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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한 것을 사모하라( 2008년 10월19일, 성령강림절후스물세번째주일)

하늘기차 | 2008.10.19 15:56 | 조회 2713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
2008년 10월19일(성령강림절후스물세번째주일) 고전12:1-4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면서 신령한 것에 관심을 기울일 것에대하여 당부합니다. 신령한 것에 대하여 이야기 할 때 우리는 어떤 신비한 체험, 또 꿈에대한 것, 계시를 받았다 랄지, 귀신을 쫓아내고, 미래를 이야기 하는 것들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신령하다 하는 것은 역시 하나님을 빼 놓고는 이야기 할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육으로부터 난 것이기 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령하다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 즉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 본문도 바로 영적 은혜, 영적 선물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라고 합니다. 실제 고전 12장은 영적 은사에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은사’ 글자 그대로 받은 은혜에 대하여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실 때 아무나 무작위적이지 않습니다. 필요에 따라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주시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십니다. 1절 말씀에서 보면 이 신령한 하나님의 은혜를 모른체 하지 말라고 합니다.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신령한 은혜가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전 14:12에 보면
“이와 같이 여러분도 성령의 은사를 갈구하는 사람들이니, 여러분은 교회에 덕을 세우도록, 그 은사를 더욱 풍성하게 받기를 힘쓰십시오”라고 하듯이 교회의 덕을 위한 것인데, 잘 못 개인화 하여 자신의 이기심을 충족키 위해 사모합니다. 이것은 커다란 잘 못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전13에서 못 밖아 이야기하듯이 가장 신령한 것은 사랑입니다. 왜 사도 바울은 가장 신령한 것이 사랑이라고 못 밖아 이야기 할 까요? 말씀드렸지만 신령한 것, 즉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사는 교회의 덕을 위한 것입니다. 덕을 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사이비요, 거짓이요, 거품입니다. 잠시 눈과 귀를 만족시킬 수는 있을 지 몰라도 진정 평화, 소망, 사랑과 같은 하나님 나라의 덕목이 세워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가짜입니다. 14장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의 덕을 끼쳐야 진정한 은사라고 거듭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늘 말씀드려서 이제 잘 알겠지만 예배드리는 것 만이 교회가 아닌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나서 예배당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바로 교회의 현장인 것입니다. 그대로 교회는 우리의 일상의 삶과 그대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그 교회의 현장, 삶의 자리에 신령한 은혜가 넘쳐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 밖 우리의 일터, 작업장, 사무실, 성도의 가정, 이웃들과 함께하는 곳, 특히 고통받고 소외당한 사람들의 삶의 자리 말입니다. 그 곳이야말로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마지막 때에는 사랑이 없다고 합니다. 원망과 시비, 분노와 폭력과 거짓과 헛된 것들이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입니다. 작은 일에 쉽게 상처받고, 별로 그렇게 큰 일도 아닌데 작은 일에 크게 싸웁니다.(E 마트에서 어는 주부와 노인과의 싸움, 언성을 높이면서)자기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운전할 때 보면 더 그렇습니다. 자동차는 구조적으로 사람들을 거칠게 합니다. 정해진 도로 안에서 스피드를 내야합니다. 속도를 내지 못하면 짜증이 납니다. 마음에 응어리 진 것들이 그 때 폭발합니다. 아마 속도기에 최고 속도가 30Km 정도면 아마 도로에서의 주행이 훨씬 즐거울 것입니다. 요즈음 자전거를 타고 교회에 왔다 갔다 합니다. 정말 좋습니다. 아쉬운 것은 교회의 일이 많다보니 항상 짐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면 자전거를 타고 올 기회가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자전거를 타고 오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달릴 때의 바람이 스치는 촉감, 이리 저리 거리의 움직임을 보며 갈 수 있는 즐거움, 이웃들과 눈을 마주치고 하는 인사, 그리고 경비절약, 건강에 도움되도 너무 좋습니다. 마음이 정화되고, 순화됩니다. 앞에 사람이 있을 때 벨을 울리는 것도 너무 좋습니다. 자전거는신령한 도구인 것 같습니다.

