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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근심을 넘어서(2009년 9월 6일, 성령강림절후열네째주일)

하늘기차 | 2009.09.06 15:27 | 조회 1976


세상 근심을 넘어서

2009년 9월 6일(성령강림절후열네째주일) 사64:1-8

오늘 읽은 이사야서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70년 동안 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포로생활을 청산하고 큰 희망을 안고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스라엘의 본토와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완전히 폐허가 된 것을 보고 기가막혀 하는 장면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상황입니다.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 올 때 이스라엘이 많이 손상됐으리라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 까지 무너졌을지는 미쳐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 온 느헤미먀가 예루살렘 성곽이 있었던 곳을 말을 타고 돌아보는 장면이 느2:11 이하에 나오는데,
성벽은 다 허물어지고, 문들은 모두 불타고
왕의 연못, 샘물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다가갈 수 없었다고 기록하
고 있는 것을 봅니다. 사실 바벨론에서 풀려나와 이스라엘로 돌아갈 즈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커다란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실제로 예레미야, 이사야 등의 예언자들도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나라에대해, 약속에대해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이스라엘 회복의 상징으로 예레미야가 바벨론에 있으면서도 이스라엘의 베냐민 지방 아나돗에 있는 밭을 사고 팔라고 권면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은 바로 남과 북이 통일될 것이니 이전 북쪽 지역의 땅의 소유권을 회복하고, 그 곳에서 터를 잡을 준비를 하라는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전체 분위기는 새로운 시작, 새로운 약속, 새로운 삶에대한 기대로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꿈에도 그리던 이스라엘은 참혹 그 자체였습니다. 사63:11을 보면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출하여 홍해를 건너게 하신 그 하나님, 거룩한 영을 선조들에게 부어 넣으신 그 하나님은 지금 어디 계신가?' 하고 질문합니다. 눈 앞에 보이는 현실을 바라보며 기가막혀 합니다. 탄식을 합니다. '하나님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하나님 앞에서 탄식할 뿐만아니라 모든 것이 무너진 것 앞에서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을 봅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의 중요성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회개하는 마음이 없을 때에는 오늘 우리의 상황이 이렇게 비참하게 된 것이 마치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 처럼 보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강퍅하게 된 것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의 죄, 교회의 죄, 나라와 민족의 죄를 똑 바로 보며 회개할 때 오늘 이렇게 참혹한 현실에 이르는 것이 하나님께대한 반역, 하나님께대한 죄의 결과 임을 깨닫게 됩니다. 사64:6은 '우리가 모두 부정한 자 같다'고 합니다. 혹 나의 삶의 기반이 모두 무너져 내린다면, 나의 삶의 가치나 정체성이 혼동된다면, 앞으로 나아가야 할텐데 막히어 있다면, 바라던 희망이 안개에 가리워진 것 같다면, 미움과 원망과, 시기심이 거듭 솟아난다면, 삶이 자꾸 바람직하지 못한 방면으로 반복이 된다면, 그래서 무기력하고, 공허하지는 않은지요? 그래서 그러한 삶의 황폐함 속에서 누구 때문이라는이유가? 더 나아가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이럴 수 있습니까? 라고 하지는 않는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70년의 포로 생활의 연수를 다 채우고 이스라엘로 돌아갈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새 언약, 새로운 비죤, 새로운 삶의 터전에대한 꿈으로 부풀어 올랐고, 그러한 기대감 속에서 속속들이 이스라엘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기대와 그 바램은 폐허가 되어버린 예루살렘 성읍 앞에서 모두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기대와 바램은 너무 성급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바라는 것은 좋지만, 그 회복이 그리 쉽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오늘 말씀은 좋은 귀감이 됩니다. 우리의 삶이 새로워 지고, 기쁘고 복된 삶을 살고 싶지만, 그 바램은 폐허화된 예루살렘을 바라보는 이스라엘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신앙 생활 속에서 신앙이 한층 고조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마치 모든 것이 은혜고, 감격이고, 감사일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러했냐는 듯이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왜 그럴까요? 디이트리히 본 훼퍼 목사의 말을 빌리면 '우리에게 신앙의 발전, 성장이라는 것이 잇을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의 회개를 발판으로 해서 유일하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 없이는, 회개의 구체적인 열매가 없이는 우리는 성급한 희망 앞에 좌절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나의 감정, 의식, 종교성의 외투를 벗어버라고 진정으로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이 하나님께 향한 탄원이라 했는데, 다윗 시편에도 이러한 탄원의 시가 많이 기록되어있습니다.

