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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서 가시는 생명의 삶( 2009년 5월10일, 어버이주일)

하늘기차 | 2009.05.10 14:22 | 조회 2239


하나니님 앞서는 생명의 삶

2009년 5월10일(어버이주일) 시16:1-11

오늘 말씀 시16편은 삶의 기쁨, 행복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삶의 기쁨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말씀은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삶의 기쁨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모신다고 하니 어른 모시는 것 처럼 부담스러운데, 그러나 한글개역 성경은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앞서 가시고 우리가 뒤를 따라가는 삶에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한 삶이 기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앞서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11절을 다시 보면 “주님께서 몸소 생명의 길을 나에게 보여 주시니”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삶이 기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시편 기자가 이야기 하는 이 기쁨이라는 것은 생명의 길을 걷는 기쁨을 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먹고 마시는 기쁨에대한 것이 아니라 생명을 누리며, 생명을 얻고, 나누는 생명력 있는 삶을 사는 기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적에 그러니까 이제 초등학교 1학년이나 되었을 때, 아니면 2,3학년 정도 때인 것 같습니다. 제가 살던 곳이 영등포였던 것으로 기억이 나는데, 그런데 지금은 그런 곳은 다 없어지고 말았지만, 옜날 제가 살던 곳은 하천이 흐르고, 논과 밭 그리고 논둑길이 끝없이 이어져 있고, 옛날에 그런 곳 아닌 곳이 없었겠지요? 그리고 학교 뒤에는 기찻길이 있고, 미군부대와 연해서 연못이 있어서 그 곳에서 낚시를 하여 송사리나 피라미를 낚아 올리던 기억이 납니다. 내가 살던 곳의 그 전체가 그야말로 끝없는 무한한 생태적 공간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듭니다. 하늘의 별을 보며 무한한 우주를 바라보는 그 마음도 역시 무한함, 무한한 하나님에대한 간접적인 체험을 맛 볼수 있는 자연 공간이 아닌가 하는데, 도시에서 사는 우리에게 별을 보는 것은 별을 따는 것 만큼이나 여렵습니다.

지난 여름 중고등부 학생들과 설악산을 다녀 왔습니다. 하산하면서 그 산아래에 왠 음식점과 숙박시설과 유흥을 위한 시설로 가득 찼는지 모릅니다. 남한에서는 그래도 지리산 설악산이 자연에대한 경외심을 한 껏 자아낼 만한 공간인데도 그 경이론운 산이 모두 돈놀이에 천박한 놀이동산, 관광지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지난 겨울 청소년들과 함께 기차 여행을 떠났습니다. 기차 맨 뒷 칸에서 스쳐 지나가는 정겨운 경치들을 보면서 그 모습 하나 하나 카메라에 담고 이야기 거리를 떠올리며 즐거워 했던 기역이 납니다. 그런데 그렇게 완행 열차를 타고 가며 주변의 건물, 경치, 간판, 다리, 시냇가, 학교, 교회,,, 등을 바라보면서 이제 이런 이야기 거리도 없어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실제 서울과 부산을 잇는 고속철도를 타면 아무런 이야기 거리도 한 개도 없습니다. 그저 잠을 자거나 모니터로 동영상을 보는 것 외에, 이야기를 주고 받을라치면 다른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합니다. 반듯하게 각을 세워 줄 지어놓은 아파트 단지들을 보아도 좀 처럼 이야기 거리가 생길 수가 없습니다. 고기리로 들어오는 완성된 2차선 도로를 보면 아무 할 이야기가 안 떠오릅니다. 아마도 언젠가는 이야기가 사라질 때가 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야기야말로 절대 무한의, 생각 저 넘어의, 미쳐 꿈 조차 꿀 수 없는, 그러나 일어나고야 말 아름다운 일들을 담아내는 그릇이라 할 수 있는데, 그렇게 무한함의 것들이 우리의 삶에서 점점 사라집니다. 마치 고층 아파트들의 깍아 놓은 건물벽과 같은 가로막힘, 단절,,,,등 만이 남아있는 것을 봅니다.

