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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이레(2009년 3월22일, 사순절네째주일)

하늘기차 | 2009.03.22 17:08 | 조회 2171


여호와 이레
2009년 3월22일(사순절네째주일) 창22:1-9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제 남부럽지 않게 살아갈 즈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십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려라”아브라함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입니다. 다른 것 다 얻어도 이삭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 다 잃어버린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이삭을 바치라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말씀에 따라 아침 일찍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러 떠납니다. 하나님이 지시한 목적지에 다달았을 즈음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묻습니다. “번제를 바칠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손수 마련하여 주실 것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수 양 한 마리를 준비하여 아브라함에게 이삭 대신 그 수양을 대신 바치게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인 ‘여호와 이레’란 바로 “하나님이 손수 마련하여 주실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을까요? 12절 말씀에 보면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도 나에게 아끼지 아니하니, 네가 하나님 두려워하는 줄을 내가 이제 알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시험은 이렇게 끝났습니다. 너무 싱겁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끔찍하고 나에게는 그런 일이 다가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시험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약1:5에는 시험을 만나면 기뻐하라고 하면서 지혜를 구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무슨 지혜일까요? 믿음의 지혜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믿음의 지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며, 그 주권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생명, 나의 모든 것, 아니 나의 생명 보다 더 귀하다 할 수 있는 하나 밖에 없는 자식도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아브라함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절대적 주권,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행한다는 것,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삭이 “번제를 드릴 양이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했을 때 “여호와 이레”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이 지혜를 얻기 까지 100년이상이 걸린 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풍파를 다 겪은 후에 깨달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는 일은 기가 막히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실로 명령대로 한다면 윤리적으로도 있을 수 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삭을 죽여 제물로 드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거짓으로 시늉만으로 이삭을 드릴 수도 없고 약속과 명령 사이에, 진퇴양난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가 막힐 일 앞에서 아브라함은 ‘여호와 이레’라고 합니다. 이것은 체념이 아니라 하나님에대한 전폭적인 신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에서부터 오는, 모든 것을 다 드린다는 것에서부터 오는 믿음의 지혜인 것입니다.

이 지혜를 깨닫기에 걸린 시간이 100년 이상 걸렸습니다. 수업료를 톡톡히 지불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지혜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완전히 이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믿음의 지혜라 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에 드러난 이 지혜는 아브라함이 100년 걸려 깨달은 지혜인데 바로 생명의 지혜인 것입니다. 생명의 지혜는 생명을 내어 놓는 것에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지혜를 자꾸 개념작용으로 풀려고 합니다. 종교적 행위로 위로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지혜는 내어 놓는 지혜입니다. 우리 성도는 궁극에 이 지혜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지혜를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생명을 내어놓는 지혜는 표면적인, 외적인 삶의 틀에서는 찿아질 수 없습니다. 먹고 마시고, 주고 받고, 사고 팔고 하는 것에서는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들이 고통스러워 하고, 두려워 하고, 평화가 없고, 미워하고, 거칠어져 폭력적이 되는 것은 바로 그 외적인 삶의 것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특히 자본주의의 사회적 틀 속에서 사람들은 쉽게 고독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우울해 지는 것입니다. 무한 경쟁의 구조 속에서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것 처럼 살아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지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종종 사람들은 사주팔자를 보기도 하고, 점을 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아마도 자신이 생각하고 계획한 일이 잘 안되고, 또 어떻게 해야 할 지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할 때, 답답하여 그렇게 하는 것 같은데, 그것은 자신의 외적 욕구에 늘 붙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백년동안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고, 이민을 가고, 전쟁과, 재산 분할과 가정불화 그리고 후계자 없음에서부터 오는 뼛 속 깊은 두려움, 하나님과의 약속 파기의 유혹, 상속문제로 인한 가정 불화, ... 극적 상황을 수 도 없이 경험하여 도착한 것이 바로 아들 이삭을 내어 놓아야 하는 자리에 까지 나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여호와 이레’라고 한 것입니다. 교우여러분은 지금 어느만치 와 있는지요? 여호와 이레의 삶을 살고 있나요, 아니면 여전히 스스로의 힘과 계획과 정서로 살아가고 있나요?

