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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기쁨 4(2010년 2월14일, 사순절첫번째주일)

하늘기차 | 2010.02.21 17:32 | 조회 1970


하늘의 기쁨 4

2010년 2월14일(사순절첫번째주일) 계2:2-5

요즈음 수요일에 요한 계시록을 함께 보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당시 로마의 도미시안 황제의 박해 아래에서 믿음을 지켜며 굿굿이 박해를 견디어 내던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된 책이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무슨 내용이고, 그 수많은 숫자와 상징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구구합니다. 가장 조심스러운 것은 문자적인 말세론적 해석입니다. 666은 히틀러를 상징한다고 한다든지, 144,000명만 구원 받는다든지, 천년 왕국의 천년도 그대로 받아들인다든지 하는 것입니다. 666은 6이 3번 인데, 히브리인에게 6은 불완전한 숫자입니다. 그리고 7이나 12은 완전 숫자이지요. 그러니까 계시록에서 666으로 상징되는 존재는 불완전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요한 당시 신으로 승격하여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하던 도미시안 황제를 상징하는 숫자인데, 그가 아무리 세계를 지배하며 교회를 핍박해도, 그는 단지 불완전한 인간에 불과하며, 결국 망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144,000도 완전한 숫자인 12를 12번이나 곱하였으니 얼마나 완전합니까. 거기에다 0을 3개나 더 붙였으니 완전에 완전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도미시안 황제가 우리를 핍박하고 있지만 이 고난 속에서 배교하거나 변절하지 않고 잘 견디는 사람은 모두 구원받을 수 있다는 희망의 숫자이지, 글자 그대로 문자 그대로 144,000명만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합당한 해석은 당시 로마의 핍박을 받고 있는 당사자들을 위한 기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시의 로마의 핍박 속에서 배교하고, 교회와 신앙을 떠나는 어려운 때에 숫자와 상징을 통해 교회와 성도들에게 격려와 희망, 그리고 승리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보통의 상식으로는 알아 볼 수 없는 글을 썼는가 하면 한마디로 지금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하는 세력, 즉 로마의 도미시안 황제는 멸망할 것이라는 것인데, 이 글을 어떻게 로마의 감옥에 수감중인 수인이 대 놓고 그렇게 쓸 수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감옥의 검열을 통과하기 위해 그렇게 숫자와 상징을 통해 성도들에게 멧세지를 보낸 것입니다. 18장을 보면 바벨론이 멸망한다고 하는데, 이 것은 사실 당시의 로마 제국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러한 계시록과 같은 글을 사도 요한이 처음 기록한 것이 아니라 이미 유대에는 이러한 상징과 숫자, 환상을 통해 작가가 원하고자하는 글을 기록하는 묵시문학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서에도 이러한 묵시적인 기록이 마24장을 포함해서 간혹 등장하고 있고, 그 대표적인 문학으로는 다니엘서를 들 수 있습니다. 이 다니엘서도 후반부는 바벨론에서의 포로 생활 이야기들이지만 사실은 스스로 신이라 자청했던 그리이스의 잔혹한 황제였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제국의 멸망을 이미 패망한 바벨론을 빗대어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묵시문학의 대표적인 특징은 비관적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핍박을 받을 때 사람들은 타협을 하거나, 저항을 하거나, 아니면 은둔을 하는데 이 묵시 문학은 은둔하는 사람들의 철학과 생각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은둔자들의 역사는 깊은데, 특히 그리이스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내스의 박해 때의 잔혹함, 죽음과 같은 어두움 속에서 이들은 지금 세상은 사탄의 세력이 직접 지배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이러한 세상을 포기하고, 그러한 세상에서의 안락한 생활은 죄악이라 생각하며, 가장 열악한 사막 지대로 가서 금식과 고행, 금욕, 사유재산 포기, 개인의 즐거운 삶 포기, 결혼을 포기한 은둔의 생활로 그 시대를 지나갑니다. 세상이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져서 사탄의 통치를 받고 있다는 것이 그 은둔자들의 신념이고, 바로 묵시문학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러한 묵시문학적 틀을 가지고 교회에 편지를 쓴 것입니다.밧모섬의 사도 요한과 수감자들도 고통스럽지만, 본토의 교회 성도들도 너무 힘들었습니다. 성도들은 이 환난을 저주라고 생각하였는데, 그러나 사도 요한은 그것은 드러난 부분이고, 이 환난의 감추어진 것이 있다고 하며, 거듭 교회에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합니다.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교회의 정화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핍박을 통해 그동안의 거짓 교사들, 거짓 신앙으로 더럽혀진 하나님의 교회를 정화시키신 것입니다. 이 로마의 박해를 통해 거짓 신앙은 다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각 교회 마다 꼭 회개의 메시지를 적어 보냈습니다.

