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View Article

교회의 일꾼(창조절여섯번째주일, 2022년10월 9일)

stephensh | 2022.10.09 16:34 | 조회 323


교회의 일꾼

 

창조절여섯번째주일                                                                             고린도전서 1220-27


 

다음주에 장로선거가 있어, 한주전인 오늘은 교회의 일꾼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설교문을 작성할 때까지도 쉬이 마음을 정할 수 없었습니다. 교회의 일꾼에서 교회가 강조되어야 할지, 일꾼이 강조되어야 할지요. 일꾼의 덕목을 이야기하고 어떻게 교회를 섬길지 방법적인 이야기를 해도 좋겠지만 그런 이야기는 너무 잘 아실테고... 게다가 열정만 가득한 방법, 열심, 실천이 얼마나 심각한 해악이 되어왔는지 봐 왔던 터라. 처음 의도와는 살짝 다를수 있지만 교회에 좀더 강조점을 두면서 말씀을 풀어가보려고 합니다. 바울이 꿈꾸었던 교회의 모습을 그려보며 그런 교회에 어울리는 일꾼의 모습을 생각해보는 시간이었으면 합니다.

 

본문배경

고린도서를 보면 고린도교회는 문제가 많은 교회였습니다. 물론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고 은사자들의 활동이 활발해 겉보기엔 화려했죠. 그러나 교회 내부는 온갖문제와 갈등이 얽히고 섥혀 썩을대로 썩은 모습이었습니다어떤 문제들이 있었는지 예를 들어보면요. 성찬본문으로 알려져있는 앞 장, 11장을 떠올려보시죠. 11장에서 바울은 다소 격앙된 어조로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저녁식사 모습이 심기가 불편했던 것인데요. 당시엔 성찬이 오늘처럼 예전으로 따로 정리되어 있지않았습니다. 저녁식사 자체가 예수님과의 식사를 재연하는 성찬이었죠. 그런 성찬자리에 문제가 생깁니다. 부유한 이들이 일찌감치 모여 흥청망청 먹고 취해버리곤 했던 것이죠. 일을 마치고 저녁늦게 모여든 가난한 사람들은 자주 굶어야 했고 또 이런 상황에 수치심을 느끼곤 했습니다. 이에 바울은 부유한 자들에게 화를 내며 그들을 27,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 33, 기다리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심하게 질책합니다. 이 장면은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일어나고 있는 차별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또 다른 곳에서 바울은 방언에 대해 꽤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이야기합니다. 방언하는 이들이 교회에서 꽤 우쭐거리고 거들먹거렸나 봅니다. 방언을 예언과 그리고 사랑과 비교설명합니다. 방언처럼 신비하고 영적으로 보이는 은사보다 공동체에 유익을 주는 예언같은 은사와 사랑같은 성품이 훨씬 가치가 있음을 밝힙니다. 이 두가지 이야기는 강한자가 그렇지 않은 이들을 홀대하고 무시하는 차별이 고린도교회 구석구석에 넓게 퍼져 있었다는 걸 알려줍니다이런 고린도교회의 상황에서 바울은 오늘 본문을 포함한 12절부터의 몸의 비유를 빌어 누구든 어떤이유로도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누군가를 홀대하고 비교하며 우월감을 느끼거나 모욕감을 주는 일체의 행동은 결코 교회에 어울리는 행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몸의 비유는 이미 로마사회에서도 흔히 쓰이는 비유였다고 합니다. 사회의 단합을 요구하는 연설에서 자주 쓰이던 비유였는데요. 다 자기자리가 있으니 자기자리를 지키라는 위계적인 질서를 강조하는 이야기였다고 합니다. 노예는 노예답게 평민은 평민답게 헛된 꿈을 꾸지 말고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하라고 말이죠. 그랬던 몸의 비유를 바울은 뒤집어 사용합니다고린도 교회는 뻔히 듣던 이야기인줄 알고 듣다가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걸 알았을 때 적잖이 당황했을텐데요. 사실 교회는 이런 당황스러움을 안겨주는 존재여야 합니다.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는 시대의 고정관념이나 원리들에 의문을 제기하고 전복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예나 지금이나 시대를 전복하기 보다는 시대의 원리를 충실히 따르곤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시대보다 더 탐욕스럽고 더 비인간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그래서 화려하고 으리으리한 교회건물을 얻는데 성공했지만, 사람들을 잃고 시대의 꾸지람을 들어야 하는 낯선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오늘 한국교회처럼 화려한 겉보기를 추구하는 교회였던 듯합니다. 그리고 영적인 황홀경에 몰입하며 일상생활의 고단함을 잊게 해주는 요란하고 짜릿한 현실도피적인 경험들로 교회의 경험을 채워갔습니다. 그러나 로마사회와 뚜렷하게 대조되는 대안사회를 이루는데는 실패하고 현실도피만 부추기는 민중의 아편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포기하지 않고 고린도교회에 편지하며 특히 몸의 비유를 통해 집중적으로 교회의 모습을 그려갑니다. 바울이 그렸던 교회의 모습은 세가지 정도로 정리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모두의 목소리가 살아있는 교회, 두 번째는 포용하는 교회, 세 번째는 연대하는 교회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모두의 목소리가 살아있는 교회

