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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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순종(2005년3월6일,사순절네번째)

aht21 | 2005.04.01 06:51 | 조회 2404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순종

2005년 3월 6일(사순절4번째) 히5:7-9

예루살렘으로 향하실 때에 이미 예수님께서는 포위되었습니다.사람의 뜻에 포위된 것입니다.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당연한 결말이었습니다.공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한 번 밖에 올라가지 않은 것으로 되어있지만,요한 복음은 3번으로 되어있는데,매 번 올라갈 때 마다 예수님을 향한 관심은 점점 높아갔습니다(아마 예수님이 처음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에는 그렇게 큰 관심을 끌지 못 하셨을 것입니다).

청소년 축구 스타 박영주에대한 축구계나 팬들의 관심은 점점 열기를 더 해 가는 것 같습니다.인터뷰하면서도 이러한 관심의 열기가 매우 부담스럽다고 하는 걸 보았습니다.하물며 2000년 당시 세 번째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의 예수님에대한 관심은 어떠했을까요?

가끔 국회의원들이 국회에서 활동하면서 간혹 발언하는 내용을 보면,“지역 주민의 뜻을 거역할 수 없었다”라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지역 주민의 말을 듯지 않으면 자신의 정치생명은 여기서 끝이라는 것입니다.그러면서 어쩔수 없이 공공의 뜻 보다는 지역 주민의 뜻을 따를 수 밖에 없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3번째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에는 이미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 나라의 왕,평화의 왕으로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정치적 왕,돌을 떡이 되게하시는 왕으로 모셨습니다.예루살렘 성 앞에서의 환영도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의 입성이 아니라,기적을 일으켜 로마를 이스라엘의 땅에서 한 번에 몰아낼 세로운 왕으로 오시는 것이었습니다.이 번 3번째 방문이야말로 그 열기나,그 인지도에 있어서 기필코 그 일을 이룰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풍선처럼 가득 부풀어 올랐습니다.반면에 예루살렘의 기득권자들도 역시 예수를 세상의 왕으로 보기는 마찬가지인데 예수가 이참에 예루살렘을 접수할 것 같은 위기감에 휩싸였고,또한 혹 로마의 심기를 건드려서 그나마 누리고 있는 안전을 빼앗길까봐,예수를 이 번 기회에 제거하려고 마음을 먹은 것입니다.이 것은 사탄 마귀의 올가미입니다.예수님의 공생애 처음 광야로 나아가 기도할 때 마귀가 예수님을 유혹하던 바로 그런 유혹에 세상이 걸려든 것입니다.“돌을 떡이되게 하라.”“이 성전에서 뛰어내려 보아라”“나에게 절을 하면 네가 보는 이 천하를 네게 다 주겠다”는 이 모두가 세상 왕되라는 마귀의 유혹입니다.여기에 모두가 걸려든 것입니다.

간혹 길에서 교회의 행사를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있는 것을 보았는데,한 글자가 눈에 들어왔습니다.빨간 글씨로 현수막 귀퉁이에“능력”이라고 써 있었습니다.집회를 인도하는 분이 능력이 있다는 건지,아니면 주님의 능력을 어떻게 보여주겠다는 건지?!조심스러워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우리를 향하여 지금도 너희가 나를 찿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불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오늘 말씀에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웠고,그 고난,그 순종을 통해 완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빵과 기적을 바라는 세상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당하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예수님은 십자가를 원해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세상은 빵과 기적을 원하고,예수님이 세상의 왕이 되기를 원하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세상의 가치를 따르지 않고,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따랐기 때문에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 고난은 참혹했습니다.세상이 버린 죽음이었습니다.이 죽음은 신념이나,의로움,인류의 평화를 위해 뜻밖에 죽음을 당한 위대한 영웅들의 죽음과는 전혀 다른 죽음입니다.간디,마틴 루터 킹,장준하,마더 테레사등과 같은 사람의 죽음에 대해,사람들은 큰 별이 떨어졌다고 애도를 합니다.사람들의 일말의 연민을 불러일으킵니다.다이 애나의 죽음,얼마전 영화배우 이은주의 죽음은 애뜻한 연민을 불러 일으키는 죽음입니다.모두가 좋아하던 사람이 죽으면 온 백성이 안타까움과 연민의 정을 가지고 죽음을 애도하는데,예수의 죽음은 인간의 밑 바닥,인간의 죄성을 그대로 드러낸 죽음이셨습니다

