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View Article

구속의 기쁨(2009년 7월19일, 성령강림절후일곱번째주일)

하늘기차 | 2009.07.20 14:42 | 조회 1988


구속의 기쁨

2009년 7월19일(성령강림절후일곱번째주일) 사35:5-10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살게 된 것은 요셉의 꿈 때문이었습니다. 야곱의 아들 꿈쟁이 요셉은 자신이 꾼 꿈으로 인하여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아갑니다. 형들에게 죽을 뻔하고, 노예로 팔려가고, 감옥에 갖히고, 총리 대신이 되고, 그리고 형들과 온 가족 들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사실 요셉은 처음에 형들을 만났을 때에는 그들을 용서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요셉은 형들을 계속 시험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막판에 요셉의 마음이 완전히 바뀌어 버리고 소리 내어 울음을 터뜨리고 맙니다. 그리고는 결국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라고 거듭 언급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미리 요셉을 이집트에 보낸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비밀, 그 경륜, 그 섭리를 몰랐습니다. 그 총명하고 지혜로운, 그래서 총리대신이 된 요셉도 자신의 생각으로는 마지막 까지 그 비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고난, 죽을 고비, 보디발 장군의 아내의 유혹, 그리고 감옥생활, 형들에대한 복수심이 형들과의 화해의 눈물과 뒤범벅이 되면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려고 먼저 보낸 것이다'라는 신앙 고백 한 마디로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 비밀과 하나가 됩니다.

요셉은 미리 알지는 못하지만 그리고 깨닫지는 못했지만 믿음으로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에 참여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진리를 깨닫기 위해 도를 닦기도 하고, 또 미리 알기 위해 예지력이 있는 사람을 찿기도 합니다. 성경은 그 모든 것들이 헛되가고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오직 믿음을 말씀합니다. 그것이 유한한 인간에게 합당하고 맞습니다.

'주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말씀만으로', '말씀에 의지하여', '내 뜻대로 마옵소서, 아버지 뜻 대로 하옵소서' 등 이러한 신앙 고백,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 고백은 과거의 고난과 앞으로의 푯대를 향한 소망의 이정표가 됩니다. 어쨌든 하나님이 요셉을 택한 것은 바로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어느 목공소가 있습니다. 목수 아저씨가 여러 나무들 가운데에서 길고 넓적한 나무, 두꺼운 나무들 중에서 하나를 택하여 훌륭한 목각품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한 쪽에 잘 놓아 두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의 부인이 청소를 하면서 못쓰는 나무들을 챙겨 난로에 넣고 있었습니다. 한 구석에 있던 이 나무는 속으로 따분해, 심심해, 나도 저 불 속에 들어가 보았으면 했습니다. 탁탁 불똥이 튀는 소리도 나고, 따뜻하고 좋은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 아주머니가 앞으로 와서는 자기를 들어다가 난로 속에 넣는 것이었습니다. 뜨거운 불길에 휩싸여 몸이 막 타 들어갔습니다. 그 때 주인이 목공소에 들어오다가 그 광경을 목격하였습니다. 주인은 깜짝 놀라면서 그 나무를 그 불 속에서 끄집어 냈습니다. 아직도 연기가 풀풀 났습니다. 몸도 많이 그슬렸습니다. 그러나 그 나무는 감사했습니다. 그 속에 있었으면 영영 타서 없어져 버렸을 텐데, 그러자 얼마 후에 목수 아저씨는 이 나무를 톱으로 썰고, 끌로 파고, 대패로 다듬고 하여 이 나무는 너무 아펐습니다. 송곳으로 구멍을 뚫을 때는 기절 할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 나무는 꼭꼭 참았습니다. 왜냐하면 얼마전 불구덩이에서 건짐을 받은 것을 생각하면, 지금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 고통은 참을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주인이 자기를 갈고 닦아 지금 무엇인가 만들고자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엇기 때문입니다. 켜고, 자르고, 깍고, 다듬고, 파고 하는 동안에 이 나무는 멋진 작품이 되었습니다.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기쁨은 바로 이러한 기쁨입니다. 아모스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소돔과 고모라 같은 불길에 타버릴 뻔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 돌아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벧후3:10 이하에서 주님의 날은 도둑같이 올 터인데 그 때에 모든 원소들이 녹아버리고 모든 일이 다 드러날 것인데 그 때에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린다고 합니다. 또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건축가가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집을 짓는데, 어떤 사람은 금, 은, 풀, 나무, 보석 위에 집을 짓는다고 하면서 그러나 심판 날이 오면 자기가 각자 한 일이 명백해 질 것이며, 심판의 날에 불을 몰고 오는 그 분이 우리들이 지은 집을 태울 터인데 그 집이 그 불을 견디면 상을 받을 것이라고 하면서, 그러나 그 건축자 자신은 불 속에서 살아나오는 사람같이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렇게 마지막 때에 모두 하나님 앞에서 불로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야말로 우리는 불구덩이 속에서 연기가 풀풀 나는 채로 건짐을 받은 존재인 것입니다. 그야말로 초라한, 숯 검댕이가 그대로 묻어나는 그러한 존재입니다. 그 불구덩이에서 건져냄을 받은 그 감격, 그 기쁨! 교우여러분 우리가 세상을 바라 볼 때에는 불타 죽을 수 밖에 없는 부지갱이 같은 것이 건짐을 받았다는 그 감격, 그 기쁨으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사업에 실패한 눈, 아니면 성공한 눈으로, 대학 입시에 실패한 눈, 아니면 사업에 성공한, 아니면 실패하여 궁색해진 눈으로가 아니라 구속의 은혜를 입은 자의 눈으로 모든 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모든 것이 바로 보입니다. 인간의 지식으로는 어떤 과학으로도, 어떤 사상과 개념으로도 세상을 바로 볼 수는 없습니다. 오직 구속의 기쁨, 감격으로 바라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겉으로 이루어지는 일들의 뒤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그렇게 믿음으로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볼 수 있었ㄷ건 것입니다.

