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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건물, 새 공법(2009년 3월29일, 사순절다섯째주일)

하늘기차 | 2009.03.29 15:57 | 조회 1888


새 건물, 새 공법
2009년 3월29일(사순절다섯째주일) 사43:16-21;눅20:9-19

예수님이 유월절 절기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성전에서 하신 일은 성전을 깨끗게 하신 일이었습니다. 성전의 장사치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을 모두 몰아 내셨습니다. 그 때 이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았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께 찿아와 물었습니다.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일 수 있겠느냐?’고 합니다. 다른 곳에서는 네가 무슨 권한을 가지고 이렇게 성전에서 이런 일을 하느냐고 권한에대한 물음을 묻습니다. 이것은 소위 너는 어느 기득권 출신이야라는 것을 묻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이 구역은 우리 구역인데 네가 외 끼어드느냐라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성전의 이방인의 뜰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채찍으로 내리치시며 모두 내 쫓을 때, 과연 유대인으로 구성된 성전경비대와 로마 수비대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라는 의구심을 갖는데, 그렇습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를 엮을 올가미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소란을 피우기를 기다렸다가, 사회를 문란케 하는 죄로 구속하기위한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이러한 현상은 항상 어디에서든지 똑 같이 일어납니다. 기득권 유지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한 번은 또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가나에 다시 갔었는데, 그 때에 한 왕의 신하인 자가 자기 아들의 병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찿아옵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않는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5병2어의 기적을 베푸신 후에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셨을 때, 사람들이 그 곳에도 찿아 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찿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암시를 주었는데도 이들은 곧 바로 우리들이 당신을 믿을 수 있도록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병에 걸려도 보통 중병에 걸린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복음서 곳곳에서 우리는 유대인들이 계속 기적을 구하는 모습을 봅니다. 완전히 기적 콤플렉스에 걸려있습니다.

오늘 말씀 사43:16-21의 말씀을 통해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당시 홍해를 건넜던 옛적의 일, 이스라엘이 굶주렸을 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만나의 메추라기를 더 이상 기억하지 말라고 합니다. 모세에게 나타나셨을 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라고 스스로를 나타내기까지 하신 하나님께서 옛적 조상들에게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지 말고, 생각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기적은, 그 기적을 통해 믿음을 더 확고히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더 분명히 입증하고, 약속을 보증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케 하려고 할 때에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 보는 자들에게는 믿음을 줄 때에, 그 기적이 기적으로서의 역활을 하는 것인데, 유대인들에게 이제 기적은 우상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신앙의 전부가 되고 말았습니다. 주님은 이것을 경계하십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보다 더 깊은 문제가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대제사장들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이 기적을 자꾸 내세우는 것은 이미 그들에게 하나님의 기적이 끊어진지도 이미 오래일 텐데도 불구하고 모세의 기적을 계속 찿고, 요구하는 의도는 율법에 있습니다. 이것은 이 모세의 기적이 자신들이 누리는 기득권을 지탱해 주는 율법에대한 보호막이요, 방패 역할을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그들이 지키고 가르치고, 집행하는 율법은 그 수 많은 이적과 기사를 베푼 조상 모세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강조하여 율법에대한 권위를 세우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율법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자꾸 건드리기 시작하자 종교지도자들은 모세의 기적을 앞세워 율법을 통해 자신들의 욕망, 사리사욕을 체웠던 삶의 틀이 깨어져 나가는 것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5병 2어의 기적으로 5천명이 먹는 기적을 베푸신 직 후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모세는 만나를 광야에서 우리 조상에게 주었는데, 당신은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이 무어라고 답변을 했을까요? 예수님은 단도직입적으로 내가 바로 생명의 떡이다 라고 했습니다. 내가 바로 생명의 떡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교우여러분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가나안 땅으로 향하면서 광야에서 처음으로 만나를 접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수군 거렸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인가?”라고 하는데 그 말이 바로 히브리어로 만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5병2어 기적 후에 ‘내가 바로 생명의 떡이다.’라고 하면서 요6:29에 보면
“너희의 조상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다. 그러나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빵은 이러하니, 누구든지 그것을 먹으면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나의 살이다. 그것은 세상 에 생명을 준다.” 고 하자 서로 논란을 벌였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게 무슨 소리인가?’했을 것입니다. 이 새로운 생명의 떡을 먹지 아니 받아들이지를 못합니다. 율법의 욕심과 기적의 허구만을 바라보는 종교쟁이들에게 생명의 떡을 먹자는 예수의 생명 내어놓고 하시는 말씀을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합니다.

오늘 눅20:9-19을 통해 들려주시는 포도원의 비유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맡긴 이스라엘이라는 좋은 포도원을 종교 지도자들이 율법을 빙자한 위선과 거짓으로 모두 말아먹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방관치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오셔서 자신의 아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기 까지 한 그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주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그 포도원을 맡은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는데, 그 때에 예수님께서 그 모세의 옛 이적과 기사를 표방하며 율법이라는 틀로 자신들의 온갖 욕심과 욕망을 가득 체우려는 사람들에게 한 마디 하십니다.

