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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과 호감(성령강림후제7주일, 2018년 7월 15일)

하늘기차 | 2018.07.15 16:15 | 조회 969


                        두려움과 호감

2018715(성령강림후제7주일)                                                                    2:37-47

     오늘 말씀 43절에 모든 사람들에게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47절에서는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고 합니다. 자세히 보면 두려운 마음과 호감을 샀다는 마음의 주체가 다릅니다. 두려운 마음은 초대교회의 공동체 안에서 드러난 마음이고, 호감을 샀다는 마음은 세상 사람들이 초대 교회를 바라보는 마음입니다. 두려운 마음에서부터 호감을 샀다는 마음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두려운 마음은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하던 마음이었습니다. 유대종교를 바탕으로 세워진 견고한 사회의 틀 속에서는 볼 수 없었던 전혀 다른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를 포함에서 한국교회에 두려운 마음이 있는가? 경외스러운 마음이 있는가? 질문해 봅니다. 이 마음은 도대체 어떤 마음일까요?

     이 경외심은 43절 말씀대로 사도들을 통하여 놀라운 일과 표징이 일어나면서 비롯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시다는 것을 보여주기위해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사도행전 첫 번째 기적은 예루살렘성전미문 곁의 걷지못하는 사람을 베드로가 일으킨 사건입니다. 사람들이 놀라워하며 베드로와 요한에게 몰려들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사람들은 52어 역시 그 현상 만을 봅니다. 베드로는 믿음대로 되어진 일을 마치 우리의 능력이나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우리를 바라보지 말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놀라워하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선포합니다. 2:42, 43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 예수께서 버림을 받으신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계획을 따라 미

                      리 알고 계신 대로 된 일이지만, 여러분은 그를 무법자들의 손을

                      빌어서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

                      음의 고통에서 풀어서 살리셨습니다. 그가 죽음의 세력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모여들었던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묻자 베드로가 외칩니다. 38절입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각 사람은 예

                     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용서를 받으십시오. 그리

                     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서 내면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 변화는 실제적이고 경제적인 사건으로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은 사도 베드로의 복음 선포와 그 말씀을 듣고 양심이 찔린 사람들에의해 자발적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사도들 앞에 내어놓기 시작하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소유물을 포기했지만 모든 것을 서로 나누었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 부족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자율의 근간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말씀드리면 43절에 두려운 마음에대해 무어라고 하는가 하면 모든 사람들에게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영적으로 민감한 한 두 사람이 아니라, 깊이 통회 자복한 한 두 사람이 아니라, 교회 모두가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고 합니다. 이 마음은 믿음을 통해 오는 마음입니다. 덴마크의 실존철학의 문을 연 쉐렌 키에르케고르는 공포와 전율이라는 책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삭을 바치는 것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라고 봅니다. 아침 일찍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 자기 아들을 산제물로 드리기 위해 모리아산으로 향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세상의 윤리적 가치와 상충이 되는데, 아브라함은 아랑곳하지 않고 일체의 침묵으로 세상과 유리된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이 행위의 책임을 아무에게도 보상받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세상과 나뉘어 홀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아브라함을 두려움과 떨림으로 바라봅니다. 이 마음이 교회에 있나 돌아보아야합니다. 그런데 나 개인에게 있는 것 하고, 교회에 있는 것 하고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에게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자본가치에 매몰된 이 시대에, 개인은 물론이고 교회에 이 두려워하는 마음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교회에 와서 위로와 평안, 그리고 행복해 하는 것 다 좋습니다. 일상에서 지친 마음을 교회에서 예배와 말씀, 기도, 교제를 통해 회복하고, 재충전하는 것이야말로 오늘 이 시대에 없어서는 안되는 교회의 중요한 역할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인가라는 것입니다. 이 위로와 평안은 어디에서부터 오는가 라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자족감에서 온다면 다시 생각해 보아야할 것입니다. 베드로는 성전미문에 걷지 못하는 사람을 일으켜 세웠을 때, 우리의 경건이나 능력으로 걷게한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려움은 사람에게서 온 것이 아닙니다. 자기만족은 있는데, 자기를 내어놓는 경외함은 어디있나요?

   교단 신문에 어느 목사님이 몇 해 전부터 부침개 전도, 붕어빵 전도, 냉차 전도와 같은 전도전략이 먹혀들어가지 않는 것은 이것 먹고 우리교회 나오세요라는 의도가 있는 선심이라는 것을 세상이 알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이런 전도 전략이라는 것이 1970년도에서부터 생기기 시작하였데, 이 전의 교회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착한 사람의 대명사는 나 저 교회에 다녀요’, ‘집사입니다. 권사에요하면 다시 볼 필요없이 믿을만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기독교인들에게는 뭔가 강렬한 욕구가 기본적으로 숨겨져 있어서 베푸는 친절 뒤에 뭔가가 있다고 의심하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최근 터져 나오는 교회의 추문들은 교회의 신뢰도를 더욱 떨어뜨렸습니다. 그럼에도 교세가 약화된 것은 교회가 전도를 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여전히 별의별 기발한 전도전략으로 오늘도 바쁘고, 교인들을 가만 두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원하는 교회는 그렇게 바쁘지 않을 것이며, 그것은 본질이 아니라고 하면서 교회는 이래야 해 할 때 46절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고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교회의 열심 중에 빠진 것이 하나있는데 초대교회 공동체의 순전한 마음이라 생각합니다. 그 순전함의 증거는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신들의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공동으로 소유하며,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으며, 그렇게 자연스럽게 43절에 모든 사람에게 두려운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자발적인 경외심이 스스로에게서 솟아나온 것입니다. 이 경외심은 세상을 향한 존중이며, 타자에대한 존중이 살아난 것입니다. 그러려면 나에대한 존귀함, 그러니 하나님에대한 경외 즉 회개없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싶습니다.

