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View Article

선(善,2009년 1 월18일, 주현절후둘째주일)

하늘기차 | 2009.01.18 14:03 | 조회 1873


선(善)

2009년 1 월18일(주현절후둘째주일) 롬8:28-30

오늘 말씀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고 합니다. ‘선하다’하면 쉽게 말해 ‘좋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좋다는 것인가요? 우리 몸에 좋은 것이 있고, 나쁜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몸에 좋다면 가리지 않고 찿아 나섭니다. 신문이나 T.V에 무엇이 몸에 좋다 하면 그 다음날부터 그 좋다는 것은 동이 나버립니다. 한 때 까마귀가 몸에 좋다하여 멸종 위기에 까지 간적이 있습니다. 이렇다면 이게 좋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무엇을 좋은 것이라고 할까요?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선한 것에대한 기준이 있습니다.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이 선한 것입니다. 나에게 좋더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나쁘면 안 좋은 것입니다. 선한지 선하지 않은지에대한 기준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마19:16에 보면 어느 부자 청년이 예수님에게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하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 만이 선하시며 그 선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이 선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니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합니다. 이 선은 바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것을 가장 보기 좋아하실 까요?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6번 째 날 사람을 창조하시면서 ‘심히 좋았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이 보기에 최고의 선(善)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최고의 선인 사람이 어떻한가요? 아니 사람뿐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다고 하신 모든 피조물들이 어떠한가요? 롬8:22에 보면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고통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좋지 않습니다. 선이 아닙니다. 왜 이렇게 좋지 않게 되었을까요? 20,21절에 보면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했고, 그래서 썩어짐의 종노릇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탄식하며, 고통한다는 것입니다. 굴복하며, 종노릇하고, 탄식하고, 고통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굴복하여 종노릇하고 탄식하며, 고통받는 것에서 해방되어 자유하기를 원하며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과 함께 누릴 영광의 자리에까지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오래전에 TV에서 ‘희망’이라는 드라마를 본 적이 있습니다. 한 가정이 남의 집 문간방에 세를 들어 사는데 삶이 지지리 궁상입니다. 그래서 연초에 하도 답답해 며느리와 함께 점을 보러 갑니다. 그런데 그 점쟁이가 이 집이 잘되려면 짐승 하나를 키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잘 키우면 복이 굴러 들어 올텐데 하면 서 잡종 개 한 마리를 사라는 것입니다. 그 값이 잡종인데 만만치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제목이 희망인데 이것은 거짓 희망입니다. 허무한 희망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참된 희망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9절 말씀에 보면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희망해야 하는 것은 강아지 한 마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현주 목사님은 이 본문의 피조물 대신에 ‘강(江)을 넣어보면 어떻겠냐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 본문을 읽습니다.
‘강이 저렇게 썩어가는 것은 강 스스로 그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다. 강이 바라는 것은 더 이상 썩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함께 누리는 것이다. 그래서 강은 지금 하나님의 자녀들의 출현을 고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피조물, 피조세계, 온 세상이 소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통해 허무한 것에 굴복하며, 썩어짐의 종노릇 하고, 그리고 그에서 비롯되는 탄식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유와 해방을 누리는 영광에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바라시고 원하시는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궁극적인 소망, 참소망, 죽은 소망이 아닌 살아있는 소망을 원하십니다.

그러면 이러한 이러한 자유, 해방의 소망,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선은 어떻게 이루어 질까요? 오늘 말씀 28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기로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그렇습니다. 다시 말하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는데 그것은 바로 허무한 것에 굴복하며, 썩어짐의 종노릇 하고, 그리고 그에서 비롯되는 탄식과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하여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까지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소망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29절은 한 번 더 풀어서 자세히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9절을 함께 읽어보기로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사람들을 택하셔서, 자기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도록 정하셨으니, 이것은 그 아들이 많은 형제 가운데서 맏아들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 좋은 일이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온 세상이, 신음하는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데, 바로 그 간절히 기다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요,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을 원하시며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온 세상의 희망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소망인 것입니다.

그런데 23절 말씀에 보면 첫 열매로 성령을 받은 우리도 신음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허무와 종노릇의 고통과 신음은 어느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신음하며, 고통스러워하며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자녀에게 있어서 다른 점은 무엇인가요? 종종 예수를 믿으면 만사형통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좀 지나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궁극의 바램, 소망이 아닙니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오히려 그러한 거짓된 소망에서 비롯되는 허무, 종노릇의 세상 구조 속에서 참된 소망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24절은 그 소망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니 이제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었으니 이제 구언 받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허무와 종노릇의 세상의 틀 속에서 29, 30절의 말씀과 같이 이제 택하셔서, 정하셔서, 의롭게하시고, 영화롭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의롭게 하심과 영화롭게 하심 사이에 거룩케 하심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소망의 과정 속에 이제 들어 선 것입니다. 이것 만이 우리에게 유일한 소망이고 그리고 구원인 것입니다.

