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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의 신부, 새 예루살렘 (창조절 열셋째주일, 2018.11.25)

mungge | 2018.11.25 17:03 | 조회 1109

어린양의 신부, 새 예루살렘 / 21:1~10

 

새 하늘과 새 땅

21~22장은 요한계시록의 정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신약 성경 전체의 정점입니다. 또한 요한계시록의 21~22장은 인류의 원역사를 담고있는 창세기 1~11장과 함께 성경의 전주와 후주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창세기1~11장 안에는 하나님의 창조이야기와 인간이 에덴동산에 머물렀다가 쫓겨난 이야기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계시록 21~22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통해 그 구원의 역사를 완성합니다.

모두 이 땅의 하나 됨 위해 갈라진 누리 하늘 되어 땅이 되어

오직 한 소망 통일을 위해 새 하늘 새 땅 만들어가세

몸갈땅 막혔을손 어이 못 가랴 바람이 되어 가려네

긴 세월 숨죽여온 눈물 모두어 황토빛 강물되어 (허이)“

우리가 통일음악회에서 한목소리로 불렀던 노래입니다. 이 노래 가사에 오직 한 소망 통일을 위해 새 하늘 새 땅 만들어가세가 나오지요. 이 가사의 새 하늘 새 땅은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계시록의 그 새 하늘 새 땅입니다. 하나님의 새창조,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모든 분열과 다툼과 전쟁이 없으니, 어서 속히 이 한반도에 새 하늘과 새 땅’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는 노래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우리가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말합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의 내용은 이렇지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하나님의 나라로 우리가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늘에서만 통하는 것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도 하늘에서와 같이 분명하게 선포되어지고 이루어지는 권능입니다.

하늘과 땅을 나누고, 영혼과 육체를 나누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자기 잇속을 챙기는 사람들이 주로 주장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이 땅에 임하므로 하늘과 땅을 나누던 경계를 없애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하는 곳과 우리가 존재하는 장소가 분리 되지 않는 것입니다. 223~5절을 교독하겠습니다. 세상 끝날, 종말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이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선명한 방법으로 영원히 우리와 함께 사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습니까?

세상의 끝날, ‘새 하늘과 새 땅이 우리에게 임한다는 것은 무얼 의미할까요? 이것은 잘못된 종말론에서 오해하게 만드는 온 우주의 파멸이 아닙니다. 그러나 온 우주의 파국은 맞습니다. 파국과 파멸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파국은 어떤 일이나 상황이 잘못 되어 완전히 무너지고 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파멸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어 완전하게 멸망하는 것을 말합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이 땅뿐 아니라 저 하늘의 해와 달과 별을 포함한 온 우주를 말씀으로 창조하십니다. 그리고 뭐라고 하시나요? ‘보기 좋았더라하시지요. 완전하고 온전한 능력으로 인간이 머무는 이 지구와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폭력으로 이 우주를 다시 완전하게 파괴하고 멸망시키실까요? 하나님이 악을 뿌리채 뽑고 제거하시기 위해 무자비한 복수처럼 온 우주가 감당하기 어려운 폭력과 파괴로 심판하고 우주를 돌이킬 수 없게끔 파멸시키실까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여주는 환상은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물질의 세계가 완전하게 파괴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대신 들어선다는 것이 아니라, 이 물질세계에 근본적인 변화, 변형이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어떤 곳인가요? (3~4)‘하나님의 집이, 장막이 사람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자신의 백성들과 함께 계십니다. 그래서 이제는 눈물이 사라지고,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새롭게 하셨기 때문입니다(5). 창세기가 그리는 첫 창조 때의 낙원은 포기되거나 파괴당하지 않고 드디어 마지막 때에 주님 안에서 회복 되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통치가 온 우주안에 완전히 이루어 진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

오늘 본문에서 보니 새 하늘과 새 땅새 예루살렘이 내려옵니다. 그런데 새 예루살렘의 모습이 특이합니다.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와 같이 차려입고 내려옵니다(2). 새 예루살렘을 이쁘게 단장한 신부로 표현합니다. 그럼 신랑이 궁금해지네요. 새 예루살렘과 결혼하는 신랑을 누구일까요? 앞장에 나와 있습니다. 어린양이 혼인을 합니다(19:7). 요한계시록에서 어린양은 죽임당한 어린양’(5)입니다. 죽임당한 어린양은 하나님의 신실한 증인으로 죽은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시고, 땅위 왕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1:5). 지난주에 나누었듯이 요한계시록 안의 예배의 대상이 바로 하늘 보좌에 계신 하나님과 그 곁에 함께 계시는 죽임 당한 어린양입니다.

이 어린양이 혼인을 합니다. 새 신부는 성도들의 의로운 행위를 상징하는 빛나는 모시옷을 깨끗하게 차려 입고 있습니다(19:8). 이 신부가 바로 새 예루살렘입니다. 이제 우리는 새 예루살렘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은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말합니다. 새로운 출애굽을 통해 죄악의 도시 바벨론에서 나온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예배하지 않아 경제적, 정치적 탄압과 폭력, 죽음의 위협과 모진 환란을 이겨 낸 사람들입니다. 새로운 출애굽을 통해 오직 하나님과 죽임당한 어린양 예수에게 예배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지금 무엇이라 부르고 있습니까? 네 교회입니다. 제도로서의 교회 말고, 신실한 하나님 백성들의 예배 공동체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교회가 바로 새 예루살렘입니다(20:28).

