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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 소식을 전하는 발걸음(2009년 7월12일, 성령강림절후여섯번째주일)

하늘기차 | 2009.07.12 16:20 | 조회 2083


기쁜 소식을 전하는 발걸음

2009년 7월12일(성령강림절후여섯번째주일) 롬10:8-15

시내의 번화한 곳에서 다소 눈에 띠는 복장을 하고, 어깨 띠를 두르고 여러 가지 글들을 써가지고 들고 다니면서 확성기로 '예수 천당 불신 지옥' 하며 외치는 사람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또 지하철에서 목 쉰 소리로 예수 믿고 부르짖는 경우도 보았고, 시각장애인이 찬송가를 녹음하여 들려주며 동냥을 하는 경우도 있고, 또 젊은 청년들이 기타를 메고 복음송을 부르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점잖게 정장을 하고 성경, 찬송을 옆에 끼고 예수를 열심히 전하는 분들도 종종 보았습니다. 이 분은 훈련을 하는 분이라고 합니다. 어떤 훈련이냐 하면 이렇게 낯 선 사람들 앞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담대해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담대함은 없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건 담대함이 아니라 뻔뻔함입니다. 담대함은 지난 번 말씀처럼 왕같은 제사장으로서 아름답고, 존귀한 모습이어야 할 것입니다. 옛날에 한 번은 버스를 탔는데 갑자기 한 대학생 같이 보이는 생머리를 한 여학생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길래 무엇인가 했더니 열심히 복음을, 아마도 사영리였던 것 같은데 너무 빨리 말을해서 잘 알아듣지도 못했는데, 그러고서는 다음 정거장에서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급히 버스에서 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학생도 아마 느낌에 전도 훈련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내심 부끄러웠던 모양입니다. 하여간 이런 모습을 보노라면 느껴지는 것은 전도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닌데, 그렇다고 전도에 열정을 가진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얼핏 복음을 전하는 것에 무관심했던 것을 들키고 만 것 같은 생각도 드는데,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네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혀 무관심한 것도 아닌데 하며, 아! 그래 '복음을 전하는 방법이라 할 까'가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근 우리 교단은 300만 전도 부흥을 위해 교단 전체가 총 동원되고 있습니다. 전쟁을 불사하는 것 같고, 그래서 교단 홈피에 예장 300만 성도 운동이라는 홈피가 따로 개설되어, 매 주 얼마나 전도했나 하는 통계가 올라옵니다. 얼마 전만해도 저의 핸드폰에 교회 전도 현황을 300만 홈피에 접속해 보고하라는 메시지도 뜨고 해서 지금 우리 교단은 한 판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스코아 273만 4,903명이라고 합니다.

어느 교회 홈페이지에 올라온 광고를 보니 '전도대회 1등 상품이 소형승용자 1대, 그밖에 인원에 따라 김치냉장고, 컴퓨터, 대형 텔레비전, 자전거' 같은 경품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진에 보니 그 교회 로비에 소형승용차가 떡하니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얼마나 성도들이 전도를 하지 않으면 경품까지 내걸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한편, 백화점이나 할인마트에서 특별행사를 할 때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흔히 사용하는 방법이라 마음이 씁쓸하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교회의 전도왕은 향토예비군 중대장인데, 예비군 훈련을 빼주는 대가로 예비군 훈련에 참석했던 사람들을 차로 실어와 등록시켰다고 하고, 어느 유치원 원장님은 유치원 선생님들을 유치원 차로 실어왔다고 하고, 심지어 다른 교회에 다니는 분들을 품앗이로 데려와 위장 등록을 시켜 전도 숫자를 늘리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것은 총동원전도주일에 있었던 일인 것 같은데, 그런데 성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숫자 헤아리는 것을 좋지않게 여기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이유는 다윗이 자신의 군대의 힘이 얼마나 되는가 숫자를 헤아리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분이 하나님임을 망각한 처사였던 것입니다. 이로인하여 이스라엘이 큰 재앙을 당하는 모습을 봅니다. 한국 교회의 양적 성장은 괄목할 만 합니다. 한 생명, 한 영혼 사랑의 결실입니다. 그러나 점차 전도의 열기가 숫자 따라잡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교회들이 자꾸 숫자에 연연합니다. 큰 교회에대한 콤플렉스가 매우 강합니다. 저 자신과 고기교회도 이러한 흐름에 예외일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던 이러한 풍조 속에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도합시다'하면 선입견부터 가집니다. 큰 숫자와 대형교회에대한 것이 머리 속에 그려집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전도에대한 생각 속에 이러한 한국교회의 Complex, Syndrom이 떠오른 다면 빨리 잠재우시기 바랍니다.

