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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교회( 2009년10월18일, 성령강림절후스무번째주일)

하늘기차 | 2009.10.18 17:52 | 조회 1836


성령의 교회

2009년10월18일(성령강림절후스무번째주일) 행13:1-3

스테판 집사가 순교당하는 것을 기점으로 하여 교회는 본격적으로 박해를 받기 시작하는데, 그 때에 많은 신자들이 박해를 피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떠났지만 사도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지키고자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예루살렘에 박해가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주신 명령을 준행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요21장에도 보면 '내 양을 치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근심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결국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은 사도들은 스스로 그 박해를 받게 되는데, 그래서 12 제자 중에 야고보는 헤롯에게 죽임을 당하고, 베드로는 옥에 갇히기도 합니다.

하여간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했을 때, 제자들은 이 약속을 이스라엘에만 국한시켜 버렸습니다. 아무도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베드로가 사마리아 땅 끝까지의 의미를 깨달은 것은 욥바에서 집승들의 환상을 보고 난 후부터 였습다. 그래서 그 전 까지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대 갈릴리 사마리아에 국한되고 있음을 행9:31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제자들의 의식 수준, 즉 그리스도 복음을 이스라엘에 한정시키는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방 지역으로 까지 복음을 멀리 보내고자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행8:14에 볼 것 같으면 그리스도의 복음이 사마리아에도 들어 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냅니다. 그리하여 그 곳에서 성령을 받게 합니다. 그러나 행11:19 이하에서 볼 것 같으면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방지역인 수리아의 안디옥에 들어갔다는 보고가 예루살렘 교회에 들어오자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안디옥 교회로 파송합니다. 저는 행8:14과 11:22을 보면서 느끼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께서는 준비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예루살렘 교회는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놀랍니다. 사마리아에 복음이 들어가다니? 그 버려진 땅에!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한 것은 사도들이 아니라 사도들이 택한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이었던 빌립이었습니다. 그러자 예루살렘 교회는 사마리아 교회를 위해 사도 베드로와 요한을 파송합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제는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되었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물론 이미 베드로를 통해서 이방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긴 했어도, 사도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통해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졌다는 소식을 접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이 때에 예루살렘 교회는 누구를 파송하느냐 하면 사도를 파송하는 것이 아니라 바나바를 파송합니다.

성령께서는 복음을 유대에서 사마리아를 거쳐 안디옥으로 전하면서 그냥 전한 것이 아니라 바나바라는 사람을 준비시켜 놓았습니다. 안디옥의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사람은 구브로와 구레네 지방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안디옥 교회를 담당하기 위해 예루살렘 교회가 공식적으로 직접 파송한 사람은 바나바 였습니다. 행1:24에 볼 것 같으면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는 구브로 사람으로서 레위 지파 사으로 이름은 요셉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이 요셉에게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나바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밭을 팔아 예루살렘 교회에 바친 사람이었습니다. 종말론 적인 신앙의 소유자였습니다. 또 사울이 회심한 후에 예루살렘에 와서 복음을 전할 때에 아무도 사울이 개종한 것을 믿어 주지 않았습니다. 이 때에 중재 역할을 스스로 자처한 사람이 바나바 였습니다. 그만큼 바나바는 사도들에게 신뢰를 얻고 있었던 바, 사울이 개심한 이야기를 바나바를 통해 들은 사도들은 그 때에야 비로서 사울과 더불어 지내게 됩니다. 또한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가 성장하자 혼자서는 도저희 안디옥 교회를 섬길 수 없다는 것을 느끼자, 다소에 있던 바울을 안디옥으로 초청하여 함께 목회를 합니다. 학문에 있어서나, 신앙에 있어서나, 능력에 있어서나 모든 면에 자기 보다 뛰어난 바울을 초청하여 함께 목회를 합니다. 이러한 그의 포용적인 성격은 자신 보다 뛰어난 바울을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였는데, 행14:12에서 볼 것 같으면 바나바와 바울이 루스드라에 도착했을 당시, 바울이 앉은뱅이를 일으켰는데, 그 때에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바울 보고는 헤르메스라고 불렀으며, 바나바는 제우스라고 불렀ㄷ건 것으로 보아 바나바가 과묵한 성격인지를 잘 알 수가 있습니다.