     걷지 못하는 사람을 예수의 이름으로 일으켜 세우며, 너희들이 바로 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하나님께서 죽음의 권세에서 일으켜 세우셨다는 베드로의 선언에 사람들이 어찌할 줄 모를 때에 회개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이었고, 복음이었습니다. 그러나 회개를 우리는 잘 못 오해할 여지가 많습니다. 회개는 성령이 우리의 내면을 움직이면서 일어납니다. 말씀을 듣거나, 교회안에서의 성도의 교제나, 세례를 받거나 등 다양한 삶의 자리에서 자유로운 성령님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회개를 간혹 내 안의 모든 더러운 것을 다 드러내는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물론 그렇기도 하지만 그것은 현상이며, 내 열심이고, 내 윤리적인 판단이기 십상입니다. 요한 하인리히 아놀드공동체 제자도라는 책에서 우리의 내면을 해와 달, 별을 비추는 투명한 연못이라고 생각하라고 하면서 바닥의 진흙을 휘저으면 물은 흐려지고, 휘저을수록 더욱 흐려질 것이라고 합니다. 내 바닥의 우울함, 과거의 더러움을 들추어내는 것이 회개가 아닙니다. 그러면 자기 안에 갖혀버립니다. 한 때 귀신쫓아낸다구하면서 온 예배당이 귀신으로 가득찬 걸 보았습니다. 회개한다고 온통 죄로 가득한 집회를 보았습니다. 회개는 내 마음을 주님께 여는 것입니다. 모든 경험들과 생각들과 관계, 가치들을 뒤로하고 외아들 바치듯이, 내가 평생 가장 소중하게 여기던 것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찿아오셔서 우리의 눈을 뜨게합니다. 죄 보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회개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으면 열매도 없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삶의 모든 것이었던 율법을 내려놓았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두렵고 떨림으로 이삭을 내어놓았으며, 야곱이 그렇게 얍복강 나루터에서 자기의 것을 포기하려고 하나님과 밤새 씨름하였습니다. 어부였던 베드로가 그렇게 깊은 물에가서 그물을 던지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던지는 순간, 이 분이 주님이라는 것을 깨닫고 두려워, 죄인임을 고백하며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이러한 변화, 깨우침이 한 공간에서 한 시간에 기적 같이 일어난 것입니다. 회개는 경외심을 촉발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뿐 아니라, 함께하는 모든 존재하는 것에대한 경이로움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나라는 거기서부터입니다. 내적 경외심이 모든 공동체 각자에게서 모두에게 일어나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의 성을 쌓은 것이 아니라, 어려워하며, 병들고, 가난한,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제자들이 성령의 방언으로 여러 민족과 나라에서 온 사람들의 언어로 말하기 시작하자 조롱하여 새 술에 취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호감을 샀다고 합니다. 공동번역은 그들을 우러러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글 개역은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라고 합니다. 유대교나 로마제국의 국가 체제에서는 볼 수 없는 전혀 상이한 일들이 초대교회공동체에서 생겨났습니다. 기존의 삶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말과 행동이 밖으로 뻗어나간 것입니다.

     어제 퀴어축제가 전국 곳곳에서 열렸는데, 그 반대집회를 극우 보수 집단들을 중심으로 바로 붙어서 진행하는 것을 뉴스에서 보았습니다. 교회가 이렇게 망가졌습니다. 그 천박함은 말로 다 할 수 없이 부끄럽습니다. 경외나 호감은 오늘 이 시대 교회에서 어디에서도 찿기 힘들지 않나 싶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어떻게 함께 경외함 교회 안에 머물 수 있을까요? 그래서 이 세상의 질서와는 무언가 다른 모습으로 인하여 세상이 호감할 수 있을까요

                 -17세기 말 어느 1세대 퀘이커 교도가 남긴 말입니다.

                        우리를 그대로 따라 하거나 모방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는 항해하는 배가 되어,

                        의식을 일깨는 거품을 남기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그 거품도 이내 사라져 버릴 것이다.

                        우리를 따르고 싶다면, 우리가 따르는 성령을 따라 주기 바란다.

                        그 성령을 추구하기 위해 우리도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그 성령 또한 세대마다 새롭게 추구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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