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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면 죽으렵니다(2009년 3월 1일, 사순절첫번째주일)

하늘기차 | 2009.03.01 14:02 | 조회 2523


죽으면 죽으렵니다
2009년 3월 1일(사순절첫번째주일) 더4:12-16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한 이스라엘은 드디어 고향 가나안 땅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사정상 여전히 그 곳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에스더서는 미처 이스라엘로 돌아가지 못하고 남아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일어난 사건을 기록한 것입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권력투쟁입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와스디 왕비를 궁에서 쫓아내고 얼마후 새로운 왕비를 맞이하는데, 그 때에 히브리 사람인 모르드개가 자기 조카 에스더를 궁녀로 왕궁에 들여보내고, 그 때 절대로 히브리 사람이라고 자기 정체를 밝히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는데, 바로 그 에스더가 왕의 눈에 들어 왕비가 됩니다. 그리고 나서 2:19에 보면 모르드개가 왕궁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자기 조카가 왕후가 되었으니 권력은 떼어놓은 당상입니다. 자연스럽게 입궁한 것입니다. 권력의 중심에 자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

그런데 입궁하고 나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무릎을 꿇지도 않고, 절을 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사실에대해 이것이 신앙적인 결단에서 비롯되었는지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좀 맞지않는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사람에게 절하는 것이 어찌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같을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상대에대한 하나의 예우일텐데, 그래서 모르드개가 절을 하지 않은 것은 권력 싸움의 한 면모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어찌되었던 한 소수 민족의 여자가 대 제국의 왕비가 되었고, 모르드개는 그 왕비의 삼촌이니, 일반 상식으로도 장차 모르드개의 세도가 어찌될지 짐작이가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추종세력도 있겠지만 시샘하는 세력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 즈음에 하만이 왕의 총애를 받게되었고, 추측컨대 왕비의 세력과 하만의 세력 사이에 암투가 있니 않았나 하는 추측을 해 봅니다. 하만이 히브리 모든 민족을 진멸하겠다는 음모와 계획은 이렇게 시작된 것입니다.

하여간 이 사실을 안 모르드개는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갈아입고, 재를 뒤집어 쓴채 대궐 앞에서 대성 통곡을 합니다. 왜 모르드개와 온 이스라엘이 베옷을 입고 금식하며 기도하는지에대한 사실이 궁궐 안에 있는 에스더 왕비에게 전해지게 됩니다.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상황을 설명하면서 에스더가 직접 어전에 나아가서, 왕에게 자비를 구하고, 최선을 다하여 자기 겨레를 살려 달라고 탄원하도록 요청을 합니다. 그러자 에스더 왕비는 왕이 부르지 않았는데 어전에 들어가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형인데, 왕이 부르지 않은지가 한 달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모르드개는 오늘 본문 13, 14절 말씀입니다.
“왕후께서는 궁궐에 계시다고 하여, 모든 유다 사람이 겪는 재난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때에, 왕후께서 입을 다물고 계시면, 유다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라도 도움을 얻어서, 마침내는 구원을 받고 살아날 것이지만, 왕후와 왕후의 집안은 멸망할 것입니다. 왕후께서 이처럼 왕후의 자리에 오르신 것이 바로 이런 일 때문인지를 누가 압니까?”라고 합니다.