예정하셨다. 이 말을 사람들은 어려워 하고 힘들어 하며, 운명론이라 합니다. 그것은 정말 오해고 넌센스입니다. 우리의 삶의 하나 하나, 즉 학교에 가고, 취직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이사를 가고, 결혼을 하고 먹고 살기 위해 수고 하고 하는 그런 삶을 미리 정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예정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예정의 자리, 그 구원의 자리에 지금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마22:14에 보면 청함을 받은 자들은 많은데 택함을 받은 자들은 적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집에서 식사를 할 때 보면 집사람이 식탁을 맛있게 준비하고 아이들을 부릅니다. 예들아! 밥먹어라! 합니다. 그러면 그 초청에 금방 응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몇 번 불러야 그 때서야 어슬렁 거립니다. 왜냐하면 자기 일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만화를 보거나, 게임을 하거나, 아니면 음악을 듣거나 하다보면 엄마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습니다. 기회는 균등합니다. 그러나 예! 하고 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직 좀 더 있겠다는 사람, 아예 듣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사람을 택하셨다거나, 정하신 사람을 부르셨다고 할 때 그것은 어떤 특정한 한 사람을 부르시는 편협한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모두를 부르십니다. 그러나 그 부르심에, 그 예정된 구원의 부르심, 즉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함으로 몸의 속량을 받을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누구인가요?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바로 피조물들이 기대하며 나타나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자녀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다시말해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야말로 선이며 소망이며 구원의 희망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29절 말씀처럼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회사에는 경영주가 있습니다. 경영주는 그 회사를 어떻게 경영해야 할 지에대한 마스터 플랜을 늘 갖고 있습니다. 미리 정하여 놓습니다. 그 계획에 따라 인력과 공간, 노동의 시간, 기계, 협력 업체 등 무수한 기획과 과정을 통해 그 회사의 경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 역사를 하나님의 뜻에따라 이끌어 가시는데, 그 섭리, 그 경륜, 그 계획의 핵심은 바로 구원입니다. 그런데 오늘 그 구원을 사도 바울은 무엇이라 하였습니까?

허무한 것에 굴복하며, 썩어짐의 종노릇 하고, 그리고 그에서 비롯되는 탄식과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와 해방을 누리는 영광에 자리에 까지 나아가는 소망하는 삶에대해 말씀하고 있는데, 23절에 보면 ‘우리 몸을 속량하여 주실 것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는데, 바로 그러한 소망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몸을 속량하여 주실 것을 고대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잘 보아야 합니다. 우리 몸을 속량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마음이나, 영혼, 생각을 새롭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우리 모든 존재의 영역을 허무와 종노릇함에서 구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구속의 모습은 다시 말씀드리지만 전체의 과정을 의미합니다. 무엇보다도 29절에서 말씀하신 아들의 형상, 즉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이 되기를 바라시며 좋아하신다는 것입니다. 3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이미 정하신 사람들을 부르시고, 또한 부르신 사람들을 의롭게 하시고, 의롭게 하신 사람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라고 합니다. 이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이야말로 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어느 다른 방법을 가지고는 이 세상을 구원 할 다른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결국 인간의 죄 만 드러났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결국 우리의 부족함, 연약함만이 남습니다. 그래서 오직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옳다고 생각합니다. 가슴에 감동이 옵니다. 이 구원의 계획 속에 우리를 정하여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하신 사람을 부르셨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그 구원의 섭리 속에 내가 지금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만 부른 것이 아닙니다. 세상 모두를 부르십니다. 누가 이 부름에 응답하였습니까?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자입니다. 그런데 왜 그리스도를 믿는자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단순히 믿는다는 것으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약2:19에도 보면 마귀도 예수가 구세주인 것을 믿고 떤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임을 믿고 고개를 끄떡이는 것 만으로는 아닙니다. 다른 분의 신앙을 보고 들으며 감격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 받았다고 좋아하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마치 속빈 강정과 같은 것이니,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자를 통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세상 구원의 뜻과 섭리와 경륜을 세워나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24절 말씀을 보면 이 소망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눈에 보인다면 그것은 소망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눈에 보이는 소망에 눈을 돌립니다. 예를 들어서 점쟁이가 이야기 해 주는 강아지 한 마리가 우리를 복되게 할 것 같습니다. 아이가 좋은 학교에 들어가는 것, 좋은 회사에 취직하는 것, 좋은 집과 사돈을 맺는 것, 사업이 번창하는 것... 눈에 보이는 것 하나님은 우리들이 연약하고 부족하여 이러한 눈에 보이는 것을 결코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소망이 아니고, 우리의 기다림, 25절의 말씀처럼 소망에대한 기다림의 과정 속에서 종종 자주 우리에게 베푸시는 위로입니다. 이것은 눈에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궁극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에게 궁극의 산 소망을 베푸시기위해 위로 보다는 시험과 어려움,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주시기도 합니다.

