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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교회에 비추어 본 한국교회 남북통일 과제.

하늘기차 | 2009.11.26 13:30 | 조회 2140


가칭 개혁목회자 모임에 참여 한지도 어언 1년이 넘어갑니다. 매 달 마지막 화요일에 특별한 일이 없으면 새벽기도를 마치고 부리나케 연세대 언더우드홀로 향합니다. 요즈음은 광역버스가 생겨서 머네에서 광화문 까지 새벽에는 25분 밖에 안 걸립니다. 목회자, 신학자, 영성가, 선교사 등의 다양한 분들이 모입니다. 이 시대의 minority입니다. 참 귀하신 분들입니다. 지난 번 모임(11월24일)에서는 정종훈 목사님께서 통일과 교회에 관한 발제를 하여주셨는데, 너무 우리에게 필요한 글이어서 이렇게 올려봅니다.


독일교회에 비추어 본 한국교회의 남북통일을 위한 과제

정 종 훈 (연대 연합신학대학원 교수)
1. 들어가는 말

1989년 11월 9일에 독일 분단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그 이듬해 10월 3일에 통일을 이루어낸 독일은 세계사에서 보기 드문 역사를 기록했다. 우리가 세계사를 보면, 영토를 확장하고 국가적 이해관계를 얻기 위해 전쟁과 폭력, 그리고 피의 혁명을 주저하지 않은 역사들로 얼룩져 있지만, 독일의 역사는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동서독 통일이라는 대과업을 이루어냈기 때문이다.
독일통일의 급박한 상황을 볼 때, 그 물꼬를 튼 것은 무엇보다 동독교회였다. 동독교회는 사회주의 동독사회에서 현실 사회주의에 그대로 적응하지 않은 유일한 공동체였던 동시에, 전체주의 앞에서 스스로 민주주의를 실행하고 주민들에게 민주주의의 훈련을 제공한 유일한 공간이었다. 그러나 동독교회가 사회주의 속에서 교회로서의 자기정체성을 유지하고, 타자를 위한 교회로서 크게 기여할 수 있었던 것은 동독교회 자신의 힘만은 아니었다.
서독교회는 동서독 분단 이후 양쪽 정부가 냉전 이데올로기로 인해 긴장과 갈등 상황에 있을 때조차도 하나님의 하나의 교회라는 고백 위에서 동독교회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서독교회는 동독교회가 교회의 건물을 보수하고, 교회의 재정을 충당하고 하는데 필요한 재정적인 지원을 중단한 적이 없었고, 또한 재정적인 지원을 빌미로 동독교회의 자존심을 건드린 적도 없었다.
이처럼 동독교회는 사회주의 동독체제를 옹호하는 앞잡이가 아니었고, 서독교회는 자본주의 서독체제를 선전하는 선동자가 아니었다. 동독교회와 서독교회는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매개로 해서 연합했고, 삶의 자리에서 평화를 만드는 일에 동역했다. 분단된 동서독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서 각자의 이데올로기에 감염되어 서로를 적대적인 관계로 설정했지만, 동서독 교회만은 형제자매로서 서로의 사랑을 교감했다.
이러한 동서독 교회의 교감과 연대가 독일의 통일에 크게 기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 이후 독일 주민들에게는 적지 않은 난제들이 있었다. 엄청난 통일비용을 부담하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40년간 지속된 단절로 인한 소통의 어려움을 극복해야 했다. 분단 시절 자행되었던 동독의 비밀경찰과 각종 범법 행위자들의 과거를 제대로 처리해야 했다. 또한 자본주의 교육을 받지 못한 청년세대들을 새롭게 교육해서 경제활동에 편입시켜야 했다. 지난 20년 동안 독일 주민들은 많은 고통을 감내했다. 그러나 독일의 통일은 결과적으로 독일과 유럽과 세계의 평화를 증진시켰고, 독일로 하여금 내실 있는 국제경쟁력을 갖추게 했다.
통일된 독일의 20년을 내다보는 시점에 한국교회가 독일의 최근 역사적 변화과정과 동서독 교회의 통일에 대한 기여를 돌아보면서, 남북통일을 위해 어떤 과제를 설정해야 할지 논구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한반도의 분단현실은 평화를 깨뜨리는 것은 물론이고 남북주민들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조건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독일교회의 경험이 한국교회의 규범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한국교회를 반성하고 새로운 과제를 제시하는 시사점이 되기에는 충분하다고 사료된다.