하여간 사람들의 마음이 이렇게 점점 거칠어 집니다. 성도들, 아니 목사도 마찬가지 입니다. 어느 누구도 오늘 이 시대의 흐름에 거칠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정말 신령한 은혜가 아니구선느 이 세상을 하나님이 주신 그대로의 좋고도 아름다운 삶을 살아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왜 고린도 교회에 신령한 은사를 사모하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의 정황과 고린도 교회의 정황이 비슷하다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고린도교회가 파당과 거짓 이단의 침투, 빈부의 갈등, 우상숭배, 음욕, 술취함 등 너무나 많은 문제들로 인하여 매우 힘들었고, 그래서 사도 바울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고,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가기 전에 먼저 편지로서 권면을 하였는데, 바로 신령한 은사를 사모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거친 상황 속에서 교회가 건강하게 세워질 수 있기 위해서는 성도들이 신령한 은혜를 입어야 했던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감당할 수 없는 상황, 수습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질 때 신령한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을 감당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를 보아도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도를 넘어선 일들이 이 곳 저곳에서 일어납니다. 신령한 은혜가 아니고서는 감당할 길이 없습니다.

교우여러분! 저도 간곡히 부탁을 드립니다. 신령한 것에 관심을 갖기 바랍니다. 영적 은헤에 대하여 모른척하거나, 무관심하거나, 적당히 하지 말고 깊은 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사도바울은 14장에서는 신령한 은사를 열심히 구하라고 권면을 합니다.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찻듯이 파숫군이 새벽을 기다리듯이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마지막 때에 신령한 것에 관심을 가져야합니다. 마지막 때에는 우리를 시험하고, 유혹하며, 우리의 삶을 무너뜨리려 하는 것들이 우리를 집어 삼키려 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얼마전 인기스타였던 최진실씨의 죽은을 우리는 보도를 통해 보고 들었습니다.

얼마전 인기 스타였던 최진실씨의 죽음을 우리는 보도를 통해 보고 들었습니다. 저도 펜이었는데, 그런데 이 번 기독공보에서 최진실씨를 애도하는 어느 목사님의 글을 읽었습니다. 수원상일교회의 목사님의 글이었습니다. 아마도 그 교회에 다녔나 봅니다. 목사님의 시는 구구절절이 안타까움으로 가득하였습니다. 이혼의 상처를 안고 두 자녀를 자신의 성으로 입적할 만큼 강한 모성애로도 그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였는지 하면서, 술자리 대신 교회에 나와서 ‘주님 억울합니다’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Eh 세상 친구 대신 믿음의 친구를 만나 답답한 사연을 털어 놓고 함께 기도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며 세상이 더 이상 악해져서는 안되겠다고 하면서
“공중 권세를 잡고 사이버 공간을 점령하여
악플러를 통해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악한 영이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갈찌어다!
......
그대의 우울한 짐을 십자가 앞에 내려 놓으라“하며 글을 올렸습니다.

집사람하고 역시 최진실씨 이야기를 했는데,‘누가 최진실씨를 죽음으로 몰고 갔느냐?’ 질문하면서 신문에서는 악플이라 하고, 그래서 최진실법을 만든다고도 하지만, 결국 안재환의 죽음도, 그리고 최진실도 모두 돈, 맘몬에의해 죽음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 돈의 힘, 물질의 힘 뒤에는 바로 죽음의 권세, 어두움의 힘이 있습니다. 오늘 전 세계를 이렇게 휘청거리게 하는 것은 바로 그 허무, 죽음, 어두움, 물질 만능의 권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아쉬운 것 하나 더 있는데 하나님이 그 죽음과 돈의 힘 보다 크다는 것을 외 모르냐는 것입니다. 신령한 하나님의 은혜가 세상을 돈의 논리로 몰고 가는 어두움의 힘을 어떻게 헤쳐가게 해 주는지를 알아야 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신령한 것 중에 하나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찿아와 주신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이런 일도 하고, 저런 일도 하고, 또 전도도 하고, 금시기 기도도 하고, 헌금도 똑바로 하고 등 여러 가지 헌신, 봉사의 일들, 소위 세상 기준으로 말하면 공과난 업적이라 할까요? 그런 것 없어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때에, 극한 시험의 때에,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워 서 있기 조차 힘들 때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찿아와 간섭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설 때에 중요한 것은 바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도 이야기 했는데 우리의 기다림은 ‘고도를 기다리는’식의 기다림은 아닙니다. 그 때 그런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고도는 이미 와 있는데 그 두 사람이 고도를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질문을 던졌던 기억이 납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눈이 다른 것 보고, 우리의 귀가 다른 것 듣고, 우리의 마음이 다른 것에 잡혀있으니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오셔도 오신 줄을 모릅니다.

