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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견디는 사람(2008.10월 5일, 성령강림절후스물한번째주일)

하늘기차 | 2008.10.05 16:16 | 조회 2081


끝까지 견디는 사람
2008.10월 5일(성령강림절후스물한번째주일) 마24:9-14


최근 미국에서부터 수입되어 들어오는 금융위기를 서민들로서는 아직 체감할 수가 없습니다. 단지 개인적으로 느끼는 것은 돈 네고 돈 먹기 하는 도박판이 이제 끝났다는 것입니다. 투자다 주식이다 하는 땀 흘리지 않고 남의 돈 공짜로 먹겠다는 게임이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도록 포화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소위 미국발 신자유주의 금융경제의 종말이 온것입니다. 이 게임에 전 세계 나라의 경제가 목을 메었는데 결국 그것이 얼마나 허하다는 것이 실제로 드러난 것입니다.

최근 좀비라는, 서양 귀신 이야기가 우리나라의 영화관을 자주 들락 거리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그 좀비들이 밤에 무차별적으로 먹을 것을 찿아 돌아다니다가 목표물이 포착되면 가차 없이 습격하여 욕구를 충족시키는 모습을 보면 여지없이 지금 이 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좀비는 죽었지만 살아있습니다. 영혼이 없습니다. 즉 생각이나 뜻이 없이 한 가지 욕구인 먹이만을 쫓습니다. 그래서 같은 좀비들끼리도 물어뜯고 하는 것을 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오직 먹이만을 쫓습니다. 삶의 참 가치 없이 한 가지 목표 돈, 1등을 위해 맹목적으로 덤비는 모습이 딱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기업합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거대 금융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모두 신자유주의 금융경제에서 비롯된 개념들입니다. 최근 기업은행, 대우조선, 하이닉스 등 우리 나라 굴지의 기업들을 서로 사고 팔려고 난리들입니다. 이렇게 긍융권에서는 금융권대로 그리고 일반 서민들은 어떤가요? 어떻게 해서든지 아파트 하나 장만하여 오르는 물가 속에서도 내심 안심하는 모양이 우리 서민들의 실제 경제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는 먹을 것을 찿아 밤새 쏘다니는 영혼 없는 좀비의 모습이 보여집니다. 아름답게 미화되고 포장되어 있지만 그 포장을 한 꺼풀 벗어보면 어떻게 해서든지 먼저 정보를 얻어 목 좋은 곳에 투자하여 불로소득의 이득을 보는 모습은 좀비의 모습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게임에서 누가 가장 이득을 볼 수 있겠나 하는 것입니다.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 그리고 가장 힘이 있는 사람, 가장 기득권에 근접해 있는 사람이 승리자가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밤 새 쏘 다니며 먹을 것을 찿아 다닐려면 가진 자나 갖지 못한 자나 모두 두려움, 불안감 어두움, 적개심, 폭력 속에서 고통스러워 하는 것입니다. 최고로 많이 가진 사람도, 가장 힘이 센 사람도 언젠가는 아래로 떨어질 것이라는 불안감은 더 할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가 바로 오늘 우리 사회의 만연한 모습입니다. 비정규직, 광우병소, 대운화, 민영화, 먹거리, 아파트 거품 이 모든 경제, 정치, 사회적 문제들이 다 하나로 묶여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병리는 바로 서민들의 경제 속에서는 자녀들 교육현실을 통해 그대로 첨예하게 드러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바로 사교육 문제입니다. 기러기 아빠, 교환 학생, 조기 유학, 외고, 과학고, 자사고, 기숙형 학원, 최근에 국제중학에 이르기 까지, 그 상황 속에서 소위 대안학교, 홈스쿨이 태동이 된 상태입니다.

