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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서 가시는 생명의 삶 Ⅱ(2009년 5월17일 스승의 주일)

하늘기차 | 2009.05.17 15:06 | 조회 2982


하나님 앞서 가시는 생명의 삶 Ⅱ

2009년 5월17일(어버이주일) 시16:1-11

지난 금요일 밤토실에서 심리학자인 서은국교수로 부터 "주관적 행복(subjective well-being)"이라는 제목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 분이 번역한 책도 읽었는데, 요즈음 한 창 심리학이 상종가를 치고 있는데, 저로서는 심리학 자체도 낯 선데, 그 책에서 제시하는 무수한 통계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도 잘 모르겠고, 그래서 낯 선 모습으로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 강의로 심리학에대한 것을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단편적으로 그 날 강의를 통해 그나마 알 수 있었던 것은, 우선 ‘주관적 심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집단, 어떤 관계, 어떤 상황, 어떤 사건에 처해 있을지라도 그러한 정황 속에서 행복한가 불행한 가는 결국 그 개인의 심리에 따른다는 것입니다. 본인이 행복하면 행복한 것이고, 불행하면 불행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가 행복하기 위해서 미래에대해 계획을 세우고 하는 과정 속에서 그 미래를 위해 현재를 너무 희생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고생하고 수고하면 미래에 행복해 질 것이라는 희망 때문인데, 바로 그것은 적지않은 경우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무수히 많은 실험의 결과물을 도표로 제시하며 사람들이 나름대로 설정해 놓은 행복의 기준이 실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을 들었습니다.

여러 가지 많은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중 샴쌍둥이 이야기 경우에는 그렇게 함께 붙어다니는 사람이 느끼는 행복과 행동에 자유로운 정상인이 느끼는 행복의 순도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하며, 생일 케익을 선물 받을 때, 그 샴쌍둥이가 느끼는 행복은 기존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의 최고치를 8로 친다면 쌍둥이들이 느끼는 행복은 실제는 한 4, 5 정도 가 아닐까 라고 문제제기를 하면서 그렇지 않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왜냐하면 그 행복은 그 개인에게서 나타나는 만족도인데 어느 누구도 그 만족스러운 경험을 평가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행복은 철저히 개인의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누가 행복한가 라는 문제에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외향적인, 그리고 사물 인식이나, 관계에 있어서 보다 확연한 기질을 가진 사람이 보다 행복하다고 통계 자료를 제시하며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어렸을 때 초등학교 때 통지표에 명랑하고, 능동적이고, 활달하다는 기록이 있는 사람들을 어른이되어 다시 만나보니 실제 그렇게 외향적인 사람들이 더 행복을 느끼며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교수님 이야기가 한국인들은 항상 보면 그 표현이나 삶의 자세에서 거의 행복해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행복은 기질에 거의 상당 부분이 좌우된다고 하면 미국인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와 그렇네! 그럼 참 행복하겠는데 하는 식의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행복은 기질이야 하면 거의 많은 사람들이 근심어린 얼굴을 하며 그럼 행복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한다는 것입니다. 나도 그 날 그렇게 질문했었습니다. 이런 모습 속에서도 한국인들은 여러 가지 정황 상 기질적으로 해피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교적, 집단적 전통적 보수적 삶의 구조가 한국인을 그렇게 만들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서교수님이 행복에대한 이야기를 할 때 happy하다, 또는 unoappy하다고 할 때 그 억양이 행복하다, 아니면 불행하다고 하는 표현과는 다소 다른 느낌을 받았습니다. 영어적 표현에서 다소 가벼운 느낌이 들었는데, 아마 그것이 그 미국적인 happy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한 편 의문도 제기됩니다. 그 날 이상권님은 서 교수님이 제시한 통계나 자료들을 보며, 미국식 행복논리에 수긍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그렇게 기질적으로 happy한 반응을 보이는 미국사람들과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한국인들과는 삶 자체가 틀리다는 것입니다. 미국은 항상 승리요, 정복이요, 물질적 풍요를 누린 나라고, 한국은 조상대대로 침략과 가난과 보수적, 전통적, 유교적 위개질서 등등의 삶의 정황 속에 살아왔는데 어떻게 그러한 통계 자료로 happy와 unhappy를 구분 할 수 있느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투명하게 그리고 합리적으로 나의 삶의 정황이 어느정도 위치해 있는지, 좀 더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지를 추구하고 규정할 수 있는 객관적(사실 얼마나 객관적일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으로 밝힐 수 있다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지 않은 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제 그 강의를 듣고 집사람과 차를 타고 오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원조 북한 샛터민인 전철우씨를 여러분 알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이 분은 북한에서 독일로 유학을 갔는데, 그 때 그 나라 사람들이 자기 나라 지도자에대해 전혀 모르는 것에 놀라고, 분도 나고 해서 막 싸우기 까지 할 정도였는데, 그리고 북한에 있을 때는 자기가 정말로 행복한 줄 알았는데, 지금 와서 보니 그것은 가짜 행복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를 찿아 남으로 귀순을 했는데 처음에는 좋았는데, 어느정도 지나고 보니 남한도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소위 행복이라는 것의 기준이나, 가치나 그리고 의미가 무엇인지 많은 의문점들이 생겨났습니다.