교우여러분 사람이 감사할 줄 모른다면 어떨까요? 더 나아가 찬양을 모른다면 어떨까요? 사람은 창조된 피조물이기 때문에 근본부터 감사할 대상이 있으며, 찬양과 존귀와 영광을 돌려야 할 대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감사도 없고, 영광도 없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이 있습니다.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똑 같이 식사하고, 일하고, 놀고, 여행하고 하여도 그 마음에 창조주, 전능자, 절대자에대한 감사의 모습이 없습니다. 찬양을 모릅니다. 그런 사람에대해 성경은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구원의 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에게는 구원의 감격이 있습니다. 그래서 존귀한 분에게 찬양을 하며, 근원적인 감사를 드립니다.

창세기를 크게 둘로 나누면 창1-11장은 원역사, 역사 이전의 이야기로서 창조와 타락의 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보시기에 좋은 창조가 인간의 타락으로 점차 파괴되어가며, 멸망의 길로 치닫는 모습을 봅니다. 살인, 거짓, 패역과 강포함이 세상에 만연합니다. 그 극치는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들과의 결혼, 그리고 바벨탑을 쌓는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그 타락의 족보 중에 아브라함도 그리고 그 아내 사라도 전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히 사라는 잉태치 못한다고 합니다.

창12장 부터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여 구속의 역사가 시작되고 있는데, 하나같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아내들인 사라, 리브가, 라헬이 모두 잉태치 못하고 있음을 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이렇게 잉태하지 못하는 인간에게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전혀 소망이 없는 곳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총, 은혜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잉태치 못하는 사라, 리브가, 라헬의 모습이야 말로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사랑도, 평안함도, 구제도, 인내도, 순종도, 그 어느것 하나라도 나의 입술과 발걸음에서, 나의 손에서 온전하게 이루어 지는 것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혀는 거짓, 입술은 독사의 독과 같고, 입은 저주와 욕설로 가득하고, 발은 피로 물들고, 파괴와 비참으로 가득하며, 평화의 길을 모른다고 합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요, 나의 모습인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타락의 족보에 함께 속해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이러한 사람들의 모습에대해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버려졌다고 합니다. 인간의 모습은 아무것도 잉태치 못하는 여인처럼 사막이요 광야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이 사막과 광야에 샘물이 솟고 시내가 흐를 것이라고 합니다.

