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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케 하시는 하나님(2008년8월31일, 성령강림주일후열여섯번째주일)

하늘기차 | 2008.08.31 18:38 | 조회 1913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

2008년8월31일(성령강림주일후열여섯번째주일) 갈5:13-15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믿음’이라는 신앙고백일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두 편지에서 믿음을 강조할 때, 그것은 순전히 믿음에대한 것이 아니라 율법에 반대하여 믿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을 바탕으로 한 하나님 신앙에대한 반대로 오직 믿음을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십계명 준수에서 시작된 율법을 지키는 것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제는 그만 두자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그리고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아무말 없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는 그 믿음, 이스라엘의 깊은 곳에 자리한 삶의 본질인 그 믿음이 ‘오직 믿음’이라는 바울의 신앙 고백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했을 때의 그 믿음은 역시 율법에대한 반대적 의미가 매우 강하게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루터가 종교 개혁을 일으킬 때 ‘오직 말씀으로만’, ‘오직 은혜로만’,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만’이라고 했을 때의 신앙고백과 동일한 맥락을 지니고 있습니다.

역설적인 것은 지금 현 시대의 한국 교회에 있어서는 ‘오직 믿음’이 아니라 오히려 ‘오직 행함’이 고백되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예수 살기’라는 신앙 운동을 하는 모임이 있는 것 같은데, 이 것 역시 단지 교회를 세우는 신앙이 아니라 나의 삶의 자리에서 시대적 문제를 이웃과 함께 아퍼하고 나누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를 구세주로 고백함으로 구원받았다는 고백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죄 사함의 은혜를 입었으니 그 받은 은혜를 따라 나의 삶의 자리에서 예언자적인 역사적 통찰력으로, 모든 세상적 가치를 뒤로하고 하나님 가치를 우선하는 종말론적인 공동체 정신으로 이시대를 살아가는 그러니까 미래 지향적이 아니라,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회복과 완성을 소망하며, 오늘 나의 삶의 자리에서 그 소망을 신앙으로 살아내는 때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이것은 종교이지 신앙일 수 없습니다.

하여간 사도 바울은 당시의 시대정신에 맞추어 ‘오직 믿음’을 고백함에따라 수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태장을 맞고, 굶주리고, 돌에 맞고... 바울이 몸소 겪은 고난은 율법을 포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바울은 갈5:11에서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아직도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아직도 박해를 받겠습니까? 그렇다면 십자가의 거리낌은 없어졌을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바울이 어떻게 참기 힘든 고통을 견디어 낼 수 있었을까요? 아니 오히려 어떻게 기쁨과 감사함으로 이 박해를 견딜 수 있었을까요? 바울의 본래 이름은 사울이었습니다. 그는 철저한 유대주의자였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을 견딜 수 없어하였으며, 기독교인들을 체포, 구속하여 처형하는 일에 앞장을 섰습니다.

사울은 기독인들을 체포하기 위해 다마스커스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길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울에게 빛으로 다가 왔습니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어두움은 빛이 비치면 사라집니다. 어두웠을 때 불분명했던 사물들이 빛이 밝아지면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납니다.

바로 그 빛이 바울에게 찿아와 바울의 어두움을 밝혀주었습니다. 이 땅의 어두움은 태양의 빛으로 밝히 드러납니다. 그러나 마음의 어두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빛으로 밝히 드러납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참 빛이라 합니다. 그 빛이 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었다고 요1:9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유대교를 철저히 신봉하는 가운데 당시 초대교회의 집사였던 스테반 뿐만아니라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죽어가면서도 마음의 평안을 얻으며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는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예수는 정말 구세주인가? 어떻게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릴 수 있단 말인가? 나사렛에서 어떻게 메시야가 날 수 있는가? 등, 등 자기의 소신대로 기독인들을 핍박하면 할수록 더 공허감만 커졌습니다. 마음 속의 강한 갈등을 느끼며 다마스커스로 향하다가 그만 빛이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충격이 너무 커서 그는 그만 눈이 멀어버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바울의 가치관은 다마스커스로 향하던 길 위에서 절단이 나고 말았습니다.

