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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개혁(창조절 아홉째주일, 2022년10월30일)

김현식 | 2022.10.30 17:02 | 조회 474



우리의 개혁

2022년 10월 30일 (창조절 아홉째주일)                                                                       로마서 1:16-17

 

때로는 성경 구절 하나가 인생을 바꾸기도 합니다. 그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옛날에, 한 대학생이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광부에서 시작해서 광산 조합의 출자자까지 되었습니다. 고생해서 성공한 사람들이 그렇듯이, 아버지는 아들이 대학을 나와 출세를 하기를 매우 바랬습니다. 아버지는 엄격하게 아들을 대했고, 아들은 그 밑에서 우울함을 얻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뜻대로 법대를 진학해 법관의 길을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길을 가다가 근처에 벼락이 떨어지자 그는 강한 죽음의 공포를 느끼며 맹세를 했습니다.

‘(광부들의 수호자인) 성 안나여 저에게 힘을 주소서, 그렇게 하신다면 저는 수도사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아들은 2주후 맹세를 지키기로 했습니다. 아버지는 수도자가 되겠다는 아들에게 벌컥 화를 냈지만 아들의 뜻을 꺾을수는 없었고 결국 두 사람은 의절하게 되었습니다.

 

수도사가 된 아들은 청빈, 정결, 순명이라는 수도생활의 규칙을 잘 지켰습니다. 너무나 잘 지켜서 문제였습니다. 엄격한 수도생활을 하면서도 이정도로는 부족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금식기도를 사흘동안 하거나 철야기도로 1주일을 지새우기도 했습니다. 신부들은 수도사인 그를 피해다녔습니다. 만나기만 하면 고해성사를 밥먹듯이 하는데다가 한번에 4시간씩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들이 이렇게까지 매달렸던 이유는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느냐 하는 큰 고민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스승은 성경을 연구해 볼 것을 권했습니다. 그래서 아들은 사도 바울의 서간들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수도자 신분으로 로마 순례도 했습니다. 4주간 로마에 머무르며 당시 순례객들이 행하던 대로 바티칸 교황청의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의 일명 '본디오 빌라도의 계단'이라 불리는 28계단을 주기도문을 외우며 무릎을 꿇고 기어 오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계단에 오르면서도 이것이 진짜일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라고 생각했고, 마지막 계단 위에 오르고서도 아무런 것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오늘 읽었던 본문인 로마서의 117, ‘하나님의 의가 복음 속에 나타납니다. 이 일은 오로지 믿음에 근거하여 일어납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한 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한것과 같습니다.’ 는 구절을 수년간 붙잡고 늘어진 끝에 그의 고민이 해결되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인간이 어떤 선행을 한다거나 자신의 힘으로 죄를 씻고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인으로 인정받는다."는 생각을 점점 굳혀나갔습니다.

이쯤이면 알겠지만 그가 바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입니다.

 

루터는 스승이 대학 교수로 임용되었기에 같이 따라서 비텐베르크대학에서 신학과정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1508년부터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강사로 임용되어 강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1512년에는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다음 해에는 교수로도 임용되었습니다.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회 수사들 중에서도 고학력에 속했기 때문에, 다른 사제들로부터 루터의 사제서품과 진급이 너무 빠르다는 불평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실제로 부제에서 사제서품까지 겨우 2달 만에 될 정도였습니다. 그는 수도회 내에서도 많은 지지를 받았고 대학에서도 신학적으로 존경받았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독일에서 면죄부 이슈가 생겼습니다. 도미니코회 요하네스 테첼 수사는 열정적인 설교자로 청중들에게 성 베드로의 유골이 비바람을 맞을 지경에 이르렀다며 허위선전을 하고, 조상들이 연옥의 불길에서 고통받는다며 현세에서 후손들이 면죄부를 사지않으면 조상들은 자식들을 원망할 것이고 오랫동안 고통을 누리게 된다고 죄책감을 자극했습니다. 면죄부를 사면 성모 마리아를 폭행해도 깨끗이 용서 받을 수 있다는 광고, 교황청의 문장이 그려진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효력이 같다는 선전, 현재에도 널리 알려진 돈궤에 쨍그렁 하는 소리가 나는 순간 연옥에서 고통받던 영혼은 천국으로 간다는 설교를 했고, 살인과 신성모독을 제외한 모든 죄목에 대해서까지 면죄부를 판매했습니다. 기존의 면죄부 혹은 대사라는 본래의 취지에서 벗어나 현재와 과거는 물론 미래에 저지를 벌까지 면할 수 있다고 선포했습니다.

 

루터는 평소 동료 수도자들과 신학 교수들에게 면죄부에 대해 신학적으로 비판했고, 대체적으로 지지를 받았습니다. 1516년부터 루터는 면죄부의 위험성을 지적했고, 15172월 설교에서도 대중들에게 면죄부에 대해 비판했지만, 이때는 별 반응이 없었습니다. 4월부터 작센 근처에서 면죄부가 팔리자, 본격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회 수사들과 동료 신학교수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지지를 얻어냈습니다. 9월에는 97개조의 스콜라신학에 대한 논박을 저술하여 자신의 주장에 대한 이론적인 근거도 제시했다.