십자가라고하는 흉악범들이 달리는 형틀에서 치욕적이며,고통스러운,참담한 죽음을 죽으신 것입니다.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 중에 이 예수의 죽음에 연루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인간의 타락한 속물성,천박함,욕망과 이기심,자기 연민이 만들어낸 죽음입니다.그러나 사람은 그를 버렸어도 하나님께서 친히 위로하시며,그리고 안타까워하시며 받으신 그러한 고귀한 죽음이십니다.성경은 이 죽음에 대해”의인을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더욱이 선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감히 죽을 사람은 드뭅니다.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롬5:7,8)고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의 내면의 근원,영혼의 바닥을 뒤 흔드는 그러한 죽음이셨습니다.세속의 흐름에 감추어진 인간의 모든 가치를 갈라 쪼개는 그러한 죽음이셨습니다.우리의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그러한 죽음을 죽으셨습니다.우리의 욕심에 가득찬 영혼을 깨끗게하시는 그러한 죽음을 죽으신 것입니다.예수의 죽음은 오직 아버지만 아시는 죽음이었습니다.그래서 예수는 신성모독죄로,그리고 정치적으로는 민심을 소요시킨 죄로,그리고 본질적으로는 자기의 기득권을 잃을까 노심초사하는 종교인들의 시기,질투,그리고 로마의 폭력,또 일반인들의 빵을 원하는 욕망,진리에대한 무관심,방관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입니다.예수는 이러한 사람들 속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따른 것입니다.그래서 십자가였던 것입니다.

오늘 히브리서는 이러한 십자가에대해 순종이라합니다.이 순종으로부터 오는 고난의 십자가가 자신을 완전케 했다고 합니다.이러한 순종은 어디에서 올까요?히브리서기자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경외를 인정하시어 그 간구를 들어주셨다고 합니다.그리고 그 경외심으로 순종하여 아버지의 뜻을 따른 것입니다그래서 십자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경외는 무엇일까요?창세기22:12에보면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칠 때에 하나님께서“네가 너의 아들,너의 외아들까지도 나에게 아끼지 아니하니,네가 하나님 두려워하는 줄을 내가 이제 알았다”하면서 아브라함을 인정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사실 이 장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모형이기도 합니다.

키에르케고르는 그의“두려움과 떨림”이라는 책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와 그리이스 신화 오딧세이의 첫 장면에서 그리이스의 연합군 사령관 아가멤논이 트로이 전쟁 승리 후 그리이스로 돌아가기위해 서풍을 불개하는 희생제사를 통해 자기 딸을 제물로 바쳐 모든 그리이스의 군사들로부터 영웅적 대우를 받는 장면을 비교하면서,아브라함의 희생은 영웅적인,또는 신격화하는 어떠한 실마리도 없는 바,오직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아무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부인 사라도,따라온 두 종,그리고 이삭 조차도 모르는,오직 하나님과 자기만 아는 이 두려움과 떨림 속에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의 전부인 외아들 이삭을 바쳤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은 오직 아버지만 아시는 죽음이었습니다.세상의 어떤 연민과휴머니즘,그 어떤 이념과 철학도 이 죽음에 개입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아버지 하나님과 예수의 일대일 관계 속에서 예수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였습니다.히브리서 기자는 이 순종에대하여 히5: 8,9에서“...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고 합니다.인류를 구원한 예수의 순종을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서 배웠다고 합니다.그리고 이 순종으로 예수님께서는 완전하게 되었습니다.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교우여러분!아버지의 아들이신 주님께서도 완전키 위해 고난을 감당하셨습니다.고난이야말로 우리를 온전케하시는 은혜입니다.만일 신체적으로 큰 병에 걸렸는데 아프지 않다면 어떻게 치유할 수 있겠습니까?아프지 않고 내 몸이 잘 못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마찬가지로 나에게 다가오는 고통,삶의 아픔,시험이 바로 우리를 순종케하며 그러므로 온전케 하는 하나님의 은혜 아니겠습니까?

주님은 바로 이 순종을 통해서 세상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뿐만아니라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십자가는 인간이 죄인이라는 부끄러움을 알게하시며,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시며,또한 인간과 아버지 사이에서 고난을 통한 순종으로 인류를 구원할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보이십니다.교우 여러분 이 구원의 은혜에 참여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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