수요일에 전도서를 함께 읽어가는데, 지난 번에 읽은 전9:1에 보면 하나님은 지혜로운 사람들의 하는 일도 조종하시고, 사랑과 미움도 조종하신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러면 인간이 로버트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한 번 만 더 생각해 보면 그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얼마전에 강원 태백 카지노에서 개인 사업자가 300을 잃었다고 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 하는 장면을 T.V를 통해 보았는데, 몇 달을 호텔에 투숙하며 그 가진 전 재산을 날렸다는 것입니다. 또 어는 총망받는 축구 선수가 마약을 주사하면서 자기가 죽고 싶을 정도로 싫다고 하면서 그렇게 마약에서 손을 놓치 못하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아니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도 보면 한 번 사람이 미워지면 그것 지우기가 그리 싶지가 않습니다. 그 미워하는 마음에 내 마음이 황폐해 집니다. 거짓과 욕심 등에 사람들이 사실은 꼼짝을 못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영께서, 또 우리의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실 때 우리는 새로워지며 우리의 마음이 온전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희망과 평화와 감사와 기쁨의 샘이 솟아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전도서 기자가 헛되다 하는 것은 해 아래의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해 아래의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죽음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이 죽음 앞에 헛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자기가 지혜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다 해 보았지만 헛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지혜의 끝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소크라테스도 '나는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맞습니다. 서양 철학의 처음과 끝입니다. 철학은 그 이상도 그 이하일 수도 없습니다.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솔직한 인간의 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공허한 것입니다.

어떤 종교인이나, 간혹 어떤 분들이 죽음을 안다, 이해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아직 모르거나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인간이 죽음을 알 수 있겠습니까? 죽음을 안다는 것은 죽음 너머를 안다는 것인데 어찌 인간이 죽음 너머를 알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모든 문제들은 여기서 비롯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연' 한다든가, '~척' 한다든가 하는 것 말입니다. 인간의 지혜는 모른다는 것 이상을 넘을 수가 없습니다. 지혜자인 전도서 기자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지혜자의 지혜가 모른다는 것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 솔로몬에게서 시작되어 넘쳐나는 인간의 지혜를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로 나아가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성경의 모든 예언과 문학과 역사서와 지혜서 그리고 율법이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지혜로 넘어갑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어둠 속에, 죽음 속에 머물 수 밖에 없는데,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의 지혜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베푸셨습니다.

다윗왕이 블레셋 진영에서 율법궤를 뺏어 오던 날, 다윗은 덩실 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그 율법궤가 이스라엘을 지켜줄 것이며 그 율법궤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늘 함께하며 우상을 물리치고 온전히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것을 생각하니 춤이 덩실 덩실 추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 가장 큰 기쁨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 오셔서 나의 죄를 다 용서 해주시고 세상 짐 지고 가는 나를 쉬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내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과 하나가 되는 그 순간에 그 때서야 비로서 생명의 삶은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 전 까진 살아도 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를 때 한 제자가 집안의 장례를 치르고 오겠다고 하시니 죽은 사람은 죽은자로 하여금 장사를 치르게 하라고 합니다. 죽은자란 바로 하나님과 단절된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영혼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하는 모습이야말로 진짜 살아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이렇게 내 안의 그리스도의 영으로 기뻐 뛰는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천국을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 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온 집 주인과 같다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참 살기 어려웠습니다. 이중 과세(종교세, 소위 십일조)와 대부분의 땅을 소수의 사람들이 소유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의 대부분이 소작농이었거나, 일할 거리가 없어 늘 빈둥거릴 수 밖에 없는 쳐지였습니다. 오늘 우리시대의 비정규직 문제나, 대학을 나온 청년들이 아르바이트 인생으로 전락한 것과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비유는 우리 시대의 우리들의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 포도원 주인이 아침에 일꾼을 구하러 나갔다고 합니다. 오전 6,7시경입니다. 그리고 제3시 그러니까 우리 시간으로 오전 9시가 됩니다. 그 시간에 놀고 섰는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오전 11시에도, 오후1시, 3시에도 나가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니 하루일과가 끝날 5시에도 그러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주인이 서 있는 사람들에게 "어찌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냐?"하고 물으니, "우리를 품꾼으로 써 주는 이가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합니다. 그러자 이 주인이 너도 포도원에 들어가라고 합니다. 그래서 오후 5시에 길거리에서 서성되던 사람이 포도원에 들어가 열심히 땀흘려 일을 했습니다.

