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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시는 영(창조절 둘째주일, 갈4:6;5:17-26)

하늘기차 | 2018.09.09 17:27 | 조회 1454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시는 영

201897(창조절 둘째주일)                                                                        4:6;5:17-26

     25절에서 성령으로 삶을 얻어, 성령이 인도해 주심을 따라 살아간다는 말씀은 마치 이스라엘의 광야길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빠져나와 광야길을 갈 때, 이스라엘은 자의적으로 움직인 것이 아니라,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움직이면, 그 때 전열을 갖추어 어느 때라도, 어디서든 멈추었던 곳을 떨쳐버리고 이끄는 대로 향하였고, 멈추면 설령 조금만 더 가면 오아시스가 있을지라도 아마 바로 멈추어 말씀괘를 중심으로 진영을 갖추어 자리를 잡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지 못하였습니다. 우상때문이었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백성들은 결국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 주저 앉고 말았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스라엘이 황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을 숭배하기 시작한 것은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을 때였습니다. 오늘 이시대에도 교회는 명성교회의 현실을 바라보며 하나님 이름을 걸고 자본과 자기 좋은 것에 취하여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 16절에서 성령이 인도하시는대로 살아가라고 합니다. 그러면 육체의 욕망을 체우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19-21절 까지는 육체의 욕망에대해, 22-23절은 성령의 인도함을 따르는 길에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성령으로 인도하는대로 살지 못하면 육신의 욕망대로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어떻게 하면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살 수 있을까요? 24절은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은 정욕과 욕망과 함께 자기의 육

                              체를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누가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인가요? 8:9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 살아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로마서도 그렇고, 갈라디아서도 모두 공통적으로 살려면 죽어야한다고 합니다. 기억하시나요? 거룩한 산제사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인류 구원을 위한 아버지의 뜻이 살았듯이, 결국 내가 죽어야, 내 안의 영이 산다고 하였습니다.

     교우여러분!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의 영이 살아계십니까? 잘 모르겠나요? 그렇지 않으면 살아있지만 산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죽어야 참 생명의 삶, 즉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있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밍숭맹숭한가요? 분명한 것은 열매를 보면 살아있는 삶인지, 죽은 삶인지 압니다. 오늘 말씀 22, 23절은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생명의 9가지 열매에대해 이야기 합니다. 열매가 있나 자기를 돌아보십시오. 사람들이 자신에게 열린 성령의 열매를 먹으려고 다가오는지 보십시오. 결국 열매는 삶 속에서 열립니다. 싸울건가요, 아니면 평화인가요? 원수를 맺을건가요, 용서인가요? 미움인가요, 아니면 사랑하나요? 기쁨인가요, 슬픔인가요?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계신가요? 조금 불편한가요? 사도 바울은 5:1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

                             다.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라고 했는데, 여기서 그만 덜커덩 거리내요. 내가 죽고 그래야 그리스도의 영이 살아야한다는 말씀이 나를 살리는 말씀이 아니라 법이 되어 주눅들게 하는 말씀은 아닌지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딤후1:7 말씀처럼 비겁한 영을 준 것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데 말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2:19절 말씀에서 인상적인 말씀을 합니다.

                         “나는 율법과의 관계에서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어버렸습니다.

                           것은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려고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관계에대해서 이야기합니다. 흥미롭지 않나요? 여러분 여러분들은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인가요? 저는 이 말씀이 매우 감사했습니다. 조금은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습니다. 살아라, 죽어라 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려고 한다고 하니 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과 어떤 관계인가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삶인가요? 아니면 바쁘고 피곤하여 그저 주일 예배드리는 정도인가요? 그런데 늘 바쁘고 늘 피곤하잖아요. 자본주의 사회는 그렇게 바쁘고 피곤하게 살아가는 사회입니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님은 <피로사회>라는 책에서 오늘 이 사회는 여가시간과 업무시간의 경계마저 무너져,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착취하는 성과주의로 나아가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겨 피로가 일상화 되어버린 자본주의사회라고 하는데, 벗어날 길은 없는지요? 멈추면 되잖아요. 주일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한 번 해보세요. 우리교회가 주일을 온전히 지키는 일에 앞에 서면 어떤가요? 안식일지키는 것이 단지 옛 고조선시대의 법으로 퇴물 취급 받은지가 오래지 않은데, 그러나 최근에 월터 브루그만 같은 진보진영의 신학자도 안식일은 저항이다라는 책을 통해 자본에 저항하는 길은 안식일지킴에 있다고 안식일지킴으로 돌아가자고 부르짖는데 저는 매우 공감하고 있습니다.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인가요?