특히 시42편을 보면 이스라엘이 아직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할 때에 기록된 시인데, 이 시편 기자는 예루살렘에 있을 때 예배를 인도하던 제사장이었던 것 같은데, 그가 바벨론에 끌려가 괴로워 했던 가장 큰 아픔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포로입니다. 노예가 되었습니다. 노예는 생명을 보장 받을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이스라엘에서의 삶을 생각 해 보면 지금 바벨론에서의 삶은 인간 한계의 최악이었을 것입니다. 의식주, 중노동, 질병. . . 그럼으로부터 오는 고통, 괴로움, 슬픔, 절망 이 외에는 그 사람 주변에 아무것도 없었을 것입니다.그런데 이 시 42편 기자의 가장 큰 고통은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 예배드리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로 나아 갔을 때 물과 음식 등, 광야의 거칠음과 황무함으로 괴로워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를 건널 때 갑작스러운 풍랑을 만나 두려워 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세상 살이로 인하여 고통스러워 하며, 눈물나며, 상처 받고 괴로워 합니다. 그러나 교우여러분 정말 우리가 고통스러운 것은 무엇일까요? 시42편의 기자를 보면 포로 생활의 고달픔을 괴로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멀어져 있는 것에 대하여, 그리고 포로생활로 인하여 하나님이 멸시 당하는 것으로 고통스러워 합니다. 이 시편 기자는 지금 포로생활의 고달품 뒤에 있는 아픔을 부르짓고 있습니다. 물론 중노동, 질병, 의식주 등 멸시와 천대의 노예 생활로 고통스러워 하겠지만 그가 진정 괴로워 하는 것은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지금 무엇으로 힘들어 하고 있습니까? 무엇으로 괴로워 하고 있습니까? 무엇으로 가슴 아파 하며, 통한의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사업, 일용할 양식을 위한 일 때문인가요? 가정에 문제가 있습니까? 자녀가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하나요?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얼마나 마음 아파하는 일이 많습니까? 그러나 더 깊이 아퍼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삶의 아픔 속의 아픔입니다. "아! 하나님을 잃어버렸구나! 아! 하나님을 뵙지 못하는구나"하는 것입니다. 일상에서 우리는 핸드폰이나, MP3가 없어지면 온 집안 구석구석을 다 찿아다닙니다. 그런데 하나님 잃어버린 것에는 감각이 없습니다.

시편42편 기자는 5절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을 합니다. 자기 자신의 영혼을 향하여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낙심하며, 어찌하여 그렇게 괴로워하느냐? 너는 하나님을 기다려라. 이제 내가,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을 또 다시 찬양하련다." 고 합니다. 이 시편 기자는 처음에는 자신에 대해, 자신의 삶에 낙망하여 불안해 합니다. 슬피 웁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그 울음이, 그 괴로움이, 그 방황함이 자신의 영혼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시 42편 기자는 스스로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바라자!"고후7:10에 보면 세상 근심은 사람을 죽게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룬다고 합니다.

벨기에 수도인 브뤼셀 시(市)는 정교한 레이스(lace)로 유명합니다. 그곳의 유명한 레이스 가게에 가면 가장 세밀하고 우아한 무늬를 짜는 방들이 따로 있습니다. 이 방들은 작은 창문에서 새어 나와 무늬 위로 직접 떨어지는 빛을 제외하곤 하나같이 어둡습니다. 어두운 방에 오직 한 사람만 앉아 있다. 그는 좁은 광선이 떨어지는 그 자리에서 레이스를 짭니다. 레이스는 언제나 그가 어둠 속에 혼자 있을 때, 무늬가 빛에 비췰 때 더욱 정교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집니다. 아마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무늬를 짜 넣으실 때에도, 우리는 종종 ‘어두운 방’에 앉아 있지 않나 모르겠습니다. 어둠은 우리를 숨 막히게 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하고 계시는 일을 이해할 수 없고, 어둠 속에서 어떤 선함도 발견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신실하신 직공에게 나의 초점을 맞춘다면, 인생의 가장 훌륭한 작품은 어두운 시절에 만들어졌음을 언젠가 알게 될 것입니다. 내 인생을 되돌아보면, 하나님과 가장 친밀했던 때는 어두운 시기입니다. 먹구름이 몰려올 때 하나님이 내 마음에 깨우치신 교훈이 불안한 내 마음을 평온케 합니다. 우리의 삶이 어둠으로 가득해 아무것도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때에도 일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밤새도록’ 일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광야로 나아갔을 때, 얼마 못 가서 홍해가 앞을 가로막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바로 이집트군이 뒤쫓았습니다. 진퇴양난에 처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어쩔줄을 모르는 이스라엘에게 오직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나 보라고 합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천사가 앞에서 이스라엘을 줄곧 인도하던 구름 기둥을 이스라엘 진 뒤로 보내어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군사 사이를 가로 막습니다. 그리하여 밤새도록 이집트군이 이스라엘을 공격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는 출14:21을 보면 '주님께서 밤새도록 강한 동풍으로 바닷물을 뒤로 밀어 내시니, 바다가 말라서 바닥이 드러났다"고 합니다. 밤 새 그 어두움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일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서 기자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바라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보다 우리를 더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산 위에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 마지막에 우리들이 염려하는 것을 안타까워 하시면서 6 번이나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 하면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염려하며, 두려워며, 세상 근심에 붙들리는 것은 바로 먼저 해야 할 일을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교우여러분! 우리를 살리는 것은 세상 근심으로 탄식하며 주저 앉아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따라 나서는 회개입니다. 오늘 사64:1은 '주님께서 하늘을 가르시고 내려'오시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하늘을 쪼개어 내려 오시어 나의 삶에 개입하여 주실 것을 구합니다. 여러분 도저희 우리의 지난 삶을 돌아 보건데 나의 힘으로는 변화도, 삶의 진전도, 열매도 맺을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나의 나쁜 습관화된 관행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아니시면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주님이 오시어서 우릴 새롭게 하시며, 변화시켜 주실 것을 간구합시다. 오늘 사64:8 말씀은
"그러나 주님, 주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님은 우리를 빚으신 분이십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이 손수 지으신 피조물입니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이 고백을 통해 세상 근심 넘어의 하나님 소망으로 성큼 나아가길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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