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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수 있는 은혜 Ⅴ(2009년 1 월 4일, 성탄절후둘째주일)

하늘기차 | 2009.01.04 14:59 | 조회 1692


볼 수 있는 은혜 Ⅴ

2009년 1 월 4일(성탄절후둘째주일) 요1:14;고후4:4-7

예수님께서 눈먼자의 눈을 뜨게 하였을 때, 처음에는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소경인 것은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 사람의 죄도, 이 사람의 부모의 죄도 아니라고 합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볼 때 우리와 다르게 보십니다. 우리는 기존의 질서, 가치에 연연합니다. 세상의 가치 흐름에 늘 붙들립니다. 그러나 주님은 당시 유대의 가치 체계인 율법에 목을 메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보십니다.

빌립이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할 때에도 예수님은 쓸때 없는 질문하지 말고 하나님이 내 안에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이 요한의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에게 오실 그 분이 당신입니까? 하고 사람에대해 집중하여 물었을 때에도 예수님은 사람이 아니라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같은 일을 놓고도 어떤 사람은 그 일을 그 일 그대로 보지만, 오히려 어떤 사람은 일어난 일을 그 정반대로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관심과 이해와 가치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 고후4:6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우리 마음에 주셨”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풀면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이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냥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하면 우리는 금세 종교적 틀에 붙들려 종교적 만족에, 아니면 신비적인, 아니면 자신의 노력에 머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빛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그리스도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지혜의 빛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지식은 어떤 지식일까요? 지혜입니다. 주님의 지혜입니다. 주님의 마음입니다. 주님의 마음은 늘 말씀하지만 두 가지 마음입니다. 스스로를 낮추는 마음입니다. 또 하나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스스로 낮추는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우리를 향하는 마음입니다. 이 두가지 마음을 통해 주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이 마음이 어떠하길래 하나님의 영광, 다시말하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따를 수 있을까요?

스스로 낮추며, 우리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인데 빌2:8에 보면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라고 합니다. 어느만큼 자기를 낮추었는가 하면 죽기까지 라고합니다. 십자가입니다. 또 긍휼히 여긴다고 하는데 우리를 얼마나 사랑할까요? 요13:1에 보면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베푸시는데 먼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기위해 제자들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수건을 허리에 차고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하나 하난 정성껏 씻어주었습니다. 자기를 낮추어야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당연히 스스로를 낮춥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이고 마음이며 하나님께서는 이 모습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데 이것은 아버지의 영광이요, 아들의 영광일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영광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이 지혜를 우리가 가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가졌나 하면 질그릇 안에 있다고 합니다. 질그릇은 깨지기 쉽습니다.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비록 작은 일에 낙심하고, 슬퍼하고, 미워하며, 자기 연민에 붙들리어 세상의 일로 일희일비하며 세월을 허송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지만 그 안에 이 보물이 담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 보물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입니다. 지혜입니다.

요1:14절 말씀을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늘 가슴 깊이 새겨야합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하심을 보고는 그 분의 영광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고, 아니 사신 것을 보고 그 영광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교우여러분 교회가, 아니면 성도가 그 스스로의 일을 보고 아니면 교회의 일원으로서 교회가 하는 일을 볼 수 있다면 자신이나, 성도들에게, 아니면 교회를 어떻게 바라볼까요? 교우여러분은 교회를 통해, 아니면 여러분 자신을 포함한 성도들을 통해 그 드러나는 일의 영광을 보고 있는지요? 이것은 우리의 신앙이 어느만큼 와 있는지를 알 수 있는 가늠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저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먹고, 마시며 살아가는 그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광은 14절을 계속 보면 어떤 영광이라고 하나요? ‘그 영광은 아버지께서 주신 독생자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독생자의 영광입니다. 독생자란 바로 하나님의 외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아들로서의 영광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광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시고 준비하신 영광인데, 요3:16은 우리에게 늘 가까이 있는 말씀입니다. 무어라 말씀하고 있나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합니다. 이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구원받게 하시려고 외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구원의 동력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요? 그렇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을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서 사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는 모습을 보며 제자 요한은 그 아들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삶이 앞으로 어떻게 존귀하게 평가 받을 줄 안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치범으로, 신성모독죄로, 그리고 사회를 혼란시킨 자로 십자가에 치욕스럽게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결국 기득권자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역사, 시대의 가치, 권력, 권세와 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에게 영광과 존귀를 돌렸습니다. 그 영광과 그 존귀는 바로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인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무런 질적 차이를 드러낼 수 없는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 바로 그대로인데 바로 그 영광을 사도 요한이 예수님에게서 본 것입니다.

새 해에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사도요한과 같이 그 예수님의 사시는 모습 속에서 그 삶의 영광을 보았듯이 우리가 우리의 삶을 하루 하루 살아가는 중에 우리 삶의 가치를 서로 서로 존중할 수 있는 그러한 삶을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사람의 가치, 판단, 노력, 모습을 존중할 수 있는 그러한 관용의 삶이 넘쳐났으면 좋겠습니다.