사실 하나님의 이삭을 바치라는 것은 모든 것을 다시 원점으로 되 돌려 놓는 명령이었습니다. 사라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창11:30의 말씀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가 임신을 하지 못하여 자식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러한 존재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전 생애는 자식의 문제에서 시작하여 자식의 문제로 끝이 날 뻔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이삭을 바치라 하였습니다. 생명을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죽음을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은 시험입니다. 하나님은 당대의 제일 가는 의로운 부자였던 욥의 모든 것을 다 빼앗으셨습니다. 시험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강한 드라이브를 걸었습니다.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이삭은 부족의 후계자요, 하늘의 별 같이, 바다의 모래 같이 많은 자손의 씨앗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상속자를 얻기 위해 남몰래 마음 조리며, 눈물 흘리며 가정 풍파 일으키며, 중동의 여러 부족들 속에서 서로 힘자랑하며 때로 공포에 짓눌리기도 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이삭으로 인하여 싸움과 두려움과 불신앙과 거짓 등 그래서 그러한 삶의 고비를 다 넘기고 이제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살아가는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입니다.

사실 아브라함의 삶에서 이삭을 뺀다면 아브라함에게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이기도 하고 축복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은 그러한 삶을 산 것입니다. 이 삶이야말로 우리 성도들이 바라며 원하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언약과 축복에 목을 메고 산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삶이 어떤 삶이었는가를 신중하게 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험을 하기 직전 창21:22 이하를 볼 것 같으면 아비멜렉이 등장합니다.

어떤 내용이 기록되어있는가 하면 아비멜렉이 아브라함과 거래를 하고 있음을 봅니다. 무슨 내용인가 하면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찿아와 자신과 자신의 아이들을 속이지 말아달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아브라함에게 호의를 베풀었듯이 자기에게도 호의를 베풀라는 것입니다. 맹세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기꺼이 맹세를 합니다. 그리고는 바로 이어서 이번에는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당신의 종들이 우리 우물을 빼앗았다고 항의를 합니다. 그러자 자기는 여지껏 그러한 사실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기의 양과 소를 끌고 와서는 그 중에 새끼 암양 일곱 마리를 따로 떼어서 자신들이 우물을 판 증거로 이 일곱 마리의 양을 드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비멜렉과 아브라함은 그 일곱 마리의 양을 두고 맹세를 하였습니다.

속이지 말아달라고 하는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거짓말을 했다는 것인가요? 이 아비멜렉은 앞에서도 등장하는데 언제인가 하면 아브라함이 그랄 지역으로 이동했을 때 그 지역의 왕이었던 아비멜렉에게 생명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내 사라를 누이라 소개하였지만 결국 나중에 하나님께서 꿈 속에 나타나 사라를 건드리지 못하게 했던 기억을 아비멜렉이 알고 있었고, 게다가 거짓말은 아브라함이 했는데도 하나님은 거짓말한 아브라함을 역성드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브라함의 세력이 점점 커져 이제는 오히려 자기를 위협하는 이웃 부족으로 성장하자 아브라함에게 찿아와 평화협약을 맺은 것입니다.

이 아비멜렉은 뒤에 이삭과도 계속 관계를 맺는데, 바로 이삭이 판 우물을 빼앗고, 덮어버리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끼리 맺는 평화협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 한지를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하여간 아브라함은 21장 마지막 절에 보면 오랫동안 블레셋 지역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이 부분도 역시 꺼림직한 부분인데 하여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인 아브라함이 이러한 삶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단지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주고 받는 GIVE & TAKE의 삶 만으로 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 생애의 전부였던 이삭을 내어 놓으라 하셨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인생의 희노애락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이제 그 행복을 내어 놓으라 하셨습니다. 말씀드렸지만 언약과 축복이 개인에게서는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이며 주고 받고, 사고 팔고, 먹고 마시는 삶에 주저앉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 가셔서 처음으로 들른 곳이 어디입니까?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그 곳에서 사람들은 물건을 사고 팔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고 파는 장사치들을 내 쫓으셨습니다. 어디에서 물건을 사고 팔았습니까? 이방인의 뜰이었습니다. 성전은 이방인의 뜰 - 여인의 뜰 - 유대인의 뜰 - 성소 - 지성소로 되어있는데 지성소에서는 일 년에 한 번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대제사장이 들어갈 수 있었던 곳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을 보면 여전히 이방인의 뜰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니면 여인의 뜰, 아니면 유대인의 뜰에, 여러분은 어디에 머물러 있나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어 돌아가심으로서 지성소의 휘장은 위에서 아래로 찢기어졌습니다. 이제 누구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속죄의 장소로 나아가 죄사함의 은혜를 입고 그 곳에 머물 수 있습니다. 성도는 그 은혜의 자리에 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바로 주님의 끝까지 베푸는 사랑의 은혜 아래 나아가야 합니다. 온 인류가 이 십자가에서 보여준 ‘끝까지 사랑’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서 공중에 나는 새와 들의 백합화를 보라 하면서 염려하지 말라고 무려 일곱 번이나 말씀하셨는데, 인생을 염려하는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그것은 이방인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이방인들의, 다시말해 세상의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주고 받는 삶에 만 머물러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일깨우신 것도 바로 그 부분인 것입니다. 내어놓는 생명의 지혜가 있는 곳으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언젠가 최춘삼 할아버지에대한 다큐를 통해 그 분이 어떻게 내어놓는 생명의 삶을 살았는지를 우리는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그 할아버지의 아들을 인터뷰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는데 그 아드님이 목사님이 되어서 지금 목회를 하고 있는데, 아버님은 신앙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몸소 실천하며 사신 분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내일 일은 절대로 걱정하지 않는 분이셨어요. 당장 내일 먹을 쌀이 없어도 전부 나눠주시고, 새 옷을 사다드리면 밖에 나갔다 들어오실 때 다 떨어진 헌옷으로 바꿔 입고 들어오시고, 심지어는 ‘바울아 너는 따뜻한 옷이 또 있지?’라고 하시며 제 잠바들도 모두 나눠주셨으니까요.”