2. 통일 이전(1945-1989)의 독일교회와 그에 비추어 본 한국교회의 과제
2.1. 평화를 위한 독일교회의 노력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과 함께 독일은 폐허 위에서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했다. 독일 주민들은 민족사회주의 정권이 자신들과 다른 민족들 그리고 다른 국가들에 대해 어떤 범죄를 자행했는지 전쟁이 끝나고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경제적인 빈곤으로부터 오는 어려움도 컸지만, 정신적인 공황 역시 컸다. 독일은 패전으로 인해서 연합국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고, 동서냉전의 중심지로서 이데올로기의 각축장이 되었다.
그러나 독일교회는 ‘독일적 그리스도인들’(Deutsche Christen) 중심으로 구성되었던 각 지방교회의 집행부를 고백교회(Bekennende Kirche) 진영 중심의 집행부로 전환했고, 1945년 8월 27일~31일 트레이사(Treysa)에 모인 교회 대표자들은 독일 개신교회 전체를 포괄하는 ‘독일개신교협의회’(Die Evangelische Kirche in Deutschland, EKD)를 조직했다. 독일교회는 폐허의 비참함과 어려움 속에서 종교상의 도피처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연합국 군정에 대해서 독일 주민들을 자유롭게 대변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었다.
독일교회는 탈나치화와 민주주의의 이식을 제일의 목표로 설정했던 연합국 군정의 정책을 주저하지 않고 수용했고, 연합국 군정은 고백교회의 투쟁 역사를 높이 평가하면서 독일교회에 대해서만은 호의적이었다. 그래서 독일교회 대표자들은 1945년 10월 18일~19일 슈투트가르트(Stuttgart)에 모일 수 있었고, 그곳에서 무엇보다 나치 정권 하에서의 부끄러운 죄를 고백할 수 있었다. 그리고 폭력과 원한의 정신을 극복하고 평화와 사랑의 정신 속에서 새로운 시작을 하도록 제안했다.
시간이 오래 지나지 않아, 1949년 독일의 서쪽에는 독일연방공화국(Bundesrepublik in Deutschland, BRD)이, 동쪽에는 독일민주공화국(Deutsche Demokratische Republik, DDR)이 각각 수립되었고, 독일에서의 냉전이 가시화되었다. 서독은 서구 진영을 향한 소련의 팽창정책이라는 위협 앞에 있었고, 동독은 정권의 합법성을 결여해서 언제 권력을 상실할지 모른다는 위기감 앞에 있었다. 그래서 동서독은 각각 동맹세력의 보호에 자발적으로 편입되어서 냉전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그러나 독일교회는 동서독의 분단 가운데서 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구조적으로 유지했고, 1965년 10월 1일에는 동구 이웃들과의 화해를 촉구하는 동구사회백서를 출판하기까지 했다. 독일교회는 동구사회백서를 통해 독일이 분단되고, 많은 독일인들이 독일의 옛 영토로부터 추방된 이유는 나치정권의 죄악 때문이었음을 고백했고, 평화의 질서를 위해 독일의 옛 영토에 거주하고 사는 폴란드인들의 생존권과 그들의 고향에 대한 권리를 인정해야 함을 제안했다. 이렇게 독일교회는 정치적인 상황에 지배되기보다는 복음의 빛으로 정치를 진단하고 계몽하는 일에 앞장섰다.
또한 독일교회는 197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지 40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면서, 서독의 개신교협의회와 동독의 개신교연맹 공동으로 발표한 성명서를 통해 동서간의 긴장완화정책과 평화정책 수립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런데 바로 그해 12월 나토(NATO)는 소련이 서유럽을 향해 배치한 핵미사일을 철수하지 않으면, 나토 역시 미국의 중거리 핵미사일을 배치하겠다는 모순적인 이중결정을 하게 되었다. 이 때 독일교회는 침묵하지 않았고, 평화의 지표로서 궁핍함의 제거, 폭력의 회피, 부자유의 축소를 제시하면서, 평화의 과제를 위한 기독교적인 관점을 정리하는 동시에, 평화를 위해 교회가 기여할 것이 무엇인지를 제안하며 구체적인 평화의 장정에 들어갔다.

