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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이 땅에서의 부활(2009년 4월19일, 부활절후둘째주일)

하늘기차 | 2009.04.19 14:15 | 조회 2682


지금, 여기, 이 땅에서의 부활

2009년 4월19일(부활절후둘째주일) 요20:1-9

A.I라는 SF영화에서 인조 인간이 인간이 흘리는 눈물을 희안하게 생각하며 그 눈물을 분석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화학적으로 분석해 보아야 H2O와 소금기 등 그 외에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인간의 눈물에는 그 화학성분외에 슬픔, 기쁨, 억울함, 통회함, 감사, 감격 등 ... 화학적 성분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감성과 체험이 있습니다.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을 썩어문들어진 살이 다시 아물어 보송보송해지고, 썩은 냄새가 사라지고, 혈관에 혈액이 돌고, 심장이 박동하더니, 숨을 토하더라! 하며 부활을 설명할 수 있지만, 이것은 단지 어떻게 생명이 명(命)을 다했다가 다시 생(生)할 수 있나를 의학적으로 설명하는 생물학적 보고 이외의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과학이 발달하여 인간을 복제할 수도 있는 그러한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부활을 무조건 믿으라 할 수도 없는 것이 이 부활의 딜레마입니다. 그러나 이 부활의 역사적 사실을 믿지 못하는 것은 오늘 이 시대 뿐만이 아니라 예수님 당대에도 믿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부활은 충격이였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우리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부활은 우리가 받아들이기에 너무 충격적이고, 너무 벅차 어찌할 줄 모를 수 밖에 없으며, 부활을 처음 목격한 여인들처럼 두려울 수 밖에 없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부활을 보고 듣고 만지며 예수님과 함께 했던 제자들을 통해서 선포되고, 증거되고, 고백되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초대교회의 사도들이 역동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것을 봅니다. 그런데 이렇게 고백되고, 증거된 부활이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라는 것입니다?

만일 죽었던 사람이 지금 살아난다면 어떨까요? 지금 우리가 잘 아는 분이 돌아가셨는데, 다시 살아났다고 합시다. 어떨까요? 전 세계 특종감일 것입니다. 아마 그 사람은 전 세게의 언론과의 인터뷰 때문에 평생 시달리다가 죽어가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여기 저기서 다시 살아나는 사람들이 거듭 이어진다면, 이제는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에 별 관심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문제는 다시 살아났어도 또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살아났는데 이전 모습 그대로라고 한다면 그것은 부활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현세의 부활은 예수님 한 분의 부활로 족합니다.

얼마 전엔가는 신문에서 죽음에대한 체험,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대한 이론을 연구하는 사람에대한 기사가 실린 것을 보았습니다. 인도에 가서 오랫동안 연구를 했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수 많은 사람들에대한 임상 기록도 갖고 있다고 하면서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전부 가짜입니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나며, 죽음에대해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까? 죽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아니 죽음 이후의 삶에대한 이야기를 현실감 있게 한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성경은 죽음 이후에 대해 무어라 이야기 하고 있나요? 통상 신앙을 떠나서 사람들은 죽으면 육은 땅에 묻히고, 영은, 영은 어떻게 되나요? 예수 믿고 죽으면 천당 가고, 예수 안 믿고 죽으면 지옥 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옛날 처음 이 땅에 복음이 들어왔을 때에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이해하기 쉽도록 예수 천당, 불신 지옥 했지만, 예수 믿고 죽으면 천당가고, 예수 안 믿고 죽으면 지옥 가고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 안 믿고 죽은 영은 죽어서 귀신이 된다고 합니다. 적지않은 교회에서도 이렇게 말하는 것을 얼핏 듣기도 한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주장은 모두 헬레니즘에 바탕한 2원론적인 세계관에 근거한 논리이며 가치입니다. 또한 죽어서 귀신된다는 것은 우리의 토속적인 샤머니즘에 근거한 주장이기도 합니다. 모두 허황되고 근거없는 주장입니다.

성서는 사람이 죽으면 몸이 흙이 되고 영은 천당에 가는 것이 아니라! 영과 육이 모두 죽는 죽음에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 따로, 육 따로의 죽음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 떠난 것을 죽음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떠나 먹고 마시고 생각하고 느끼고... 하는 삶에대해 성경은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생명이란 하나님에게 있으며, 그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우리는 살아있는 것입니다. 살았다고 다 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떠난 삶은 죽은 삶인 것입니다. 죽어있는 나무들은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러나 살아있으면 열매를 맺습니다. 그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그 사람의 삶의 열매를 보면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서는 죽음의 냄새가 피어나지만, 어떤 사람에게서는 꽃향기가 벌과 나비를 부르듯이 생명의 향긋한 향기를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크리스찬들입니다. 자유, 평화, 사랑, 관용, 나눔, 용서, 화해, 소망의 향기를 솔솔 풍깁니다.