내가 읽은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의 저자 자신의 마지막 결론은 ‘행복을 발견하는 간단한 공식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여전히 미래의 행복을 꿈꾸며 상상을 하는데 그 예측 능력이 그리 뛰어나지도 정확하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저 집을 사면 행복할까 랄지, 저 대학을 들어가면, 저 사람과의 결혼생활은 행복할꺼야 랄지 하는 예측들이 그리 정확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결론이 부정적인 것 같지만 그러나 그동안에 숫하게 행복에대해 이야기 하는, 아마 이 시대 이 세계적 질서체계의 무한경쟁의 힘든 삶 속에서 마치 그 책을 읽으면, 아니면 이러한 방법으로 살아가면 이렇게 믿으면 happy할 수 있다는 허구적 상상을 깰 수 있어서 좋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면서 그러나 한편으로는 긍정적이기 보다는 부정적인 결론에 도달하는 아쉬움과 그리고 결국 서구적 방법론이 소크라테스가 고백한 ‘나는 모르는 것을 안다’라고 하는 헬레니즘의 한계를 보여주는 그러나 그래서 솔직하고 겸허한 ‘주관적 행복’강의가 아니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서교수님이 마음에 들었던 것은 스스로도 happy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도 그렇게 happy한 것에대해 핏대를 올리며 이것이다 라고 하지도 않고 올릴 필요도 없다는 happy에대해 무채색 같은 그러면서 ‘그것은 방법론이다’라는 입장을 보이는 그런 모습이 좋았습니다. 그동안 교계에서나 사회에서 그렇게 떠들어데는 지금도 서점에 가면 늘 눈에 뛰는happy에게 어퍼컷을 메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야기가 다소 길어졌지만, 그렇다면 성경은 행복에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전에도 한 번 말한 적이 있지만 성경은 행복에대해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행복이 아니라 기쁨, 평화, 자유, 감사, 사랑, 믿음에대해 이야기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뜻하나님 나라의 행복, 축제, 잔치에대해 이야기합니다.

최근 신문이나 미디어 매체를 통해 잔잔하게 한 분의 삶을 애도하는 영상이나 기사가 이 곳 저곳에 실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지난9일 별세한 장영희 님입니다. 서강대 영어 어문학 교수이며 수필가로도 알려지셨는데 57세를 일기로 타계하셨습니다. 그 분에게는 여러가지 별명이 있다고 합니다. 이혜인 수녀님과 함께 명랑소녀 또 가수 조용남 씨와의 친분, 또 시무하는 대학에서 가장 존경받는 스승 등, 그런데 그 분은 태어나자 마자 1년 만에 소아마비에 걸려 5살 되는 동안 꼼짝없이 누워만 있다가 목발을 집고 평생을 1급 장애를 안고 살아왔다고 합니다.

최근 죽기 전에 낸 그의 수필집에서 보면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몇해 전의 인터뷰 내용을 보면 사람들은 보통 이런 장애자를 보면 소위 ‘천형의 삶’을 산다고 하는데, 자신의 삶은 천형의 삶이 아니고 천혜의 삶이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네가 누리는 축복을 세어보라(Count your blessings)’는 영어 속담처럼 축복을 나열해봤더니, 축복의 이유가 너무 많았다는 것이지요. “첫째, 나는 인간이다. 둘째, 내 주위에는 늘 좋은 사람들만 있다. 셋째, 내가 사랑하는 일이 있다. 넷째, 남이 가르치면 알아들을 줄 아는 머리와 남이 아파하면 같이 아파할 줄 아는 마음을 갖고 있다.”며 하늘의 축복을 받으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장교수의 삶의 특징 중에 하나는 희망을 살며 희망을 노래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삶은 희망 그 자체였습니다. 그가 하는 말 중에 인터뷰를 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받는 질문이 있다고 합니다. 신체장애, ‘암 투병 등을 극복한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가’라고 할 때마다 참으로 난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냥 본능의 힘이라고 말하며, 그건 의지와 노력으로 가질 수 있는 힘이 아니라 내 안에서 절로 생기는 내공의 힘, 세상에서 제일 멋진 축복이라고 하며, 난 그렇게 희망을 아주 크게 떠들었다고 합니다. “희망을 가져라, 희망을 갖지 않는 것은 어리석다”고 하는 스스로 희망 전파자 였다는 것입니다.