2.2. 특수한 공동체로서 동서독 교회의 연합과 사회주의 속의 동독교회

동서독 분단 이래로 동독 주민들은 연평균 20만 명씩 서독으로 탈출했고, 체제유지의 위기 앞에 직면한 동독 정권은 1961년 8월 13일부터 베를린 장벽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베를린 장벽이 설치되면서 동독의 이탈주민 숫자는 급격히 감소했고, 뿐만 아니라 동서독 교회의 직접적인 교류 역시 어려워졌다. 동서독의 분단으로 정치는 각각의 체제로 운영되었으나, 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유지했던 동서독 교회가 더 이상 함께 모이기 어려운 현실 상황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공산당 정권이 교회의 분리를 강요한 부분이 없지 않았지만, 결국 동독교회는 서독교회와의 협의 하에서 분리를 결정했다.
그 후 서독교회는 독일개신교협의회(EKD)로 그대로 머물렀지만, 1969년 동독교회는 새로운 교회기구로 독일민주공화국 개신교연맹(Bund der Evangelischen Kirche in DDR, BEK)을 설립했다. 개신교연맹은 스스로 ‘독일 전체 개신교인들과 특수한 공동체 속에 있음’을 고백하면서, ‘사회주의에 대항하거나 옆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속의 교회’로서 자신의 존재를 규정했다. 동독교회를 이해함에 있어서 ‘특수한 공동체’와 ‘사회주의 속의 교회’라는 두 개념은 동독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동기가 되었다.
동독교회는 ‘특수한 공동체’라는 표현을 통해 동서독 교회가 외형적으로는 분리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선언한 것이었다. 서독교회 역시 ‘특수한 공동체’로서 동독교회와 연결되어 있음을 소중히 생각했고, 때문에 동서독 교회가 분리된 이후에도 동독교회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서독교회는 교회에 적대적인 동독에서 동독교회가 재정적으로 독립할 수 있도록 교회 건축비용이나 건물 보수비용 등 동독교회의 운영에 들어가는 전체 연간예산의 약 40%를 지원했고, 정치범 석방이나 이산가족의 합류, 구금된 교회관계 종사자들의 석방 등에 들어가는 비용을 전달하는 통로가 되었다.
서독교회의 이와 같은 재정지원은 결과적으로 다음의 결과를 창출하는데 기여했다: 동독의 국민경제와 외화획득에 도움을 주었다. 동독의 물자조달하는 부담을 덜어주었다. 기독교적 유대관계가 향상되어 여타의 정치적 법률적 장애를 극복하도록 했다. 동독의 교회단체, 교회부속의 병원과 양로원, 기타 기관들을 실질적으로 도움으로써 동족의 고통을 완화시켰다. 동독교회가 계속 전한 복음이 동독인들의 삶에 중요한 원리가 됨으로써 유물론적 사회를 저항하게 하는 토양이 되었다. 결국 동독의 공산정권이 붕괴되는 것을 재촉했다.
동서독 교회는 ‘특수한 공동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문단(Beratergruppe)과 협의단(Konsultationsgruppe)을 구성했다. 자문단은 1969년 12월에 동서독 교회가 각각 15명씩 파송함으로써 구성했고, 매년 4회의 정기모임과 수차례의 사전 예비모임을 주최하면서 동서독 교회 간의 교류를 도모했다. 협의단은 1979년 9월에 동서독 교회가 발표한 공동성명서에 기초해서 ‘평화와 화해’의 주제를 다루기 위해 구성되었고, 매년 열리는 ‘평화주간’과 ‘평화를 위한 공동예배’ 등을 준비하며 독일의 평화와 유럽의 평화증진에 기여했다.
한편 동독교회는 자신을 ‘사회주의 속의 교회’로 규정했는데, 이러한 규정은 몇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었다: 첫째는 사회주의 동독이라는 상황 속에서 어쨌든 존재하는 교회가 되겠다는 의미, 둘째는 인간에 대해 근본적으로 관심을 가진 사회주의를 인정하면서 보다 나은 사회주의를 만드는 교회가 되겠다는 의미, 셋째는 동독 정권이 내린 사회주의의 해석을 받아들이면서 현존하는 사회주의에 협조하는 교회가 되겠다는 의미 등이 그것이었다. 물론 동독정권은 세 번째 의미를 기대했지만, 동독교회는 두 번째 의미를 실제로 추구했다.
결과적으로 사회주의 속의 동독교회는 국가에 의해 전적으로 통제되지 않는 유일한 기관으로서 주민들의 신뢰를 얻었고, 교인의 수는 줄었지만 교회가 전체주의 국가의 대안으로 발전되어 갔다. 때문에 1983년 어느 공산당원은 자신의 논문에서 동독교회의 현실에 대해 이렇게 경고할 정도였다: “교회는 사회주의 속에서 그 본질로 볼 때 사회주의 사회와 일치하지 않는 유일한 기구이다. 교회는 더 이상 성장해서는 안 되고, 사회주의와 그 발전을 위해 불필요한 존재다.” 이러한 경고는 동독교회가 교세는 약했지만, 국가와 사회에 대해 책임적 자세를 견지한 것에 따른 결과였다.