가진 사람은 가진 사람대로 없는 사람은 없는 사람대로 나름대로 생존을 위해 이 약육강식의 치열한 싸움판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니 병이 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병원에는 암환자로 넘처납니다. 정신질환이 속출합니다. 이러한 사회적 병리 현상에 자유로울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많은 사람이 걸려 넘어진다고 하는데, 어디에 걸려 넘어지는지에 대한 언급이 없는데 한글 개역 성경을 보면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주고 미워한다고 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불법이 성하여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을 것이라고 합니다. 좀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영화관에서 좀비영화를 통해 공포를 즐기는데 사실 그것은 우리들의 자화상인 것입니다.

이러한 세기말적인 현상을 접할 때 마다 늘 떠오르는 말씀은 딤후3:1의 말씀입니다.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른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풀면 모든 것이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어떤 선택을 해도 마땅하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합당하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먹거리를 보아도 그렇고, 자녀들의 교육현실을 보아도 그렇고, 부작용이 따릅니다. 문제는 그 후유증이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염려가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 13절은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합니다. 끝까지 견디는 사람이 구원을 얻는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읽으며 아리숭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구원은 그리고 견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그리고 어떻게 견딘다는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구원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요? 보통 예수 믿고 구원 얻었다는 것이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나에게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어느날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으로 가시는 중에 유대의 장로들이 와서 어느 로마인 백부장의 하인이 죽게 되었는데 이제 그 종을 살려달라고 백부장을 대신해서 간청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발길이 그 백부장의 집으로 향합니다. 집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 집에서 한 사람이 와서
“주님, 더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나는 주님을 내 집에 모셔 들일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주님께로 나아올 엄두도 못 냈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셔서, 내 종을 낫게 해주십시오. 나도 상관을 모시는 사람이고, 내 밑에도 병사들이 있어서, 내가 이 사람더러 가라고 하면 가고, 저 사람더러 오라고 하면 옵니다. 또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고 하면 합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 로마인의 말에 놀라셨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 아직 이런 믿음을 본 적이 없다고 칭찬하셨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의 믿음은 우선 군인정신에 입각하여 순명하복에 철저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 백부장의 삶의 선함이 이야기 곳곳에 묻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로마의 백부장이라 하면 전쟁에 이골이 난 사람입니다. 얼마나 거칠고 폭력적이겠습니까, 식민지의 점령군으로 와 있으니 얼마나 오만방자 하겠습니까 만은, 이 백부장의 모습에는 그러한 모습이 전혀 보이질 않습니다. 오히려 당시 집에서 부리는 가축 정도나 될 만한 그 집의 노예가 병에 걸렸다고 어떻게 해서든지 살려보려고 백방으로 알아보는 그 사람의 배려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식민지의 원로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 백부장이 얼마나 인격적이었고, 타 문화를 존중해 주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종교와 문화를 존중하여 적극 지원해 준 것을 알수가 있습니다.

왜 직접 주님께 찿아와 요청하지 않았나 할 지 모르지만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의 접촉을 금기시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백부장은 예수님을 배려하여 유대의 원로들에게 부탁을 하였고 원로들도 의기 투합하여 기꺼이 그 요청에 응한 것입니다. 어떤 큰 일이 아니라 일게 종을 위해 원로들이 백부장의 부탁을 받고 나선 것입니다. 또 집에 오는 중간에 한 친구를 보내 오지 말라고 한 것도 역시 유대인들이 이방인의 집에 들어오는 것 역시 금기인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백부장의 예수님에대한 배려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에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얻는다고 합니다. 구원이라는 것이 단지 예수 믿고 그리고 구원 받았으니 이제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는 것은 이제 시작인 것입니다. 구원 받은 은혜의 삶을 맛보며 누리며 나누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근데 그 믿음의 삶의 모습이 어떤 삶이어야 하는가 할 때, 저는 이 백부장의 삶의 모습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삶 전체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 백부장의 순명하복이나, 그 백부장의 삶에서 묻어나오는 관용과 배려의 삶 말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해야 한다’가 아니라 ‘이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무엇 무엇과 같다’이지 ‘어떻게 해야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는 빛과 소금이다’이지, ‘빛과 소금이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무엇 무엇과 같다고 할 때 그 다음의 역활은 우리 차지인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하는 것에 관한한 그것은 은혜입니다. 은혜입은 만큼 행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해방의 은혜를 입고 광야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바로 자유가 아닙니다. 홍해를 은혜로 건넜지만 광야 40년은 참 견디기 힘든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돌아 가겠다고도 하고, 금 송아지도 만든 것이 다 이유가 있고 결국 여호수아와 갈렙 밖에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은혜입은 자의 삶의 몫은 그 광야길인데, 오늘 성경 말씀은 끝까지 견디는 자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백부장의 삶 전체가 믿음이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으로 끝까지 견디어 내야 하는데, 그럼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요? 얼마 전에 밤토실 책읽기 모임에서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사무엘 베케트의 책을 읽었습니다. 거기서 등장인물들은 속절없이 고도를 기다립니다. 대화 중에