12절부터 19절에서 바울은 여러지체를 강조합니다13절의 모든 사람은 한 성령을 경험했고 한 성령 안에 있으니 차별없이 동등하다는 것을, 14절부터는 이 동등한 개인들이 더 나아가 여러 기능과 모양임을 지니고 있음을 밝힙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다양성이 존중되고 확보되어야 하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눈이 될 수없고 모두 귀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른 이가 될 필요도 다른 역할을 부러워 할 필요도 없이, 내 모습 그대로, 나의 경험을 존중하며, 나의 역할을 따라 몸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필수적인 다양성을 보다 정확하게 표현해주는 단어로 복수성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복수성은 한나 아렌트라는 철학자가 강조한 개념으로 다양성과 비슷하지만 다른 단어입니다. 복수성에는 다양하다는 의미에 저마다의 향기와 빛깔을 가진 이 다양한 사람들이 다발로 묶여 있다는 개념을 더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임의적으로 헤어질수 없는 필연적으로 함께 살아가야 하는 운명공동체라는 것이죠. 어떻게든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함께 살아간다는 건 저마다 다른 생각과 욕구의 충돌로 끊이지 않는 갈등과 문제 속에 살아가는 것이죠. 그래서 아렌트는 스스로 생각하는 사유하고 판단하는 능력,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의견과 행위, 서로 다른 의견을 조율하고 갈등을 대화로 풀어가는 정치를 강조합니다아렌트는 운명공동체의 다발을 지역, 국가, 세계로 확장해 갑니다. 누구도 함께 묶여 있는 다발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이죠. 아렌트의 이러한 관점은 우리의 신앙고백에 힘을 실어주는 좋은 설명인 듯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가장이 되시는 지구라는 집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는 교회라는 운명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지역과 국가, 지구라는 운명공동체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의 경험을 말하고 서로의 생각을 존중하며 어떻게든 함께 살아가려고 하는 일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너무 많은 교회들에서 복수성은 귀찮은 것으로 여겨지고 대화는 사라진 듯 보입니다. 매년 진행되는 교단의 총회를 보면 아시겠지만, 교단의 중요한 사안들은 중산층 이상의 중년 남성의 시각과 경험에 의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양한 연령과 성별, 사회적 지위라는 삶의 자리에서 비롯된 하나님 경험은 미숙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저마다의 하나님 경험에서 비롯된 상이한 관점과 시선, 의견은 위험한 것으로 매도되기도 합니다.

 

