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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급해 하지 맙시다(창조절넷째주일, 2018년 9월23일)

하늘기차 | 2018.09.23 11:12 | 조회 1219

 
                              

                                조급해 하지 맙시다.

창조절넷째주일(2018년 9월 23일)                                                                                                  민11:4-9;21:4,5

     얼마 전 T.V프로에서 가수 강산애의 일상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을 보았는데, 잠간 지나가는 이야기에 귀가 쏠렸습니다. 강산애는 아마도 집에서 요가나 신체 단련, 마음 수련을 하며 사는 것 같은데, 이 사람이 어느 외국의 스님에대해 이야기하면서, ‘인간의 마음은 마치 칼날에 묻은 꿀과 같다는 표현을 써서 참 기가막힌 비유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심스럽게 마음을 다스리라는 것인데, 말은 참 멌있는데, 몇 번 말씀을 드렸지만, 교회는 마음공부하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껏 마음 공부 하지 않고 잘 살아왔습니다. 다른 종교를 비하 하려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할 수도 없구요. 종교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 주신 또 다른 선한 모습이라 생각합니다. 단지 기독교의 정체성을 이야기하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도를 닦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주님께 고백을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을 잘 아시는 성령께서 지금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주고, 분별케 해 주고, 그리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께 이 사정을 중보해 주기도 합니다. 교회가 침묵 기도를 하거나 묵상을 하는것에 대해 혹 보수적인 교인들은 교회에서 무슨 묵상을 하나 할지 모르지만, 교회의 묵상은 마음을 다스리는 묵상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내 마음을 드러내 성령의 감동을 따르는 기도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이 인도하여주는 길로 나아가게 합니다. 가장 좋은 기도의 모습은 마치 어린 아이와 같이 기도에 머무는 것입니다. 무조건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어린아이 같아야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할 때의 그 어린아이는 이기적이고, 때쓰며 이거 해주지 않으면 하며 길거리에, 수퍼 마켓에 드러눕는 그런 아이의 모습이 아니라, 모든 것을 엄마, 아빠에게 전폭적으로 맡기는 아이들의 모습으로 주님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모든 것입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자식이 없어 매우 힘들어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안타까움을 통해 산 소망의 하나님을 만납니다. 한나는 자식없음으로 얼마나 멸시를 받으며 살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나는 자기의 초라한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 간절히 기도하는 중에 서원 기도를 받아 하나님의 종, 사무엘을 낳습니다. 사무엘은 당시 부족국가에서 왕권국가로 넘어가는 역사적 전환점에서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뜻을 백성들에게 전하는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아마 한나는 전혀 예상치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단지 아들을 구하는 한나에게 역사적 전환기에 이스라엘의 지도자 역할을 할 자녀를 낳게 한 것은 한나의 믿음이라 생각합니다.

     한나는 흐느껴 울며 기도하였습니다. 소리없이 입술만을 움직이며 계속 기도하는 것을 당시 엘리 대제사장이 보고 술에 취했다고 합니다. 한나는 나를 나쁜 여자로 보지 말라고 하며, 술취한 것이 아니라, 슬픈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 저의 마음을 주님 앞에 쏟아놓았을 뿐이라고 합니다. 엘리가 그렇다면 평안한 마음으로 돌아가시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대로 간구한 것을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한나가 무어라 하는가 하면 제사장님이 종을 좋게 보아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면서 그 길로 집으로 돌아가 음식을 먹었고, 다시는 얼굴에 슬픈 기색을 띠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미 늙고 영적으로도 흐릿해진 노인네의 이야기를 하나님의 말로 받아들였습니다.

     말씀은 어디나 넘쳐납니다. 그래서 이리저리 주옥같은 말씀을 찿아 나서기도 합니다. 그러나 말씀이 말씀되는 것은 그 말씀을 받는 사람의 마음에서 부터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한나의 마음을 받으시고, 급박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아들을 한나의 배에 잉태케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한 마리아의 마음은 어떠한가요?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은, 말하는 인물들이 아니라 듣는 인물들입니다. 노아가 퇴락한 시대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말씀을 듣습니다. 갈렙이 여호수아와 가나안 정복의 마지막에 나눈 이야기는 매우 감동적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그 날 약속하신 이 산간지방을 나에게 주십시오.

                   때에 당신이 들은 대로, 과연 거기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은

                   크고 견고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만 한다면, 주님

                   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는 그들을 쫓아낼 수 있습니다.”약속 그대로, 말씀하신 그대로 하겠다고 합니다. 성경에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예언자, 전도자, 목사, 교사 정도입니다. 듣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그렇게 자기 눈이라도 내 놓을 정도로 바울의 말을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21:4에 보면

길을 걷는 동안에 백성들은 마음이 조급하였다고 합니다. 한글개역은 마음이 상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광야길을 한창 걸을 때였습니다. 에돔 땅을 돌아가려고 남동쪽 경계를 따라 아라바 반도 쪽으로 남진하여 내려가는 길인데, 아마도 가장 통과하기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5절에서는 왜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왔느냐? 이 광야에서 우리를 죽이려고 하느냐? 먹을 것도 없고, 마실 것도 없다고 합니다. 말은 바로 하라고, 먹을 것, 마실 것이 없는게 아니라, 말 그대로 지금 먹고 마시는 것이 싫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보잘 것 없다고 한 만나는, 바위를 깨뜨려 낸 샘물은 광야길을 버티게 해주는 생명의 양식이었습니다.

