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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먹으라(2009년 9월27일, 성령강림절후열일곱번째주일)

하늘기차 | 2009.09.27 15:05 | 조회 2110


말씀을 먹으라

2009년 9월27일(성령강림절후열일곱번째주일) 겔3:1-11
서구 문화의 바탕에는 3가지 근본 정신이 흐르고 있다고 합니다. 첫 째 헬레니즘의 이성주의, 둘 째 로마의 법 철학, 그리고 세 째가 양심을 선언하고, 정의를 선포하는 히브라이즘의 예언자 정신이라고 합니다. 이 예언자 정신, 예언자 활동이야 말로 구약, 즉 야웨 하나님 신앙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예언자 정신에 있어서의 가장 근본은 바로 하나님 중심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예언서를 보면 어디를 보아도 "야웨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로 시작을 합니다.

자신의 속 마음과 개인적 확신이나 의지, 자신의 사상이나, 연구 결과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그리고 야곱과 함께 했던 하나님, 홍해를 갈라 이스라엘을 구원한 그 하나님의 관점, 하나님의 중심에서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언자들은 그 말씀 속에서 정치, 사회, 군사, 경제, 심지어 유행을 따르는 의복 같은 세속의 일에 대해서도 일일이 관여하는 것을 성경을 통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러한 세상의 모든 일에 전문적인 지식을 모두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사야, 그리고 예레미야 선지자가 당시의 왕에게 어떻게 정치적 입장을 취해야 할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는 모습을 봅니다. 이것은 그들이 어떤 정치적 전문성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모든 문제들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서는 어떤 일도 해결할 수 없다는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관점', '하나님 중심'이야말로 예언자 정신의 가장 근본이었습니다.

예언 활동은 이스라엘 왕권이 시작되는 초기에 이미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초기 예언자의 대표적인 사람은 사무엘입니다. 사무엘은 어머니 한나의 기도를 통해 태어나 하나님의 제단에 드려졌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의 단 앞에서 먹고 자며 그 당시의 엘리 대제사장의 시중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무엘을 그저 시중드는 아이로 놓아 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엘리와 사무엘의 대화 가운데서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어떻게 서는지에대한 모습을 봅니다. 엘리는 사무엘에게 이제 너를 다시 부르면 다음과 같이 대답하라고 합니다. "주님 말씀하십시오. 주님의 종이 듣고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말씀하십시오. 주님의 종이 듣고 있습니다."라는 말씀에 인간의 생각이나 의지나 감정이 들어갈 여지는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말씀을 듣는자가 듣겠다는 고백 사이에 어떠한 것도 끼어들 수 없는 것입니다. 엘 리가 사무엘에게 가르쳐준 '주님 말씀하소서 주님의 종이 듣고 있습니다.'야 말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선 예언자의 모습입니다.