사유와 행위가 사라지면 어김없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건 전체주의입니다. 전체주의는 몇가지 과정을 통해 사람들의 사유와 판단능력을 증발시켜,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을 공장에서 찍어내듯 찍어냅니다. 과거 독일나치는 600만명이나 되는 유대인을 비롯해 사회적 약자들을 학살했는데요. 군인들을 학살의 실행자 되게 하고 대다수의 국민들을 방관자되도록 치밀하게 설계했습니다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에는 나치가 사용한 상투어가 한 몫했다고 합니다. 딱딱하고 형식적인 공무원의 상투어를 사용하여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도록 한거죠. 예를 들면 수많은 사람들을 가스실로 보내 학살할 때 감정이 실리지 않은 최종해결책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도록 했습니다. 이런 상투어로 학살의 비열함과 잔인함, 폭력성, 그리고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런 상투어의 사용은 판단과 책임을 회피하게 하고, 자신의 관점을 표현하는 의견과 행위 자체를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갑니다. 그리고 결국 생각과 판단을 전체주의적 지도자에게 맡기게 될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됩니다안타까운 것은 교회처럼 상투어를 많이 쓰는 곳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은 의미를 담는데 실패합니다. 종교적인 상투어를 이용해 외치는 구호가 얼마나 잔인한지 자각하지 못한 체 무심코 사용합니다. 이러니 교회가 배제와 혐오의 광풍에 속절없이 나부끼는 건 당연한 수순일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 안에 교회 구성원들의 복수성을 확보하는 것은 교회가 교회일 수 있도록 지켜가는 중요한 안전장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워낙 크고 넓으신 분이라 우리는 저마다의 향기와 빛깔을 지닌 채 하나님을 닮아가는 여정에 오를 수 있습니다. 물론 그전에 전제될 것이 있겠죠. 저마다 자기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진지하게 탐구하고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 그렇지 않다면 복수성을 확보한 교회는 자기소견에 옳은 대로 다투는 이전투구의 장소 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따라서 교회의 일꾼들,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먼저는 교회 안에 스며들어 하나님의 뜻 인냥 포장하고 다가올 수 있는 성과, 이익, 효율, 탐욕에 대해 날선 분별력이 아닐까 합니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모두의 삶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흔적을 발견하고 긍정하려는 열린마음이 더해져야 합니다읽지 않았지만 28-30까지의 내용은 모두가 함께 참여하는 의사결정구조, 즉 공치적인 의사결정구조에 대해 말하는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구절엔 교회 유지를 위한 최소한 9가지의 기능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는 건 교회가 본래 어느 한 사람에 의해 독점될 수 없도록 디자인되었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구성원 각자의 재능과 은사를 계발하고 조율하여 지도력이 분산되도록 했듯이 우리도 그래야 할 것입니다고기교회는 모든 세대들의 의견 수렴하고 성별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운영위원회에서 교회의 중요한 안건들이 결정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위원회별 활동이 활발하고 주일예배, 저녁예배, 다양한 활동들도 성도들의 참여를 자극하고 권장하는 방식으로 구성됩니다. 성도들이 교회의 모든 시간과 공간을 자발적으로 채우고 주도적으로 참여합니다. 우리 교회는 복수성, 곧 여러지체 됨이 살아있는 공동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음주 일꾼이 선출되면 이런 복수성을 더욱 지켜갈 수 있도록 부탁드립니다.

 

포용하는 교회

두 번째 바울이 꿈꾸었던 교회는 포용하는 교회입니다. 20절에 들어서면서 여러지체를 강조하던 본문 분위기에 약간의 변화가 생깁니다. 초점은 여러지체에서 한 몸으로 옮겨집니다. 지금까지 지체의 복수성이 강조되었다면 이제부터는 지체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이 강조됩니다바울은 이러한 생각의 발전을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고백에서 끌어왔을 겁니다. 하나님이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니 우리도 여러지체이나 한 몸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확신한 것이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각각 개성과 개별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삼위의 하나님은 또 일체를 이룹니다. 일체를 이루는 방식은 신비입니다. 하나님은 상대를 정복하거나 혹은 억압해서가 아닌 사랑의 순환운동으로 하나가 됩니다. 사랑의 관계로 깊이 연결되고 묶여 있기에 하나인 것입니다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발견되는 차이는 하나됨과 교제를 방해하는 위험요소가 아닌 서로의 사랑을 풍성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기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르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는 것이죠.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을 닮아가는 교회는 모든 차이와 복수성, 다양한 의견과 시선을 환영하면서 하나를 향해 나아갑니다. 다양한 목소리나 생각, 복수성을 격려하면서 하나가 되어 갑니다. 포용적인 공동체가 되어 갑니다.