그러자 에스더는 16절에서
“어서, 수산에 있는 유다 사람들을 한 곳에 모으시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게 하십시오. 사흘 동안은 밤낮 먹지도 마시지도 말게 하십시오. 나와 내 시녀들도 그렇게 금식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고 난 다음에는, 법을 어기고서라도, 내가 임금님께 나아가겠습니다. 그러다가 죽으면, 죽으렵니다.” 라고 합니다. ‘죽으면 죽으렵니다’라는 그 유명한 말이 여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법을 어겨서라도 어전에 나아가 왕을 뵙겠다는 것입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법 제1장 제1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양심의 자유입니다. 법의 첫 번째 조항이 양심입니다. 양심은 법위에 있습니다. 법에 우선합니다. 신앙은 어찌 보면 그렇게 지켜지는 것입니다. 하여간 사흘째 되는 날 에스더는 왕이 있는 궁궐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왕이 보고 반가워하였다는 것입니다. 뜰에 서 있는 에스더 왕비를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바라보고는 홀을 왕비에게 내밀었습니다. 그리고 왜 찿아왔는지를 묻습니다. 그래서 왕을 위해 잔치를 차리겠다고 하는데 하만도 꼭 같이 참여할 것을 요청합니다. 그래서 왕비가 개설한 잔치에 참여하여 그 소원이 무엇인지를 물었더니 에스더는 내일 한 번 더 잔치를 열터인데 그 때 소원을 이야기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만이 마음이 흐믓해져서 궁궐을 빠져 나오는데, 마침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서 여전히 자기에게 절을 하지 않는 모습을 목격합니다. 화가 잔뜩 오른 하만이 가까운 친지들을 모아 이 모르드개를 어떻게 처형할지를 논의하였는데, 집에 높이 50자 짜리 장대를 세워 내일 아침에 그를 높이 달도록 당장 임금님께 요청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만은 다시 부랴부랴 궁궐로 향합니다. 그런데 한 편 아하수에로 왕은 그 날 밤 잠이 오지 않자 궁중실록을 읽게 되는데, 실록에 궁궐 수비대의 두 내시가 자기를 죽일 음모를 꾸미다가 모르드개에의해 들통이나 자기가 살게되었다는 사실을 알게됩니다. 그런데 그 모르드개에게 어떤 후사도, 상급도 내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자 왕은 신하를 부릅니다. 마침 그 때 모르드개를 죽이려는 계획을 가지고 왕궁에 밤 늦게 찿아온 하만이 왕의 부름에 궁 내전으로 나아갑니다. 왕이 자기가 특별히 대우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말해 달라고 하자 하만은 자기를 두고 하는 이야기인줄을 알고, 왕의 옷을 입혀 왕의 말을 타게 하고 왕의 신하 중 가장 높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 사람을 태워 성 안 거리를 돌며 ‘임금님께서 높이고 싶어하시는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대우하신다’하고 외치며 돌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왕은 하만에게 그대가 모르드개에게 그렇게 하라합니다. 하만은 그렇게 하고나서 근심어린 얼굴로 갈아나듯이 집에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에는 왕비가 차린 잔치에 나아갔는데, 거기서 왕이 왕비 에스더에게 그 소원을 묻자 왕비는 내가 임금님께 은혜를 입었고, 임금님께서 저를 어여삐 여기시는데, 그렇지만 지금 목숨을 잃게 되었으니 살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뿐만아니라 자신의 겨레도 몰살당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왕이 그자가 누구인지, 감히 그런 일을 하려고 마음을 먹고 있는자가 누구인지를 밝히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에스더 왕비는 바로 그 원수는 이 흉악한 하만이라고 밝힙니다. 결국 하만은 자신이 만든 장대에 오히려 달리어 죽게 됩니다. 또 함께 음모를 꾸민 모든 사람들이 같이 죽게 됩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이 사건은 겉으로 보기에는 권력 투쟁입니다. 그런데 하나 알아두어야 하는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공교롭게도 모르드개의 조상과 하만의 조상이 이 전부터 원수지간이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삼상15:8에 보면 사울이 아말렉과 대적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아말렉 왕이 누구인가 하면 아각이라는 사람입니다. 바로 그 아각이 지금 에스더와 이스라엘을 진멸하려 했던 하만의 조상입니다. 그렇다면 이 아말렉 사람들은 출17:에 보면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행로를 가로막았던 족속인데, 모세가 산 꼭데기에 올라 기도하는 동안 여호수아가 나아가 그들과 싸워 승리를 일구어냇던 바로 그 아말렉 족속인 것입니다.