예전에 우리 중고등부 단합대회 때에, 안양의 새소망 교회의 15인승 봉고를 몰고 설악산을 간 적이 있습니다. 15 명 거의 꽉 차서 떠났던 기억이 납니다. 차가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결국 속초를 지나서 거의 목적지에 다 와서 그만 자동차가 탈이 나고 말았습니다. 차에서 김이 모락 모락 올라옵니다. 캄캄한 밤에 일단 아이들 다 내리게 하고, 혹 이 지역에 같은 교단 교회라도 있으면 그 곳을 찿아 가려고 수소문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보험회사에 연락을 하였는데, 내가 가입하지 않은 차라 도움을 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낯 선 곳에서 바가지라도 쓰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때에 친구 목사한테서 그 지역에서 목회하는 목사님이 볼 일을 다 보아서 곧 이 곳으로 갈 것이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나마 위안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저 쪽에서 경찰 순찰차가 불을 깜박이며 다가왔습니다. 그냥 가만히 있으려 하는데 순찰차가 멈추었습니다. 무슨 일이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차가 고장이 나서 그런다고 했더니 날도 어두웠고, 학생들도 있으니 일단 파출소로 가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아이들을 다 태우고 천천히 파출소로 갔습니다. 파출소에 도착하여서도 나는 이 곳 저 곳 연락할 곳이 있으면 여기 저기 전화로 불나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런데 파출소 책상에 앉아있던 순경 한 분이 시큰둥 해 가지고 나에게 ‘무엇을 도와드릴까요?’합니다. 아차 싶었습니다.

순경의 표정은 왜 도와주고 싶은데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맞다’했습니다. 그래서 그 순경에게 현재의 상황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근처에 잘 아는 정비업소가 있는데 기술자를 오라고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비업소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그리고는 차의 본네트를 열고 이리 저리 보더니 다 고쳤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떤 연결 부분이 빠져서 그렇게 되었다고 하면서 출장비 1만원만 주면 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그래서 그 남감한 일을 일단락 지었던 기억이 납니다.

신령하다는 것이 무슨 말일까요? 성경은 성령에대해 보혜사라고 합니다. 도울 ‘보’에 은혜 ‘혜’자를 씁니다. 도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혜사는 ‘도움을 주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 보혜사라는 말의 헬라어는 ‘파라클레토스’인데 그 뜻 역시 ‘도와주는 자’입니다. 성경은 성령에대해 진리의 영, 그리스도의 영, 하나님의 영이라고 부르는데, 바로 그 영이 도와주는 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가요? 그것이 바로 구원이 아닌가요? 구원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이 함께하는 것이 구원이지요. 믿음의 이야기의 내용이 무엇인가요? 구원을 받은 이야기, 인도함을 받은 것, 즉 도움을 받은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도움을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스랑ㄹ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고, 요단강을 건너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고 하는 것들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하나님의 도움에 익숙하지 않을까요?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는 것은 도움을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고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다 놓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선은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편하고 일이 잘 될 때는 모르지만 가는 길이 막히고, 어디로 가야 할 지 모를 때 바로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을 바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의 생각, 고집, 그리고 자기 열심, 자기 연민에 빠지면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며 우리를 도우신다는 것과 하나님을 사모하며 바라는 관계가 성립이 되지 않으면 정말 어려움을 당할 때 자기 연민, 우울함, 자기 고집, 교만, 헛 된 자존감에 빠지지 전혀 하나님을 바라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된 우리 인간의 모습인 것입니다.