처음에는 인내를 강조하고, 신앙을 바로 세우라고 권면하면서 책망을 곁들였지만, 나중에 가면 칭찬은 사라지고 죄에대한 무서운 질타가 이어지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가식적인 경건의 탈은 다 벗겨져서 마지막 7 번 째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에대해 이야기 할 때에는 '풍요롭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지만 실상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었다'고 통렬히 질타하며 그야말로 라오디게아 교회를 벌거벗겨 버립니다. 자기 연민에 빠진 교회가 자신의 충족을 자랑하며 이러한 핍박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지 못하시기 때문에 오는 것이라고 비난하는 것에대해 요한은 온전치 못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교회라고 통렬히 지적합니다. 에베소 교회 같은 경우는 다른 교회와 달리 분별력이 있어 거짓 신앙에 휘말려 들지 않았다고 칭찬을 하지만 그러나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회개를 촉구합니다.

어떻게 회개할까요? 저는 이 번 달에 계속 기쁨에대한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기쁨의 삶을 살자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잃어버렸으면 꼭 다시 찿으라고 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기쁨의 반전, 즉 하나님의 기쁨에 대해서 말씀하였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잃은 기쁨 찿아 주시기 위해 오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공생애 첫 번째 말씀으로 바로 희년을 선언하셨습니다. 요한 복음의 첫 번째 기적도 역시 결혼 잔치 축제의 회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기쁨을 잃어버렸을까요? 교우여러분 지난 느9:35-38 내용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넓고 기름진 땅을 주셔서 좋은 과일과 곡식을 먹고 살라고 하였는데, 우리 조상에게 주신 바로 그 땅에서 종이 되었다고 합니다. 오히려 이웃 나라들이 우리의 소출을 먹고, 우리의 가축을 부리므로 우리가 종이 되었다고 합니다. 왜 기쁨을 잃었나요? 그렇습니다. 종이되었기 때문입니다.

참 이상합니다. 자유로운 것 같은데 종노릇합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말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말이 맞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5:1에서 주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였으니 그러니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말라 하는데도 종으로 살아갑니다. 죄에 종살이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 그렇게 숨 돌릴 틈 없이 바쁠까요? 왜 벗어나지를 못할까요? 종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이 맞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어서 13절 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섬기라" 즉 종노릇 하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종살이 하는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켰는데 또 종노릇하라 합니다. 그렇습니다. 전에는 욕망에 종노릇 하였지만 이제는 사랑에 종이 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참 주인 잃어버리면 바로 그 순간부터 우리는 욕망, 자기 연민에 사로잡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떠나면 욕망의 종노릇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우리의 모든 것을 자유롭게 해 줍니다. 의무나 먹고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쁨과 감격의 삶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과 함께하며, 주님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하나님 사랑, 주님 사랑. 하나님과 연애하지 않으면 그렇게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가 그만 그 사랑, 첫 사랑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다시 찿을 수 있을까요? 계2:5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해 내서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을 하여라. 네가 그렇게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겠다."고 합니다. 잃은 것 다시 찿기 위한 첫 번째입니다.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기쁨에대해 말하면서 계속 이야기 했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치매가 아닌 이상 다시 기억해 보라는 것입니다. 빽업을 해 보라는 것입니다. 마치 잃은 지갑을 다시 찿은 목사님 처럼 말입니다.