 

그러나 현실은 참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서로 다르고 이해하지 못해 적대하고 배제하고 혐오합니다. 21절을 한번 보시지요. 21. 눈이 손에게 너는 내게 쓸데가 없다 할수 가 없고 머리가 발에게 너는 내게 쓸데가 없다 할수 없다고 합니다. 고린도교회에선 이런 말다툼이 끊이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향해 쓸데없다고 하는 배제의 시도가 빈번했다는 것이죠. 자세히 들여다보면 예쁘지 않을 삶이 없고, 오래보면 사랑스럽지 않은 영혼이 없고, 들어보면 이해하지 못할 사정이 없을텐데, 미처 사정을 다 알기 전에 너무 빨리 판단을 내립니다요즘 유행처럼 번지는 MBTI 성격검사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검사는 우리 각 사람이 얼마나 다른지에 대해 이해의 폭을 넓혀줍니다. MBTI 성격검사에 따르면 에너지의 방향이 달라 누구는 혼자 있어야 에너지가 충전되는 반면 누구는 여러 사람과 왁자지껄해야 충전됩니다. 정보를 수집하는 과정도 다르고 수집된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도 다르고 생활하는 양식도 다릅니다. 이 검사는 똑같은 사람이 한명도 없음을 알려줍니다. 같은 유형이라도 결국에 정도가 다 다르다는 걸 알게 됩니다. 이 검사의 쓰임새는 '너 그 유형이었어? 어쩐지 하며' 손절하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 너가 그래서 그랬구나'하고 서로를 이해하는데 있습니다이 검사는 우리가 서로에 대해 알아가려고 다가가는 노력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쉽지 않다는 것을 알려줍니다이 검사의 사상적 배경이 되는 것은 칼융이라는 심리학자의 이론입니다 칼융은 인간이 대극적인 반대되는 성격양식을 통합해가며 성숙을 향해 나아간다고 말합니다이 MBTI  성격유형의 중요한 부분이 여기입니다. MBTI 연구자들은 중년 이후 대극이 되는 반대편 성격을 통합해가는 과정을 통해 인격이 성숙해간다고 봅니다. 다시 말하면 결국 나와 다른 관점, 다른 시선의 도움을 받을 때에야만 나의 틀을 깨며 성장해 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이죠.

 

이러한 성장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충만함을 향해 살아가는 것의 다른 표현일 수 있겠습니다. 결국 삼위일체 하나님을 닮고자 나선 신앙의 길은 최대한 다양한 입장과 관점과 해석, 시선을 더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쓸데없다고 여겨지는 이들의 관점까지 도움을 받으면서 말이죠.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배워가는 교회는 쓸데없다고 여겨지는 이들을 밀어내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사정을 들으며 알아가며, 자세히 보며 기다리고, 오래보며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며 한명 한명을 포함시켜 나가는 교회입니다교회의 일꾼은 우리 교회가 더욱 포용하는 교회가 되도록 듣고 기다리고 다름을 인정하고 격려하는 지도자가 되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함께 몸을 이루어가는 모든 사람들을 자세히 보아 얼마나 예쁜지 말해주시고 오래 보아 사랑스럽다고 말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래서 이 여러 지체가 한몸 이루어가는 기쁨을 날마다 깨닫게 해주는 일꾼되어 주시길 부탁합니다.

 

