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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의 하나님(2005년3월13일,사순절다섯번째주일)

aht21 | 2005.04.01 08:19 | 조회 2214
위로의 하나님
2005년.3월.13일(사순절다섯번째) 롬4:17-23;히6:13-20

고린도후서 1장은 위로의 장입니다.사도 바울은 3절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자고 합니다.왜 찬양을 올리자고 하냐하면 환난 가운데에서 온갖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위로에대해 2가지를 말씀하고 있는데 첫째는 환난 속에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위로를 준비해 놓으신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 받은 위로로 또 다른 환난 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한다고 하는 것입니다.즉 위로받은 사람이 위로를 준다는 것입니다.과부 사정을 과부가 알고,홀아비 사정을 홀아비가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위로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어떤 위로를 받으셨기에 우리에게 위로를 주실 수 있을까요?아니 하나님께서는 어떠실까요?하나님도 위로를 받으실까요?에이,어떻게 하나님이 위로를 받아 하실지 모르겠습니다.답은 예입니다.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로 하나님께서는 계속 힘들어 하십니다.노아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창6:5,6에 보면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차고,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임을 보시고서 땅 위에 사람 지으신 것을 후회하며 마음 아파하셨다고 합니다.11절에도 보면 세상이 썩었고 무법천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노아의 홍수는 하나님께서 물로 심판하시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하나님이 아파하신다는 것입니다.하나님이 후회하시며 힘들어 하신다는 것입니다.하나님이 분노와 슬픔으로 힘들어 하십니다.그러면 이렇게 힘들어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계속 힘들어야 할까요?아니요 위로를 받습니다.어떤 위로를 받나요?창6:8은 노아만은 주님께 은혜를 입었다고 합니다.9절에 보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가장 어렵고 힘들 때,심한 아픔으로 힘들어 할 때,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에 그냥 있어만 주어도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노아가 하나님으로부터,위로를 받는 것은 물론이고,오히려 하나님이 노아를 통해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하나님께서는 노아를 통해 이 세상의 패역함 속에 창조 질서의 새로운 가능성을 본 것입니다.6장22절은 노아에대하여“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다 하였다.꼭 그대로 하였다.”고 합니다.이 노아의 모습에 하나님은 위로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예수님께서는 어떨까요?위로를 받으셨을까요?예수님이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의“주는 그리스도시며,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나이다”라는 고백에 흡족하여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장로들과,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한다고 했을 때 베드로가(표준 새 번역이 그래도 잘 된 것 같습니다)예수를 따로 붙들고“주님,안됩니다.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됩니다.”하고 말하면서 예수님께 대들었다고 합니다.한글개역은 예수님을“붙들고 간하”였다고 하는데(공동번역은“말리었다”)이건 잘 된 번역 같지않고,영어NIV와,보수적인KJV에서도 Rebuke라고 되어있습니다.베드로가 예수님을 한 쪽으로 데리고 가서“꾸짖었다”고 합니다.제자들 사이에서는 이미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되는 것을 기정 사실화하고 있었습니다.그런데 예수님이 이것을 거부하신 것입니다.모두가 왕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예수님이 건방지게 안된다는 것입니다.어떻게 3년을 따라 다녔는데,마치 아이를 꾸짖듯이 어이없다는 듯이 예수님을 꾸짖은 것입니다.다 된 밥에 왜 재를 뿌리느냐는 것입니다.고지가 바로 저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원튼 원치 않튼,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나,일반 백성들,그리고 제자들까지도 예수를 세상 왕으로 간주하였습니다.이후의 예루살렘에서 진행된 일들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인간의 계획과 시스템,욕망에의해 십자가의 자리 까지 예수님을 내어 몬 것입니다.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전혀 동요가 없
으십니다.마치 비웃기라도 하듯이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어린 나귀를 타고 뒤뚱 거리며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평화의왕으로 입성하신 것입니다.그런데 이 인간의 일을 아버지 하나님께서 구원의 사건으로 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 사건의 와중에 예수님의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외로운 마음을 위로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읍니다.여리고 성을 지날 때에도 예수님의 외로운 마음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 했습니다.그나마 예수님을 온전히 바라본 사람은 못됬다고 손가락질하던 여리고성의 삭케오였습니다.여리고 성을 다 지날 때에 여리고성의 주민들은 예수님을 별로 반가히 맞아주지 않았습니다.유월절 분위기로 보아서는 당연히 더 많은 인파들이 몰려들었을텐데,왜 그랬을까요?여리고성은 수도권이었습니다.예루살렘의 기득권가진 사람들이 뫃여사는 수도권이었습니다.바리새인,사두개인,제사장,공의회,군,세리 등등의 사람들이 큰 저택을 짓고 럭셔리하게 살던 곳이었습니다.성경은 예수님께서“여리고에 들어가 지나가고 계셨다”하면서,아무도 반기지 않는 모습과 거의 다 여리고 성을 지나가고 있는 아쉬움을 표현하고 있습니다.바로 그 때,그냥 지나치실 그 순간에 삭케오가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보고 뽕나무에서 눈 맞춤을 한 것입니다.예수님께서는 뽕나무의 삭케오를 내려오라 하시어 그의 집에서 하루를 묵어 가셨습니다.삭케오에게는 은혜요,주님에게는 위로였습니다.

변화산 사건의 신비체험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에게 아주 특별한 위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또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예수님을 세상나라 왕으로 바라보는 한 쪽 작은 곳에 성경은 예수님을 평화의 주님으로 바라보는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시선을 보여줍니다.바로 옥합을 깨뜨린 여인입니다.