“ 집 짓는 사람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율법, 종교심, 그리고 이기심, 위선, 기득권, 모세의 기적 등을 가지고 옛것과 자신의 욕심, 자신들의 뜻을 가지고 유대종교의 집을 높이 높이 쌓아 올렸습니다. 이 건축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외면하였습니다. 그러나 참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들이 쓸데없다고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것입니다. 이 모퉁이의 머릿돌은 요즈음 보듯이 집 짓고 나서 건물 앞에 머릿돌이라고 하여 건축 년월, 건축주, 시공자 등의 말을 새겨 놓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집을 지을 때 머릿돌은 그 건축하는 건물의 가장 기초가 되는 돌인데, 그 돌을 드러내면 온 집이 무너지는 그러한 기초석이라고 합니다. 그냥 기초석 정도가 아니라 그 머릿돌이 빠지면 온 건물이 다 무너져 내리는 그러한 귀중한 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귀중한 돌이 왜 유대인들에게는 그렇게 대수롭지 않은, 별 볼일 없는, 전혀 쓸모없는, 버릴 수 밖에 없는 돌로 보였을까요? 문제는 표적만을 바라는 신앙의 눈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생, 공회원, 회당의 지도자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만나러 찿아 왔을 때, 첫 번째 이야기가 무어인 줄 압니까? 요3:2를 같이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랍비님,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같이하지 않으시면, 선생님께서 하시는 그런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니고데모에게 표적이 아니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라고 합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ㄹ 건축할 수 없다고 하니까, 니고데모가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냐고 하면서 어머니 뱃 속으로 어떻게 다시 들어갈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니고데모의 건축기술 가지고는 기초도 세울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 까요? 사도 바울은 빌3:7-9를 통해서 3번이나 ‘해로 여겼다’, ‘배설물로 여겼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주님이 설계 해 주신 도면을 보고서는 그 공법에 따라 하나님 나라를 건축하기 위해 지금 그가 갖고 있는 모든 know how를 과감히 버리고 있습니다. 이 건축의 공법은 어떤 공법일까요?전혀 쓸모 없는 건축 자재를 오히려 가장 소중한 머릿돌로 사용했다는 것을 보면 이것은 기존의 건축과는 전혀 다른 이전에 보지 못한, 듣지도 못한, 경험해 보지도 못한 건축이라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처럼 옛 것을 기억하거나 생각해 가지고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건축의 기초를 잘 놓아야 하는데 오늘 예수님은 눅20:18을 통해 분명히 말씀하시는 것은 이 기초로 사용할 머릿돌에 잘 못 깨어지고, 넘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예수님께서 내가 생명의 떡이다. 모세가 준 떡은 조상들이 먹고 죽었지만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나를 먹어야 산다고 하자 사람들이 수근 수근 거렸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이 걸림돌이 되느냐?”하십니다. 옛 것, 옛 생각, 옛 경험을 가지고는 새로 오는 것에 대해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수근 거리게 됩니다.

먼저 이 새 것을 감당하려면 버려야합니다. 사도 바울은 거듭 3 번이나 유익했던 것이지만 모두, 새로운 건축을 위해 버렸고 배설물 같이 여겼다고 합니다. 다시 돌아 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어떻게 해야 이 건축 공법을 따라 집을 지을 수가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한 벙어리 귀신들린 자의 귀신을 쫓아내었을 때, 논쟁이 벌어졌는데, 잠시 후에 곧 바로 또 기적을 보여달라고 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요나의 표적 밖에 더 이상 보일 것이 없다고 합니다. 또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치들과 돈 바꾸어주는 상인들을 전부 내 쫓았을 때에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역시 표적을 보여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 성전을 부수면 내가 3일 만에 이 성전을 다시 짓겠다고”고 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이 성전은 짓는데 46년이 걸렸는데 네가 무슨 용빼는 제주가 있어 3일 만에 짓느냐고 합니다.
교우여러분! 46년 걸려 짓는 건축이 아니라
3일 만에 짓는 건축입니다.
교우 여러분! 이 건축 방법을 따릅시다. 오늘 사도 바울은 이 건축 공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빌3:10,11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

10에 보면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다고 하는데, 롬8:22에 보면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고 합니다. 성도인 우리도 ‘속으로 신음하고’있다고 고백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인생에 고통과 아픔이 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이 있는데 어찌 아프지 않겠습니까? 죽었다면 아픔도 고통도 물론 기쁨도 느낄 수 없지만, 살아있는 것은 살아있기 때문에 아픔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아픔을 아퍼하는가 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 이렇게 살아있는 것의 마땅한 아픔을 마치 불행한 것으로 선전하며 광고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모든 것들에 행복, 즐거움, 자유, 더 나아가 wellbeing에 이르기 까지 아픈 것을 견디지 못하게 합니다. 나에게 다가오는 생명을 가진 존재에게 마땅히 있는 당연한 아픔과 고통을 감당하지 않고 피해간다면, 아마도 더 이상스러운, 아니 겪지 않아도 될, 겪을 이유가 없는 고통과 아픔에 힘들어 할 것입니다. 흔히 많은 사람들이 이 고통은 나만 겪는 아픔이고, 다른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아픔이고, 어느 누구도 이런 아픔을 겪지 않을 것이다라고 착각하지는 않는지, 아니 시 시대의 풍조가 그렇게 사람들을 착각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해산의 고통에대해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이 생명이 받아들여야 할 아픔을 피한다면, 아마도 생명을 잉태하는 그 희망이 없는 고통으로 힘들어 하다가 자기 생명을 다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지금 인류가 그렇게 아픔을 아퍼하지 않으므로 헛된 고통과 아픔으로 무너져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해산의 고통과 감당하지 않아야할 고통과 아픔이 뒤 섞이어서 어느것이 참 아픔이고, 참 고통인지, 어느 것이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아픔이요, 고통인지를 분별 할 수 없는 정도가 되어버렸습니다.