그러니까 죽음을 그렇게 2원론적으로 보니까 별 잡다한 가치와 변론과 미신 등의 이야기들로 덫칠해 지는 것입니다. 천국에 갔다 왔다는 둥 하는 이야기 말입니다. 저는 이러한 자연적인 죽음에대해 성경이 가장 잘 말해주는 것 중에 하나가,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표현 중의 하나가 ‘잔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5:39에 보면 예수님께서 한 죽은 아이를 보시고는 ‘잔다’고 합니다. 이렇게 이렇게 영과 육을 하나로 보며 이야기 하면 문제가 없는데 육 따로 영 따로의 죽음을 이야기 하니까 부활도 그런식으로 이야기 되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죽은 사람이 단지 생물학적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요, 2천년 전의 예수의 부활만을 바라보는 것도 아니오, 또 앞으로 주님 다시 오실 때의 부활을 소망하는 것만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 속에서 내가 밟고 살아가는 이 땅에서의 부활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릴 때, 그 여동생 마르다를 만납니다. 그 때 마르다가
“주님,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네 오라버니가 살아날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러자 마르다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그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내가 압니다.”라고 합니다. 마리아의 이 고백은 당시 유대교의 종교에 익숙해 있는 유대인들의 전형적 대답이었는데, 예수님은 그 대답을 거부하십니다. 종교적인 문답하지 말자는 것입니다.그러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고 물어보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마르다에게 처럼 질문을 하고 계십니다. 이 질문은 하나님께서 지금 이 자리에서 영원한 부활의 생명의 잔치에 초대하는 요청인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그렇습니다. 다가올 부활이나, 2000년 전의 부활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나와 어떤 관계가 있냐는 것입니다. 주님이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듯이 지금 이 곳에서 부활을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참 부활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와 영생에대해 이야기 하는 중에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는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나의 삶의 자리 속에서 부활을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다시오실 날의 생명의 부활을 알 수 있겠습니까? 천만 부당의 말씀인 것입니다.

최근 문규현 신부, 수경 스님, 정종훈 신부 3분의 종교인들이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오체투지를 시작하였다. 올 해에는 북한 묘향산 까지 간다는데 어찌될지 모르겠습니다. 이분들이 왜 이렇게 몸으로 길을 가는 것일까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총무이신 김인국신부는 한겨레 신문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오체투지 순례는 내일 4·19혁명 기념일에도 계속된다. 순례자들은 묻고 또 묻는다.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산다는 게 무엇인가? 구경꾼들은 꼿꼿이 일어섰다 산산이 부서지듯 엎어지는 이 희한한 행렬이 궁금하다. 당신들 지금 뭐 하는 거요? 매 순간 뼈를 깎듯 분투하는 순례자들의 깊은 심중을 어찌 헤아릴까마는 아마 싸우고 있을 것이다. 누구를 거슬러? 조만간 물러갈 권력 따위에 맞서는 그런 치사한 다툼이 아니다. 괴물이 되어버린 인간 자신과의 싸움이다. 자기를 이겨낸 힘이 아니라면 불의는 반드시 되돌아와 우리를 괴롭힌다. 49년 전 권력을 이겨서 불의를 몰아냈다면 지금은 인간을 이겨서 불의를 쫓아낼 때다. 무례와 무도의 시절, 오체투지의 순례자들이 사람의 길을 닦는 참혁명을 위해 진땀을 흘리고 있다.