한 번은 아니 종종 저는 동생들과 동네 아이들과 함게 영등포 하천 뚝으로 나가면, 그 봄에, 어딘가 무한정으로 뻗어 나갔다가 신나게 놀고는 해가 뉘엿뉘엿 질 때, 배에서 꼬로록하는 배고프다는 종이 울릴 때에야 비로소 집에 들어오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또 서울로 이사 와서 살 때에는 저녁을 먹고 골목골목을 누비며 캄캄한밤 늦게 까지 가로등불이 환하게 골목을 비추는 곳곳을 쏘다니며 도둑놈 잡기, 다방구, 집뺏기 놀이 등을 하면서 땀 뻘뻘흘리며 뛰어놀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이런 놀이, 이런 공간이 우리 주변에서는, 아니 도시화된 공간에서는 찿아보기가 힘이든 때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한 번은 어느분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자신이 어렸을 때 땀 뻘뻘 흘리며 한 껏, 마음 껏 뛰어 놀던 기억이 새삼스럽다고 하면서 자기는 일의 원동력, 삶의 원동력이 그렇게 어릴적 한 껏, 마음껏 뛰어놀던 것에서 오지 않는가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맞다, 그렇다’고 맞장구를 처 주었습니다.

저도 어릴적에 제가 살던 곳 어디서나, 초등학교 5,6년 때는 삼청동 말바위를 끝없이 타고 넘었던 생각이 납니다. 그 때에는 청와대 담을 들락날락 했던 때입니다. 그렇게 원없이 한없이 놀았던 것 같은데, 이런 무의식적인 내적 체험이 아마도 어떤 근원의 힘, 그러니까 저로서는 하나님의 무한함을 그렇게 무의식 속에서 체험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이런 무한함에대한, 끝이 없는 것 같은 내적 힘은 우리들의 삶 속에 어떤 어려움이나, 고난, 자기 연민에 깊이 빠질 때, 마음 속에 어두움으로 가득체워질 때, 그리고 스스로의 삶의 기준들이 무너져 내릴 때, 스스로에대한 그리고 함께 하는 것들에대한 끝없는 사랑으로 솟아오르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면에서 지금을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그런 한 없는, 끝없는 것에대한 간접 체험이 물론 있겠지만 거의 패쇄적이고, 인위적일 수가 있다는 것에 항상 아쉬움이 있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면서 작은 사람 하나라도 죄를 짓게하는 자는 하면서 네 손이나 발을 찍어버리라, 네 눈을 뽑아 버리라고 하자 제자들은 겁을 덜컥 먹습니다. 그리고는 베드로가 그러면 “주님, 한 신도가 내게 죄를 지을 경우에,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하고 질문을 합니다. 그 때에 예수님은 “일곱 번까지가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해야 한다. ”고 합니다. 절대 사랑입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관심은 항상 하나님이십니다. 베드로가 고난에대해 반대하는 이야기 했을 때에 예수님은 서슴없이 베드로에게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하셨습니다. 산상수훈에서도 에수님은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먼저 해야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도 예수님은 끊임없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대해서 말씀하시고. 내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다고 합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사람들은 잘 이해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종종 여러 가지 질문을 해 올 때, 예수님은 대부분의 경우 그 질문에 그대로 대답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질문 자체가 자기 개인적인 삶에 천착하여 이기적인 답을 구하고자 하는 질문이거나 아니면 두려움이나, 불안에서 비롯된 질문들이기 때문입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에게 밤에 찿아와 기적에 대해 질문했을 때에도, 그리고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 할 때에도 그 질문에대해 즉 답을 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회복 할 때가 지금입니까?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자가 누구입니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어떤 여자가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은 참으로 복이 있다고 하자 예수님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이 복이 있다”(눅11:28)고 합니다. 더나아가 어떤 사람은 형제와 재산 다툼이 일어나자 그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에게 해결해 달라고 찿아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람들에대해 탐욕을 멀리 하라 하면서 재산이 차고 넘처도 사람의 생명은 거기에 달려 있지 않다고 합니다. 어디에 달려있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찿아와 질문하는 내용들의 대부분은 물질, 장차의 삶에대한 두려움, 염려, 실제로 지금 당장 나를 곤욕스럽게 하며, 힘들게 하고, 내 마음의 질서, 가치를 흔들어 놓는 일에 두려워 하며, 근심하며 주님께 나아옵니다. 항상 그 문제들에 벗어나지 못하고 그 문제에 붙들려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를 보지 못합니다.