판화가 이철수씨의 2009 책상 다이어리의 1월 판화에 보면 시냇가의 징검다리가 그려져 있는데, 이 징검다리에대해 이철수 판화가는
“일상의 작은 즐거움 • 보람...
개울을 건너는 징검돌일뿐
때로, 슬픈 • 아픔도 우리를 지켜주지만
그것들 그대로 인생인줄 여기지는
마시기를...”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위로는 위로일 뿐입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이 허무한 것에서 벗어나는 자유, 죽음의 종노릇에서 풀려나는 해방에대한 소망인데, 이러한 구원을 얻는 우리의 삶이 바로 기다림의 삶인 바, 이 기다림에 우린 조급해 하며, 우울해 하며, 견디어 내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23절에서 우리는 다른 피조물과 함께 마찬가지로 고통스러워 하며, 신음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그냥 신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을 속량하여 주실 것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연약한 모습입니다. 속으로, 다시말해 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신음합니다. 무엇을 구해야 할지 몰라 내 마음 깊숙이에서 말못하고 탄식합니다. 그런데 교우여러분 구하고 싶지만 하나님께 무엇을 구해야 할 지 말 못하는 자리에 까지 나아가야합니다. 그게 맞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아픔과 고통이 있는 것입니다. 또 궁극의 선에대한 갈망은 있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 올 지는 잘 모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좋으신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를 도우십니다. 누구를 도우시나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어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자가 되는 것을 도와 그 되어지는 일들을 협력케 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 궁극은 어디인가요? 30절 말씀과 같이 정하신 사람들을, 그러니까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을 의롭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의롭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그 리고 바로 영광의 모습인데, 그 사이에 하나가 더 있습니다. 성화의 과정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면서 내적 성숙을 통해 성령의 열매가 아름답게 맺혀 거룩한 삶, 그리고 이제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 까지 나아갑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세상을 향해 계획하신 선(善)입니다. 이 선한 자리에 참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
979개(39/49페이지)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하나님은 잊지 않으신다(2016년9월4일) 사진 첨부파일 관리자 14487 2016.09.09 08:30
공지 나는 주의 사람이니(가야금, 대금 동영상) 첨부파일 하늘기차 25855 2007.10.16 12:24
공지 망대에 오르라(창립40주년 기념 예배 설교,유경재 목사) 고기교회 26215 2006.05.31 22:16
공지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하늘기차 24807 2005.09.02 16:30
215 [일반] 하나님 앞서 가시는 생명의 삶 Ⅲ(2009년 5월24일, 부활일곱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127 2009.05.24 14:29
214 [일반] 하나님 앞서 가시는 생명의 삶 Ⅱ(2009년 5월17일 스승의 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981 2009.05.17 15:06
213 [일반] 하나님 앞서 가시는 생명의 삶( 2009년 5월10일, 어버이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239 2009.05.10 14:22
212 [일반] 젖뗀 아이(2009년 5월 3일, 어린이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305 2009.05.06 18:37
211 [일반] 나 주가 할 수 없는 일이 있느냐?(2009년 4월26일, 부활절후세째주 첨부파일 하늘기차 2118 2009.04.26 15:21
210 [일반] 지금, 여기, 이 땅에서의 부활(2009년 4월19일, 부활절후둘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682 2009.04.19 14:15
209 [일반] 준비된 죽음(2009년 4월 5일, 종려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721 2009.04.05 15:34
208 [일반] 새 건물, 새 공법(2009년 3월29일, 사순절다섯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1888 2009.03.29 15:57
207 [일반] 여호와 이레(2009년 3월22일, 사순절네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171 2009.03.22 17:08
206 [일반] 화가 나서 죽겠습니다(2009년 3월15일, 사순절세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1941 2009.03.15 16:47
205 [일반] 이 일을 아느냐?(2009년 3월 8일, 사순절두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086 2009.03.08 13:35
204 [일반] 죽으면 죽으렵니다(2009년 3월 1일, 사순절첫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522 2009.03.01 14:02
203 [일반] 신실한 청지기는 은혜의 사람이다(2009년 2월22일, 주현절후일곱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336 2009.02.22 14:25
202 [일반] 하나님의 은혜와 시험(2009년 2월 8일,박경철 목사,한신대 구약학 교 하늘기차 2962 2009.02.21 10:25
201 [일반] 딸을 다시 살려주신 하나님(CBS '새롭게 하소서') 하늘기차 2780 2009.02.15 18:18
200 [일반]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2009년 2월 1일, 주현절후넷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519 2009.02.01 14:55
199 [일반] 우리가 벗어나야 할 것들(2009년 1 월25일, 주현절후셋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033 2009.01.25 11:00
>> [일반] 선(善,2009년 1 월18일, 주현절후둘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2] 하늘기차 1874 2009.01.18 14:03
197 [일반] 집사 빌립( 2009년 1 월11일, 주현절후첫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584 2009.01.11 13:59
196 [일반] 볼 수 있는 은혜 Ⅴ(2009년 1 월 4일, 성탄절후둘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1692 2009.01.04 14: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