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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서(2009년7월26일, 성령강림절후여덟번째주일)

하늘기차 | 2009.07.27 10:25 | 조회 1947


하나님 앞에서

2009년7월26일(성령강림절후여덟번째주일) 출3:11-15

모세라는 이름에는 '건져 내었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름대로 모세는 나일강에서 바로의 공주에게 건짐을 받아 어릴적부터 공주의 아들로 왕궁에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젖이 없는 공주대신의 모세의 친 엄마가 모세의 유모가 되어 모세를 돌보게 됩니다. 그래서 모세는 친 엄마의 품에서 이집트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하나님 백성 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찿아갑니다. 그래서 겉은 이집트인이었지만, 속은 히브리인이었습니다. 모세는 성장하여 민족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필연이었습니다. 늘 마음 속에 어떻게 하면 이스라엘을 이집트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모세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사건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올 것이 오고 말았습니다. 자기 백성이 이집트인에게 맞는 것을 보고 참지 못하여 폭력을 가한 이집트인을 쳐 죽이고 땅에 묻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출2:12에 보면 '좌우를 살펴서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그 이집트 사람을 쳐 죽여서 모래 속에 묻어버렸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이집트인을 죽인 것은 개인적인 감정으로 즉흥적으로 행해진 것이 아니라, 주도 면밀하게 계획한 것이었습니다. 오랜동안 마음 속에 품어왔던 것이 이 일로 인하여 드러나 버린 것입니다.

이튿날 다시 그 장소에 갔는데, 이번에는 같은 히브리사람들 끼리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싸움을 중재하게 되었는데, 보기에 잘못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치려하자 모세가 "당신은 왜 동족을 때리오?"합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와 재판관으로 세웠단 말이오?"하고 반문하면서 어저께 이집트인을 죽인 것을 이야기하면서 자기도 죽일 것이냐고 합니다. 감쪽같이 숨긴 줄 알았는데, 자신의 일이 탈로가 나고 만 것입니다. 2:15에 보면 바로가 그 사실을 전해 듣고 모세를 죽이려 합니다.

결국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달아나게 되고, 무려 40년 동안을 은둔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제 모든 꿈은 사라지고 나름대로 이스라엘의 해방을 위해 준비한 계획도 끝이 났습니다. 모세는 철저한 실패자가 되도 말았습니다. 이집트의 왕궁에서 쫓겨났고, 자기 백성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과연 모세는 40년을 어떻게 생활했을까요? 무엇을 생각하며 살았을까요? 미디안 광야로 내려가 은둔자로 살면서 과연 소망이나, 꿈이 있었을까요? 삶의 기쁨이 있었을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찿아오셨습니다. 아니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찌보면 그동안 끝까지 놓지 않았던 인간적인 계산, 방법, 조건에 연연해 하던 것을 자의던 타의해 의해서든 내려놓자 찿아오십니다. 아니 늘 함께하고 계셨는데 그동안 자기가 붙잡았고, 붙잡고자 했던 끈을 놓치 않으니 그 좋으신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십니다. "모세야! 모세야!",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라고 불렀을 때 "예!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또 선지자 이사야도 성전에서 이사야를 불렀을 때에도 역시 "예!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즉각적인 응답을 합니다. 그러나 아담은 죄를 범해 하나님이 불렀을 때 부끄러워 숨었습니다. 신앙과 불신앙의 차이가 이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워 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모세도, 아브라함도, 엘리야도 모두 죄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죄인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불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결정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함께 할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듣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하기는 베드로나 유다나 마찬가지 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돌아오느냐 등을 돌리느냐에 따라 삶은 전혀 다른 방향이 되는 것입니다. 용서받은 삶과 용서 받지 못한 삶은 전혀 다릅니다. 어릴적 부모에게 회초리로 맞은 기억이 납니다. 근데 그 회초리가 전혀 원망스럽거나 치욕적이지 않습니다. 그 매에 사랑, 품어 안는 마음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회초리를 달 때에는 내 치려는 것이 아니라 품으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여간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좀 독특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출생 이후 40년 동안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뒤에서 보이지 않는 손으로, 큰 팔과 편 손으로 모세를 이끌어 가십니다. 풍요로운 왕궁 생활, 뜻 밖의 살인을 하고, 도망을 가고, 은둔 생활을 하고, 좌절과 침묵 속에서 생활 할 때에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손실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이 부르는 그 순간이야 말로, 그 때야말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하나님의 섭리, 우주와 시간과 민족과 개인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호흡이 결정적으로 들어 오는 때입니다. 인간의 지혜로는, 인간의 노력으로는 이러한 순간은 도저희 만들 수가 없습니다. 영원한 것이 유한한 시간 속에 찿아오는 순간! 거룩한 것이 속된 것과 만나는 장엄한 때,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순간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순간, 믿음의 시간입니다. 인간의 의지로, 인간의 지혜로,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삶의 시간이 아니라, 한 순간, 어느 결정적인 순간, 그 동안의 시간은 모두 나의 시간이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나의 시간 개념으로 나의 시간을 체울 수 없는 바로 그 때, 나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며 하나님의 말씀 만이 살아나는 그 순간, 그래서 믿음으로 만이 아니고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그 순간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나를 부르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이 모세에게는 떨기 나무 불 꽃 앞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이 순간을 위해 80년을 기다리셨습니다.