사도 바울의 2차 전도여행 때에 복음을 전한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도 바울이 엄청난 핍박 때문에 단지 2주 정도 밖에 머물지 못했는데도, 그 말씀이 뿌리를 내려 교회가 든든히 서게 되었는데,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가 극심한 가믐으로 어려움을 당할 때에 비록 데살로니가 교회가 재정적으로 넉넉한 교회가 아니었는데도 당시 소아시아와 마케도니아의 여러 교회들 보다도 더 예루살렘교회를 위해 최선을 다하여 구제에 참여했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교회다운 모습으로 아름답게 설 수 있었던 이유가 살전2:13에 언급되고 있는데, 그것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사도 바울의 말씀을 들을 때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데살로니가 교회에대해 "말씀이 신도 여러분 가운데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명기서에서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해방되어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가데스바네아' 라는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전하게 따르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40년간의 광야생활로 내 몰려 모두 광야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안타까움을 볼 수 있습니다. 신1:21,22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 . . 주 당신들 조상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올라가서 차지하십시오. 두려워하지도 말고, 겁내지도 마십시오. 그러나 당신들은 다 나에게 와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땅을 탐지할 사람들을 먼저 보내서, 우리가 올라갈 길과 우리가 쳐들어갈 성읍들이 어떠한지, 그 땅을 정찰하여 우리에게 보고하게 하자"고 할 때 모세가 "내가 듣기에도 그 말은 옳은 말이어서" 각 지파에서 열두 사람을 뽑아 정탐꾼으로 뽑아 정탐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민수기서에는 이스라엘이 그 정탐 40일을 일년으로 쳐서 40년 동안을 광야에서 방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듯이 받아야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에스겔도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 그대로 받는 모습을 봅니다. 에스겔은 북 이스라엘이 이미 멸망하고, 남쪽 유다도 바벨론에 곧 멸망하기 직전의 때에 활동하였으며,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 예언자입니다. B.C 597년에 이스라엘과 함께 포로로 잡혀가서 5년 후에 예언자의 소명을 받았는데, 포로 잡혀간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곧 회복하실 것이라는 근거없는 낙관론에 빠져있는 것을 거부합니다. 오히려 에스겔은 예루살렘이 망할 수 밖에 없다는 필연성을 선언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신앙 타락을 질타 합니다. 그러나 587년 예루살렘 멸망 이후에는 숙명론적인 자포자기에 빠진 이스라엘에대해 갱신과 회복의 말씀을 선언합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을 특이하게 받습니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 두루마리를 먹으라고 합니다. 말씀이 들리고 그 음성을 듣는 것이 아니라 먹으라고 합니다. 에스겔서의 특징은 환상과 상징이 많이 나오는데, 벙어리 상태가 되기도 하고, 환상 가운데에서 공중에 몸이 뜨기도 하고, 마비 상태가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이사야서나 아모스, 포로기 이 전의 예언자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현상입니다. 그런 특이한 행위가 나타나는 이유는 그동안 끊임없이 예언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거짓 예언자들의 말을 따릅니다. 예를들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완전 멸망시키실 것이고, 바벨론이라는 거대한 제국에게 멸망을 당하여 오랫동안 노예 생활을 하게 될 것이라고 하여도 이스라엘의 거짓 예언자, 그 대표적인 사람이 예레미야 예언자와 동시대 사람인 하나냐 같은 사람인데 이스라엘이 망해도 곧 1,2년 안에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실테니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지 못하여 이스라엘은 망하게 되었는데 이스라엘은 여전히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와서는 더 할 나위없이 신앙의 위기가 닥쳐 온 이스라엘에게 특이한 방식으로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말씀을 먹으라고 합니다. 이 표현은 신약의 묵시록인 요한계시록에서도 언급됩니다. 계10:9에 보면
"그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고 하니, 그는 나에게 "이것을 받아 먹어라. 이것은 너의 배에는 쓰겠지만, 너의 입에는 꿀같이 달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이제 말씀을 듣는 정도 가지고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단지 생각하는 정도가 아니라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와 그 말씀이 살아 역사하여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몸에 좋은 보약은 달지 않고 쓰다고 합니다. 바로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성도들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나기 위해서는 자신의 온전치 못한 것들이 회복되고 고쳐지기 위해서는 그저 듣기 좋은 소리 만 가지고 안된다는 것입니다. 살을 베는, 뼈를 깍는 아픔이 동반된다는 것입니다.

이미 무수한 하나님의 말씀이 이스라엘에게 전파되었지만 듣지않는 이스라엘의 강퍅한 마음에 에스겔은 무수히 많은 고민을 합니다. 어떻게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까? 하나님의 말씀의 객관성과 타당성을 어떻게 전할까? 극한 절대절명의 시대적인 상황 앞에서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에 푹 잠긴다는 뜻입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감히 그 시대 속에 받은 말씀을 갖고 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또 이 세상 속에 온전한 모습으로 설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 7절에 보면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너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온이스라엘 족속은 얼굴에 쇠가죽을 쓴 고집센 자들이어서, 나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합니다.
2:6에도 보면
"너 사람아, 비록 네가 가시와 찔레 속에서 살고, 전갈 떼 가운데서 살고 있더라도, 너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이 하는 말도 두려워 하지 말아라. 그들이 하는 말을 너는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얼굴 앞에서 너는 떨지 말아라. 그들은 반항하는 족속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 말씀9절을 통해
"내가 네 이마를 바윗돌보다 더 굳게 하여, 금강석처럼 만들어 놓았다. 그들은 반항하는 족속이니, 너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얼굴 앞에서 떨지도 말아라"고 합니다.