그가 인용한 에피소드도 있는데, 두 개의 독에 쥐 한 마리씩을 넣고 빛이 들어가지 않도록 밀봉한 후 한쪽 독에만 바늘구멍을 뚫어 놓으면 똑같은 조건하에서, 완전히 깜깜한 독 안의 쥐는 1주일 만에 죽지만 한 줄기 빛이 새어 들어오는 독의 쥐는 2주일을 더 산다고 하면서, 그 한 줄기 빛이 독 밖으로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되고, 희망의 힘이 생명까지 연장시킨 것이라고 희망을 이야기 합니다.

혼탁한 세상에 그분은 글과 행동이 일치하는 지성인으로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신선한 영혼의 울림을 주신 분이었다고 합니다. 5년전 찾아온 유방암이 치유된줄 알았으나 2차로 척추암으로 전이되고, 그것 역시 치유되었으나, 작년 여름 3차로 암이 간까지 전이된 것이 발견되어 또다시 치료에 전념하였으나 끝내 하나님께서는 그를 하늘나라로 데려 가셨습니다.


"엄마 미안해, 이렇게 엄마를 먼저 떠나게 돼서.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 찾아서 기다리고 있을게. 엄마 딸로 태어나서 지지리 속도 썩였는데 그래도 난 엄마 딸이라서 참 좋았어. 엄마, 엄마는 이 아름다운 세상 더 보고 오래오래 더 기다리면서 나중에 다시 만나."

고(故) 장영희(57) 서강대 교수가 '엄마'에게 남긴 편지입니다. 장 교수가 죽기 직전 병상에서 쓴 마지막 글입니다. 스스로 장애를 갖고 불편하게 세상을 살았지만, 불편함과 장애가 그의 세상을 보는 아름답고 선한 눈을 바꾸지는 못하였습니다.

장 교수의 편지는 단 네 문장으로, 100자 밖에 되지 않았지만, 지난달 28일 병원에서 퇴원해 집에 가기 직전, 병상에서 노트북 컴퓨터로 사흘 걸려서 썼다고 합니다. 막내 여동생 순복(47)씨 이야기로는 "통증과 피로감으로 정신이 혼미한 상태라 한 줄 쓰다 쉬고, 한참 있다 또 몇 자 보태고 하는 식으로 쓰느라 그렇게 됐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대학교 2학년 때 읽은 헨리 제임스의 <미국인>이라는 책의 앞부분에 어떤 남자를 소개하면서 “그는 나쁜 운명을 깨울까 봐 무서워 살금살금 걸었다”라고 표현한 문장이 나오는데, 장교수님은 “ 난 그때 마음을 정했다. 나쁜 운명을 깨울까 봐 살금살금 걷는다면 좋은 운명도 깨우지 못할 것 아닌가. 난 나쁜 운명, 좋은 운명 모조리 다 깨워가며 저벅저벅 당당하게, 큰 걸음으로 걸으며 살 것이다, 라고... 아닌 게 아니라 내 발자국 소리는 10미터 밖에서 사람들이 알아들을 정도로 크다. 낡은 목발에 쇠로 된 다리보조기까지, 정그렁 찌그덩 정그렁 찌그덩, 아무리 조용하게 걸으려도 걸을 수 없다. 그래서 그런지 돌이켜 보면 내 삶은 요란한 발자국 소리에 좋은 운명, 나쁜 운명이 모조리 다 깨어나 마구 뒤섞인 혼동의 연속이었다.”