처음자리 습지에는 가재가 바글 바글 합니다. 그런데 그 가재는 생애에 4~5번의 허물벗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허물을 벗으려면 온 힘을 다 써야하는데, 어떤 경우에는 탈진하여 죽기도 하고, 너무 기운이 없어 자기를 잡아먹을 천적이 와서 자기를 잡아먹으려 해도 기운이 없어 피할 수 없을 정도로 탈진을 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자연은 스스로 생명의 아픔을 감당하며 죽기 까지도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어디서부터 흘러들어왔는지 모르지만 힘들고 아픈 것을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그래서 마치 저주스러운 것이 아닌가 라고 할 정도로 삶의 아픔을 피하려 합니다. 그 고통을 피하면 좀 더 나아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른 고통과 아픔, 허무한, 정말 감당하지 않아도 될 아픔과 고통으로 세월을 흘려버리고 맙니다. 온 인류가 바로 이러한 고통에 신음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끊임없이 범죄하자 바벨론에 70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그 때 거짓여예언자들은 그런 고통 없을 것이라고 외쳤고, 포로 생활을 하더라도 2,3년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해 줄 것이라고 거짓말을 외쳤습니다. 최근 전 세계에 불어닥친 이 거대 긍융 위기는 모든 지구촌의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정말 이런 고통이야말로 우리가 겪지 않아도 될 아픔이요, 고통인데 이제 그 아픔과 고통을 감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고통은 하루 아침에 없어질 고통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온 세계, 온 나라가 힘들어 할 때 잘 견디어 내야 하는데, 면역체계가 약한 우리나라는, 그러니까 사회 안전 장치, 사회 보장이 잘 되어 있지 않는 나라에서는 누가 고통을 견디고, 감당하며, 죽기까지하고, 파산하는 지경까지 가는가 하면, 바로 가난하고 병들고, 힘 약한 주변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결굴 그 병약한 사람들이 또 그 고통을 다 짊어지는 것입니다. 용산에서 있었던 전세 상인들의 죽음도 바로 그 현상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아직 장례식도 치르지 않았는데, 바로 이 분들이 이 나라, 이 세계의 십자가를 지며 지금도 고통스럽게 피눈물을 흘리는 것이 현실인 것입니다. 이 아픔 앞에 우리는 정말 속죄의 마음과 가련한 마음으로 이 일을 바라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여간 여러분 내 삶에서부터 다가오는, 내가 선택한 삶으로 말미암는 아픔과 고통 감당하며 위로를 받으시길 바랍니다. 고후1장에서 사도 바울은 주님은 온갖 환난 가운데서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분이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아버지로부터, 사람으로부터 버림받은 그 고통을 감당하셨기에 위로하기에 마땅하신 그 주님의 위로를 받으며 또 온갖 환난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하자고 합니다. 우리가 감당해야할 고통과 아픔은 해산의 고통과 아픔입니다. 그러니까 생명의 아픔입니다. 여기에는 위로가 있습니다. 이 주님의 위로에 머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바로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이 건축에 모세의 율법은 사용될 수 없습니다. 줄곧 한국교회를 이끌어 왔던 물질축복, 건강축복, 입시축복, 자녀축복하며 마치 수퍼 마켓에서 상품 광고하듯이 축복을 그렇게 값 싸게 취급하는 식으로는 이 건축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 것 저 것 다 끌어 모으는 46년 걸리는 건축 공법 가지고는 이 건축물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의 신앙을 다시 세웁시다. 교우 여러분 3일 걸리는 건축법으로 우리 가정을 다시 세웁시다. 참 하나님이 베푸시는 하늘 나라의 축복을 받읍시다. 3일 걸리는 건축법으로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업, 우리 고기 교회를 다시 세웁시다. 교우 관계를, 부모와 자녀 사이에, 부부 간에 새로운 건축을 합시다. 그러나 이것, 저것 다 끌어 모으는 옛날 것, 옛 습관, 이기적인 것, 위선적인, 습관적인, 거짓 경건의 모양만 있는, 게으른...46년 걸리는 것 말고, 그래서 완공 되기도 전에 하자가 발생하는 불실시공 말고, 3일 만에, 딱 3일 만에 다시 세우는 십자가와 부활의 건축술로 우리 다시 시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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