그런데 서로 페르시아의 포로된 민족으로 까지도 여전히 싸우는 모습을 보는데, 이 싸움을 보면서 영적 싸움이 끝이 없다는 것을 보게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 안에서의 영적 싸움을 잘 싸워 이겨야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영적 무장을 잘 해야합니다. 엡6:11-13은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시는 장비로 완전무장을 하십시오. 우리의 싸움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와 권세자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악한 날에 능히 대항할 수 있고 모든 일을 한 뒤에 서 있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시는 장비로 완전무장을 하십시오” 라고 합니다. 영적 싸움에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에스더는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약속한 택한 백성을 어떻게 보살피는 가를 잘 보여줍니다. 사실 에스더서에는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에스더서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손 길, 하나님의 섭리를 곳곳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세상의 이야기, 문학, 전기, 소설 등 모든 것들의 주인공은 인간의 삶, 휴머니즘, 즉 인본주의입니다. 그러나 성서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십니다. 옛날 직장 생활 할 때 단체로 영화 구경을 갔었는데, 그 때 벤허를 단체로 보았습니다. 참 감동적이었고, 지금도 감동이 있습니다. 벤허의 어머니와 여동생의 문등병이 치유될 때, 그리고 모세의 손에서 원수 멧살로메를 죽이려고 했던 칼을 내려놓는 장면, 해전, 전차 장면등 감동적인 장면이 많이 있는데, 영화를 다 보고나서 이야기를 하는 중에 한 동료사원이 하나도 재미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감동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주인공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주인공 노릇하는 이 세상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주인공이어야 합니다. 에스더서는 바로 하나님이 주인공입니다. 그런데 이 주인공은 무대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무대의 주인공입니다. 참 신비롭습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심이 에스더 전체에 흘러넘칩니다. 한 소녀를 택하여 페르시아 대국의 왕후가 되게 하며, 모르드개의 충성을 궁중일기에 기록케 하시며, 에스더로하여금 왕의 자리에 나아갈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시며, 두 번의 만찬과, 왕을 잠 못 이루게 하여 궁중일기를 보게 하시고, 하만의 장대를 예기치 못한 일에 사용하시며, 왕으로 하여금 에스더를 깊이 사랑하게 하시며, 또한 왕으로 하여금 새 조서를 내려서 이스라엘이 승리할 수 있도록, 결국 이스라엘이 죽음의 위협 속에서 구원얻도록 하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작은 민족이지만 하나님의 선민 의식을 가지고 다른 민족에게 동화되지 않고 독창적인 문화를 가지고 생존한 민족입니다. 이스라엘은 국가는 없어져도 하나님을 중심으로한 이스라엘 종교 공동체, 민족 공동체를 유지하면서 생존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400년 동안 이집트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이집트 문화에 동화되거나 종속됨이 없이 하나님 섬김과 민족 공동체를 끊임없이 유지해 왔습니다. 바벨론 포로생활 70년 동안에도 결코 이러한 신앙공동체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스라엘의 근거가 어디에 있을까요? 결국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우리 가정, 우리 민족과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세속 가치의 도도한 물결에 동화되거나 붙들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 즉 죽음의 힘이 주관하는 세상에서 이기적 욕심과 정욕대로 살다가 그 속에 묻히어 죽을 수 밖에 없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를 건지어 내심을 뜻합니다. 에스더서에는 바로 그러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하시는 섭리와 비밀이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되어지는 일들의 모든 우여곡절 속에는 바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라는 비밀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세상이 알까요? 여러분은 알고 계시는지요? 안다면 사람들이 우상에 붙들리고, 죽은 귀신 섬기며, 사주, 팔자와 점괘에 마음을 쓰려들까요? 점괘나 사주, 팔자를 말할 때 사람들은 통계적이고, 과학적이어서 합리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나,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에대해 과학적이라 하지 않습니다. 합리적리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비과학적이고, 비 합리적입니다. 아니 합리성과 논리를 품으며, 뛰어 넘어 있습니다. 이 비밀을 인간의 지혜로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깨우쳐주시는 성령님이 아니고 이 초시간적, 초 우주적인 하나님의 섭리와 비밀을 어떻게 깨달을 수가 있을까요? 세상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하나 가득입니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니, 이것이 생명의 비밀일진데, 그래서 우상에 무릎꿇고, 누추하게, 구걸하며, 주눅들어...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의 현상은 온 우주에 편만해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섭리, 숨결이 속속들이 묻어있습니다. 참새를 떨어뜨리지 않으시는,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을 세시는 하나님의 그 섬세한 섭리가 우리들의 온 것에 스며있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섭리를 하나님의 섭리로 드러나게한 결정적인 것이 하나 있습니다. 오늘말씀 4:16의 바로
“죽으면, 죽으렵니다”입니다. 그런데 이 죽어야 하는 몫은 누구의 것인가요? 에스더의 몫입니다. 요셉의 이야기에서 팔리고, 모함당하고, 감옥에 갖히고 하는 것은 누구의 몫인가요? 요셉의 몫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세우신 십자가는 누구의 몫인가요? 예수님의 몫인것입니다.