어느 소설가의 이야기인데 오랜 만에 수첩에 적혀있는 전화 번호로 연락을 하여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 여전히 남편 흉을 보더랍니다. 옛날에 만났을 때에도 남편 흉을 보며 못살겠다고 하길래 그럼 이혼하라고 했던 기억이 나는데 그 후 이렇게 또 만났는데 여전히 남편 흉을 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충고를 듣고도 여전히 예전의 나쁜 모습 다시 보이는 그 친구와 더 이상 만날 이유가 없다는 생각에 수첩에서 그 친구의 전화 번호를 지워버렸다는 것입니다.

또 한 사람의 이야기인데 이제 나이가 60이 넘은 부인인데 남편과는 10년 전 쯤에 사별을 했는데, 그동안 남편과 살아오는 동안 남편 때문에 참 많이 힘들게 살았더라는 것입니다. 저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60이 넘어 남편과 함께한 지난 세월을 돌아보니 내가 왜 그 남편 생각 때문에 내가 즐기고 맛 보아야 할 즐거워야할 삶을 놓쳤나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자신에게 닥치는 염려와 근심에 천착할 수 밖에 없는 안타까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두려움, 근심 걱정은 큰 시스템을 가지고 우리들의 생활 속 깊이 친근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예를들어 중고등학생들은 이번 시험을 못 본다면, 또 어른들은 병원의 진료가 잘 못 나온다면, 은행 대출이 안된다면, 이 번 프로젝트가 무산된다면, 북한의 개성 공단이 철수 된다면, 교육, 사업, 건강, 정치, 문화, 인간 관계 등 그리고 그러한 두려움 뒤에 있는 병원, 학교, 부모, 선생, 교회 목사, 기업사장, 언론, 등 조직화된 사회 속에서 우리는 만들어지는 그리고 만들어내는 두려움에 빠지기가 십상입니다. 특히 남과 북으로 갈라져 아직도 해묵은 이데올로기의 안보논리가 우리를 거짓 두려움으로 몰아가는 이 시대 속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질문들은 커다란 조직체계를 갖고 우리들의 삶을 조여옵니다. 이런 두려운 질문들과 두려운 문제 의식을 갖고는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 자유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생존의 문제들이 우리 삶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 보면 하나님의 말씀, 기도, 하나님의 큰 사랑, 은혜가 모두 한갖 미사여구에 그칠 경우가 십상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대해 이야기 할라치면 그래서 어떻하다는 것인가라고 일축하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거듭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공중의 나는 새와 들의 백합화를 보라 하면서 염려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것은 이방인들이나 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도 요한은 미래에대해 불안해 하는 사람들에게 요일4:17에서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두려움은 형벌과 맞물려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것입니다.”고 합니다. ‘형벌과 맞물려 있다’고 하는 말씀을 보니 그 두려움이 마치 천형과 같이 다가옵니다. 늘 근심하며, 걱정하며, 염려하며 살아갑니다. 일생을 그렇게 소비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근심 걱정 없는 삶이 어떤 세상인지도 거의 잊어버릴 정도로 우리는 근심, 걱정, 두려움에 붙들려 있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를 근심하게 하며, 염려하게 하고, 걱정을 달고 살아가게하는 이유를 사도 요한은 완전한 사랑에 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에 어느 집에 숨어있던 제자들에게 찿아오셔서 하신 첫 마디가 평화였습니다.