얼마 전에 충북 청원군에 있는 쌍샘자연교회에서 생태친화적인 교회 모임에 참석하였습니다. 5교회 중심으로 10여명의 목사님들이 참석하였습니다. 그 중에 곽은득 목사님이 계시는데 봉사하시는 교회 이름이 작은 교회입니다. 이 전에도 이렇게 작은 교회 모임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거부감을 일으켰던 기억이 납니다. 번성과 풍요가 아니라 '어떻게 작은 것을 지향할까?' 하는 의구심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진정 성서적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작은 것은 지극히 작은자, 다시말해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자를 향한 작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겨자씨 만한 믿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 가셨을 때, 양과 염소를 가르는 심판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때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말씀 속에서 작은 자와 자신을 동일시 하고 계셨습니다. 작은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 것을 이 말씀 통해 볼 수가 있습니다. 큰 것으로 치면 캐톨릭의 교황의 권위와 그 재산, 그리고 계급적 제도를 어디 따라 갈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개신교가 그 큰 것에서 벗어 나았는데, 설마 다시 그리로 돌아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수원 고등교회의 박희영 목사님은 작은교회에대해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관현악에서 피콜로라는 작은 악기가 만일 자기의 작음에 열등감을 느낀 나머지 플륫의 소리를 흉내낸다면, 작은 북이 제 소리를 낼 생각을 않고 큰 북소리를 낸다면 그 관현악단은 들으나 마나다. 크든 작든 다 제 자리가 있고 제 몫이 있다. 제자리에서 제 몫의 일을 하는 사람이 일을 잘 하는 사람이다. 자기 자리를 슬그머니 떠나 공연히 일반적인 이야기를 하거나 알지도 못하는 남의 이야기를 하는 수가 있다. 대체로 이런 사람들은 지금 자기의 일에대한 열등감 내지 부끄러움이 그 밑 바닥에 깔려 있다. 작은 교회 목회자, 농촌교회 목회자들은 자기가 하고 있는 목회에 대하여 보다 긍지와 자신을 가져야 한다. 작은 교회는 큰 교회 되기 전 상태의 교회가 아니다. 농촌 목회는 도시 목회를 대기하는 임시 목회가 아니다. 그런데도 수 많은 작은 교회 목회자들은 왜 자기가 헌신 해 섬기는 작은 교회론을 자신있게 펴지 못하는가? 왜 수 많은 농촌 목회자들이 자기의 농촌 목회를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고 기가 죽어있는가? 그럴바에야 하루 빨리 큰 교회에 가서 도시 교회로 가서 기펴고 열심히 일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제가 왜 작은 교회에대해 말씀을 드렸나 하면, '전도합시다'하면 숫자목표, 큰 교회 지향의 대상이 떠오를 수 있는데, 그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였습니다. 교회에서 '전도합시다'하면 얼굴부터 굳어집니다. 갑자기 눈이 둥그레 집니다. 못 볼 것을 보았는지, 듣지 말아야 할 말을 들었는지, 그러나 길거리에서 아니면 지하철에서 이상한 옷차림을 하고 목청껏 부르짖어 시끄럽게 소음이 되어버린 그런 인식 숫자와 대형교회 지향의 개념을 혹 갖고 있다면 이제 지워버리기 바랍니다.