연대하는 교회

마지막으로 바울이 꿈꾸었던 교회는 연대하는 교회입니다. 바울은 강자가 약자를 함부로 대하는 분위기에 어떻게든 변화를 주고자 합니다. 22절을 보면 22 몸의 지체 가운데서 비교적 약하게 보이는 지체들이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 고린도교회 사람들은 자신들보다 약해보이는 이들을 경멸하듯 내려다보며 한 공간에 있는 것조차 불쾌해했습니다. 보통 그러는 것처럼 경멸받는 사람들은 비슷한 사람들끼리 뭉치고 자기도 경멸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냈을 것입니다. 결국 교회 내에 위계질서가 생기고 불가촉천민처럼 누구에게나 함부로 여겨지는 부류의 사람들이 생겨났을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다수는 경멸받는 이들을 노골적으로 적대하거나 혹은 투명인간처럼 대했을 것입니다. 그런 고린도 교회에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너희가 불가촉 천민처럼 여기는 이들이 사실 더 요긴해하고 말입니다보통의 몸의 약한 기관은 겉으로 화려하게 드러나지 않고 가장 깊숙이 숨겨져 있는 기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기관은 자기 의지로 움직이지 못하고 정해진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기관입니다. 이런 기관엔 뭐가 있죠? 보통 심장, , , . 이런 기관들입니다. 이런 기관이 약하다고 쓸모없는 기관이라고 할 수 있나요? 이런 약한 기관은 우리의 생명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기관입니다. 보잘 것 없어 숨겨져 있는 듯 하지만 그건 보잘 것 없어 가려진 것이 아니라 근육과 뼈에 의해 보호받느라 가려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약한 것이 요긴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 상황에서 약한 것이 요긴하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수 있을까요?성경에 하나님은 약자들에게 특별한 관심과 베풀고 불공평하다 싶을 정도로 특혜를 제공하는 분으로 나타나곤 합니다. 하나님은 약한 지체를 더 보살피고 더 많은 기회를 줍니다. 이들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살아가고 한참 뒤쳐진 출발선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특별히 돌보십니다. 아벨에게 그랬고, 야곱에게 그랬고, 사울에게 그랬고, 다윗에게 그랬습니다열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 없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보통은 속을 많이 썩이는 자녀라도 부모는 다 같은 마음으로 사랑한다는 의미로 쓰이는 속담이죠. 그러나 열손가락이 다 아프다 해도 다 같은 강도로 아픈 건 아니지 않나요? 좀 더 약한 손가락이 더 많이 아픈 법입니다. 그러니 아픈 손가락이, 상처난 손가락이 혹시 옷깃에 스치기라도 할까 더 많은 마음을 쏟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아픈 손가락들에게 더 마음을 쏟고 아픈 손가락들의 생존에 더 많은 관심을 베풉니다. 어버이이기 때문에 당연히 쏟는 관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약한 지체들을 23절처럼 '더욱 풍성한 명예를 덧입히고 더욱더 아름답게 꾸며줍니다.' 고린도교회가 하나님의 노여움을 살만한 차별과 배체, 혐오라는 심각한 문제들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고린도교회를 견디십니다. 어쩌면 그 이유가 고린도 교회의 약한 지체들 때문일 수 있습니다.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약한 지체들에게 언제나 그래왔듯이 하나님은 또다시 약한 지체들을 특별한 자비로 살피셨을겁니다. 사람들은 다 연결되어 있으니 소위 강한 자들만 솎아낸다하더라도 약한자들 역시 충격을 받았겠죠. 그러니 약한 자들을 위해 강한 자들을 견디신 것 아닐까요. 다시 말하면 강한 자들은 약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에 무임승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약한 지체들이 바울이 볼 때 요긴했던 것 아니었을까요?

 