‘바보 이반의 산 이야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톨스토이의 책이 아니라 책 제목이 그렇습니다. 이 책은 최성현님이 쓴 책인데, ‘좁쌀 한 알’이라는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의 삶을 소개한 책을 쓴 분입니다. 그런데 그의 농장 이름이 ‘바보 이반’입니다. 농사는 아주 조금밖에 짓지 않는데, 그 이유는 “이쪽에서 바라는 걸 재배해 먹는 게 아니라 저쪽(산 혹은 자연)에서 주시는 걸 먹고 사는 쪽으로 가야 한다고 어느 날 눈을 떴기” 때문이다. 그는 비료와 농약을 쓰지 않음은 물론 땅을 갈지도 않고 또 풀을 두고 가꾸는, 매우 온유한 방법으로 농사를 지으면서도 “재배는 어떤 방식이든 땅과 풀에 대한 폭력을 바탕에 깔고 있다”고 보고 “뿌리지 않고 거두는, 주시는 대로 먹는 새나 벌레나 야생 짐승처럼 살고 싶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 인디언에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돈후앙이라는 인디언이 살고 있는 지역에 한 식물학자가 찿아와서 식물을 채취했으면 한다고 하니까 인디언이
“식물을 채취하려면 먼저 식물에게 그 까닭을 말하고, 사과해야 하며, 또 언젠가는 자신의 몸뚱이가 그들의 양식으로 주어질 것임을 깊이 믿도록 신뢰를 주어야 한다” 이야기를 합니다. 평샌 인간은 엄청난 양의 식물과 동물을 먹으며 생명을 유지해 가는데 그것들이 있어서 사람들은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죽은 뒤에는 우리의 몸을 그들에게 돌려주는 것이 당연한 자연의 도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먼저 인간이 나무다 풀보다 낫다는 생각을 버려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평등한 관계가 보이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인디안 돈후앙은 그 백인 식물학자에게 식물 앞에 무릎을 꿇고 “나는 당신 보다 나를 조금도 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평등하다”라고 자만심이 모두 없어질 때까지 큰 소리로 이 말을 반복하라고 했답니다. 속으로 말해서는 안되고, 큰 목소리로 말해야 하고 또 남들 앞에서도 그렇게 말 할 수 있어야, 그래야 식물의 응답을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낮추니 자연이 대화의 상대로 보인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이 내용을 보면 무슨 선문답 하는것 같고, 무슨 무위자연의 도 닦는 이야기 같기도 한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이 우리를 구원키 위해 이 땅에 오실 때의 모습인 것입니다. 낮추지 않고는 희망이 없습니다. 빌2:6-8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 사도 바울은 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 받으라는 것입니다.

어제 인문사회교실을 준비하는 모임에서 한동우집사님께서 광주의 연암수퍼마켓에대한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수퍼 마켓의 주인은 예를 들면 어느 젊은 청년이 시골에 있다가 도시로, 예를들어 광주로 올라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있으면 그 청년을 데려다가 자기 가계에서 일을 시키고, 일을 가르칩니다. 그리고는 어느 시간이 지나면 모든 자본을 다 데어서 그 청년에게 수퍼 마켓을 차려준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세운 수퍼 마켓이 전라도 일대에 20 여개가 넘는다는 것입니다. 대형 수퍼 마켓이 전 시장을 독과점 하고 있는 떼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훈훈한 이야기를 꽃 피워냅니다.

또 조주현님이 속해있는 디딤돌 학교에서도 아이들에게 여러 가지 직업을 가르쳐 주면서 예를들어 제과제빵 기술을 가르치면서 한 지역에서 양심적으로 무공해한 신선한 빵을 살고 있는 지역에 공급하겠다는 신념과 정신을 가지고 사람들을 위한 빵가계를 개설한다면 그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일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돈을 벌기위해 인체에 해로운 것을 거침없이 만들어 내는 때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훈훈함이 전해지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을에 전파사가 하나 생겼습니다. 요즈음은 모두 에프터수리점에서 물건을 고치지만, 이전에는 동네 마다 전파사가 하나씩 다 있어서 가지고 있는 전자제품이 고장나면 그 전파사에 가서 수리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우리 동네에 전파사가 하나 생겼다는 것입니다. 고장난 물건을 가지고 가면 친절하게 잘 고쳐준다고 합니다. 뿐만아니라 부속품이나 기타 필요한 정보들을 친절하게 잘 이야기 해 준다고 합니다. 돈을 주고 물건을 사고 파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만나 삶을 나누는 것입니다.

오직 한 가지 가치, 돈을 위한 가치 체계에서 ‘돈이 아니라 사람이다’라고 하는 삶의 가치체계가 절실한 때입니다. 우리 고기교회에서도 이번 겨울 방학동안 고등학생 연령 층의 지역아이들과 인문 사회가치를 나누는 교실을 준비중입니다. 아이들과 여러 가지 활동을 하면서 돈의 가치, 나눔, 평화와 생명 가치의 소중함을 놀이와 축제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는 여러 다양한 과정을 통해 만들어 가려고 합니다. 이러한 작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을 가능케 하는 아름다운 일들을 만들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 고후4:6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우리 마음에 주셨”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아버지 하나님께서 지혜의 빛을 주셔서 우리로 이 세상을 바라보며 무엇이 하나님나라의 일인지를 알게 하셨습니다. 마치 들 꽃들이 자기 자리에서 자기 꽃 ,자기 색, 자기 향을 피워 여러 다른 색, 향, 모양을 통해 조화를 이루듯이 우리도 물질 가치가 유일한 가치가 아니라 생명, 평화 나눔 들의 아름다운 가치를 자기 삶 속에서 스스로 피워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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