헨리 나우엔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인 기적 사건에대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갈릴리 디베랴 바닷가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저녁 때가 되어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인 안드레가 요6:9에서 “여기 한 아이가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고 예수님께 반신반의합니다. 안드레는 그 많은 사람들에 압도되어 이까짓것 가지고 무얼 어떻게 하겠느냐고 합니다. 차라리 우리끼리 간단히 요기하는 것이 차라리 낫지 않는가 하는 의사 표시도 되지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절박한 상황을 한 순간에 바꾸어버립니다. 예수님은 안드레의 투정어린 질문을 역시 받아들이지 않으시고 사람들을 앉게 하고는 빵을 들어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는 나누어 주라 하셨습니다. 보리떡5개와 물고기 2마리는 5천명이 먹기에 턱도 없는 아주 극소의 양일지 모르지만 예수님의 눈에 비친 보리떡 5개와 물고기2마리는 하나님께서 지금 여기 모여있는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귀한 선물로 본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꺼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그 떡을 그 곳에 모여있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나눈 것입니다. 6:13에 보면 “그래서 보리빵 다섯 개에서, 먹고 남은 부스러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의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그렇습니다. 시편 기자는 9절에서 “주님, 참 감사합니다. 이 마음 기쁨으로 가득 차고, 이 몸이 아무런 위험도 느끼지 않는 까닭은...”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마치 예수님이 보리떡5개와 물고기2마리를 놓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과 같습니다. 1절에 하나님께 지켜달라고 하며 피한다는 것을 보면 10절에서 “주께서 나를 보호하셔서 죽음의 세력이 나의 생명을 삼키지 못하게 하셨으며, 주님의 거룩한 자를 죽음의 세계에 버리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는 것을 보면 목숨이 경각에 달하여 급히 주께 피하는 상황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다윗은 그렇게 일생 위험과 환난과 고난을 달고 산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서를 보면 다윗의 삶이 얼마나 고난의 연속이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전쟁, 원수, 인륜이 무너져 버린 가족의 아픔 등...그러나 다윗의 시를 보면 언제나 하나님에대한 감사와 찬양, 그리고 기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다윗에게 다가오는 근심, 걱정과 두려움이 다윗을 털 끝 하나도 건드리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바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와 경륜에 거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여호와를 항상 앞에 모시며,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는 삶은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항상 현재형이었습니다 . 그래서 다윗은 언제나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다 고 고백을 합니다.

오늘 교회 솔 밭에 아름다운 모란꽃이 함박 꽃을 피워냈습니다. 5월 초 늘 어김없이 초록의 잎새들과 어울려 보라 빛의 꽃을 피워냅니다. 언제 보아도 탐스러운 꽃입니다. 근데 이 꽃을 보며 문득 서정주 시인의 국화옆에서라는 시가 떠 올랐습니다. 소쩍새가 밤새 울었고, 그리고 천둥 과 비 바람에 아름다운 국화가 피어 난다는 잘 아는 시입니다. 가만히 자연을 둘러 보면 그렇게 된 서리, 땡 볕의 가믐, 큰 바람과 거센 빗줄기를 맞지만 꽃 나무들은 결국 그 속에서도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고, 열매를 맺는 모습을 봅니다. 그 가믐, 바람, 땡볕이 그 모란, 국화를 어떻게 건드리지 못합니다. 오히려 보다 더 아름답게 빛나게 해 줍니다. 주님을 앞에 모시는 사람의 삶도 그렇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고난에대해, 근심, 걱정에대해 이야기 할 때 보면, 만약 인생이 10가지라 한다면 아마 1,2 가지로 염려하며 두려워 하고, 걱정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8~9 가지 놓아두고 1,2 가지에 천착하여 결국 죽을 때까지 하는 말이 인생 망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1,2 가지를 선택하여 그 선택에 목을 메고는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교우여러분! 그런 어리석음에서 벗어납시다. 예수님은 그래서 우리에게 거듭 염려하지 말라 하신 것입니다. 이제 두려움, 염려, 걱정의 조직체계, 시스템에서 벗어납시다. 그 틀에서 자리를 옮겨 하나님의 무한하신, 미쳐 꿈에서 조차도도 꾸어 볼 수 없는 생각과 사고 저 넘어의 하나님의 섭리, 두려움과 염려와 걱정 보다 무지 무지 크신 그 섭리,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에 머물기를 감절히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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