바나바는 바울과 더불어 1차 전도 여행을 함께 떠나기도 했으며, 그 후 예루살렘 회의에서는 이방인들의 신앙과 관련하여 순수한 신앙에 대해 바울과 더불어 함께 논쟁을 벌였습니다. 바울과 2차 전도여행 때에는 갈라지기도 하지만, 나중에 다시 화해를 합니다. 바나바는 관용하면서도, 공평했고, 온후하면서도 일에 대해서는 옳고 그름을 분명히 했으며, 결단성이 있으면서도 온유한 인물이었습니다. 성령께서는 바로 안디옥 교회를 위해서 바나바를 준비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이 빠른 속도로 전파되는 과정 속에서 복음의 본산지인 예루살렘 교회는 교리나 교권에 얽매이지 않고 탄력성있게 성령이 나아가는 일에 보조를 잘 맞추어 나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마리아 지역에 그리고 이방 지역에 복음이 전파되자 예수님과 직접 먹고 마시며 동거동락 했던 제자들은 그들에게 복음이 전파된 것에대해 복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든지- 왜냐하면 그들이 성령을 모른다고 하기 때문에-할례나 율법으로 그들의 신앙을 얽어 멘 것이 아니라, 혹시 부족한 것이 없나 하여 사도들을 파송해 사마리아 교회 같은 경우에는 성령에대해서 모르므로 성령을 받게 했으며, 이방 교회에 대해서는 할례나 율법에대해서 강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특성에 맞게 끔 강령을 내려 보내도 했습니다.

즉 사도들은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사울과 바나바 와의 예루살렘 회의에서 이방인들을 위해 4가지 강령 1)우상에게 바쳐서 더러워진 것을 먹지 말고, 2)음란한 행동을 하지 말며, 3)목매어 죽인 짐승의 고기 4)피를 먹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시대적 관행이나 규례로 본다면 참으로 파격적이며 진보적이며, 합당하고 융통성 있는 결정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러한 결정 사항을 곧 바로 안디옥 교회에 보냈으며, 안디옥 교회는 이 소식을 듣고, 격려를 받았으며, 기뻐하였습니다. 이방인들의 복음 전파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는 안디옥 교회는 이 편지 한 통으로 숨통이 확 틔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는 서로 간의 긴장 관계, 갈등 관계를 즉 한 쪽에서는, 즉 안디옥 교회는 미지의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계속 전하고 있는 반면에, 한 쪽에서는, 즉 예루살렘 교회는 새롭게 복음에 도전 해 오는 여러 가지 현실에대해 한계를 설정해 주고,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는 역할을 잘 해 주었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계속 뻗어 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만일 사도들이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든지, 유대인들의 규례를 강요한다든지, 복음 전파자들을 인정해주지 않았다면 안디옥 교회와 예루살렘 교회는 아마 관계가 좋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교회에서 비롯되는 모든 것들을 받아들여 새롭게 해석하여 적용하기에 까지 이르릅니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는 단지 2000년 전에만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똑 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통해서 역사합니다. 고기 교회를 통해서도 역사합니다. 고기교회를 통해 알게 모르게 역사하는 하나님. . .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안디옥 교회와 반대되는 교회의 모습, 성장도 없고, 변화도 없고, 물론 열매도 없고, 진취성도 없고, 한 마디로 복ㅇ음 전파, 하나님 나라의 확장의 사역이 끊어진 교회 또한 예루살렘 교회와 반대되는 교회의 모습, 무엇인가 진취적이고, 또한 기존 틀에서 벗어나면 용납하지 못하고, 자기 것 만을 고집하려는 교회. 과연 고기 교회는 어떤 교회에 속할 까요? 안디옥 교회, 그 반대, 아니면 예루살렘, 그 반대 교회 . . . 저는 이러한 4가지 속성들이 우리 교회, 아니 어느 교회에도 다 들어 있다고 봅니다.

그 중에 우리는 안디옥 교회와 예루살렘 교회와 같은 성경을 닮아가야 하겠습니다. 교회의 이름을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할 때에 안디옥 교회 처럼 진취적이며, 과감하고 그리고 신속하게 한 마음으로 일을 하지만, 일에 어려움이 생기고 문제가 생길 때에는 예루살렘 교회처럼 포용하며, 용납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간혹 말씀드리지만 우리 고기 교회는 4가지 방향의 길을 따라갑니다.

첫 째는 종말론적인 가치관을 갖는 교회입니다. 주님이 마지막 때에 모든 것을 회복시키시리라는 가치. 그러니까 지금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인하여 삶 속에서 1희 1비 하는, 절망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고 희로애락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삶이 아니라 오직 한 가지, 모든 것이 회복되고 세상가치가 하나님 다시 오실 때에는 무가치하다는 것을 알고, 참 생명의 가치의 소중함을 귀히 여기며 그 가치를 따라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둘 째 예언자적인 역사관을 갖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참 평화에 합당하지 않은 현실에대해 타협하지 않고, 거짓된 평화, 그리고 함께 누리는 평등과 또한 우리의 자유를 구속하는 폭력에대해 '아니다'라고 말 하고 행동할 수 있으며 이 세상을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라는 하나님 신앙으로 살아가는 예언자적 신앙 고백을 따릅니다.