교우여러분! 우리는 이렇게 오후 늦게 5시에 택함받은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포도원비유를 읽어보면 포도원 주인이 아침 일찍 일꾼을 부르러 나갔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아침의 시작은 오전 6시입니다. 일찍부터 우리를 부르러 나오신 주님, 그동안 주님을 기쁨으로 만나지 못한 교우여러분, 오후 늦게라도 아직도 기회가 있으니 꼭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예수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구속의 기쁨이 있어야 삶의 모든 것, 즉 과거와 미래의 삶이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 안에서 하나로 이어질 수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주인이 되실 때에 능히 세상짐을 감당하며 자유, 평화, 기쁨을 맛보며 나누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이 그렇게 살기를 원하시며 기뻐하십니다.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
979개(38/49페이지)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하나님은 잊지 않으신다(2016년9월4일) 사진 첨부파일 관리자 14498 2016.09.09 08:30
공지 나는 주의 사람이니(가야금, 대금 동영상) 첨부파일 하늘기차 25870 2007.10.16 12:24
공지 망대에 오르라(창립40주년 기념 예배 설교,유경재 목사) 고기교회 26225 2006.05.31 22:16
공지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하늘기차 24816 2005.09.02 16:30
235 [일반] 성령의 교회( 2009년10월18일, 성령강림절후스무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1838 2009.10.18 17:52
234 [일반] 오직 한 사람(2009년10월11일, 성령강림절후열아홉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1910 2009.10.12 11:35
233 [일반] 가장 좋은 것(2009년10월 4일, 성령강림절후열여덟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1959 2009.10.04 13:09
232 [일반] 말씀을 먹으라(2009년 9월27일, 성령강림절후열일곱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111 2009.09.27 15:05
231 [일반] 다윗의 능력(2009년 9월20일, 성령강림절후열여섯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072 2009.09.20 17:08
230 [일반] 이 가을에 . . . 기도 첨부파일 하늘기차 1805 2009.09.14 15:52
229 [일반] 축복(약속)의 땅(2009년 9월13일, 성령강림절후열다섯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1717 2009.09.13 15:46
228 [일반] 세상 근심을 넘어서(2009년 9월 6일, 성령강림절후열네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1977 2009.09.06 15:27
227 [일반] 기도 외에는 ...(2009년 8월30일, 성령강림절후열세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1939 2009.08.31 14:11
226 [일반] 산다는 것은 . . .(2009년 8월23일,성령강림절후열두째주일) 첨부파일 [3] 하늘기차 2149 2009.08.23 15:21
225 [일반] 사람아, 일어서라!(2009년 8월16일, 성령강림절후열한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117 2009.08.18 12:20
224 [일반] 새롭게 하여 주십시오!(2009년 8월 9일, 성령강림절후열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1866 2009.08.09 15:24
223 [일반] 즐거운 섬김( 2009년 8월 2일, 성령강림절후아홉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1890 2009.08.02 14:55
222 하나님 앞에서(2009년7월26일, 성령강림절후여덟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1949 2009.07.27 10:25
>> [일반] 구속의 기쁨(2009년 7월19일, 성령강림절후일곱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1989 2009.07.20 14:42
220 [일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발걸음(2009년 7월12일, 성령강림절후여섯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084 2009.07.12 16:20
219 [일반] 예수님의 마음(2009년 6월28일, 성령강림후네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004 2009.06.29 15:15
218 [일반] 하나님 나라 선언(2009년 6월21일, 성령강림후세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1923 2009.06.21 15:30
217 [일반] 하나님 앞서 가시는 생명의 삶 Ⅴ(2009년 6월14일, 성령강림후두번째 첨부파일 하늘기차 2232 2009.06.14 15:53
216 [일반] 하나님 앞서 가시는 생명의 삶 Ⅳ(2009년 6월 7일, 성령강림후첫번째 첨부파일 [1] 하늘기차 2144 2009.06.07 14: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