최바울 목사님은 당시 고생을 많이 했지만 부족했던 부분들을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항상 채워주셨다고 이야기 합니다.

“한번은 다음날 아침에 먹을 쌀을 전부 나눠줘 어머니께서 발을 동동 구르시고 계신데 지방에서 한 성도가 첫 수확한 쌀이라며 새벽차로 올라와 문을 두드린 적도 있었어요.” 라고 하면서 어린 마음에 자신의 옷이 하나 둘 없어질 때 마다 속상했었다고 합니다.

“중학교 때는 동생들을 모아놓고 ‘아버지가 예수를 믿어서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이니 우린 절대로 예수 믿지 말자’라고 했던 때도 있었어요. 김포 일대의 땅이 대부분 아버지 소유였고 자동차가 다섯 대나 있었는데 모두 나눠주고 개천 다리 밑에서 살다가 쫓겨나는 일이 비일비재해서 어린 마음에 상처가 컸었던 것 같아요.”

독립운동을 하셨던 아버지가 도장하나만 찍으면 증손자까지 4대가 학비 지원을 받으며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을 수 있었던 터라 아버지를 원망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떤 이들은 서류를 위조해가며 받아내려는 독립유공자 자격을 ‘나라가 반쪽인데 그 돈을 받을 수 없다’며 끝까지 도장을 찍지 않으셨어요. 목숨을 걸고 지키셨기에 대한민국을 지독히도 사랑하셨더라는 것입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의 삶의 모습입니다.

최바울 목사님은 동생들을 모아놓고 ‘예수 믿지 말자’던 사춘기 시절의 상처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고, 하나님께서 모두 채워주시고 회복시켜주시고 인도해주셨다고 하였습니다. 최춘삼 할아버지는 그렇게 생명의 지혜로 이 세상을 사신 분입니다. 강아지 똥을 쓰신 권정생 선생님도 그렇게 내어놓는 삶을 사셨습니다. 이렇게 생명의 지혜의 삶을 살아간 사람과 동시대를 살았다는 것도 축복이라 아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내어 놓는 생명의 지혜의 삶으로 초대하였다고 했는데, 그 마지막 요청을 대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이 이전과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하나님과 만날 때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고, 저항도 하고 그랬는데 이 번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 1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를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그를 부르셨다.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시니, 아브라함은 "예,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고 합니다. 7절에도 보면 이 번에는 아들이삭이 부르는데 “이삭이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그가 "아버지!" 하고 부르자, 아브라함이 "얘야, 왜 그러느냐?" 하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또 11절에서는 천사가 아브라함을 부르는데 “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그를 불렀다.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예, 여기 있습니다."”라고 하는 것을 봅니다. 완전 Yes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저 주여! 주여! 하는 것 같고, 그저 Yes Man인 것 같은데, 여기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Yes를 단지 종교적 “예”로만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랜 삶의 여정을 거치며 하나님과 축복의 언약을 지켜온 신앙의 연륜에서 비롯된 Yes임을 느끼게 됩니다. 오히려 이 Yes에는 하나님의 사람 아브라함의 삶의 가치가 묻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Yes 반대편에 있는 세상 가치에대한 온전한 NO!를 봅니다.