블라디미르: 그자가 뭐라고 할지 어디 기다려보자.
에스트라공: 누가?
블라디미르: 고도(godot) 말이야.
에스트라공: 참 그렇지.
블라디미르: 우리의 결심이 설 때까지 기다려보는 거야. 합니다. 그런데 그 기다림이 끝이 없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1,2차대전을 치른 유럽인들의 허무, 공허, 가치 상실, 단절, 폭력 등의 것으로 상처입은 치유받지 못하는 영혼의 모습을 봅니다. 관객들은 사실 그 연극을 통해 처음부터 끝까지 웃습니다. 사실 그 연극을 보고 관객들은 웃고, 웃을 수 밖에 없지만, 그 등장인물들은 바로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자화상인 것입니다. 좀비가 우리들의 자화상이라고 했는데, 고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무기력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또 하나의 우리의 자화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다림이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최근 젊은 연극인들이 이 고도를 공연하였는데 색다르게 공연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공연 연출의 변을 보았는데, 그 연출자가 그렇게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영석이라는 연출자였는데 “문제는 고도가 누구냐에 있는 게 아니라 기다리는 시간 동안 뭘 할 거냐가 문제가 되는데, 바로 내 옆에 있는 사람, 이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게 중요하고 그 사람과 시간을 잘 보내는 게 중요하다라는 생각을 했어요.”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 젊은 연출자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아! 이 사람이 연출의 방향을 잘 못 잡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기다리는 시간 동안 뭘 하느냐, 그것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이 사람은 베케트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전혀 모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베케트는 그 기다림의 고통을 두 사람을 통해 보여주는데, 기다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 그 기다림을 잘 기다려 보겠다는 것인데 그것이 안되서 베케트는 이 작품을 썼는데 그래서 나중에 작가의 변을 들어보면 베케트가 “실컷 웃어라. 그러나 집에 돌아가서 인생을 생각하는 건 당신의 자유다”라고 했다는데 그것이 맞다는 생각이 듭니다. 웃을 수 밖에 그나마 희망은 웃는 것 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작년에 베케트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산울림에서 고도를 다시 올렸다고 하는데 산울림의 대표이기도한 임영웅씨가 1969년에 국내에서 초연을 하고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까지 한 임영웅 연출의 고도를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웃음을 주던 생각이 떠오릅니다. 그 공허한 웃음은 어떻게 보면 소름이 날 정도이기 까지 합니다. 연세가 7순이 넘으셨는데 아직도 쟁쟁하십니다. 나는 임영웅의 고도가 옳다는 생각이 듭니다. 웃자는 것입니다. 베케트도 웃자는 것에 손을 들었는데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언제까지 웃고만 있을 것이냐는 것입니다. 끝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끝에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이야기 해주는 기독인의 시간관입니다. 오늘 말씀에 끝까지 견디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13:1에서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야 할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회복에대한 소망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그 끝까지가 어떤 끝까지 이냐는 것입니다. 고도를 기다리는 그런 기다림은 전혀 아닙니다. 모든 것이 좀비와같고, 고도의 주인공 같은 것이 우리의 자화상 이지만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기 까지 하신 예수님의 ‘끝까지 사랑’이 우리에게 있어 희망입니다.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항상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끝이 있습니다. 시작이 있듯이 지금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에는 끝이 있습니다. 그 끝은 ‘끝까지 사랑,의 끝입니다.