세 째는 이웃과 더불어 함께 하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를 홀로 닫힌 모임으로 만들어 우리들 만의 종교 모임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사회의 애환을 함께 나누며 품는 그러한 교회를 지향합니다. 밤토실, 아래 공방, 그리고 준비중인 재활용품 가게를 통해 이웃과 함께하는 교회입니다. 이웃과 교회가 서로 허물없이 소통하는 것 말입니다.

네 째는 생태지향적인 교회입니다. 생태, 기후의 위기는 전 지구 공동체가 함께 극복해야 할 과제입니다. 그래서 보다 환경친화적인 사고를 가지고 살아가는 교회이기를 바랍니다. 그런면에서 우리 교회는 축복을 받은 교회입니다. 아직 그래도 여전히 어쨌든 우리 교회는 난개발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원초적인 자연 생태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고, 그것을 누리며 나누고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자리 생태교실을 잘 운영하고 있습니다. 우리 처음자리 들꽃동산을 잘 보존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섯째로는 앞으로, 곧 거룩한 독서, 렉티오 디비나라는 신앙 훈련과 침묵으로 드리는 피정 기도를 통해 성도의 신앙을 좀 더 성숙하게 끌어 올려 그 신앙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분량에 까지 자랄 수 있는 말씀과 기도의 공동체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의 방향은 글자그대로 방향이고 지향하는 과정이지 그것이 목표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있어서 유일한 목표는 한 가지 즉 사도 바울이 빌3:12에서
"내가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요, 또 이미 목표점에 이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
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라고 고백했듯이 우리에게 목표가 있다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머물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맛 보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주님 사랑 안에 푹 안기는 그러한 목표야 말로 우리의 유일한 목표입니다. 이 목표를 향해 우리는 여러 가지 다양한 길을 가는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 교회는 여러 가지 일들을 해 나가고 있습니다. 주로 지역 사회와 함께하는 일에 열심을 냅니다. 이러한 일들 속에서 느껴지는 것은 어떤 비죤을 가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볼 것 같으면 안디옥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 중에 특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들은 선지자들과 교사들이었습니다. 안디옥교회의 총 책임자이며, 바울을 동역자로 인도한 바나바, '니게르'라고 하는 시므온, 구레네 출신인 루기오, 그 당시의 분봉왕 헤롯, 즉 헤롯 안티파스와 함께 젖을 먹고 자란 마나엔, 그리고 사울이었는데, 그들이 특별히 금식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그 명령에 따라 바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운 바,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이방전도를 위해 보냈다고 합니다.

과연 안디옥 교회는 이방 전도의 비죤을 어떻게 받고 있습니까? 금식하여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이 충만해 짐에 따라 세계 선교의 비죤을 갖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일을 하면서 느끼는 것 중의 하나는 기도 없이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은 인간의 지혜나 방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며 성령께서 역사할 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간절한 마음으로 금식하며, 이 금식을 통해, 즉 먹는 것을 중단함으로써 인간의 욕구, 의지를 모두 끊어버리는 바, 하나님의 말씀만 살아나며, 성령께서만 역사하게 되는 데, 그렇게 기도할 때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갈 바를 제시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 때에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오늘 본문 말씀 볼 것 같으면 '세워라' 하니, '떠나 보냈다'고 합니다. 교우여러분!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일으켜 세울 때에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명령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실 때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일어나 걸으라!' 눈먼 장님의 눈을 뜨게 할 때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하십니다. 생명은 이렇게 단순한 말씀으로 살아납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생명의 언어로는 명령문이 가장 합당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과 만나서 죽은 생명과 관련될 때에는 명령하셨습니다. 귀신에게 '나가라!'고 명령하셨으며,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에스겔의 해골 골짜기에서 주님은 명령하십니다. '너희 마른 뼈들아, 너희는 나 주의 말을 들어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불어와서 그들이 살아나게 하여라!'명령합니다. 그런데 식사 시간에 '밥 먹어!", 이건 아니지요. . . 생명과 관련된 것은 사람들에게 서술적으로 표현되지 않습니다. '빛이 있으라!'입니다. 생명은 이렇고 저렇고가 아니라 하라! 걸으라! 일어나라!입니다. 오늘 안디옥 교회에서도 성령께서 사도 바울과 바나바를 '세우라'하니 '떠나 보냈다'고 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누가 그 명령을 받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고기 교회는 복음이 전파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면서 어떤 보냄을 받고 있는지요? 아니 보냄을 받기 위해 어떤 기도를 하고 있는지요? 성령께서는 과연 누구를 준비해 두고계실까요? 오늘 고기 교회의 바나바는 누구인가요? 오늘 이 시대에 하나님 나라의 바나바, 사울은 누구인가요? 누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전심으로 기도하나요? 성령의 감동에 따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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