여러번 말씀드렸지만 성도들은 삶의 여정,신앙의 여정 속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야 은혜의 삶을 살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이스라엘이 광야생할을 어찌되었든 지속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하나님의 위로 때문이었습니다.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을 시작하자 마자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고,낮에는 구름기둥으로,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또한 광야의 타는 갈증 속에서는 모세의 지팡이를 통해 바위에서 샘을 나게 하셨습니다.이러한 위로를 통해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향한 희망을 불태울 수 있었습니다.사도바울이 살 희망마저 끊어진 상황 속에서 살아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하나님의 위로 때문이었습니다.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위로가 전부요,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또한 눈에보이는 위로가 거짓 위로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통해 십계명을 받는 동안 이스라엘은 산 아래에서 잔치를 벌였습니다.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것이 우리를 애굽에서 구원한 하나님이다 하면서 금송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제사를 드리고 먹고 마셨습니다.가짜입니다.또한 만나와 메추라기,구름 기둥과 불기둥,바위에서 터져나온 샘을 보고 여기가 좋습니다 하면 그것은 결국 가나안 땅에 도착하지 못하는 이스라엘과 같은 것입니다.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부르시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기 위해 은혜를 주십니다.병을 치유 받기도 하고,사업이 다시 살아나기도 하고,인간 관계가 회복되기도 합니다.남이 모르는 신비한 체험을 허락해 주기도 합니다.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 백성되도록 하기 위한 방편이요,위로인 것입니다.간혹 성도님들 중에 옛날에 이런 은혜를 입었는데 하면서 그 은혜에 붙들려 더 이상 성숙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종종 봅니다.그것이 신앙의 전부인 줄 압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성도에 대하여“앞에 놓인 소망을 붙잡으려고 세상에서 피하여 나온 사람들”이라고 합니다.그렇습니다.단지 위로의 사람,위로를 바라는 사람이 아니라 앞에 놓인 소망을 붙잡는 삶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의 삶의 목표인 것입니다.그런데 이렇게 부름받은 사람들의 삶의 중심은 어디에 있을까요?바로 하나님과의 약속입니다.어떤 약속인가요?창세기12장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자로 세우셨다고 약속하십니다.오늘 본문 말씀 속에서도 14절은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을 주고 복을 줄 것이며,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겠다”고 합니다.16절에서 바로 아브라함이 그 약속을 받았다는 것입니다.그런데 그 약속을 받을 때 어떻게 받았느냐 하면 오래 참은 끝에 받았다는 것입니다.아마도 75세에 갈대아 우르를 떠났으니 25년의 세월을 기다린 것 같은데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러한 오래 참은 믿음에 대하여“희망이 사라진 때에도 바라면서 믿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약속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약속은 상호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까?롬4:17,18에보면 참 멋진 기록이 있습니다.17절 중간에 보면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하나님에 대하여 무어라고 말하냐 하면“죽은 사람들을 살리시며 없는 것들을 불러내어 있는 것이 되게 하시는”하나님이라고 합니다.그러면 아브라함에 대해서는 18절에 무어라고 합니까?“희망이 사라진 때에도 바라면서 믿었다”는 것입니다.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18절 후반에 “너의 자손이 이와같이 많아질 것이라는 말씀대로,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었습니다.”고 합니다.그 하나님에 그 아브라함이 아닙니까?이 하나님과 이 아브라함 사이에 무엇이 이루어졌습니까?내!약속입니다.이 약속을 사이에 놓고 하나님과 아브라함은 팽팽합니다.느슨하지도,끊어질 정도로 땡겨지지 않는 적당한 긴장감이,탄력이 있습니다.잘 조율한 현악기의 줄과 같습니다.하나님은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오늘 히브리 말씀에 보니까 히6:13에 자기를 두고 맹세하였다고 합니다. 14절의 내용을 보니까“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을 주고,복을 줄 것이며,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어떻게 해서라도 내가 너를 복으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처음에 이 맹세를 아브라함의 초기 부분에서 찿아 보니까 없드라구요,뒤에 이삭을 바치는 시험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인데,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반드시”라고 합니다.하나님께서 맹세하시는 것이지요.아브라함은 이렇게 맹세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오래 참는 신앙을 보여준 것입니다.

로마서는 이 아브라함의 신앙에대해 롬4:20에서 첫째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다.둘째 오히려 믿음이 굳세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셋째 하나님께서 스스로 약속하신 바를 능히 이루실 것이라고 확신하였다고 합니다.하나님께서는 또 이 아브라함의 신앙을 의롭다고 인정을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이 것은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25년 동안 하나님께서 맹세로서 보증하신 약속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신뢰입니다.믿음입니다.참 얼마나 아름답고 귀하며,사랑스럽습니까.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이 맹세,이 약속을 통해 큰 위로를 받게하려고 한다고 합니다.눈에 보이는 위로가 아니라,순전히 약속의 위로입니다.어릴때 아이들하고 놀다가 보면,친구가 장난감을 자랑합니다.그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우리 아빠가 그것보다 더 좋은 장난감 사준다고 약속했어!”합니다.이 때에는 아빠가 최고입니다.아빠가 약속해 주었다는 것 하나로 모든 위로가 되었던 기억이 납니다.이러한 믿음과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약속은 앞에 있는 소망을 쫓는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큰 선물입니다.이것을 히브리서 기자는‘영혼의 닻’이라고 합니다.항구에 배가 정박하여 쉬며,수리할 때 배는 닻을 내립니다.그러면 풍랑과 외부의 충격에 배가 흔들리지 않게 해 주는 것이 닻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바로 이 약속,이 말씀의 위로가 우리에게‘영혼의 닻’이라고 합니다.우리 삶의,소망을 향한 삶의 여정에 있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약속과 맹세의 위로야 말로 참으로 안전하고,확실한 위로인 바,신뢰를 바탕으로하는 참으로 우리가 지향해야할 성숙하고,존귀한 위로입니다.이 귀한 위로가 항상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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