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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나타남과 능력(2008년8월24일, 성령강림주일후열다섯번째주일)

하늘기차 | 2008.08.24 18:07 | 조회 2292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

2008년8월24일(성령강림주일후열다섯번째주일) 고전2:1-5
사도 바울이 아테네를 방문한 것은 2차 전도 여행 때 였습니다. 그런데 아테네는 당시의 문화와 철학의 중심지였습니다.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는 로마가 지중해 권을 장악했지만 문화적으로는 아직도 그리이스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약성서를 보면 그 원문이 라틴어가 아니라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테네는 그야말로 동시대의 모든 지식인의 동경의 대상이었습니다.

바울은 아테네에서 실라와 디모데가 데살로니가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많은 사람들과 만났을 것입니다. 그 많은 지식인들 중에서 특별히 사도 바울은 스토익 학파와 에피큐로스 학파의 사람들과 만나 뜨거운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에 바울과 논쟁을 벌였던 사람들은 사도 바울을 ‘말쟁이’라고 불렀습니다. 분명히 행17:18에 볼 것 같으면 ‘예수와 부활’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바울을‘말쟁이’라고 하였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는데 단지 말쟁이라는 말 밖에 듣지 못했습니다.

또한 행17:34에 볼 것 같으면 ‘몇 사람이 그를 친하여 믿었다’(한글개역)고 합니다. 단지 몇 사람이 그것도 말씀을 듣고 죄 사함의 은혜를 입고 하나님을 믿었다고 한 것이 아니라 ‘친하여 믿었다’고 합니다. 물론 친교를 통해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저 몇 사람이 친하여 믿었다고 하는 말을 읽을 때에 어딘가 석연치 않음을 느끼게 됩니다. 왜 스스로 이방인의 사도를 자처하는 바울 선생이 말쟁이로 전락할 수 밖에 없었을까요?

바울을 말쟁이라고 했던 사람들은 그 시대를 풍미했던 스토익 학파 사람들과 에피큐로스 학파 사람들이었는데 스토익 사람들은 소위 금욕주의 자들이고, 에피큐로스주의자들은 쾌락을 추구함으로 행복을 찿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생명이 아니라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는 자기 만족의 생활, 윤리적 생활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인간중심의 행복 추구의 윤리적 논리와는 잘 맞을 수가 없었습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부활을 인간의 논리, 인식, 윤리로는 설명될 수 가 없는데, 아마도 사도 바울은 그들과 대화 할 때에 철학적 지식과 논리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말쟁이’ 그리고 ‘친하여 믿고자 하는 몇 사람’이라는 초라한 결과 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도 바울은 아테네 다음에 고린도를 방문하게 되는데, 고린도는 아시아와 로마의 통상 주요 도로였으며, 상업도시로서 우상 숭배와 환락으로 가득한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 볼 것 같으면, 이 도시에 바울이 도착했을 때, 그는 하나님에대한 증거를 말이나 또는 세상의 지혜로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밖에는 그 외의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작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만이 전해질 수가 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했을 때에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대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일 때에 역사를 하고 권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의 지식이나, 언어가 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은 그 권능을 상실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식이 아니라 권능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부활을 세상의 지혜로 이해할 때 어떻게 될 까요?

고전 1:10 이하에서 볼 것 같으면 바울파, 게바파, 아볼로파, 그리스도파로 나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3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갈라지셨습니까? 바울이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기라도 했습니까? 또는 여러분이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까? ”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적으로 이해할 때 예수 그리스도는 나뉘어 질 수 밖에 없습니다.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은 사실을 세상적으로 논리적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을까요? 교우여러분! 십자가는 이론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말이 아닙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십자가를 인간의 지혜로 표현하려고 할 때 그 때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럴 경우 이 사람이 생각하는 십자가, 저 사람이 생각하는 십자가가 모두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아볼로의 십자가, 바울의 십자가, 게바의 십자가가 따로 있게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하나 뿐이며, 오직 그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있으며,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의 십자가를 인간의 지식으로 받아들일 때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은 사라지고 분파만 생깁니다. 어느분이 예수와 그리스도가 싸우는 장로교는 세계에서 처음 보았다고 빈정거리는 것을 들었습니다. 한국의 잘로교는 크게 ‘대한예수교 장로회’와 ‘대한 기독교 장로회’로 나뉘었습니다. 파당을 짓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은혜와 권능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세상 지식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기득권을 놓치 않고 이기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지식이 아니라 삶입니다. 희생이요, 고난입니다.