‘죽으면 죽으렵니다.’라는 고백을 위해 예수님은 감람산에서 피와 땀을 흘리며 기도하였습니다. 세상에 붙들리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세상에 연연해 하는 모습으로는 ‘죽으면 죽으렵니다.’가 나올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받칠 때에도 ‘죽으면 죽으렵니다’였습니다. 다니엘이 바벨론 왕이 하사하는 음식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이어서 먹지 않겠다고 마음을 정하는 것도 ‘죽으면 죽으리이다’입니다. 다니엘의 3친구가 유황불 속에 던지어질 쳐지에 놓였을 때에도 능히 건져주실 건이지만 그리하지 않으시더라도 임금님의 신을 섬기지 않겠다고 마음을 정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 주보에 늘 볼 수 있듯이 요 12:24의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처럼 죽어야 세워지며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살려고 합니다. 내가 자꾸 살려고 합니다. 내가 살면 내 안에 주님은 죽습니다. 그러나 내가 죽으면 예수님은 내 안에서 일하십니다.

우리는 늘 내 스스로가 살려고 여러 가지 조건을 달고 스스로를 합리화시킵니다. 건강이 안 좋아서, 경제적으로 힘들어서, 아이들 교육 때문에, 약속이 있어서... 그런데 이렇게 해서는 감추어진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은혜를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생명은 죽으면 죽으리다에서 오는 것입니다. 온 자연 생명이 그렇습니다. 나무고, 개구기고, 물고기고 온 생명이 죽으면 죽습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인 것입니다.

오늘 3.1절입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사순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오늘 에스더서를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무엇보다도 저항정신입니다. 오늘 3.1절에 느끼는 것은 역시 일제의 강점에 맨 몸으로 저항한 것이 바로 오늘입니다. 3.1 독립선언에 33인 중에 대부분이 기독교인인 것은 바로 저항정신이 그 신앙 안에 흐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정신, 그러니까 장로교의 정신, 아니 개신교의 정신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프로테스탄트(prostent)입니다. 개신교라는 말은 한자로 改(고칠 개)新(새로울 신) 새롭게 고쳐나가는 교회를 뜻하는 것입니다. 독일의 루터, 프랑스의 칼빈, 스코틀란드의 존 녹스, 스위스의 츠빙글리 로 이어지는 개혁의 물결은 그동안의 캐톨릭으로 어두웠던 정치, 경제, 문화, 종교의 모든 바탕을 뒤집어 놓는 사건이었습니다. 르네상스의 인본주의 운동도 같은 시기에 아니 종교개혁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지만 행동으로 중세의 정신에 대항하여 개혁을 몸으로 보여준 것은 바로 교회의 개혁자들이었습니다. 유럽전체가 이 개혁의 흐름으로 소용돌이를 쳤고, 그 이후 산업혁명이 이어지는 그런 역사적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

개신교가 개혁정신, 저항의 정신이 없다면 그것은 교회가 교회이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현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법에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온통 법을 고치겠다고 이야기 합니다. 언론법을 위시해서. 교육정책, 재개발, 운하...모두 법을 고쳐서라도 기득권을 소수에게만 나누어주겠다는 것입니다.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서 들려오는 법개정의 소식은 희망적인데, 우리 나라의 현실은 어둡습니다. 이럴 때에 ‘법을 어겨서라도 어전에 나가 뵙겠다’는 에스더의 결단이 간절히 느껴집니다.

역사는 결국 위에서 아래로, 소수자의 기득권을 여러 사람이 함께 나누는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부도, 권력도, 문화도, 그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마치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이, 잠깐 지체하거나 위로 올라가는 흐름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잠깐이고, 결국 역사는 모는 사람이 함께 나누는 방향으로 흐를 것입니다. 이 흐름의 물꼬를 트는 것은 결국 저항정신이었습니다. 프로테스탄트야 말고, 개식교 교회야 말로 바로 그 정신에 바탕하여 세워진 것입니다. 이 정신이 사라진다면 교회가 교회일 것을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3.1절 날에, 그리고 사순절 첫 번째 주일에 이 저항정신을 잊지 않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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