우리가 잘 아는 길잃은 양 비유를 통해 요긴함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목자는 99마리를 놔두고 1마리 길잃은 양을 찾아갑니다. 길 잃었다는 것은 많은 것을 상징합니다. 실패와 고통과 불안과 공포를 상징합니다. 목자는 지금 절박한 양 한 마리를 찾아, 약한 지체를 구하기 위해 99마리를 방치합니다. 이럴 때 가정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방치된 99마리 마저도 다 흩어지는 거겠죠. 소탐대실의 상황이랄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성장학 관점이나 경제적인 논리로 따지면 결코 해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목자는 한 마리를 찾아 떠납니다그런데 목자가 한 마리를 찾아 떠나는 일이 99마리에겐 꼭 나쁜 일이기만 했을까요? 인간의 삶은 가변적, 유동적입니다. 사회적 지위나 상황이 고정되어 있지 않죠. 그렇기엔 누구라도 길을 잃을 가능성, 약한 지체가 될 가능성을 얼마든지 가지고 있습니다. 나도 언제든 그 한 마리가 될 수 있습니다. 이때 길을 잃은 누군가를, 어려움 당한 이를 찾아나서는 목자를 보면 99마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나도 어려움에 빠지면 이렇게 찾아 나서시겠구나. 결코 나를 버려두지 않겠구나하는 든든함, 안도감을 얻지 않았을까요? 이러한 느낌은 우리가 사실은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연대감을 갖게 할 것이고, 더욱 따뜻하고 안전한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밑바탕이 될 것입니다. 이래서 약한 지체들이 요긴한 것, 이었을 것입니다이런 연대의 깨달음은 26절 말씀처럼 누군가가 비극을 경험할 때, 고통의 현장 속에 있을 때 함께 아파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우리 몸의 약한 사람들이 보호받는 경험들을 통해 우리는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서로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듯이요. 그래서 이제 우리는 서로를 더욱 연결짓고 더욱 연대하는 삶을 꿈꾸어갑니다. 주께서 온 세상을 품으셨듯이 우리도 온 세상의 약한 사람들과도 또 스스로를 보호하지 못하는 약한 생명들과도 이어지길 꿈꾸며 말입니다교회의 일꾼은 하나님의 시선과 마음을 가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약한 지체를 보호하고 약한 지체의 목소리가 들려지도록 스피커가 되어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또한 서로를 연결할 때 그 연결이 단단해지도록 튼튼한 연대의 고리가 되어주어야 합니다. 보통의 수고와 열심으로는 연대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좀처럼 끊어지지 않는 단단한 고리가 되어 우리의 연대를 더욱 단단하게 붙잡아 매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처럼 바울이 꿈꾸었던 교회는 모두의 목소리가 들리는 교회, 포용하는 교회, 연대하는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다음 주 선출되는 장로님 2분 역시, 바울이 꿈꾸었던 교회를 이루어가기 위해 수고하고 애쓰는 교회의 일꾼이 되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
979개(4/49페이지)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하나님은 잊지 않으신다(2016년9월4일) 사진 첨부파일 관리자 14488 2016.09.09 08:30
공지 나는 주의 사람이니(가야금, 대금 동영상) 첨부파일 하늘기차 25856 2007.10.16 12:24
공지 망대에 오르라(창립40주년 기념 예배 설교,유경재 목사) 고기교회 26216 2006.05.31 22:16
공지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하늘기차 24809 2005.09.02 16:30
915 아브라함의 신앙과 성숙해지는 신앙 (평신도 강단: 장기혁 집사, 27일 첨부파일 김현식 465 2022.11.28 16:56
914 라오디게아교회의 현상(대강절첫째주, 2022년11월27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393 2022.11.27 13:31
913 하나님 나라:영적 샘파기(창조절12주일, 2022년11월20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521 2022.11.20 14:03
912 하나님 기도를 찿아 볼 수 있나?(창조절11주일, 2022년11월13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630 2022.11.13 11:06
911 마실 수 있겠느냐?(평신도강단교류,2022년11월6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바람 421 2022.11.07 11:09
910 우리의 개혁(창조절 아홉째주일, 2022년10월30일) 사진 첨부파일 김현식 475 2022.10.30 17:02
909 우리서로같이감사(추수감사주일, 2022년10월23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317 2022.10.23 16:07
908 나를 더 사랑하느냐?(창조절일곱번쨰주일, 2022년10월16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311 2022.10.16 10:02
>> 교회의 일꾼(창조절여섯번째주일, 2022년10월 9일) 사진 첨부파일 stephensh 324 2022.10.09 16:34
906 참 소망은 상속이다(세계성만찬주일, 2022년10월2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352 2022.10.02 10:49
905 아무것도 아닌 것의 하나님(창조절네번째주일,2022년9월25일) 사진 첨부파일 만지다 357 2022.09.26 16:00
904 강물처럼 흐르는 정의(창조절세번째주일,2022년9월18일) 사진 첨부파일 김현식 320 2022.09.19 17:06
903 좁쌀 • 하나(창조절두번째주일,2022년9월11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335 2022.09.09 16:59
902 내가 택한 내 그릇(창조절첫번째주일,2022년9월4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308 2022.09.04 13:39
901 내가 하나님을 만나는 방식(8월 28일 저녁예배 평신도 강단: 심현모 성 사진 첨부파일 만지다 483 2022.08.29 20:13
900 그리스도 안에 넘치는 은혜(성령강림후열두번째주일,2022년8월28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300 2022.08.28 10:21
899 그리고 그 분이 부르셨다(성령강림후열한번째주일,2022년8월21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352 2022.08.21 10:46
898 한 달란트(성령강림후열번째주일,2022년8월14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95 2022.08.14 11:00
897 두 렙돈 같은 헌금(성령강림후아홉번째주일,2022년8월7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427 2022.08.07 11:05
896 모여서 지키며 가르쳐 나누는 교회(성령강림후여덟번째주일,2022년7월31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319 2022.07.31 10: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