만일 십자가를 해석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삶 속에서 나누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침묵을 지키며 십자가를 지셨는데, 사람들은 그 침묵의 십자가를 말의 십자가로 바꾸어 놓습니다. 그럴때에 권능은 사라지고 말 싸움만 남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 즉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부활을 무엇으로 전하고 받아들여야 할까요?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2:4에서
“나의 말과 나의 설교는 지혜에서 나온 그럴 듯한 말로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 보여 준 증거로 한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지혜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성열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전하는 것입니다. 살전1:5에서 사도 바울은
“복음을 말로만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하였기 때문입니다”라고 합니다. 또 요14:26에도 있지만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고,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라고 합니다. 또한 성령은 마음의 감동을 줍니다.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게 합니다. 바로 그러함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질 때 앞에 서는 것은 성령입니다.

그런데 아테네에서는 지혜로, 논쟁으로 전하여 권능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성령께서 내 앞에 설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3절에서 “내가 여러분에게로 갔을 때에, 나는 약하였고, 두려워하였고, 무척 떨었습니다”고 합니다. 그런데 행17:16에 보면 사도 바울은 아테네에 도착했을 때 격분하였다고 합니다. 마음의 차이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행18:5절 이하에서 볼 것 같으면 바울 사도가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유대인들이 대적하여 복음전하는 것을 훼방했습니다. 그 때에 사도 바울은 그 사람들을 저주합니다. “여러분이 멸망을 받으면, 그것은 오로지 여러분의 책임이지, 나의 잘못은 아닙니다. 이제 나는 이방 사람에게로 가겠습니다.”

아마도 꽤 갈등이 심했던 것 같습니다. 그 때에 밤에 바울이 환상을 보는데 “두려워하지 말아라. 잠자코 있지 말고, 끊임없이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을 터이니,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서 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나의 백성이 많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바울은 고린도에서 두려워하고 떨었다고 합니다. 복음을 전하면서도 두려워했습니다. 약했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느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약할 때에 하나님의 권능, 성령은 강하게 역사합니다.

고후 13:4는 “사실 그는 약하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십니다. 우리도 그의 안에서 약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아나서, 여러분을 대할 것입니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약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습니다.우리도 더할 나위없이 약해야 겠습니다. 무엇이 약해져야 하겠습니까? 나의 주관, 의지, 나의 것들이 약해져야 합니다. 그럴때 성령께서는 살아 역사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약한 것이 우리 본래의 모습인 것입니다. 구약 창세기의 첫 인간의 모습을 보면 벌거벗었습니다. 이것은 약하고, 가난하며,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서로 돕고 나누며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사탄 마귀는 첫 사람 아담에게 찿아와서 강하여지라고 합니다. 하나님처럼 되라고 합니다. 그러나 본래 우리는 약하고 연약합니다. 약하고 연약한데 하나님이 함께하십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에 다윗은 약했습니다. 그 약한 다윗이 골리앗을 향하여 “너는 칼을 차고 창을 메고 투창을 들고 나에게로 나왔으나, 나는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 곧 만군의 주의 이름을 의지하고 너에게로 나왔다. ”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약하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골리앗 앞에 섰습니다. 하나님은 마른 막대기를 들어 홍해를 가르는데 쓰시는 분이십니다.

이 장면은 우리의 신앙의 삶에대해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가난하고 약하고, 부족하면 사실 삶이 그리 편하지 않습니다. 힘이 듭니다. 그러나 약하고 가난하다고 해서 비굴하거나, 옹졸하거나, 눈치를 보는 삶을 살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나의 정체성을 확실히 하고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나는 약하고 부족하다는 것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렵고 불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삶에는 나눔이 있고, 하나님이 함께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평화가 있습니다.

그러한 면에서 딤후1:7은 우리에게 큰 힘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한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그렇습니다. 비록 우리가 약하고, 부족하고 가난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비겁한 영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연약하여 십자가를 향해 나아갈 때 비겁하지 않고 담대했던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에게 비겁한 영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 말씀 그대로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보내셨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지혜와 용기와 능력의 영을 보내주십니다. 롬8:26에 보면
“성령도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 ”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약하지만 주님은 강하시며, 성령은 우리를 도우십니다.

우리는 늘 부족하고, 연약하며, 깨어지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믿고 용기를 얻어 담대하게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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