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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벗어나야 할 것들(2009년 1 월25일, 주현절후셋째주일)

하늘기차 | 2009.01.25 11:00 | 조회 2033


우리가 벗어나야 할 것들

2009년 1 월25일(주현절후셋째주일) 눅4:21-32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공생애 초창기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사셨습니다. 태어나기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셔서 애굽으로 피난 갔다가, 나사렛으로 가셔서 자라셨고, 그리고 이제 요단강으로 가셔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광야로 나아가서 40일간 금식으로 기도하시고, 그리고 갈릴리에서 활동하시면서 점차 고향 쪽으로 향하여 나사렛에 가셔서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4장1절에 보면 ‘돌아오셨다’고 합니다. 14절에서도 돌아오셨다고 합니다. 또 16절에는 ‘들어가셨다’고 합니다. 이러 이러 하셨다는 마치는 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가야할 곳에 가셔서 복음을 전하시는데, 그것이 마치 물이 흐르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우리의 삶도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물이 흐르듯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그 물 흐르는 듯 한 모습은 바로 14절에 근거합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을 입고 갈릴리로 돌아오셨다”고 합니다. 그 전에도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나아갔다고 합니다. 또 세례를 받을 때에도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셨다고 합니다. 그런걸 보면 예수님의 삶은 성령의 인도하시는 삶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데, 이 법칙을 어기는 법이 없습니다. 굽이치기도 하고, 머물기도 하고, 고이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하며, 갈라지기도 하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순리에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갑니다. 흐르면서 지형에 따라 넓어지기도 하고, 좁아지면서, 가파르게 내 닫기도 합니다.

우리 인생의 흐름도 강줄기와 같지 않나 싶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인생
의 강 줄기를 순리대로 자연스럽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성령의 인도하심입니다. 물은 아래로 아래로 흘러내려가야 하는데, 자꾸 절벽 앞에서 올라가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결국 계솟 그 곳에서 몸살을 알으면서 멈추어 설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절벽을 끼고 굽이쳐 돌아가야 그 맛이 나지 않을까요? 바로 그렇게 물처럼 썩지 않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겨울에는 꽁꽁 얼면서 그렇게 흘러갑니다. 우리의 인생도 물 흐르듯 해야합니다. 마치 물이 아래로, 아래로 흘러 바다를 이루듯이 우리 인생도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 조금씩 아래로 낮아져야 합니다. 마치 빌립보서2장의 예수님 처럼 말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자신의 길을 가셨습니다. 이렇게 나아가는 중에 예수님이 자라신 고향 나사렛 동네에 이르셨습니다. 나사렛 회당에서 예수님은 열심히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의 말씀에 감탄하고, 놀랐다고 합니다. 은혜로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말씀의 은혜에 놀라고 감탄한 사람들이 말합니다.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따라가야 하는데, 말씀을 듣고는 이러쿵 저러쿵 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의 자세는 본문 21절에서 말씀하듯이
“이 성경 말씀은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성경 66권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습니다.

한 때 이 본문 말씀이 큰 신학적 논쟁을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입니다. 말씀드리자면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거든요, 그러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일까요? 아닐까요? 말 장난 하는 것 같지만 그 말씀은 결국 ‘소 귀에 경 읽기’ 식이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 편으로는 듣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든 받지 않든, 상관 없이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지요. 두 가지 주장이 다 일리가 있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하는데, 듣는 사람 가운데서 말씀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오늘 보면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사61:1,2 의 말씀을 읽고 설교하신 것 같은데, 그 말씀에 감탄도 하고, 그냥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니라 놀랄 정도로 은혜를 받은 것 같은데 왜 그 말씀이 고향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되지 못할까요? 한 구절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를 육적으로만 바라 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영적 본질이 가리워져 있습니다. 육적으로 사람을 보는 것은 신앙에 도움이 안될 때가 많습니다. 사도 바울도 고후 5:16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 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고 하였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를 첫째는 목수의 아들, 목수로 보았습니다. 이것은 노동자, 즉 천한 일을 하는 사람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이고, 그의 가족들 중의 동생들에대해서 언급합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동생들의 이름이 죽 열거되고 있습니다.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마을 사람들은 예수의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나사렛 동네 사람들은 예수의 활동에 대해 설왕설래 하였습니다. 요셉의 아들이, 마리아의 아들이 무얼 한다고!! 그래서 실제로 동네에 와서 말씀을 가르칠 때에는 전혀 예수님을 구세주로,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속 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네 병이나 고쳐라”라고 나에게 말하려 한다고 하면서 “어디 가버나움에서 행한 기적을 여기에서도 베풀어 보지”라고 말하려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엘리야 때의 사렙다 과부가 구원을 받은 것과 엘리사 때의 시리아 사람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을 깨끗이 나은 것에대해 이야기 합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이것이 자신들의 믿음 없음을 두고 한 이야기인 줄 알고 예수를 동네 밖으로 쫓아 내었습니다. 뿐만아니라 벼랑으로 몰고가 떨어뜨려 죽이려고 까지 하였을 정도였습니다.

예수는 이러한 사람들에대해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고 일침을 놓았습니다. 예수는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에대해 답답해 하면서 고향이니, 친척이니, 집안이니 하는 것들이 사람을 규정하고, 구속하는 것에대해 한탄을 하셨습니다. 마가복음에 볼 것 같으면 다른 곳에서는 그렇게 많은 기적을 베풀었지만 그의 고향에서는 몇몇 병자를 고쳐준 것 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킬 수 없었다고 합니다.