한 사람에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어느 영국 의사에대한 이야기입니다. 최근 EBS에서 다큐페스티발을 한 적이 있습니다. 참 좋은 실제적 이야기를 영상으로 보여주는데 헨리 마쉬라는 영국 의사가 우크라이나에서 어느 처녀의 뇌종양 수술을 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우크라이나의 현지의 젊은 의사와 함께 뇌 종양 수술을 해야 하는데, 이 젊은 의사가 그 환자에게 병에대한 진실을 이야기 하려 하자 헨리는 눈짓으로 환자에게 이야기 하지 말 라고 합니다. 뒤에 두 사람이 대화하는 중에 젊은 의사는 ‘환자에게 사실을 이야기 하여 희망을 주어야 하지 않느냐고 하는 반면에 육순을 훨신 넘어 보이는 영국인 의사 헨리는 “진실을 말하지 않으며 거짓말 하지 않기가 어렵다”고 하면서 그 처녀가 아직 자기가 불치병 환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준비가 안 되어 있다는 것과 의사 입장에서는 그렇다고 거짓을 이야기 하거나 잘 못된 희망을 이야기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이 다큐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이 다큐의 이야기를 알게 된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우크라이나의 의료 시설이 열악하여 환자를 수술할 때 각성 상태에서 수술을 한다는 것입니다. 마취제가 없어서 추측컨대 전신마취를 안하고 부분마취를 하고 뇌수술을 한 것 같은데, 수술을 해도 성공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지만 생명을 살리기 위해 고뇌하며 수술에 임하는 한 늙은 외과 의사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 영국인 의사는 우크라이나에서 개업을 한 의사인 줄 알았는데, 영국에서 우크라이나로 와서 뇌종양 수술을 하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는 장면을 다큐의 마지막 부분에서 보여줍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이 의사가 우크라이나에 오는 것이 남들 다 가는 휴가 때에 휴가를 이용하여 열악한 우크라이나에 와서 그런 힘든 수술을 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더욱이 그러한 봉사를 15년 동안 계속해 왔다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좀 더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영국 의사라는 다큐의 감독을 인터뷰한 것이 있는데 이 감독이 이 작품에서 보여주려고 했던 것은 다름이 아니고 “모든 사람은 선택을 할 수 있는데, 세상을 좀 더 좋은 곳으로 만들고자 노력할 것인가, 하지 않을 것인가 하는 그 선택에 대한 이야기가 내가 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였다는 것입니다. 얼마전에 화요일 성경공부 모임에서 영적 훈련에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 때 선택에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영적 훈련이 있다면 그것은 선택에대한 것이다’라고 하면서 어느 것이 마땅한 것인지, 그리고 누려야 하는 것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분별이야말로 영적 훈련의 중요한 부분 중의 하나라고 했습니다. 이 의사는 15년 동안 우크라이나를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세상을 좀 더 좋은 세상으로 만들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우리는 좀비도 아니고, 고도를 끝없이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끝까지 사랑’을 기다리는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나는 이 영국 의사가 크리스찬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지만 이 분이야말로 구원 받은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듭니다. 예수님께서 로마인 백부장을 칭찬하였듯이 하나님은 이 영국 의사의 삶, 그렇다면 믿음을 칭찬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 다큐에서 이 영국인 외과 의사 헨리 마쉬가 “서로를 돕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죠”라고 말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그 의사의 15년의 선택, 진리를 말하지 않고 거짓을 말하지 않는 마음, 이렇게 살 때 우리는 끝까지 기다려 구원을 얻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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