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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안에서 빛(성령강림후제4주일, 2018년6월 17일)

하늘기차 | 2018.06.17 14:42 | 조회 1009


                        주님 안에서 빛

2018617(성령강림후제4주일)                                                        요일1:5-7;엡5:8-13

     사도 요한의 서신 기록 연대는 A. D 100년경 이어서 이미 교회가 지중해권, 헬레니즘 세계에 널리 자리잡은 때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족보를 기록하는 서술방식으로는 당시의 신앙인들을 이해시킬 수 없었습니다. 또한 본질적으로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은 사유나 행동 양식이 달라, 예를들어 하나님에대해 히브리민족은 행동하는 하나님으로 고백되는데, 헬레니즘 문화권은 신의 본질, 속성등 존재론적으로 바라봅니다. 서구는 끊임없이 예수의 존재에대한 질문을 던지며, 4, 5세기 중세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에대해 참 하나님이요, 참 인간이라는 고백을 끌어내기까지, 셀 수없는 치열한 논쟁과 전쟁과 처형이 이루어졌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은 존재론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제1원인이랄지, 1목적, 아니면 이데아 라고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방패요, 산성이요, 구원의 뿔이며, 인도하며, 지키며, 보호하신다고 고백을 합니다. 인간은 선한가? 악한가? 하며 2원론적으로 묻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창조를 믿습니다. 악과 선의 실제가 공존하며,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한 뜻 안에 있습니다.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인류의 역사에 개입하실 뿐 아니라, 우리의 각 개개인의 삶 속에 머리카락까지 셀 정도로 섬세하고 온유하게 다가오십니다.

     사도 요한은 2원론적인 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헬라인들에게 헬라적 개념의 언어를 택하여 복음을 전하고, 기록하고, 편지를 썼습니다. 헬라인들에게 로고스는 이성, 합리, 지혜를 뜻하는 세상질서의 근원인데, 사도 요한은 우주를 창조하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로고스로 번역하여, 로고스가 육신으로 이 세상에 왔는데,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언을 합니다. 또한 당시 교회를 흔들어 놓던 복음과 무관한 거짓된 영지주의 교리를 몰아내기 위해,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 , 말씀, 사랑을, 참 빛, 참 포도나무, 참 떡이라는 비유적인 표현을 더하여 헬라인들의 이해를 끌어냅니다.

     1:5은 빛이 어둠 속에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어둠은, 세상이라는 말과함께 당시의 유대교를 총칭합니다. 특히 유대교지도자들입니다. 유대종교지도자들과 논쟁하며 싸울 때, 예수님은 악마의 자식들이라며 준엄하게 그들의 정체성을 폭로합니다. 그러니 그 빛을 이기지 못한 유대인들이 폭력을 행사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밖았습니다. 예수님은 참 빛이시기 때문에, 그 빛에 거짓과 살인이 그냥 노출되었습니다.

     저는 2년 전 광화문 KT 원자력안전위원회 앞에서 고리1호기 폐쇄를 위한 40일 금식기도회에서 받은 주님의 말씀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그 중에 엡5:13은 빛이 폭로하면 모든 것이 드러나니, 폭로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폭로는 본질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행동하라, 마라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빛이 비추이면, 모든 것이 사실 그대로 드러납니다. 원안위 앞에서의 기도회는 그 자체로 빛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함께하시어 핵을 통해 무엇인가를 얻으려는 인간의 방식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위배된다는 것을 드러낸 것입니다. 무엇을 하고, 안하는 차원이 아니라 성경은 예수님처럼 빛의 자녀들이 스스로 빛으로 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어떻게 스스로 빛일 수 있나요? 말이 그렇지 이것은 불가능한 것 아닌가요? 그런데 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도 산상수훈 첫 부분의 8가지 하나님 나라의 복을 선언하시고는 바로 그 다음에 우리를 향하여 소금과 빛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처음부터 선언입니다. 생명, , 말씀, 사랑은 선언입니다.