     지난 주에 지홍이 할머니로부터 오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눈은 거의 못 보시는 것 같구요, 소리는 들으시고, 입과 혀가 더 굳어지셨습니다. 할아버님 곁으로 가서 저 왔습니다하니 저를 알아보시고는 움직이려 하셨습니다. 찬송부르기를 좋아하셔서 찬송 몇 곡을 부르니 이전처럼 두 팔을 움직여 지휘를 하며 듣습니다. 아멘 합니다. 그리고 찬송을 듣는 와중에 혀가 다시 풀려 어눌하지만 고기교회, 그리고 안홍택목사님, 감사라고 합니다. 예배당 건축하면 휠체어에 앉아서 벽돌 한 장 나르겠다고 하셨으니 얼른 일어나라고 하니 아멘 하십니다. ~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사모함이요, 간절함입니다. 그리고 찬송을 부를 때 기뻐하는 영적 감흥입니다. 이러한 영적 감흥을 어디에서 찿을 수가 있을까 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살고자 하려면 우선 많은 것을 회복해야하는데, 우선은 사라져버린 영적 감흥입니다. 이른 새벽 아침 주먹밥을 챙겨 노상에서 반 나절 길을 걸어서 예배시간에 교회에 도착하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수요일에는 수요성서강해를 듣기 위해 어린 아기를 등에 업고 예배당 뒤쪽에 앉았다가 아기가 보채면 현관으로 나가 아이를 얼르며 뒷문 빠끔이 열고 머리만 내밀고 말씀에 귀기울였습니다. 없는 살림에 헌금은 더 할 나위 없었습니다. 이 영적 감흥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려고 한다고 해서 드린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4:13-15에서 갈라디아교회에 무어라고 하는가 하면, 자기가 갈라디아에 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병이 들어 예정에 없던 갈라디아를 들르게 되어 복음을 전하였는데, 갈라디아교회가 병에 걸렸는데도 천사처럼, 예수님처럼 자신을 영접해주었고, 그 때 할 수만 있으면 눈이라도 빼어서 자기에게 주려고 했다고 하면서 그 때의 그 감격은 지금 어디로 갔느냐고 합니다

     하여간 저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려면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야하는데, 이 말씀이 부담이 되지는 않는가?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려고 한다는 말씀에 숨통이 조금은 트였습니다. 다시 물어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과 어떤 관계인가요? 오늘 본문 말씀 4:6을 다시 읽어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자녀이므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영을 우리의

                마음에 보내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셨다고 합니다.

     이 말씀이 저를 자유하게 하였습니다. 우리 주위를 겹겹이 두르고 있는 생각의 잣대, 판단과 평가의 잣대. 책임과 성과, 편견과 집착, 욕망, , , 그 모든 짐들이 나에게 지워져 두려움과 우울함으로 빠져버리기가 십상입니다. 그런데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순간 그 모든 세상의 기준들과 가치들이 다 소멸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나를 인정해 주십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면서도 자유롭지 못한 것은 내 안의 다른 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법을 죄의 법이라하면서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줄까? 탄식하며 성령을 요청합니다. 말씀이 여기서 끝났으면 저는 죄의 법과 롬 7:23마음의 법 그리고 행함의 의를 짐지우는 율법 8:2의 성령의 법, 그리고 7:22하나님의 법이라는 개념에 갖히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롬8:14, 15로 넘어가면 우리를 자유케하시는 나를 인정해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의 부르심을 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자녀

                           입니다. 여러분은 또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녀로 삼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영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

                          지"라고 부릅니다. ”아멘입니다. 할렐루야입니다. 이 은혜, 복음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자녀로오셔서 주신 생명의 은혜입니다. 십자가에서 베푸신 은혜입니다.

     바울이 창조주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복음을 갈라디아교회에 전하였는데 예루살렘에서 온 거짓 교사들이 율법의 의를 슬며시 끼워넣으려 했습니다. 바울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영의 은혜가 나를 살립니다. 부모가 자식을 인정하는 것은 낳았기 때문입니다. 인륜을 저버린 죄인으로 극형을 받은 죄수도 아빠, 엄마에게는 아들입니다. 내 새끼라는 생명의 사랑으로 모든 것이 용서되고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롬4:6 이하에서 행한 것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 주시는 사람이 받을 복에대해 다윗의 시를 인용합니다. 32:1,2입니다.

                          “복되어라! 거역한 죄 용서받고 허물을 벗은 그 사람!

                           주님께서 죄없는 자로 여겨주시는 그 사람!

                           마음에 속임수가 없는 그 사람!

                           그는 복되고 복되다!” 바로 이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정해 주십니다. 사랑은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으로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구원을 인증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유롭습니다. 교우여러분! 주저말고 아바 아버지 부르심으로 인정을 받아 자유와 평안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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