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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기쁨 5(2010년 2월28일, 사순절두번째주일)

하늘기차 | 2010.02.28 15:47 | 조회 1817


하늘의 기쁨 5

2010년 2월28일(사순절두번째주일) 시51:10-12

여러분들은 어느 때 가장 기쁜가요? 연령과 성별에 따라, 나라와 민족에 따라 천차만별일 것입니다. 갖고 싶은 것을 가질 때, 보고 싶은 것을 볼 때,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날 때 기쁩니다. 희망하는 기쁨이 있지요. 절망 속에서 어두움 속에서 빛을 바라보는 기쁨이 얼마나 큽니까? 감사의 기쁨도 있지요, 나눔의 기쁨은 또 어떠합니까? 또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는 기쁨은 더 할 나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에게 있어서 기쁨은 무엇일까요? 성도들에게만 있는 기쁨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우리는 하늘 하면 이 지상의 것 보다는 저 멀리의 것, 아니면 환상적이거나 어떤 특별한 것을 생각하기 쉬운데, 그래서 간혹 우주선이나 외괘인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바로 이 현실 세상의 어려움, 고통을 벗어나고픈 욕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종교도, 외괘인 이야기도 자칫 이원론 적인 현실과 괴리된 이야기를 하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랍비요, 공의회의원인 니고데모와 대화하는 중에 니고데모가 자꾸 하늘과 관련된, 하나님의 특별함을 자꾸 이야기 하자 예수님은 땅에서 이루어지는 일도 모르면서 어찌 하늘의 일을 알 수 있냐고 하면서 다시 태어나라고 하면서 니고데모의 관심을 일축해 버립니다.

기쁨의 사전적인 의미는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의 즐거운 마음이나 느낌이라고 합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본질적으로 무엇인가를 채워야하는 마음상태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마도 본질적인 것을 잃어버렸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 말씀은
다윗이 하나님에게 구원의 기쁨을 다시 돌려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어느 정도로 간절한가 하면 8절 말씀에서처럼
"주님께서 꺾으신 뼈들도, 기뻐하며 춤출 것입니다."라고 고백할 정도이니 지금 다윗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다윗이 고백했듯이 구원의 기쁨이 없다면, 구원의 기쁨의 가치나 감격도 별로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어디선가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그 기쁨을 잃어버렸지만, 이제 다시 돌려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구원의 기쁨이 무엇일까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7곱 교회 중에 유일하게 책망을 받지 않는 교회가 있습니다. 바로 서머나 교회입니다. 이 교회가 어떻게 책망을 받지 않았는지를 찬찬히 보는 중에 계2:9의 말씀에 '나는 네가 당한 환난과 궁핍을 알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교회가 환난과 궁핍을 당하였다는 것입니다. 7 교회 중 마지막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와는 정 반대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3:17에 보면 스스로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는데 사실은 비참하고 불쌍하고 실제는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었다는 것입니다. 호되게 책망을 받습니다. 그러나 서머나 교회는 오히려 네가 궁핍하지만 실제로는 부요하다는 것입니다.

핍박과 궁핍함은 초대교회의 전형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사도 바울의 복음전도 여행을 보면 언제나 핍박과 박해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이 항상 사도 바울의 복음전파를 심하게 방해하였습니다. 1차 전도 여행 때에 비시디아 안디옥(행13:50)에서는 유대인들이 그 지역의 귀부인들과 지도층 인사들을 선동했다고 합니다. 또 이고니온(행14:2)에서는 나쁜 감정을 품게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바나바와 바울은 3절에 보면 주님을 의지하여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였는데, 주님께서 놀라운 이적과 표징을 보여 주셔서 은혜의 말씀을 확증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도시의 사람들이 두 편으로 나뉘어지기 까지 했는데, 5절에 보면 이방사람들과 유대 사람들이 관원들과 합세해서 바울과 바나바를 모욕하고 돌로 치려 하였고, 19에 보면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루스드라까지 와서 군중들을 설득하여 바울을 돌로 쳐서 죽은 줄 알고 성 밖으로 끌어낼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그당시 교회의 모습이요 상황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당시의 치안과 경찰력을 가진 기득권자들을 선동하여 바울일행을 핍박하였습니다.