     처음 하늘에서 새벽 이슬과 함께 만나가 내릴 때 이스라엘의 반응은 그것을 거두어다가, 맷돌에 갈거나 절구에 찧고, 냄비에 구워 과자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 맛은 기름에 반죽하여 만든 과자 맛과 같았다고 하는데, 왜 이스라엘은 지금 만나를 보잘 것 없다고 할까요? 21:4에 보면 이스라엘과 함께 광야길을 따라 나선 사람들이 먹을 것 때문에 탐욕을 품었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의 충동질에 마음이 한 순간에 하고 넘어간 것입니다. 사실 그 사람들은 소수의 사람들인데, 마치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뱀의 꼬임에 한 순간에 넘어가듯이, 이스라엘이 외부 사람들의 짜증에 넘어간 것입니다. 어려움이 닥쳐오자 이스라엘은 그동안 늘 함께했던 만나를 보잘 것 없는, 진저리가 나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항상 함께하였는데 말입니다. 보잘 것 없는 것이 아니라 가장 소중한 은혜인데, 은혜를 은혜로 보지 못합니다. 언약의 말씀, 가나안에대한 비젼을 길의 어려움으로 조급해 하며, 마음이 상하여 잃어버렸습니다.

     안시성 이라는 영화가 개봉되었나 봅니다. 예고편에서 명대사 장면을 보았습니다. 한 번도 져 본적이 없는 20만 당나라 대군과 안시성의 5천 군사와의 싸움은 뻔한 싸움입니다. 근데 끝까지 싸우자고 합니다. 어느 한 사람이 안시성 성주 양만춘에게 정말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백기를 들자는 이야기이겠지요. 그 때 조인성이 분한 양만춘 장군이 너는 이기는 싸움만 하냐고 의미있는 웃음을 짓는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럼 지는 싸움을, 대의도 명분도 없는 싸움을 왜 하는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계속 이어지는 내용을 얼핏 보니, 지키기 위해 싸우자고 합니다. 무엇을 지킨다는 것인가 하고 보니, 함께 소소하게 살아간 안시성 사람들을 위해라고 소리칩니다. 영화에서 성주 양만춘은 매우 서민적으로 묘사되어 안시성 내의 서민들, 저자 거리의 불량배들과도 어울리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그렇구나 평양성의 고구려왕 연개소문이 양만춘이가 역모를 꾸민다고 여기며, 싫어하는 것이 이 부분이구나 하는 것을 어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양만춘과 안시성의 주민들은 하나였습니다. 그러니 어떤 명분이나, 큰 뜻이 아니라, 안시성 백성 스스로 살기 위해 모두가 한 마음으로 혼연 일치가 되어 안시성을 지키기 위해 싸웠습니다. 하나됨을 깨뜨리려는 어떤 힘에대해서도 저항합니다. 하나됨의 관계를 파괴하려는 어느 누구도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이기고, 지는 게임이 아닙니다. 사느냐 죽느냐를 이미 넘어선 싸움이었습니다.

     저는 이 장면들을 보며 예수님과 양만춘의 모습이 교차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인류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십자가의 길로 향합니다. 이미 이기고 지는 차원, 살고 죽는 차원을 넘어선 것입니다. 죄의 권세, 죽음의 힘으로부터 생명을 지키기 위해, 말씀을 지키기 위해 주님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유는 한 영혼, 한 생명입니다. 보잘 것 없는 나를 지키기 위해입니다. 대의 명분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마음이 나누인 것은 대의 명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제는 싫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을 지금 까지 살게 해 준 만나를 이제 그만 먹겠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매일 매일 내리는 만나가 감사하였는데, 가나안 땅으로 향하는 길에 은근히 끼어든 이방 사람들의 충동질에 그만 소중한 만나를 하찮은 것으로 보게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질서는 대의명분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근데 그 생명의 질서는 아주 소소한 것 안에 감추어져 있는데, 아차하는 순간 휙 하고 그 소중함을 놓아버렸습니다. 나의 아내, 아이들, 부모, 직장, 그리고 동료들, 고기교회 예배시간, 주일저녁기도회, 작은 소모임들, 수요일 성경 강해, 교육부서의 봉사, 공동체 식사, 교회 청소 . . .이 소소한 것들이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가까이 내 곁에 있는 것들은 나에게 주신 소소한 것들을 소소하게 지키는 실마리입니다. 그 소중함을 잃었다면, 어디서 놓쳐버렸는지 돌아보아야합니다.

     여러분! 가장 가까운, 가장 곁에 있는 것이 가장 소중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멀리 있었겠지요. 그래서 멀리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 다시 만나려 합니다. 남과 북도 누가 이래라 저래라 해서가 아니라, 대의 명분이나, 외교, 군사, 경제를 뛰어 넘어 잠시 멀어졌지만 가까우니까, 한 민족이니까 만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여정에서 조급히 여기며 마음 상한 것은 가장 가까운, 그래서 가장 소중한 나의 분신, 즉 만나와 바위를 쪼개어 낸 샘물, 구름과 불기둥을 너무 쉽게 놓아버렸기 때문입니다. 나의 모습은 바로 나의 곁에 늘 같이 하는 것들을 통해 드러납니다. 그게 내 모습입니다. 이 번 명절에 소소한 일상에 조급해하지 마시고, 가장 가까운 소소한 것에 한글개역 처럼 마음 상하지 마시고, 나의 곁에 있는 하나, 하나와 조화를 즐기는 여러분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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