복음전도는 주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한 생명 구원을 위해 손수 행하신 귀한 발걸음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초기에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지역에서 눈코뜰새 없이 열심히 사역을 하였습니다. 마침 기도하며, 재 충전을 위해 한적한 곳으로 나아가 있을 때 였습니다. 그 지역의 사람들이 찿아와 예수님께 간청하였습니다. 다른데로 가시지 말고, 이 곳에 머물 것을 요구합니다. 왜 그랬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그 곳에 계시면서, 각 종 질병을 다 고치시고, 귀신 쫓아 내고, 귀한 말씀을 들려주시니 더 이상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곳에 묶어두려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요청을 외면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하시고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잘 대접하는 곳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으면서 병도 고치고, 귀신도 쫓아내고, 랍비들과 같이 가르치기도 하며 지내실 수 있지만, 주님은 그 요청을 거절하시고, 갈릴리 여러 회당에 다니시며 전도하셨습니다.

마9:35절 이하에 보면 주께서 이스라엘의 온 곳을 다니시며 사역하신 행적을 말씀해 주고 있는데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며,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온갖 질병과 온갖 아픔을 고치셨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그들에대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에 지쳐서 기운이 빠져있"다 하면서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추수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영적 추수를 의미하지 않습니까? 영적 추수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으니 이제 추수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의 때, 영적 추수 때에 알곡과 가라지를 고른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벼와 피가 서로 섞이어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모르지만, 추수 때가 되면 피가 위로 쑥 올라와서 한 눈에 벼와 가라지가 구분되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지금 이 마지막 때에 영적으로 무르익어 하나님께 돌아올 백성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물질의 풍요, 과학 문명의 편리함 속에서 풍요로운 삶을 누리지만 사람들의 심성은 점점 더 강포해 지며, 그 양심이 화인맞아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심령이 늘어나며 양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참 귀한 한 마디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목자 없는 양 같이 돌아다닌다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단기선교라 해서 평신도들이 휴가 기간을 이용해 외국에 나가 복음을 전하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거의 교회를 위한, 신도들 훈련을 위한 프로그램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소위 단기선교라고 하는 것이 잘은 모르지만 원래 구 소련이 붕괴되던 때에 러시아에 갔던 성도들이 러시아인들의 영적 공허함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였다고 합니다. 말이 통할 수가 없으니까 그저 찬양을 통해 모스크바나, 페테르부르그, 로스토프 같은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였는데 이 곳의 러시아인들이 마음이 조금씩 열리면서 하나님을 영접하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단순히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이 한 마디에 돌같이 굳어있던 표정들이 녹아져 내리는 것을 체험했다고 합니다. 이 러시아에서 복음을 전했던 사람들이 "잃어버린 축복, 한 많은 세월"을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는 이 한 마디로 모두 되 돌려 주었다고 합니다.

전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방금 말했듯이 잃어버렸던 것 다시 찿게 하고, 되돌려 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행26:18말씀은
"그들의 눈을 열어 주고, 그들이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세력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또 그들이 죄사함을 받아서, 나를 믿
는 믿음으로 거룩하게 된 사람들 가운데 들게 하려는 것이다' 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사람들, 말씀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심령, 아버지 하나님의 집, 기도하는 집인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당에 한 번도 발걸음을 옮기어 보지 못한 죽은 심령을 깨워 일으켜 손을 잡아 주께로 인도하는 이 일 보다 더 귀하고 아름다운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 15절에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얼마나 아름다우냐!"라고 합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란 바로 전도자를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발걸음이었고, 사도 바울의 발걸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 승천 하실 때에 땅 끝 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하셨습니다. 지금도 이 시간에 나홀로 벼랑 끝에 서 있으면서 사랑의 관심을 절실히 원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겉으로는 점잖고, 건강해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죽기 일보 직전에 있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닐 것입니다. 또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데, 앞을 가로막는 벽이 있어 오도 가도 못하는 심령도 있을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운 복음을 귀한 그릇에 담아 평화의 발걸음으로 한 영혼, 한 영혼에게 다가가 성령께서 감동을 주시는데로 담대하게, 그리고 섬세하게, 왕같은 제사장의 모습으로 나눌 수 있는 복잇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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