율법, 성전, 가문, 로마 시민권, 학문체계 그 어느 하나도 사울에게 붙어 남은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다마스커스에서 사흘동안 보지도 못한체로 식음을 전폐하고 머물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무엇을 느꼈을까요? 아니 느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사울을 덮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베드로가 갈릴리 바닷가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처럼 말입니다.
베드로는 상상을 초월하는 그물에 걸린 물고기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아니 눈이 멀 정도였으니, 그 보다 더 충격이 컸을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롬1:18 이하에서 사도 바울은 죄에대해서 망라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불의, 추악, 탐욕, 살의, 시기, 오만, 불손, 불경, 무정, 우매, 무자비, 모략 ...교우여러분 사도 바울이 이 많은 죄를 어떻게 느끼고 알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스스로 안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깨달아 진 것입니다. 빛이 있으면 어두움은 밝혀지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어떻게 우리가 죄인인 것을 깨우칠까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자기가 깨닫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오셔야 내 안의 어두움이 밝히 비추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빛으로 자신의 모든 것이 밝히 다 드러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바울에게 무엇이 남아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만이 남았습니다. 어떤 지식체계, 가치체계도 더 이상 바울을 주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울의 삶은 바뀌었습니다. 율법이 아니라 복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평생에 이 복음을 부둥켜 안고, 전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웠던 것은 복음을 전할 때 마다 복음과 대립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율법이었습니다. 모든 유대인들의, 예수님의 12 제자들 조차도 두 발을 꼭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율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직 믿음으로 만”을 외쳤던 것입니다. 온 세상이 모두 율법의 체계, 가치관, 율법 우선주의 의 세계로 둘러쌓여 있었지만 바울은 흔들림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만을 붙들고 당당하게 그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였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이렇게 확신에 찬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온 세상이 이교와 우상숭배와 율법주의로 가득 차 있는데도 바울은 어떻게 어떤 것에도 얽메이지 않고 스스로 자유할 수 있었을까요? 무엇에서 자유로워 졌나요? 율법? 이교? 가문? 학문? 잘나가는 로마시민권? 아닙니다. 바울은 적어도 바울만은 죄에대해 자유로웠습니다. 바울은 주님의 밝은 빛 아래에서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였습니다. 스스로 낯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는 죄인임을 알고, 오직 복음만이 이 죄로 인한 죽음에서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다고 깨닫자, 세상의 그 어느 것도 그를 얽맬 수가 없었습니다.

틀만 바뀌었을 뿐입니다. 지금의 한국 사회를 보면 마치 예수님 당시의 백성들이 유대교의 율법주의로 고통스러워 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국제중학교를 세운다고 합니다. 기숙형 학교를 세우고, 영어 조기 교육을 시작하여 차별화 합니다. 끝없는 경쟁체제로 가겠다고 이번에 당선된 교육감은 선언하였습니다. 경제적으로도 비정규직 노동자의 수는 급격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언론, 방송에대한 규제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정권의 방송으로 만들기 위해 하면 안되는 불법, 편법을 쓰고 있습니다. 가장 민감한 집 문제도, 종부세와 결부하여 극 소수의 사람들을 위해 왠 만한 규제를 전부 풀고 있습니다. 한반도를 재앙으로 뒤 덮을 수도 있는 대운하는 지금 민간단체와 지방 자치 단체로 역할이 넘어간 상태입니다. 기회만 노리며 준비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공권력의 횡포가 군사독제 시대를 방불케합니다. 의료, 수도, 철도, 공항, 돈 될만한 모든 것들을 민영화하려고 합니다. 숨이 턱턱 막힙니다. 어느 누구도 이 시대에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시대를 자유할 수 있을까요?