또한 가난 역시 초대 교회의 한 모습이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오후 3시 기도 시간에 성전으로 올라가는 아름다운 문 곁에서 구걸하는 걷지 못하는 사람을 보고는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며 그의 오른 손을 잡아 일으키니 그가 다리와 발목에 힘을 얻어 벌떡 일어나 걸으며, 뛰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성전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베드로에게 은과 금은 없어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모습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6:9,10에서
"이름없는 사람과 같으나 유명하고, 죽은 사람과 같으나, 보십시오, 살아 있습니다. 징벌
을 받는 사람과 같으나 죽임을 당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고, 근심하는 사람과 같으나 항
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과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사
람과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라고 고백을 합니다.그렇습니다. 가난한 사람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교회와 성도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사야서의 남은 자요,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들이 교회와 성도들을 헛된 말로 모함하였는데, 먼저 인육을 먹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아마 예수님께서 내 살 내 피를 마시라고 한 그 말에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또 성찬을 빗대어 남녀가 비밀스러운 음란한 연회를 연다고 비난합니다. 또 예수로 말미암아 가족이 나뉘어 갈등을 야기시킨다고 합니다. 또 로마 황제에게 불복하여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주라고 하여 황제를 멸시하며 국가 권력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ㄸ 마지막 심판 때 하나님께서 불로 심판하신다는 이야기를 부풀려 기독교인들이 방화범이라는 뜬 소문이 돌개하였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어찌되었던 교회가 적지 않은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오해도 있고, 실제 비성서적인 교회의 정체성 때문에 비난을 받기도 하는데, 그러나 사실 가장 여렵고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의 복지사업에 가장 많이 참여하는 것이 국가 통계적으로도 교회와 기독교와 관련된 단체들이라는 것이 통계로 나와 있습니다. ㅇ;렇게 좋은 일을 하는데도 교회가 오늘날 비판을 받습니다. 이럴 때 과연 교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라는 것입니다. 세상과 차별되는 모습이 무엇인가?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참된 기쁨, 참된 가치, 하늘의 참 기쁨이 무엇인가 라는 것입니다.

창12장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이야기로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여 복의 근원자로 세우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이 이야기가 왜 뜻 깊은 이야기가 될 수 있는지를 알려면 11장의 바벨탑과 그 이후의 족보이야기를 보아야 합니다. 인류는 카인이 아벨을 살해 한 이후 점점 더 폭력과 욕망으로 점철되어 갑니다. 창4에서 라멕이라는 사람은 자기가 상처를 입자 자기에게 가해 한 사람을 살해했다고 합니다. 또 자기에게 가해를 입힌 젊은 청년 까지도 죽였다고 하는 내용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마음이 점점 거칠며, 폭력적이 되 가는 것을 봅니다. 결국 노아의 홍수가 있었고, 그 이후에도 인간의 욕망은 멈추지 않고 퍼져나가 나중에 바벨탑을 세우는 사건의 자리에 까지 나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서로가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하여 온 땅으로 흩으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살게 되는데, 그 사람들 중에 아브라함의 조상도 포함되어 있었으니, 바로 데라였습니다. 데라는 가족들을 데리고 그들의 삶의 근거지인 문명의 발생지인 티그리스, 유프라데스 강 유역을 떠나 하란이라는 곳에 도착합니다. 데라는 거기에서 죽고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여기서 꼭 알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창11:30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가 임신을 하지 못하여 아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아이가 없는 문제는 아브라함의 일생을 늘 괴롭혀 오는 문제였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한 것도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석녀입니다. 아이를 잉태치 못합니다. 생명을 낳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떠난 인간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이제 폭력과 욕망으로 가득찬, 생명을 잉태치 못하는 세상 으로부터 한 사람을 택하여 폭력과 욕망으로 죽어가는 세상과의 관계를 끊고 이제 새로운 삶의 가치를 따르는, 생명의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새롭게 열어 보이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폭력과 욕망, 그리고 이기적인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이러한 석녀와 같은 삶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선과 악의 기준으로 이 세상을 본다면 생명의 가치와는 상관 없는 늘 윤리 가치에 목을 멜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선한 분은 한 분 밖에 없다고 못 밖으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교회도, 아니면 다른 어느 종교에서도 폭력에서 자유롭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한 사람을 바라 볼 때에도 이 사람의 언행이 폭력적인가 그렇지 않은가를 보면 그 사람, 그 집단이나 단체의 됨됨이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지금의 이 세상은 폭력과 욕망으로 덮여있습니다. 바로 우리이고 나입니다.