눅17장의 잃은 3가지 찿는 이야기 중의 마지막 이야기인 17절에서도 막내 아들이 자기 길에서 돌아선 것은 바로 생각이 났기 때문입니다.
“그제서야 그는 제정신이 들어서”아버지에게 돌아가야겠다고 합니다. 내가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제서야 깨닫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자 아버지는 기쁨으로 맞이하며 잔치를 베풀었다고 합니다. 축제요, 잔치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떠나면 종노릇합니다. 어느 정도까지인가 하면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먹고 싶은데 먹고 싶어도 주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처참한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러한 자기를 돌보거나, 회복시켜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생각이 난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어디서부터 잃어버렸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은혜를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모든 눈에 보이는 것을 잃어도 은혜를 잏지 않으면 그는 모든 것을 누리는 사람인 것입니다. 다윗은 시16:5에서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이 여호와의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이 은혜를 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두 번째로 '회개하라' 합니다. 햍볕같은 이야기’의 최용우 전도사님의 글 중에 ‘죄인이 없는 시대’라는 짧은 글을 읽었습니다. 내용인 즉슨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에대해 이야기 하면서 만약 21세기인 요즘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고 말씀하시지 못 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이 떨어지는 순간 여기저기에서 돌맹이가 날아와 예수님과 여인은 대갈통이 터지고 이가 나가고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요즘엔 '죄인'이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죄'를 회개하라는 설교가 사라져버린 지 오래 되었고, '회개'에 대한 설교도 성도들의 삶을 알고 있는 목사님이 성도들 눈치 봐가며, 마음 상하지 않게(?)미꾸라지식 설교를 하느라 아주 땀을 뻘뻘 흘린다는 것입니다. 양심에 화인이 아니라 벼락을 맞아 시커멓게 타버린 시대입니다. 회개는 싫어하고 축복만 좋아하는 암흑의 시대입니다. 그러니까 요즘 우리가 많은 것을 잃어버렸지만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마음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는지 한 번 돌아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회개가 없다면, 돌아서지 않는다면 회복도, 다시 찿음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회개의 합당한 열매가 없다면 어떤 삶의 참 기쁨도 회복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잃은 것을 찿는 비유의 3번째 이야기를 돌아온 아들을 기뻐 맞이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로 끝을 맺는지 모르겠습니다. 영화 mission에서 로버트 드니로가 분한 주인공이 노예상인으로서의 삶과 애증으로 인해 자기 친 동생을 살해한 그 죄를 용서받기 위해 주인공이 그동안 자기가 노예사냥을 위해 사용했던 도구들, 무기들을 커다란 그물망에 모두 담아 어깨에 짊어지고 이과수 폭포를 거듭 반복해서 오르내립니다. 주인공을 참회하도록 권유한 신부가 다 애처러울 정도로 그렇게 이과수 폭포를 오르내리지만 좀처럼 자기 죄를 벗지를 못하며 끊임없이 자기 학대를 합니다. 그러다가 다시 한 번 폭포 위에 올라 지친 몸을 추수리지만 여전히 마음은 공허하고 자기 연민에 스스로를 어찌 할 줄을 모릅니다. 그런데 그 때 지금 기억이 아련한데, 아마 추장이었던 것 같은데 지쳐서 허망하게 쉬고있는 주인공에게 다가와 주인공을 끌어 앉습니다. 그러자 주인공이 펑펑 눈물을 흘리며, 그 동안에 쌓였던 모든 고뇌와 회한을 한 순간에 눈물 범벅이 되어 토해냅니다. 그 때 화면에 이를 지켜보는 아이들의 웃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 주인공이 그렇게 씻으려고 애를 써도 지울 수 없었던 자기 죄였는데, 원주민 추장이 자기를 감싸 안는 순간 그 모든 것들이 눈처럼 깨끗이 씻기어 녹아버립니다. 우리도 이렇게 죄가 있지만 죄가 없다고 아버지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주인공의 눈물은 이내 웃음과 기쁨의 눈물로 바뀌었고, 그 후에 주인공이 성직자로 변화하는 모습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잃어버린 자리에서 왜 자기가 길을 잘 못 들었는지에대한 냉철한 자기 성찰이 없으면 변화도 새로움도 기쁨의 삶, 축제의 삶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처음에 하던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받은 칭찬은 다른 교회와 좀 다릅니다. 2절 말씀입니다.
“나는 네가 한 일과 네 수고와 인내를 알고 있다. 또 나는, 네가 악한 자들을 참고 내버려
둘 수 없던 것과,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라고 자칭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그들이 거짓말쟁
이임을 밝혀 낸 것도, 알고 있다.”고 합니다. 또 6절 말씀에서
“그런데 네게는 잘 하는 일이 있다. 너는 니골라 당이 하는 일을 미워한다. 나도 그것을
미워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에베소 교회는 영적 분별력이 있었습니다.