지난 토요일 한겨레 신문에서 호이나키라는 사람에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윌든>을 쓴 데이빗 소로를 존경하는데, 데이빗 소로는 당시 미국이 멕시코를 침략했을 때 납세를 거부하여 감옥에 간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호이나키도 미국이 월남전에 참여하는 것에 반대하여 준비중이던 박사 학위 과정을 거부하고 베네즈웰라로 이민을 갑니다. 그 후 다시 미국의 대학으로 돌아오는데 영혼없는 대학의 현실에 절망하여 교수직을 버리고 시골 농부의 삶을 선택합니다.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걷다>라는 책이 바로 그의 농사꾼의 삶의 과정을 기록한 글입니다. 그는 인간의 선한 삶을 가로막는 모든 체제에 대하여 ‘아니오!’라고 말한 뒤에 자발적으로 자신의 삶을 다른 삶의 가치에 헌신하기로 마음 먹었는데, 그것이 바로 땅이요, 이웃이고, 시이며, 우정이였다고 합니다. 일찍이 소로는 “한 사람이라도 부당하게 가두는 정부 밑에서 의로운 사람이 진정 있을 곳은 역시 감옥이다”라고 말하였는데, 지금의 우리 현실에 비추어 보면 그곳은 어쩌면 바로 철거민의 망루인지, 아니면 한반도 운하에대해 “아니오!”라 하면서 남쪽 강으로부터 북을 향하여 오체투지를 불사르며 올라오고 있는 문규현 신부, 수경 스님, 전종훈 신부의 행렬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호이나키는 인도여행을 하면서 인도인들이 보여준 친절함은 오늘 소위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를 이끌고 있는 나라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친절과 관심과 배려였다고 하면서 지금 선진국가를 중심으로 빵으로 세상을 이끌어가려는 사회가 점점 인간의 생명의 소중한 가치를 잃어버리게 하고 있다고 하면서 내게 분명히 열려있는 한 가지 행동의 가능성은 “아니오!”라는 것입니다. 호이나키의 글을 보면서 호이나키의 “아니오!”는 바로 오늘 본문 말씀에서 보여준 참 진리에대한 아브라함의 하나님에대한 온전한 “예!”와 상통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동시대의 최고의 영성가라고 생각하는 토마스 머튼이 한 이야기가 생각이 나는데, 어느 미국의 번화한 상업지구를 방문한적이 있는데, 그 곳에서 문득 깨달은 것이 무엇인가 하면 자기가 비록 은둔 생활을 하는 수도사이지만 지금 여기 이 바쁜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똑 같다는 것을 깨닫고는 하나님께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비록 인류가 많은 어리석은 일에 몰두해 있고 많은 무서운 잘못을 범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도 친히 인간 중에 하나가 되시는 것을 기뻐하셨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하면서 이처럼 평범한 깨달음이 갑자기 내기 경마에서 이겼다는 소식처럼 느껴지는 것을 생각해 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나는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기뻐한다고 하면서 하나님도 친히 성육신하셔서 인간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러한 존재이며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이 사실을 깨달았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그러나 그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태양처럼 빛을 발하며 걷고 있다는 것을 설명해 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나뿐 아니라 모든 인간이 그러한 존귀한 존재라는 것이며 스스로의 빛으로 독립된 존재로서 자신의 존재 가치에 머물 수 있는 삶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야말로 자신을 내어놓는 생명의 지혜를 깨달은 자의 삶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생명을 내어 놓아야 하는 지혜의 삶으로 초대를 하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롬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타락한 마음 자리에 내버려 두셔서 해서는 안될 일을 하도록 놓아 두셨다고 합니다. 그럼 하나님이 인간을 버리셨다는 것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이 먹고 마시고, 주고 받고, 사고 팔고 하면서 그 애증 관계, 이해 관계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무너뜨리는 죄의 자리에 서게 되어 돌이킬 수 없을 지경 까지 이르렀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바로 여호아 이레의 하나미으로서 준비하신 것이 잇는데 바로 와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 사함의 은총의 삶을 열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먹고 마시는 축복과 언약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에게 종교적인 위로나 철학적 개념에 머물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보여준 그 생명의 지혜로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주님께서 여러분들을 부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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