성경은 양들을 곧 잘 성도들로 비유하곤 하는데, 양의 특성 중에 하나는 언제나 다니던 길로 다닌다는 것입니다. 한 번 목초지가 마음에 들면 계속 그 곳에 머무르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양들이 매일 똑 같은 길로 다니다 보니 길이 패일 정도가 된다고 하는데, 그러다 보면 우기 때에 그 길이 도랑이 될 정도라고 합니다. 문제는 그 특정한 곳이 양의 오물로 오염이 되어 더러워지고 그래서 세균에 감염될 우려가 높고 결국 그 자리에는 풀도 나지 않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양들은 목자가 이 쪽 저쪽으로 좋은 풀이 풍성히 있는 곳으로 물가로, 낭떨어지를 피해서, 맹수들로부터 잘 보호해 주면서 잘 인도해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양을 보니 마치 우리와 같습니다. 고집스럽게 자기 자신에 집착하여 좀처럼 자기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일상적인 삶 속에서도 보면 가정에서 직장에서 자녀를 대하거나, 부부 간에 직장의 상하 관계에서 늘 쉽게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고 하는 것들을 끊입없이 반복하거나, 고쳐야 할 나쁜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해 힘들어 하거나 아예 포기한 체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둡니다. 더구나 오늘 시대적인 난국에 처해 있는 전 세계적인 어려운 상황 속에서, 폭력이 세상을 덮고 있는 이러한 정황 속에서 우리는 신령한 하나님의 은사를 바라는 것이 마땅합니다. 한 가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노벨 문학상을 탄 펄 벅 여사는 어린 시절 선교사인 아버지를 따라가 중국에서 보냈습니다. 어느 해, 심한 가뭄이 들었는데, 그 이유는 백인인 펄 벅의 어머니가 신을 노하게 만들어 비가 내리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불안에 떨던 사람들이 점점 분노하기 시작했고, 그들은 어느 날 펄 벅의 집으로 쳐들어왔습니다. 사태를 알아차린 하인들이 펄 벅의 어머니에게 피할 것을 권유했지만 그녀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집안의 모든 찻잔을 꺼내서 차를 따르게 하고 접시에 케이크와 과일을 준비시켰다. 집안의 모든 문을 열어놓고 아이들과 함께 거실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윽고 함성이 들리고 손에 몽둥이를 든 사람들이 단숨에 집안으로 들이닥쳤다. 굳게 잠겨있을 문이 활짝 여린 것을 보고 모두들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습니다. “정말 잘 오셨습니다. 어서 들어오셔서 차라도 한잔 드세요.” 어머니의 권유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방으로 들어와 차를 마시고 케이크를 먹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차를 마시면서, 방안에서 천진난만하게 놀고 있는 어린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그냥 돌아갔다고 합니다.. 펄 벅이 상상했던 그 어떤 소동도 일어나지 않았고, 그리고 그날 밤 그토록 기다리던 비가 내렸다고 합니다. 훗날 어머니가 펄 벅에게 그날 밤을 회상하며,,,, “만약 그때 도망칠 곳이라도 있었으면 그런 용기는 나지 않았을 거다......”고 했답니다.

펄벅의 어머니는 남편을 따라 낯 설고, 물설은 중국에 와서 엄청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펄벅의 어머니는 그 어려움을 한 번도 내색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1800년대와 1900년대의 사이라니까, 그 당시의 중국의 정세가 얼마나 불안하고 또 외국인 여자가 살아가기에 얼마나 열악했겠습니까만은 펄벅의 어머니는 한 번도 그러한 내색을 하지 않고 자신이 살고 있는 주변 환경을 그렇게 아름답게 가꾸고, 자녀들을 웃는 얼굴과 기쁨으로 대했다는 것입니다. 7자녀를 낳고 4명의 아이를 잃었지만 항상 아이들에게 사랑으로 대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감사의 삶, 신령한 삶이 가믐 때에 속죄양을 찿아 들이닥친 폭도들의 마음을 잠 재운 것입니다. 오늘 이 거친 폭력적인 시대에 참으로 신령한 은혜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 은혜를 입어 차고 넘치어 나누는 삶을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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