     이 선언은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어지는 선언이라 생각합니다. 어떤 윤리적인 결과를 바라 보거나, 지금의 우리의 도덕적 상태를 기준으로 하는 선언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선언입니다. 세상 기준의 가치와 상관없는 선언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이러이러하게 살아와서, 부끄러워서, 자격이 없어서 라는 자격지심을 일깨우는 선언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십니다. 그런데 주님은 거듭 우리는 빛이라고 선언합니다. 참 난감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스스로 빛이라 생각하는지요? 빛은 안되도 등불은 된다고 생각하나요. 1은 거꾸로 사람들이 세례 요한을 빛으로 여기자 세레 요한에대해 빛이 아니라 빛을 비추는 등불이라고 명확하게 규명하고 있는데, 세례 요한 보다 못하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우리를 예수님은 빛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시는지요? 피할 길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엡5:8에서 주님 안에서 빛이라 합니다. 이 주님 안에서가 돌파구이고, 복음입니다. 은혜입니다. 그냥 빛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입니다. 주님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오늘 말씀 요일1: 6절은 하나님과 사귀고 있다면서 어둠 속에서 살면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이것 어떻게 하면 좋지요. 스스로 어두움인지, 빛인지, 콩인지 팥인지 분별력도 없는 우리에게 어두움, 거짓과 같은 윤리적인, 가치 판단적인 우리에게 훅 하고 들어오니 매우 당황스럽습니다. 그건데 7절은 무엇이라 말씀하고 있나요?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과 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 살아가면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6절 말씀에서 보았듯이 사귐에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음이요, 은혜입니다. 교우여러분! 우리는 지금 사귀고 있는 것입니다. 요세말로 썸을 타는 것입니다. , 주님과 지금 밀고 땡기며 사귀는 것입니다. 어떤 사귐인가요? 이어지는 7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해 준다고 합니다. 교회에 식상한 분들은 에~, 또 나오네 할지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저는 윤리적으로 살지는 않았지만 대충대충 살려고 하지도 않았어요. 나름 치열하게 살려고는 했어요. 그렇지만 저는 윤리와 도덕의 잣대를 가지고, 지고지순한 가치기준을 바라며 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 안에서 주님의 죄사함의 은혜 아래 살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은혜이며, 평안하며, 감사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선명성에 목을 맵니다. 옳고 그름에, 진리와 거짓에 메이는데, 이 선명성에 함정이 있어요. 세밀함에 악마가 있다고 하잖습니까? 저는 선명하게 못살아요. 선하게 못 산다는 것입니다. 선은 우리의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 가치입니다. 의로움도, 진실도 모두 우리에게 속한 가치가 아닙니다. 그렇게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윤리주의자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금욕, 명상, 이런 행위들을 통해 하나님에게 까지 다다를 수 있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짐이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주님 안에 머물러 있으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지요, 선하신 주님 안에 머물라는 것은 가까이 곁에 있으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게 맞다고 생각을 합니다. 주님 안에 머물라는 것은 사귀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우리를 변호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이 세상에 유일하게 선하신 분, 의로운신, 진리이신 분 앞에서, 우리를 선하다고 변론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윤리의 가치를 값었이 뛰어 넘어, 자유자로서 윤리를 살아내는데, 이 자유로운 삶에대해 오늘 말씀은 빛의 열매라고 합니다. 이 열매는 신비로워서 우리가 열심히 땀 흘려 선함, 의로움, 진실의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빛의 열매가 선하여, 우리가 빛인데, 우리가 빛의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빛입니다. 이 경계가 묘합니다. 무엇으로도 표현이 안됩니다.

     믿음과 비슷합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는 순간 없고, 믿음이 없다고 하는데 믿음이 있습니다.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마9:24에서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라고 부르짖는 고백이 바로 우리의 고백입니다. 믿지만 믿음이 없다는 역설, 아이러니입니다. 이 안에서 종교적인 집을 짓고, 자기 가치의 성을 쌓으며 살면 안됩니다. 그러면 열매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빛으로 살면, 빛으로 인정을 받으면 빛의 열매가 있습니다.

     열매가 없으면 기쁨이 없습니다. 성도에게 기쁨이 없다면 그것은 죽음입니다. 살아있는 것 같지만, 종교 생활은 열심히 하는데 죽음입니다. 믿음과 믿음 없음의 자기 고백의 역설 속에 스스로 믿음이 있다는 맹목적인, 자기 중심적인 종교의 집을 짓고 울타리를 치고 살기 때문에 열매가 없습니다. 열매는 내가 맺는 것이 아니어서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주님의 시간에 주님의 방법으로 일하시기 때문에 그 일하심을 볼 수 있어야합니다. 그러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농부가 농사를 지을 때, 햇빛과 바람과 비를 주시는데, 그 시기에 맞게 농부는 땀을 흘리며 기다립니다. 하나님이 흘리시는 땀이 있고, 우리가 흘리는 땀이 있습니다. 그러나 열매는 하나님이 맺으십니다. 그래서 수고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생활을 할 때, 봉사하는 것은 열매가 아니고 받은 은혜를 나누는 것이고요, 그것은 마치 밤나무, 얼마 전 모내기를 끝낸 벼, 한창 열매를 맺고 있는 보리수, 살구 나무가 있지요. 그런데 그냥 나무가 있다는 존재감은 있는데, 그 나무에 열매가 없으면 이건 난감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비유에서 열매가 없는 나무는 베어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너무 잔인해 할지 모르는데, 이것은 비유입니다. 이야기입니다. 이야기에는 옳고 그르다는 가치 판단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면 죽음인데, 지혜가, 영적 지혜가, 그러니까 생명을 살리는 지혜가 있습니다. 어디에 있을까요? 생명은 옳고, 그르다 또는 맞다 틀리다로는 풀리리지 않습니다. 반복하지만 주님 안에서 머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 안에 빛입니다.

     어떻게 머무는 가요? 어떻게 빛인가요? 우리가 빛이라 선언하시는 것은 가치로 판단하는 세상을 뛰어 넘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아니 뛰어 넘었다는 선언이십니다. 15:10, 11 말씀입니다.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그 사랑 안에 머물

                               러 있는 것과 같다.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내 기

                               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주보 오른쪽 내용을 보니 그대로입니다. 사랑입니다. 세상의 모든 가치와 판단을 뛰어 넘어 버립니다. 법정에 선 연쇄 살인범을 그 어머니는 사랑으로 품는 것입니다. 옳고, 그른 것을 따지는 그 판단의 자리에서 그 자식을 사랑으로 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짝퉁이 아니고, 진품이 되려면 요15:10 말씀처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그 다음에 무어라고 말씀하고 있나요?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사랑도 머물러 있는 것이지, 무엇을 열심히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야 사랑의 열매가 맺히기 시작합니다. 머무는 방법을 무엇이라고 하나요? 계명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절대선언이 아니라, 상대적, 조건적 선언입니다. 이건 치열해야합니다. 마치 녹슨 것을 떨어내기위해 망치로 쇠 판을 두드리는 아픔과 고통의 멍에인데, 11장에서 주님은 내 멍에는 편하고, 가벼우니 내 멍에를 메고 배우라하셨습니다. 그러면 마음에 쉼을 얻는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감란산에서 아버지의 뜻에 죽기로 순종하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교회는 그렇게 계명을 지키는 것을 보고, 배우는 모임이 아닌가 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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