요10:29에 보면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라고 합니다. 38절에는 “ 그러면 너희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또 12:50에서는“나는 무엇이든지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해 주신 대로 말할 뿐이다.”라고 합니다. 나는 아버지께로부터 왔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복음서, 특히 요한 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철저히 하나님과 관계지어있음을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 외에는 사람들과 결코 타협하지 않는 것을 봅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 결백증에 걸린 것 같습니다. 요 2;23-25에 보면 예수님은
“...많은 사람이 예수께서 나타내 보이신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의지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예수께서 사람을 다 알고 계셨으므로, 사람에 대해서 다른 사람의 증언이 필요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사람의 속마음까지 다 알고 계셨다. ”고 합니다.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을 때에도 빌라도가 3 번이나 계속해서 단독으로 예수와 면담을 하면서, 예수가 죄가 없음을 알고 예수를 풀어주려고 합니다. 그 때 빌라도가 요19:10에서
“내게 말을 하지 않을 작정이냐? 내게는 너를 놓아 줄 권한도 있고, 십자가 형에 처할 권한도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고 하자 예수님은
“ 위에서 주지 않으셨더라면, 나를 해할 아무런 권한도 네게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사람의 죄는 더 크다.”고 철저하게 하나님과만 관계하고 있음을 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지도자요, 의회원이었던 니고데모와 대화를 할 때에도 니고데모가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압니다”라고 하면서 자신을 치켜세우자 예수님은 거들떠도 보지 않으면서 니고데모에게 거듭날 것을 촉구합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철저하게 사람들과의 타협을 거부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 이름, 뜻에로 향해 있음을 봅니다. 사실 이것은 주님이 친히 우리들에게 가르친 기도의 내용입니다. 그 내용대로 주님은 행하고 계십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우리 인간을 무시하며, 거만하셨나요?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우리를 사랑하셨고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사람들에게 깊은 연민의 정을 갖고 계셨습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감옥에 갖힌 사람들, 지금도 입시 경쟁에 짖눌리고, 직장에서 쫓겨나고, 질병으로 고통받으며, 궁핍하여 누릴 것 누지지 못하는 사랍들에게 연민의 정을 보이십니다. 이러한 인간 사랑이 어디에서부터 올까요?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 체험, 아버지께서 일하니 나도 일한다는 하나님에대한 사랑 체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과 인간에대한 사랑으로 늘 넘쳤습니다.

영어의 자유라는 말 free는 freon, 즉 사랑이라는 말에서 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자유롭다는 것은 그냥 덧 없이 홀로 산 꼭대기에서 ‘자유다!’라고 하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대로 멋대로 막 하는 것도 자유가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자유는 자기 규범, 자기의 유한함, 한계를 인정하고 다른 사람의 유한함도 인정할 수 있는 자기 진정성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 때 광야로 나아갔을 때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십계명을 주셨는데, 그 십계명을 혹자는 옛 규범이니 지금은 의미가 없다고 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 광야로 나아갔을 때 그들은 여전히 노예근성과 우상숭배로 혼돈된 백성들이었습니다. 막말로 광야에서는 힘 센자가 왕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러한 이스라엘에게 십계명을 허락하였습니다. 십계명은 이스라엘에게 자유요, 생명의 계명이었습니다. 이 계명의 정신은 지금도 우리에게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예를들어 살인하지 말라 할 때, 눈에 나타나는 현상 보다도 예수님께서도 이미 말씀하고 계시지만 바로 내적 의미, 즉 살인으로 말미암는 그 내적 폭력성을 경계하셨듯이, 감음하지 말라 하셨지만 간음이 아니라 이미 간음의 마음을 먹은 그 마음이 죄라고 말씀하셨듯이, 지금도 십계명은 우리에게,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자유의 혼을 불어넣어주는 계명입니다.

그런데 그 자유의 혼을 불어주는 십계명도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참 역설적입니다. 사실 십계명이나, 율법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 계명을 받아들이며, 실천하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실제 예수님은 율법의 정신은 사랑이라고 간파하였고, 사도 바울도 롬13:10에서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라 하였습니다. 그런의미에서 자유와 율법과 사랑은 하나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것을 무너뜨렸습니다.

자유는 사랑입니다. 자유로움을 사랑으로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자유의 극치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 13에서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신 한 마디 말씀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또 롬8:35 이하에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핍박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 성경에 기록된 바 "우리는 종일 주님을 위하여 죽임을 당합니다. 우리는 도살당할 양과 같이 여김을 받았습니다"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분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라고 고백을 합니다.

자유는 그냥 자유가 아닙니다. 편하고, 모든 일이 순탄할 때야 자유에대해 목말라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삶의 정황이 어려워지고 그리고 무엇인가 나를 두렵게하고, 염려하게 하면 점차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정체성과 자기의 삶의 가치가 흔들리게 됩니다. 전에는 처다도 보지 않던 하찮은 가치에대해서도 발목이 붙잡혀 전전긍긍하게되기도 합니다. 우리 연약한 인간의 솔직한 모습인 것입니다. 참 자유는 두렵고, 근심할 때 그 진가가 나타납니다.

어떻게 우리는 자유할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사랑입니다. 롬 8:15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또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노예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녀로 삼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영으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 그렇습니다. 하나님에대한 사랑이야말로 우리를 자유케 하는 참 가치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바로 그 사랑의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끝으로 사도 요한은 요일4:18에서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두려움은 형벌과 맞물려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것입니다. ”라고 합니다. 두려우십니까? 삶의 염려로 힘들어하십니까? 여러분을 힘들게 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통해 우리는 자유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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