에스겔의 이마를 금강석 같이 만드신다는 뜻은 무엇일까요? 쇠가죽 같이 질긴, 마음이 강팍한 이스라엘 백성의 허물을 지적하여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는 말씀의 능력을 에스겔에게 부여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통해 어떻게 해서든지 생명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합니다.

그런데 교회에는 성경을 읽는 전통이 있습니다. 최근 성경 통독 모임이 꽤 알려지고 있는 것 같은데, 그 통독모임은 한자리에 모여 대표자 한 사람이 성경을 빨리, 무지하게 빨리 읽어내려 가면 그 속도에 따라 성경을 함께 보는 것인데, 잘 모르겠습니다. 좋은 점은 성경을 빠른 시간 내에 신구약 66권을 한 번에 다 읽는 다는 것 이겠지요. 통독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통독을 하는 동안 성령께서 함께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서의 숲과 나무를 동시에 볼 수 있는 성경읽기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외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물론 귀한 은혜를 입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통독은 아무래도 우리 나라의 빨리빨 리가 만들어낸 성경읽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그리 권장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한 자리에서 단숨에 마태면 마태, 누가면 누가, 특히 바울 서신 같은 경우는 한 번에 전체를 다 읽는 것도 좋지 않겠난 싶지만 신구약 전체를 합숙하며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빨리 읽어내려가는 방법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추천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또 QT라고 하는 성경읽기도 있습니다. 소위 Quiet Time라고 해서 나의 하룰의 일과 중에 한 시간을 정하여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하나님과 조용한 시간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성경 말씀을 해석하고, 그 말씀에 맞는 이야기도 있고, 매일, 매주의 기도 제목이 주어지는 책이 여러 출판사에서 나오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교회가 오랜 동안 이어 내려오는 성경읽기에는 Lectio Divina(렉티오디비나)라고 해서 글자 그대로 거룩한 읽기라는 전통이 있습니다. 그 순서로는 첫 째는 Lectio, 즉 읽기입니다. 이 읽기를 할 때 속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크지않은 소리를 내어 천천히 음미하며 성경을 일어내려 갑니다. 음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다음 둘 째로는 Meditatio입니다. 읽은 말씀을 묵상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반추(反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초식동물처럼 되새김질을 하는 것입니다. 왜 이 말씀을 하셨는지? 오늘 나에게 이 말씀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등 마음으로 헤아려 보는 것입니다. 고대 수도자들은 성경의 말씀을 기억해 간직해 두었다가 일터에서 혹은 혼자 산책하거나 기도할 때 그것을 떠올려내어 그것을 천천히 그 말씀을 되씹고 마음에 각인시킴으로써 그 말씀으르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고 합니다. 세 번째는 Oratio(말하기), 즉 기도입니다. 기도를 통해 그 말씀을 자기의 삶의 자리에서 자리메김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들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읽었습니다. 정말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말씀을 묵상하며 그 기도를 끊지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겠지요.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렇게 그 읽은 말씀이 내 삶 속에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Contemplation 즉 관상입니다. 글자그대로 그 말씀을 내 마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에서 제자들과 함께 하는 말씀이라고 한다면 그 제자들 사이에 내 자신을 한 번 슬쩍 끼워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과 그 제자들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병 도 고치고, 말씀도 듣고, 함께 음식도 나누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 속에 그렇게 그 말씀의 상황을 그려보는 묵상을 통해 실제 내 생활 속에서도 그 말씀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바라 보는 것입니다. 평안한 마음을 가지고 말입니다.

이렇게 성경을 읽노라면 말씀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동행하심이 조금씩 느껴지게 될 것입니다. 나중에는 오랜 시간의 과정을 통하다 보면 내가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나의 삶을 읽어주는 거룩한 읽기가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읽을 때 대부분 머리로 읽습니다. 그리고 반짝 깨닫기도 하고, 그래서 감동도 먹기도 합니다만 그렇게 반짝하니까, 깜빡하고 잊기도 쉬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읽기는 머리에서 마음으로 그리고 영으로 궁극에 우리의 삶 속에 녹아지는 성경읽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히4:12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양날칼보다도 날카로워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 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향을 가려 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고, 모든 것이 그의 눈 앞에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앞에 모든 것을 드러내 놓아야 합니다." 라는 관계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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