막6:5에 보면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다’가 아니라 ‘아무 기적도 행하실 수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것에 붙들리고, 집착하고, 그것에 안주하여 마치 달팽이 같이 자기 집 속에 숨어 있듯이, 그렇게 자기 안에 박혀 자기 것에 붙들려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아무런 기적도, 은혜도 베풀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사람들에대해 소위 ‘육신을 따르는’, ‘육체대로 아는’ 사람들 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부르심을 받을 때 ‘육신을 따라서는’ 그들 가운데서 지혜있는 사람, 권력있는 사람,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육신을 따라서는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사람들을 부르신 하나님의 기준은 세상의 기준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어리석고, 약하고, 비천하고, 멸시받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하나님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새로운 가능성 속에서 택하셨다고 합니다. (고전1:27-29)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육신의 기준을 따라서’ 본다면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요. 다른 사람보다 조금도 못 할게 없지만,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는 그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육신의 기준을 따라서 사람을 평가하는 것과 정반대 되는 것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무엇이라구요 ‘그리스도 안에’있다고 합니다. 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는 것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빌3:3에서
“하나님의 영으로 예배하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랑하며,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우리야말로, 참으로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이 새로운 가능성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후5:17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라고 합니다. 교우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까? 아니면 육체대로 세상의 가치를 기준하여 살아갑니까?

이제 새 해가 밝았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을 어제 본 그 사람, 과거에 알고 있는 그 사람과 똑 같은 사람으로만 보고, 새로운 가능성에서 보지 못한다면, 아무리 달력을 새 것으로 바꾸어도 새 날은 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대하는 사람은 늘 '그 사람이 그 사람' 될 뿐인 것입니다. 누구를 만나도, 피곤한 상대, 힘든 상대, 답답한 상대로 보여집니다. 먼저 내가 새로워지지 않으면 나의 고정 관념 늘 같은 눈으로 보는 시각, 기준, 관점, 관행, 관습, 편견, 고집...‘육신의 기준들’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새 해에도 별로 기대할 것은 없응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사람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조차 새롭게 보는 사람입니다. 나의 가족, 허물이 없어 말을 막하는 그래서 상처를 주기도 하는 가장 친한 사람들, 매일 만나는 직장 동료들,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동료에대해 이전에 갖고 있던 부정적인 이미지와 그리고 그들을 둘러쌓고 있는 환경, 조건들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능성 속에서 함께하는 사람들을 바라 보고, 그들에게 새로운 기대를 거는 것입니다.

말씀드렸나요,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처음 제자들을 뽑을 때 빌립을 통해 나다나엘이 예수님께 찿아옵니다. 그 때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내가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의 말씀에 기록되어 잇는 분을 만났다. 그분은 나사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이다 라고 하자,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시큰둥합니다. 그러나 하여간 빌립을 따라 나다나엘이 에수님을 만나러 가는데 예수님은 에수님에게 다가오는 나다나엘에대해 ‘보아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라고 합니다. 나다나엘이 깜짝 놀랍니다.

‘어떻게 저를 아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제서야 나다나엘은 에수님에대해 ‘선생님, 선생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러자 에수님이 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내가 너를 보았다고 해서 믿느냐’하면서 이 보다 더 큰 일을 네가 볼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또 말씀하십니다. 요1:51절 마지막 절 말씀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고 합니다.

나다나엘과 대화하는 예수님을 보면, 거짓된 종교지도자들을 제외하고는 항상 다가오는 사람을 인정해 줍니다. 사실 나다나엘은 에수님을 신통치 않게 여겼습니다. 나사렛 이라는 동네는 오늘로 치면 그저 빈농, 가난산 시골 어촌이어서 나다나엘은 별로 신통치 않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 나다나엘의 빈정거리는 말 속에는 나다나엘의 현재의 자신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맨 처음에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 유대인들의 관습에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다는 것은 성경을 일고 묵상을 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그러한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바로 그렇게 말씀과 묵상과 기도하는 나다나엘을 본 것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나다나엘의 처지를 본다면 그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그 말씀을 설파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기존의 종교적 기득권에서 소외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의 압제에 신음하는 이스라엘을 바라보며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꿈 꾸며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그 나라가 이루어질 것을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것이 나다나엘의 처지였습니다. 자기 자신의 꿈을 펼 자리를 구할 수 없어 무화과 나무 아래 늘 앉아 있어야 할 운명에 메여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다 보니 기존 질서 체제에대한 원망과 한탄이 늘 마음 한 구석에 자리하였을 것입니다. 친구인 빌립이 메시야를 만났다고 하면서 갈릴리 나사렛 출신이라고 하자, 자신과 처지가 같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에 코 웃음을 쳤을 것입니다. 사실 이 모습은 오늘 본문 말씀에 등장하는 나사렛 사람들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넌 나사렛 출신이야’ 이 한 마디에 모든 것은 정지될 수 밖에 숨이 막혀버릴 수 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어떻게 바라보았습까? ‘저 사람이야말로 참 이스라엘이다!’라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이 사람을 보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존귀하게 대합니다. 혈연이나, 지연이나, 학연이나, 외모나, 외적 조건을 보시지 않고, 그의 심령을 보십니다. 여러분 심령을 본다고 어떤 특별한 투시력이 있어 상대를 특별하게 보는 마술사 같은 분이 아니라, 한 영혼, 영혼을 존귀하게 여기십니다. 이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우리를 대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빌3:9에서 오직 자기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에게 인정 받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는 세상의 모든 가치를 버렸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목수이신 예수에게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목수이신 예수를 예수 그리스도로 고백한다면 우리는 예수 안에서 이전에 늘 나와함께 했던 사람들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올 해 새해가 밝았는데 교우여러분 이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예수 그리스도가 존귀히 여기는 한 영혼을 볼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 안에서 새로운 인간 관계를 이루시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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