수필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중에서. 그는 세번째 암이 간 까지 전이된 것을 통보받고, 장애에대해 걱정스럽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사람들과 함께 좋아하는 일을하며, 멋진세상을 사는 축복을 누리면서 살아갈 뿐! 신은 우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하기위해서 넘어뜨린다. 나 역시 넘어질 때마다 어떻게 다시 일어서야 할 지를 생각한다. 맞다, 지난 3년간내가 살아온 나날은 어쩌면 기적인지 모른다. 힘들어서, 아파서, 너무 짐이 무거워서 어떻게 살까 늘 노심초사했고 고통의 나날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는데, 결국은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열심히 살며 잘 이겨냈다. 그리고 이제 그런 내공의 힘으로 더욱 아름다운 기적을 만들어 갈 것이다.”라고 합니다.

또 그의 이야기를 빌리면 “세상의 뜻모를 고통과 고난, 장애가 곧 절망이 아니라 '사랑하지 못하는 마음이야말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장 불편한 장애이고, 희망을 버리는 것이 곧 천국을 버리는 것'이라 가르쳐주었고, 영원히 남는 것은 오직 사랑뿐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일러 주었다. ”고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행복을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주신 은혜, 이미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할, 맛 보아야 할, 나누어야 할 소중한 것들을 주셨으니 그 귀한 은혜를 맛 보며 살라는 것입니다. 말씀드렸지만 성경은 하나님 나라의 행복, 뜻에대해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늘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그렇게 사셨고, 하나님 나라의 행복과 잔치에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제 서교수님이 행복은 기질적으로 타고 나는 것이다 했을 때 아! 왜 성경이 하나님 나라의 복, 하나님의 뜻에대하여 말하는지를 직감적으로 느꼈습니다 - 맞아 내가 기질적으로 행복하게 태어나지 않았는데 어쩌라구, 아무 상관없이, 마치 장영희 교수가 그의 목발을 집고 정그렁 찌그덩 정그렁 찌그덩 덩그렁 걷듯이 관계 없이 살아가는 것이 맞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소위 행복에대한 기조의 것들이 얼마나 허한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기쁨에대해 감사에대해 평화에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간혹 말씀드렸지만 그런 의미에서 살전5:16~18은 우리에게 귀한 은혜를 주십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저는 이 말씀에 몇 가지 말을 붙인다면 사40:31의 희망의 독수리가 하늘 높이 솟아오르기 위해서 날개짓을 하는 것 처럼 우리가 항상 기도 할 때 기쁨과 감사의 날개가 퍼덕이기 시작하면 희망을 향하여 높이 솟아오른 다는 것입니다. 행복한지 행복하지 않은지가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베푸시는 생명의 은혜를 맛 보며 나누고 사는지 그렇지 않은지입니다. 나에게 주신 희망의 날개짓을 지금 하고 있느냐 라는 것입니다.

장영히 교수는 그의 ‘영미시산책’이라는 부제가 달린 ‘축복’이라는 시집을 표냈는데, 대부분의 시가 희망을 주제로 하는 영미 작가의 시인데 목차 마지막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희망은 우리가 열심히 일하거나 간절히 원해서 생기는게 아닙니다. 상처에 새 살이 나오듯, 죽은 가지에 새순이 돋아나듯, 희망은 절로 생기는 겁니다. 희망은 우리가 삶에서 공짜로 누리는 제일 멋진 축복입니다.” 또 그는 이 시집을 펴내는 머리말에서 이 희망을 주제로 하는 영미시집의 제목을 무엇으로 정할까 한 참을 고민하였는데, 출판사에서는 ‘희망’이라 하면 어떠냐고 하길래 그렇게 직접적인 표현은 재미없다고 하면서 한참을 고민하였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내 머리 위로 향기로운 꽃 폭죽이 터지듯, 그냥 듣기만해도 마음을 기쁘고 설fp게 하는 신이 우리에게 준 최대의 축복’ 그래 축복이라 이름짓자 했답니다. 희망! 때문에 더 아름다워지고, 아름다워진 내가 다시 누군가를 축복하고 그래서 더 눈부신 세상을 만나고 더 아름답게 살아가라고 신이 내린 축복. 희망”말입니다.

그는 거듭 ‘축복’에서 ‘우리는 우리가 공짜로 누리는 축복. 우리 안의 희망의 소리를 듣지도 않고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기 일 수 입니다’라고 하면서 머리말 끝에 ‘축복같은 꽃비가 아니 꽃비 같은 축복이 나리는 이 아침에 하며 머리말을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불행하십니까? 아니면 행복하십니까? 삶은 불행이냐, 행복이냐가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되다고 선언하고 계십니다. 그 복된 것 혹 잊고 살고 있지는 않는지요? 잊었다면 어디서부터 잃어버렸는지요? 찿아 나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서 그 축복을 꽃비처럼 뿌리며 나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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