 

(브란덴부르크 주교 제롬, 마그데부르크 대주교 알브레히트, 마이센과 프랑크푸르트 자이츠의) 주교들에게도 파렴치한 신성모독을 중지할 것의 내용의 항의 편지를 보냈지만 대부분 씹혔고, 원흉인 알브레히트는 비웃었으며, 요하네스 테첼은 소식을 듣고 루터에게 논문을 통해 이단이라 비난했습니다. 결국 이 편지 내용을 바탕으로 15171031일 비텐베르크 성 앞에 있는 만인 성자 교회의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내걸었습니다. 당시 교회의 문은 일종의 게시판 역할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는 우리가 아는 바대로의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습니다. 루터로부터 시작하여 깔뱅, 존 낙스를 거쳐 언더우드와 같은 한국 선교사들을 거쳐 이 땅에 복음이 들어왔고 지금 우리는 그 복음을 받아들여 교회를 이루고 있습니다. 개혁교회는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내걸었던 10/31을 기념하여 종교개혁 기념일로 지킵니다.

 

종교개혁 이후 505년이 흘렀다. 개혁교회의 후예인 우리는 우리의 근원에 비추어서 잘못된 것이 있다면 마땅히 개혁해야 합니다. 깔뱅은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개혁은 어때야 할까요? 루터의 예에서 찾아봅시다.

 

첫째로 말씀에 근원을 두어야 합니다.

루터는 로마서에서 답을 찾았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삶에 답을 제시합니다. 물론 이 답이 오늘 무슨 옷을 입을 것인가. 고기를 먹을 것인가 생선을 먹을것인가에 대한 답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방향성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 우리의 구원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 우리가 위기와 문제의 상황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제시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말씀을 통해 만나는 하나님께 기준을 두어야 합니다.

 

둘째로 세상과 분리되서는 안됩니다

종교개혁의 배경에는 르네상스가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근본으로 돌아가자는 르네상스의 사상은 교회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교회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성경입니다. 교황의 권위와 전통이 아닌 성경과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을 만들어냈습니다. 또한 루터의 반박문이 이슈가 될 수 있었던 것은 50여년 전 발명된 구텐베르그의 인쇄술 덕분에 2주만에 독일어권 전역에 반박문이 퍼져나갔기 때문이었습니다. 세상과 교회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교회와 세상을 분리하려는 관점은 건강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3:16을 기억해봅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로 시작합니다. 교회는 세상 가운데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제가 군대 있을 때 일입니다. 휴가를 나와 청년부 수련회에 참석중이었는데 십자가라는 찬양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무엇이 변치 않아 내 소망이 되며로 시작하는 곡입니다. 초반을 잔잔히 시작하다가 클라이막스에서 십자가 십자가 그 그늘 아래 내 소망이 있네 십자가 십자가 그 그늘 아래 내 생명이 있네라고 고백하는데, 그 전에는 그 이미지가 우리가 세상의 힘든 짐을 지고 살다가 언덕위의 교회에 가서 그 십자가 그늘 아래에서 쉼을 얻는 이미지였는데 부르다 보니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완전히 십자가 그늘 아래 있으려면 내가 십자가를 지고 그 그림자 아래 있으면 됩니다. 그 상태가 내 소망이고 생명이라고 고백하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평안과 쉼을 주는 가사에서 치열한 삶의 자리에 대한 찬양이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마지막 부분 가사는 이렇습니다. ‘주여 내 영을 고요케 하사 십자가를 품게 하시며 내 영을 잠잠케 하사 십자가로 만족케 하소서.’

교회는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처이기도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세상 가운데 속해있기에 세상과 대화해야 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셋째로 주체가 누구인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루터의 오직 믿음으로는 믿기만 하면 끝이라는 주장이 아닙니다. 구원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십니다. 그런데 그 구원에 참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주관이나 감정이 아니라 예수의 현존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음은 구원의 수단이다. 가톨릭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의 길을 시작해서 받은 은혜만큼 공로를 쌓으면 거기에 하나님이 다시 은혜를 주시고, 은혜로 다시 공로를 쌓아 하나님과 인간이 협력하여 구원의 종착까지 간다고 봅니다. 이른바 신인협력설입니다.

하지만 구원은 내 공로와 선행으로 기여를 해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로 얻은 구원으로 의인이 되면, 존재가 변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결과가 나타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구원을 위한 선행이 아니라, 지옥가면 안되니까, 천국가기 위해 하는 선행이 아니라 예수가 이루신 구원 위에서 선행을 하게 되는, 진정한 선행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어디에 있든지 각자의 자리를 하나님이 주신 소명으로 받아들여서 충성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을 맡기실 때,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일의 완성도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완성도를 위해서라면 하나님이 혼자 일하시는게 낫습니다. 천지창조가 누구의 도움이 필요했나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을 맡기시는 이유는 와 같이 일하시고 싶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볼 때 감독이나 배우의 팬과 같이 보면 할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연인과 같이 봅니다. 그 사람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와 함께 하고 싶으시기 때문입니다.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 중요한 것은 그분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일의 주체를 기억해야 합니다.

 

현재의 한국교회의 모습을 두고 많은 사람이 또다른 종교개혁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개혁도 세대가 지나가면 본래의 정신은 변화하거나, 왜곡됩니다. 그때마다 제도나 시스템을 바꿀 순 없습니다. 오늘 나눈 말씀을 기억하면서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의 일하심을 더욱 풍성하게 누릴 수 있는 우리의 개혁을 이뤄가는 여러분과 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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