새 예루살렘이 어떠한 도시(도성)인지 더욱 실감 있게 느끼려면 17,18장에서부터 읽어야 합니다. 이곳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큰 도시, 음녀로 상징되는 바벨론을 향한 심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벨론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짐승으로, 세상 사람들을 우상숭배로 미혹하는 음녀로 비유되는 당시 로마를 말합니다. 황제가 스스로 신이라 칭하고, 모든 이들에게 경배와 예배를 요구하고, 주님이라 고백하게 하는 우상숭배의 도시가 바로 로마입니다. 이 우상숭배의 도시는 또한 경제적으로 약자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도시이기도 합니다. 이 도시에는 가진 자들과 권력자들에게 온갖 부를 가져다주는 상품으로 가득합니다. 1812,13절을 읽겠습니다. 이곳에 나와 있는 상품 리스트는 정말 충격적입니다. 상품가치의 우선순위를 보여주는 목록에 금은보석부터 시작해서 맨 마지막에 노예와 사람의 목숨이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사고파는 상품으로 취급하고, 황제예배에 참여하지 않는 이들을 경제적으로 배제하고, 폭력으로 억압하는 곳이 바로 로마라는 우상숭배의 도시입니다.

교회가 있는 자리가 바로 이 우상숭배의 도시입니다. 새 예루살렘의 환상은 하나님이 로마 제국 대신 내놓으신 대안입니다. 요한계시록이 새 예루살렘을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의 대안으로 묘사하는 한 가지 방법은 바로 새 예루살렘의 크기입니다. 새 예루살렘의 길이와 폭과 높이가 똑 같이 12,000스타디온(2,200km)인데, 이는 이 도시가 로마 전체 영토의 크기와 다르지 않은 공간을 가졌음을 뜻합니다. 새 예루살렘은 타락한 로마, 바벨론 도시의 대안입니다. 교회는 우상숭배와 불의가 넘치는 도시 안에서 대안이 되어야 하는 곳입니다.

 

도시를 떠난 교회, 도시 안에서 대안이 되다.

184절을 읽겠습니다. 교회는 우상숭배와 탐욕과 불의, 폭력이 난무하는 이 도시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이 도시의 죄에 가담하지 말고, 이 도시가 당하는 재난을 당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제 이 도시는 2,000년전 로마만을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곳을 돌아볼까요? 정의와 공정이 있는 사회입니까? 아닙니다. 불공정하고 비인간적인 시장경쟁을 통해 낙오자들을 배제하고 짓밟는 그런 곳입니다. 더구나 우리가 편리와 속도를 추구하는 도시적 삶은 농촌의 희생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도시의 풍족함을 누리기 위해 안전하지 않은 핵발전소를 지방 어딘가에 집중적으로 만들어 끌어나 쓰고, 밀양 할머니, 할아버지의 터전을 짓밟고, 순환되지 않는 온갖 쓰레기를 아무 죄의식 없이 내다 버리는 아주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삶의 방식입니다.

어린양의 신부로서, 바벨론의 대안이 되는 새 예루살렘인 교회는 이 도시의 죄악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어딘가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존재방식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하나님과 등지며 지금껏 고집했던 잘못된 삶의 가치와 방식에서 완전히 돌아서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이 지배체제와 지배질서가 저지르는 죄악에서 떠나서, 이 죄의 고리에 가담하지 말아야 합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영성이 경제와 밀접하게 연결됨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이기를 힘쓰고 예배드리며 서로 가진 것을 대가 없이 나누었습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회개와 예배, 가진 것을 나누는 헌금, 기도 제목의 나눔이 있는 곳입니다. 회개, 예배, 나눔이 없으면 교회가 아닙니다.

죄악의 도시에서 대안이 되어야 하는 교회는 그래서 살림의 문화, 생명의 문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바벨론이 폭력으로 강요하는 죽임의 문화를 멈추게 해야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당연시하는 경쟁과 배제, 가진자의 독식, 노동자/농민에 대한 착취, 작은 것과 느린 것에 대한 경멸을 죄악이라고 분명하게 외쳐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새로운 삶의 방식을 따라 살며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 새로운 삶의 방식은 이미 예수님이 보여 주셨습니다.

좁은 길로, 낮은 곳으로,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로...예수님은 이러한 삶을 통해 직접 몸으로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교회도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체험해야 합니다. 비우고 나눌수록 하나님의 것으로 우리 삶에 채워지는 그 신비를 맛보아야 합니다.

박노해 시인의 삶의 신비라는 시가 이것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채움보다 비움을 / 비울수록 새 힘이 차오를 것이니

더함보다 나눔을 / 나눌수록 사랑이 더 커질 것이니

가짐보다 쓰임을 / 쓰일수록 내 삶이 더 꽃필 것이니

 

요한계시록의 마지막은 초대와 약속을 담고 있습니다. 교회는 성령과 함께 예수께 이 땅에 속히 오시라고 초대합니다(22:17) 예수님은 그리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22:7,12,20). 2217절을 읽겠습니다. 교회는 교회 밖에 있는 이들에게도 오라고 초대하고, 이 초대에 응한 이들은 생명을 선물로 약속 받습니다. 누구든지 죽음의 문화에서 벗어나 생명의 문화로 들어와야 합니다. 교회는 새 창조를 소망하며 회개와 예배와 나눔과 선교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체험하는 신앙공동체, 새출애굽을 통해 만들어진 하나님의 새 백성입니다.

어린양이시며 우리 삶의 주인이신 어린양 예수께서 모든 이들을 차별 없이 불러 그를 따르는 제자 공동체의 지체로, 그의 신실한 신부가 되어 하나님의 새 창조에 들어오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이 초대에 아멘하고 기쁘게 응답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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