왜 이 분들이 이렇게 힘들게 몸으로 길을 가고 있을까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통일, 교육, 언론, 부동산...그리고 교계로서는 감리교 사태 등...많은 일들이 어두움의 수렁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는 것을 봅니다. 아마도 이 어두움에 대항하는, 그리고 소망하는 몸짓인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리 사욕과 우상숭배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자 구약의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때 독특한 행동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였습니다. 이사야 같은 예언자는 사20:2,3에서 보면 벗은 몸으로 맨발로 3년 동안을 다녔다고 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벌겨벗긴채로 끌려갈 것이라는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는 자기 어깨에 소가 메는 멍에를 메고 다녔습니다... 아마 이분들의 오체투지의 행위도 사람들에게 무엇이 진리이며, 어떤 것이 희망인지를 묻고, 답하는 모습이 아니겠나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우여러분 이 고통, 고난이 없다면 부활도 없는 것입니다. 앞에서 계속 죽음에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그런 사이비 같은 죽음이 아니라, 성경은 고난에대해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에대해 이야기 할 때 제자들은 그 고난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에 모두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에대해 실족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우리를, 우리의 이기심, 욕망, 거짓을 드러내 주었고, 또한, 드러난 모든 것을 깨끗이 씻어주었습니다. 만일 십자가가 아니었다면 제자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는데 급급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메달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자신들의 이기적인 꿈을 십자가 앞에서 접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각기 자기 길을 갔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바로 그렇게 십자가에 등 돌린 제자들을 찿아 나선 것입니다. 성경은 주께서 부활을 보여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부활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못한 제자들에게 부활도 역시 받아들이기에 벅찬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며, 당혹해 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이 찿아오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등을 돌리니 부활에대해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사람이 어떻게 죽었다가 살아나’ 하며 납양특집 수준의 천박한 죽음 앞에 서성거립니다. 그러나 고난을 받아들이면 모르는 사이에 부활은 우리에게 찿아오는 것입니다. 마치 무서워 문 꽁꽁 닫아 걸고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찿아오셨듯이 그렇게 주님은 부활로 우리에게 찿아오십니다.

이상권님의 ‘애벌레를 위하여’라는 생태동화가 있습니다. 그 책은 13 마리의 가중나무 고치나방 애벌레의 일대기를 그린 동화인데, 그 동화 속에 다양한 생명들이 함께 살아가는데, 사실은 치열한 약육강식과 생존경쟁의 처절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특히 이상권님의 글이 좋은 것은 그 생명체들 그대로의 삶을 처절하게 그리는 것입니다. 개미가 애벌래를 습격하여 살을 뜯어먹는 이야기나, 고양이가 호랑나비를, 등등의 먹고 먹히는 고통과 아픔의 이야기들을 그대로 이야기 해 줍니다. 거기서 느끼는 것은 모든 자연의 살아있는 것들이 그렇게 자신을 고통 속에서 다른 생명에게 값없이 내어 주고, 또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피조된 생명의 실존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고통, 아픔을 피해가려는 생명체가 있는데 바로 인간입니다특히 현대인들은 편리함, 과학문명에 길들여져 감당해야할 고통, 아픔을 자꾸 피하려고 합니다. 이 아픔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부활, 지금 내가 땅을 딛고 서 있는 이 곳에서의 부활은 없는 것이니다. 롬8:22에서 사도 바울은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피조된 인간에게 고통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고통에는 해산의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에대해 이야기 할 때에 변화의 부활을 이야기 합니다. 고통은 우리를 변하게 합니다. 온전치 못한 것을 온전케 하는 하나님의 헤아리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해산의 희망적인 고통을 피하려고 합니다. 모든 삼라만상이 이 해산의 고통 속에 새로운 것을 위해 자기를 내어놓는 고통을 감당하며 살아가며 죽어가는데 유독 인간들은 고통하지 않으려 하고, 죽지 않으려 합니다. 다른 것은 죽어도 자기는 살아야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다른 고통이 찿아옵니다. 천박하고 희망이 없는 고통 속에서 죽어갑니다. 사도 바울은 딤후3:1에서 말세에 고통할 때가 이른다고 하였습니다. (새번역에는 어려운 때가 온다고 합니다)그 이하의 내용을 보면 돈 사랑, 교만, 하나님 모독, 감사를 모르고, 비방, 절제하지 못하고, 난폭하고, 쾌락을 더 좋아하고... 등 인간의 나누어 주지 않는 것에서 오는 고통에 휘둘려 괴로워 합니다. 아마 인류는 해산의 고통이 아니라, 이렇게 천박한 고통 속에 함께 자멸 할 수 밖에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지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교우여러분 우리 교회는 이 4월이 되면 이렇게 온 곳에서 부활을 보여줍니다. 이 곳 저곳에서 부활이 몸짓을 합니다. 이 환희, 이 기쁨을 위해 우리 이제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통에 내 몸 하나 피하지 말고, 다른 살아있는 것들 처럼, 숭고하게, 아름답게 스스로를 내어놓는 마땅하고도, 당연한, 편리함과 과학문명과, 이기적인 생각에서 비롯된 회피가 아닌 본래의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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