교우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가 죄인임을 고백합시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고백하기 위해 80년이라는세월이 흘렀습니다. 말로만 고백하고 얼마 후에는 여전히 옛 모습대로 살아가는 그러한 죄의 고백이 아니라 정말 뻗뻗한 목이 꺽이고 이제는 죽을 수 밖에 없구나 하는 사형수와 같은 죄의 고백이 있기 까지 80년이 걸렸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적인 속물성, 교만함, 게으름, 무관심, 천박함, 이기심,,, 그 무수한 떨거지들이 떨어져 나가는데 80년이 걸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때를 기다리며 준비하여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도 80년이요,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고개를 꼬끄라뜨리고 죄인임을 인정한 것이 80년 기간이었습니다. 가끔 청문회를 보면 그 감추었던 부정, 편법이 그대로 다들어나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도 보면 부끄러워 할 줄을 모릅니다. 이 사회가 얼마나 무감각한 사회인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편법, 불법을 쓰지 않으면 오히려 멍청한 사람이 되고, 왕 따가 되는 세상입니다.

그런면에서 하나님 앞에 선 모세를 볼 때에 이 얼마나 멋지고 숭고한 그러나 요란하지 않게 홀로 하나님과 마주 서서 하나님은 모세를 인정하고, 모세는 하나님이 그렇게 인정하시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이 모습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교우여러분! 성도의 인생은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를 고백하는 것에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본래의 모습을 찿는 자리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스승이요, 공회원인 니고데모에게 다시 태어나라 하셨습니다. 부모의 몸에서 태어나, 이제는 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인생은 허공에 떠 있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 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이러한 삶을 찿는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신발을 벗어들고 하나님 앞에 머리 조아린 모세에게 하나님은 너를 다시 바로에게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건져 내게 하리라고 합니다. 아마 모세는 몸서리를 첬을 것입니다. '나 보고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라고!'그 곳이 어느 곳인데 다시 돌아 가라는 말인가요? 어떻게 해서 빠져 나온 곳인데! 40년 전의 일이 주마등 같이 흘렀습니다. 살인! 동족의 거부! 도망! 좌절, 은둔,,, 모세는 다음과 같이 대답을 합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겠습니까?"라고 합니다. 80년 만에 모세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발견합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 "나는 죄인인데", "나이 80 먹은 중 늙은인데!", "내가 어떻게 이 나이에 이 초라한 모습으로 바로의 권력 앞에 설 수 있을까?"합니다. 철저한 자기 확인, 자기 고백이 저절로 튀어 나옵니다. "나는 누구인가?" 교우 여러분 "나는 누구입니까?"

당혹해 하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함께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모세는 또 하나님께 묻습니다. 설령 내가 이집트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간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당신께서 나를 보내셨다고 하더라도, 도대체 당신을 누구라고 소개할 수 있겠습니까? 도대체 당신은 누구입니까? 교우 여러분!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자기 자신을 발견한 모세는 이제야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묻습니다. 하나님이 무어라 대답하나요? "나는 나다"입니다. 보통 이름을 부르면 그 이름에 따르는 형상이 눈에 떠오르는데, 하나님의 이름은 그 형상을 떠올릴 수가 없습니다. "나는 나다". 이 말의 히브리어 발음이 바로 "야웨"입니다. 그러니까 '야웨 하나님'이라고 할 때 그 야웨는 "나는 나다"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꽤나 긴장하신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끌어내는 일이 그리 용이한 일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가리켜 준 것입니다. 출6:2에 보면

"나는 주다.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한 하나님'으로는 나타났으나, 그들에게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알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세 이전 까지 하나님은 그저 "전능하신 하나님", "천지의 주제시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무소 부재 하신 하나님", 그러니까 우리로치면 '하눌님',삼신할머니와 같은 이름으로 불리운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이름은 이집트에도, 근동 지방 어디에도, 가나안 땅 어디에서도 흔히 불리어 왔던 이름입니다. 아브라함이 불렀던 하나님의 이름은 당시의 이방의 신들의 이름과 구분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집트에서 해방시킬 절대절명의 큰 일을 놓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야웨"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나는 나'이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모세는 누구일까요? 바로 '나는 나'의 모세인 것입니다. 그동안 80년 동안 모세는 '나는 나'의 모세가 아닌 나 아닌 모세로 80년을 지내 온 것입니다.

소금인형이 바다를 보고 싶었다고 합니다. 소금은 바다로부터 만들어졌기 때문에 늘 자신의 근원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바닷가로 갔습니다. 바닷물에 발을 들여놓자 발이 없어졌습니다. 그 다음에는 무릎이 없어졌습니댜ㅏ. 그리고는 몸이 없어지고 급기야는 전체가 없어졌습니다. 바닷물에 녹은 것이지요. 그 때 소금인형이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 내가 바다네!" 소금인형은 자신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것입니다.

모세는 소금인형이 바다로 가서 바다로 녹아들어간 것 처럼 미디안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나는 나'인 야웨 하나님 앞에 '나는 나'인 모세가 선 것입니다. 그동안 '나 아닌 나'의 모세로 살아왔지만 이제 모세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아니 내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는 '나는 나'인 하나님 앞에 '나는 나'인 모세로 세워집니다.

이 시대를 바라보면 복제의 시대입니다. 신문과 TV를 보면 상품광고를 통해 개성에대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이야기 하는데 전혀 개성이 없습니다. 요즈음 탈렌트들의 얼굴을 보면 모두 콧 날이나 눈이나 얼굴이 모두 비슷합니다. 그래서 누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예전에는 외국인 연예인들을 보면 잘 구분이 안되었는데, 요즈음 우리 나라 연예인들을 보면 잘 구분이 안됩니다. 모두 비슷합니다. "나"의 존재를 상실해 가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죽은 미국의 가수 마이클 잭슨의 얼굴 모습을 보면 오늘 이시대의 자기를 잃어버린 표상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점점 '나는 나'다에서 '나는 나'아닌 모습으로 변질되어 갑니다. 성경은 이것을 죄라고 합니다.

'나는 나'라고 하시는 야웨 하나님 앞에 이제 '나는 나'인 존재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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