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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 삶 : 교회공동체의 삶Ⅰ(창조절 여섯째주일, 2018년 10월 7일)

하늘기차 | 2018.10.07 17:00 | 조회 925


                종말의 삶 : 교회공동체의

 

2018107(창조절 여섯째주일)                                                                           4:4-9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기뻐하라고 10여 차례나 거듭 이야기합니다. 세상이 이야기하는 행복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 똑똑한 자녀들, 좋은 직장, 좋은 결혼, , ,등 든든한 인간관계, 넉넉한 부, 눈에 보이는 가치와 상관 없는 기쁨입니다. 이 빌립보서의 기쁨의 배경은 어디에 있을까요? 저는 2가지 아니 3가지 라고 봅니다.

     첫 째 5절 말씀에서처럼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는 종말론적인 바탕에서부터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며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으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나라,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이어받은 초대교회는 주님이 부활승천 이후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에 곧 올 것이라는 임박한 종말을 기다리는 공동체였습니다. 종말이란 한 마디로 이 세상의 삶이 끝이 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시간적인 끝일 뿐 아니라,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의 세속가치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를 만나고 나서, 자기에게 유익했던 것은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는데, 그 이유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배우고, 누리고, 경험하며, 체우며, 즐기며 살아 온 자신의 삶의 가치관을 내려놓는 순간 이제 종말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적이 아니라 철저히 공동체적인 내려놓음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에게 금욕적인 종말론이 읽히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 결혼하지 말라, 곧 주님 오실텐데, 주님 영접하려면 방해가 될 수 있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종말을 바라보는 것처럼 축제, 기쁨, 감사, 자유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마지막 때에 기뻐하라고 합니다. 기도와 감사와 영적 싸움으로 구원을 이루는, 지금, 여기 삶의 현재의 자리에서기쁨의 삶을 사는 종말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에세네파라는 종말공동체가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이 공동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추론합니다. 물로 주는 세례의식은 당시 유대교는 할례를 베풀었기 때문에 없는 종교 의식이었습니다. 이 에세네공동체는 사유 재산을 인정하지 않았고, 결혼을 금하였고, 기혼자일 경우 아이 출산을 금하였으며, 빈들, 광야에서 살아갔습니다. 금욕, 검소, 청빈을 추구하며, 기존의 정체, 경제, 종교, 사회질서, 특히 그 당시 종교를 거부하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했다고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구약 이사야서의 남은자들이 바로 자신들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종말,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달랐습니다. 세례 요한도 하나님 나라와 회개를 이야기하지만, 예수님은 먹고, 마시고, 기뻐하며, 결혼잔치와 같은 하나님 나라의 축제 한 마당을 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금식, 슬픔, 심판, 저주를 선포하는 마치 장례식과 같은 종말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마지막 때에 오히려 최선을 다하고 삶의 한 순간, 한 자리, 하나의 만남을 소중히 할 것을 끊임없이 다짐하는, 그래서 현재의 삶을 풍요롭게 살라고 소아시아의 교회에 보내는 편지 곳곳에 권면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오늘도 염려하지 말라, 기뻐하라고 거듭 말씀합니다. 또한 생각하고, 실천하라고 합니다.

     둘 째 4절 말씀 주 안에서 기쁨입니다. 사도 바울은 1:13에서 자기가 감옥에 갖힌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라고 할 정도로 주 안에서는모든 삶과 선교의 바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포도 나무 이야기를 통해 내 안에 머물러 있으라고 합니다. 그래야 나도 너희 안에 머물러 있으며, 내가 계명을 지켜 아버지 안에 머물러 있는 것 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15:11에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

                           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였습

니다. 그 기쁨의 이유를 예수님은 15:6,7에서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면, 그는 쓸모 없는 가지처럼 버

                          림을 받아서 말라 버린다.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서 태워 버린다. 7.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 물러 있으면, 너희가 무엇을 구하든지 다 그대

                          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며 열매맺음의 기쁨을 말씀하였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1:6에서

                       “선한 일을 여러분 가운데서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

                         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한다고 주님 안에서 생명의 열매가 맺히어 질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1:21에서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라고 합니다. 생명의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옵니다. 생명의 기쁨이 무엇인가요? 평화, 자유, 정의, 감사, , , 열매가 한 두가지 인가요? 우리 교회 공동체 모두에게서 주렁주렁 열려야 할 실과들입니다.

    세 번째로 기쁨의 배경은 교회입니다. 기쁨을 찬찬히 살펴 보면 주 안에서 어떤 기쁨인가 하면 교회, 성도와의 관계 속에서 기쁨입니다. 단적으로 4:1은 연애편지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고 사모하는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나의 기쁨이요

                          나의 면류관인 사랑하는 여러분, 이와 같이 주님 안에 굳건히 서 계

                         십시오.” 그런데 2절로 넘어가면서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사람이 있는데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처음부터 사도 바울과 함께 동역을 한 사람들입니다. 소중한 동역자들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사이에 갈등이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빌립보 교회에 분란이 생긴 것 같습니다. 빌립보서의 전체 필체를 보면 크게 문제 삼으려하지는 않지만, 조심스럽게 한 마음을 이루라고 권면을 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광기와 분파 논쟁과는 전혀 다른 오히려 사랑스럽다는 느낌이 들 정도의 분란이 아닌가 십습니다. 그 권면이 2:1-4절에서 기록되면서 그 유명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이어집니다. 1절에서 그럽니다. 무슨 격려나, 무슨 사랑의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공동 번역이 더 쉽게 이해가 되는 것 같아서 공동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힘을 얻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에 서 위안을 받습니까?