얼마전 ‘더 로드’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영화의 배경이 인류가 세운 모든 문명이 무너진 상황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근근히 적은 숫자의 사람들 만이 살아남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속에 주인공 아버지와 아들이 생존을 위해 좀더 따뜻한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먹을 것을 포함한 의식주가 모두 사라지고, 지상의 식물들도 모두 말라버린 정말로 불모의 땅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한 필요한 것들을 얻기 위해 폭력, 살인을 서슴치 안습니다. 더 나아가 인육을 먹기까지 합니다. 참으로 끔직한 세상이 되어버렸는데, 그 속에서 주인공인 아버지와 아들은 우리는 인육을 먹지 않는 착한 사람이라 하며, 스스로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것을 지켜내려 애 쓰지만 그러나 그 속에서도 결국 생명을 보존키 위한 정당방위의 살인, 그리고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양식을 지키고자 아주 이기적이 되어갑니다. 그 속에서 아버지를 향한 아들의 참견은 숭고하기까지 합니다. 음식을 나누어 주자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살아가는데, 그 아들이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최소한의 것의 마지노선이 됩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이것이 먼 훗 날의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우리가 사는 지금 세상의 실존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죄의 드러나는 모습은 폭력입니다. 창세기에서도 에덴 동산에서의 범죄 이후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증상은 무엇 보다 폭력입니다. 인간 사회의 모든 곳에서 폭력입니다. 특히 전 세계가 신자유주의 체제로 전환된 이 후 온 지구촌 전체가 폭력적입니다. 그야말로 힘있고 능력있는 사람들만의 체제로 굳혀져 갑니다. 마치 이리나 늑대와 같은 부르짖음입니다. 정치, 경제, 심지어 종교에 이르기 까지 말입니다.

영화 후반부에 가면 아버지가 지병으로 죽게 되어 아들이 홀로 남게 되는데, 그 때 남쪽 바닷가에 이르러서 한 남자를 만납니다. 이 사람이 착한 사람인지, 아니면 폭력적인 사람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 때 아이가 그 바닷가에서 만난사람에게 ‘당신의 마음에도 불씨가 있나요?’ 하고 묻습니다. 이 마지막 장면이 바로 우리 모두에게 향하는 질문이라 느꼈습니다. 우리에게 불씨가 있나요? 생명의, 평화의 자유의 불씨. 얼어버린 세상을 녹여줄 수 있는 불씨, 모든 곳을 밝히고 따뜻하게 해 줄 불꽃을 지피울 수 있는 불씨말입니다.

영화에서 착한 사람으로 길을 가는 역할을 꾸준히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들 때문이었습니다. 아들이 계속 아버지의 마음을 붙듭니다. 굶주림에 지쳐 죽어가는 노인에게 양식을 주자는 것도 아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생필품을 도둑질해 간 흑인에게 가진 것을 나누어 주자고 한 것도 아들입니다. 영화 중간 중간에 ‘우리는 착한사람이지?’하고 자기 정체를 거듭 확인하는 것도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럴 때 마다 살고자 하는 이기적인 마음을 추수려 길에서 만남 사람에게 자신에게 있는 것을 어찌되었던 나누는 모습을 봅니다.

다윗이 12절에서 구원의 기쁨을 회복시켜 달라고 하는데, 오늘 이 시인에게 참 구원의 기쁨을 회복시켜 줄 수 있는 분은 누구인가요? 오늘 이 시대를 살며 우리로 하여금 정체성을 확인케 하며, 새롭게 하며, 도와주실 분이 누구인가 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폭력의 시대에 우리로 온유하며 인간 자체, 살아있다는 것 자체, 그러니까 만남과 관계, 나눔의 가치를 품고 살아 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폭력과 욕망, 그리고 이기심에 전염되어 돌이킬 수 없는 모습이 되었습니다. 마치 더 로드의 아버지, 아니 그 모든 등장인물 처럼 말입니다.

그나마 영화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어떻게 아버지가 아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을까요? 바로 아버지의 자식 사랑입니다. 남쪽 따뜻한 곳을 찿아 힘겨운 여행을 떠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아버지의 아들에대한 한 없는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폭력과 욕망과 이기적인 세상 속에서 착한 사람으로, 불씨를 마음에 안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사랑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우리가 성도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늘의 기쁨을 누리며 나누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미 우리는 너무 많이 폭력과 욕망과 이기심에 노출되어 우리의 마음에서 깨끗하며, 너그러우며, 정직한 것을 찿기어려워 졌습니다. 도움을 받지 않고는 이 시대를 기쁨으로 살기 어렵습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의 고백이 간절히 다가옵니다. 주여! 우리를 도우소서. 주여! 우리와 함께 하옵소서!

아, 하나님, 내 속에 깨끗한 마음을 새로 지어 주시고 내 안에 정직한 새 영을 넣어 주십
시오. 주님 앞에서 나를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거룩한 영을 나에게서 거두어 가지 말아
주십시오. 주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기쁨을 내게 돌려 주시고, 너그러운 영을 보내셔서 나
를 붙들어 주십시오.

주님께서 요이1:5,6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매여, 지금 내가 간청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서로 사랑하자는 것입니다. 그렇지만,내
가 새 계명을 써 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처음부터 가지고 있는 계명을 써 보내는
것입니다. 사랑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계명은 다름이
아니라,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대로, 사랑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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