당시 교회는 헬라철학의 영향을 받은 2원론의 영지주의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 가지고는 뭔가 부족하여 율법을 지켜야 구원 받을 수 있다고 하여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려는 율법주의자들에 의해, 그리고 여전히 우상과 천사숭배와 일월성신을 숭배하는 등의 온갖 미신들에의해 교회가 참 복음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어찌 보면 참 미약하고 단순하여 무언가 더 보태야 할 것 같은 것에 현혹되어 성도들의 신앙이 적지않게 흔들릴 때였습니다.

에베소교회는 이렇게 옳고 그른 것을 명확 판명하게 가를 수 있었고 단호하게 치리를 한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얼마나 살벌해 졌겠습니까. 본의 아니게 편을 가르기도 했을 것이고, 어찌 보면 초대 교회, 교부 시대의 역사는 이렇게 처절한 교리 싸움의 시대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싸움의 진통을 겪으면서 아마도 성도간의 우애, 그리고 신부가 신랑을 기다리는 것과 같은 하나님에대한 풋풋했으며, 아름답기까지 했던 그 열정적인 하나님 사랑을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사랑의 사도 요한은 에베소 교회에 이제 교리 싸움 그만하고 교회가 처음에 함께 나누었던 사랑으로 다시 돌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디히트리히 본훼퍼 목사는 회개 없이는 신앙의 진보도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 인생여정의 벅찬 숨 고르기를 할 수 있도록 곧곧에 쉼터를 마련해 놓고 있습니다. 요15:11은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나의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
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사62:5은
“총각이 처녀와 결혼하듯이, 너의 아들들이 너와 결혼하며, 신랑이 신부를 반기듯이, 네
하나님께서 너를 반기실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쉼터 중에 가장 멋진 쉼터는 역시 시51편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욕망 때문에 저질러서는 안되는 일을 저질렀습니다. 자신의 충성스러운 부하 우리아의 아내를 범한 것입니다. 그후 다윗은 하나님께 뼈저린 죄의 고백을 합니다. 뼈저리다는 말이 맞습니다. 시51:8에 보면
“기쁨과 즐거움의 소리를 들려주십시오. 비록 주님께서 나의 뼈를 꺾으셨어도, 내가 다시 기뻐하며 외치겠습니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영적 기쁨의 시작은 이렇게 회개의 기쁨으로부터 옵니다. 7절에서
“우슬초로 내 죄를 정결케 해주십시오. 내가 깨끗하게 될 것입니다. 나를 씻어 주십시오.
내가 눈보다 더 희게 될 것”이라 고백을 합니다. 다윗의 고백의 압권은 10~12입니다. 이
전에도 보았지만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아, 하나님, 내 속에 깨끗한 마음을 새로 지어 주시고 내 안에 정직한 새 영을 넣어 주십
시오. 주님 앞에서 나를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거룩한 영을 나에게서 거두어 가지 말아
주십시오. 주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기쁨을 내게 돌려 주시고, 너그러운 영을 보내셔서
나를 붙들어 주십시오.”

다윗의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어 하늘의 기쁨이 넘치는 교회요 성도가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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