이 있습니다. 이 풀무질 속에서, 이 담금질 속에서 녹슨 것들이 다 떨어져 나갑니다. 불순물들이 다 제거됩니다. 욥기의 말을 빌리면 7번 정제되어야 순금이되어 나온다고 합니다. 욥도, 아브라함도, 모세도 이 담금질을 거쳤습니다. 이렇게 시험을 거치면서 하나님 소망의 즐거움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하는 즐거움은 눈에 보이는 그러한 즐거움이 아닙니다. 이 소망의 즐거움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이 누리는 귀한 축복이요 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시험 받을 때에 기뻐하라하였습니다.

이 소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공허하지도 않습니다. 다시말해 이 소망은 우리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넘치도록 부어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시험당하여 고통 속에 가슴 아퍼하며, 통곡하며, 그 아픔을 원망으로 돌리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를 끌어 안고, 부등켜 안으십니다. 햇볕 같은 따사로운 사랑의 손길로 우리를 어루만져 주십니다. 이 사랑은 나를 위해 피흘려 죽기 까지 우리를 사랑하는 사랑이며, 이 사랑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죽기까지 자신의 뜻을 버린 사랑인 바, 이것이 바로 온전한 사랑입니다. 온전하려면 자신의 것을 버려야합니다. 하나님 뜻 앞에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동안 스스로 온전치 못했던 것을 온전케 합니다. 온전해야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이 세상 속에서 빛으로, 소금으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온전키 위해서는 시험 속에서, 환난 속에서 인내와 연단으로 하나님 영광의 소망으로 그리고 그 소망의 즐거움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얼마 전에 아래 목공방에서 최태순님 하고 함께 있을 때 나무 이야기를 한적이 있는데, 그 때 최태순님이 들려준 이야기 입니다. 판교가 개발이 되면서 도로 정비를 할 때 여러분 아시겠지만 판교부터 정신문화원에 이르는 길의 가로수가 얼마나 아름다웠습니까. 그런데 그 도로의 가로수가 다 베어 넘어갔습니다. 이것도 개발의 폭력이지요. 그러고 보면 온 세상의 문명의 이기가 대부분 폭력적입니다.. 컴퓨터의 인터넷 악풀, 허락없이 들어오는 바이러스, 자동차의 속도, 매연, 분진, 고속도로도 편리하지만 한 순간에 폭력의 매개체가 됩니다. 또 병원에서 분별없이 제공하는 약의 과다 복용, 오염된 먹거리, 물, 공기, 우리에게 에너지를 제공하는 원자력발전소... 교육, 정치, 경제 이 모든 것들이 어느 순간 우리의 삶을 거침없이 뒤 흔들어 놓습니다. 이러한 일상의 폭력으로부터 어떻게 우리는 우리를 지켜낼 수 있을까요? 가만히 살려는 사람들을 자꾸 뒤 흔들어 노니까 사람들이 점점 거칠어집니다. 사람들이 제 정신이 아닙니다.

하여간 그 때 아마 최태순 성도님과 몇몇 사람들이 그 베어진 가로수를, 얻을 수 있었나 본데 - 그 나무가 느티나무인데 가구용으로는 꽤 괜찮은 나무인지를 최근에야 알았습니다 - 그 나무들을 제재소에 가서 켜달라고 하니까 제재소에서 안된다고 하더랍니다. 왜 안되느냐고 하니까 가로수에는 나무 안에 못이 베겨 있어서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왠 못이 베겨있느냐고 물어보니까, 보통 가로수에는 현수막을 거리에 걸 때 나무에 못질을 종종 한다는 것입니다. 근데 현수막을 뗄 때는 못은 그대로 박힌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가며 나무가 자라니까 그 못들이 나무 속에 파묻혀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재소에서는 가로수 나무는 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커다란 톱의 날을 한 순간에 망가뜨리기 때문에 가로수를 제재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 나무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기를 못질한 그 못을 품는다는 말에 놀랐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말씀을 나누면서 그래 우리의 아픔, 세상의 폭력으로 받은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길은 품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품을까 하면은 오늘 말씀처럼 소망을 품고 기뻐하며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나무가 오랜 세월 지나면서 크는 모습을 보면 배울 점이 많습니다. 한 여름 사람들에게 그늘막 되어 쉬게하고, 가믈 때는 물을 내고, 홍수 때는 물을 머금고, 필요할 때 열매 맺어 과일을 내고 그리고 늘 푸르릅니다. 자신의 상처를 그대로 품고서 자랍니다.

실제 나무를 켜 보면 그 상흔들을 볼 수가 있는데 나무는 자신을 다치게 한 것들을 다 품고 자랍니다. 계속 푸르게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도 이 나무처럼 큰 사랑 안에 머물러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저런 조건과 상황 등을 내세워 하나님에게서 벗어나려고 하는데, 교우여러분 지금 이 시대가 어떤 시대입니까? 정말 그 폭력의 힘과 빠르기가 지구를 단숨에 무너뜨릴 만한 가공할 파괴력을 가진 시대입니다. 망설일 때가 아닙니다. 스스로 그 폭력에 휘둘려 같이 폭력적이 되 가든가, 그 폭력에 짓 눌린 삶을 살 수 밖에 없는데, 교우여러분 지체말고 무조건 적으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보여주신 하나님의 그 큰 사랑 안에 안기어 참 평화로운, 그리고, 당당한, 즐거운,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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