                       성령의 감화로 서로 사귀는 일이 있습니까? 서 로 애정을 나누며 동정하고 있습니까?

                       2.그렇다면 같은 생각을 가지 고 같은 사랑을 나누며 마음을 합쳐서 하나가되라고 하면서 나의 기쁨을, 넘치게(공동번역: 완전하게) 해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기쁨이 개인이 아니라, 교회의 기쁨이며, 반드시 그러해야 한다는 간절함이 있습니다. 그런데 1:21을 보면 예기치 않은 기록이 보입니다.

                      “모두 다 자기의 일에만 관심이 있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에는 관심이 없다고 합니다. 초대교회에서도 이런 경우가 있었나 봅니다. 그런 것을 보면 초대교회를 환상적으로 바라보는 것을 조심해야할 것 갔습니다. 그럼에도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대해 2:17,18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바치는 믿음의 제사와 제물을 위해서라면 나는 그 위에 내 피라도 쏟아 부을 것이

                       며 그것을 나는 기뻐할 것입니다. 아니 여러 분과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 18.그러니 여러분도

                       기뻐하십시오. 나와 함께 기뻐하십시오.”이것은 어느 한 교회를 떠나서 사도 바울이 당시 교회를 바라보는 모습이며, 그래서 교회 역시, 예를들어 갈라디아 교회는 사도 바울이 눈병으로 고생한다는 사실을 알고 눈이라도 빼어주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쁨의 바탕에 있는 기쁨의 정체일 것 같습니다. 기뻐하라고 할 때 그냥 혼자 기뻐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역으로 고통스럽고, 아프고, 눈물나며, 우울할 때, 그것은 자기 혼자의 아픔이 아니고, 교회 모두의 아픔입니다. 그렇지않으면 그것은 무늬 만 교회입니다. 오늘 말씀의 기쁨은 단지 개인의 세상 속에서의 기쁨이 아닙니다. 주 안에서의 기쁨이며, 그래서 교회와 함께함으로 열매 맺는 기쁨입니다.

     지난 봄에 브루더호프 공동체인 미국의 메이플릿지를 23일 다녀왔습니다. 많은 감동을 받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또 하나의 인상적이었던 것은 모임입니다. 대부분의 모임은 각 집에서 모여지구요, 통상 하루 2끼를 먹어서 저녁 식사는 없거나 간단히 과일 같은 것을 먹습니다. 그래서 점심때 전체 모두가 둘러앉아 식사를 하고, 식후에 모두가 마당에 둘러앉아 찬양과 행사에대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저녁에는 중요한 안건이 있을 때 전체 회의가 열립니다. 일단 모이면 예외없이 다 모입니다. 또 끈질기게 지루하게 논의가 진행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반대의견을 낸 사람이 전체 의견에대해 수긍을 하면 그 때 합의가 이루어집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일상의 평범하고 소박한 예배, 찬양, 기도 모임이 100여년이 넘는 전통을 이끌었으며, 그 공동체에서 평화가 솟아 세상으로 넘쳐나게 하였습니다. 그 안에는 공동체 일원 하나 하나에대한 존중함이 있습니다.

     교회가 공적으로 주일에 아침, 저녁 두번의 예배, 수요일의 성경공부, 매 주 첫주 저녁 기도회, 그리고 새벽기도, 구역모임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리고 마을과 또는 고통받는 이웃과 함께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모임이 너무 초라합니다. 바쁘고, 피곤하기 때문입니다. 언제부터인가 교회의 공적 모임이 홀대를 받았습니다. 회복되어야 합니다. 나의 삶을 바쁘게 피곤하게 하는 것을 이기기 위해서라도 모여야하는데, 이렇게 세상에 끌려가면 성경이 전해주는 오직 교회 공동체에서 만이 솟아나며, 맛볼수 있고, 나눌 수 있는 기쁨, 평화, 생명 그리고 위로는 아마도 사라질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교회공적 모임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오늘 이시대의 성도들의 모임이, 아니 우리 고기교회의 모임이 물리적인 시간으로도 부족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난주에 탈핵 포럼이 있었습니다. 한 참가자가 탈핵에대한 특강 잘 들었다고 하면서, 그렇지만 이렇게 거대 담론을 이야기하다 보면, 그 틀을 벗어날 수 없음을 본다고, 근본적으로 세계적, 자본의, 제국의 전방위적인 폭력적인 틀을 어떻게 깰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이야기 해 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거대 담론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벗어날 수가 있나요, 과학문명과 경제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보이는 것들의 도구인데 말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욕망이 들어가면서 점차 지구촌의 생태계가 무너지는 형국이 되어갑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공생애 동안 이 틀을 건드린 것이 아니라, 그 세계에서 하나님 나라를 시작하고, 전하고 확장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 나라 확장의 방법일진데, 거기에 교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개인이 아니라, 사랑의 띠를 둘러 교회를 세워나가는 성도들 속에서, 세상의 현장으로 나갔다가 돌아오는 성도들을 통해 개인이 아닌 공동체로부터 솟아나는 기쁨을 맛 보고,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과연 오늘 공동체로부터 솟아나는 기쁨, 평화, 생명, 자유를 맛 보는 교회가 몇 이나 될까요? 교회공동체의 신앙에 따르는 하나님 나라의 축제를 만들어 나누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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