2.3. 루터출생 500주년 기념 국제대회와 동서독 교회의 연대

1983년 11월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의 출생 500주년을 기념해서 동독정부는 루터출생 500주년 기념 국제대회를 개최했다. 약 20만 명의 외국인들이 국제대회에 참가했다. 국제대회에 대한 동독정부와 동독교회의 입장은 서로 달랐다. 동독정부는 국제대회를 통해 동독이 평화를 사랑하고, 인도주의적이며, 다른 세계관이나 신앙에 대해서 관대하다는 것을 과시하는 기회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동독교회는 루터의 유산을 제대로 관리하고 루터의 개혁정신을 계승하는 기회, 동독교회를 활성화하는 기회, 교회의 테두리를 벗어나 건강한 그리스도인이자 교회로서 세상 한 가운데서 역할을 감당하는 기회로 생각했다.
서독교회는 1980년 12월 루터 기념대회를 자체적으로 준비하면서도 동독정부와 동독교회에 대해 세심하게 배려할 것을 논의했다: “첫째, 기념대회에 참석한 수많은 청중들 앞에서 이미 두드러진 차이점들에 대한 논쟁, 경쟁관계 등을 보여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 둘째, 루터의 해를 통해 주어진 기회를 헛되이 놓치지 말자는 것. 셋째, 어떠한 경우라도 동독의 행사에 대해 경쟁적인 행사를 준비해서는 안 될 것이고, 서독에서의 행사와 동독에서의 행사가 겹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 이처럼 서독교회는 루터 기념대회를 동서독의 긴장을 완화하고 서로 가까이 이해하는 기회로 생각했고, 대회를 준비하는 동독교회의 재정적인 어려움을 외면치 않고 지원했다.
루터기념 국제대회의 다양한 행사를 끝낸 후, 동독교회는 1984년 9월 개신교연맹 총회에서 국제대회를 이렇게 평가했다: “첫째,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확인하며 이를 향한 교회의 전망은 어떠한 것인지를 재고하였다. 둘째, 세계평화의 문제를 향한 교회의 과업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고 현실을 분석하였다. 셋째, 교회가 자연환경보호에 적극 참여할 것을 창조신학적인 입장에서 다루었다.” 루터기념 국제대회 이후 동독정부는 동독교회의 국제적, 신앙적 행사를 인정하게 되었고, 동독정부와 동독교회는 있는 그대로 서로를 이해하는 열린 관계에 도달하게 되었다. 또한 루터기념 국제대회는 동독주민들의 심리적인 갈등과 변화를 이끌었고, 동독의 정통성과 이데올로기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면서 반체제 운동을 고양시키는데 적지 않게 기여했다. 이 모든 것이 동서독 교회가 연합하고 연대한 결실이었다.

2.4. 한국교회의 자기반성과 과제

남북분단 직후 소련군정 하에서 이북은 토지개혁을 실행했고, 지주들과 갈등하면서 그들의 월남을 초래했다. 또한 교조적인 공산주의는 무신론적 이데올로기에 근거해서 기독교를 박해했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기독교인들을 거의 소멸시켰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남에는 소련군정 당시 월남한 실향민들, 한국전쟁 와중에 월남한 실향민들, 한국전쟁으로 인해 직간접으로 고통당한 이남 사람들이 반공 이데올로기를 구축했다. 한국교회 다수는 반공 이데올로기에 편승해서 이북과의 관계에서 화해적인 역할보다는 남북의 대립과 긴장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그나마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1988년 2월 29일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의 선언”을 발표하고, 소수의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이 통일운동을 전개했던 역사가 작은 이정표로써 남아있는 것은 다행이다.
서독교회는 동독교회를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연대하는 가운데 동독교회를 활성화하는 역할을 했고, 이데올로기의 논쟁이나 동독정부에 대한 비난을 자제함으로써 동독정부가 교회를 적대적으로 설정하지 않도록 기여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동서독 분단 당시 서독교회의 활동을 직시하면서, 남북의 교류와 화해, 그리고 상생에 어떻게 기여할지를 적절한 과제로 설정해야 한다.
현재 이북에서 교회의 입지는 거의 없거나 미비하다. 조선그리스도연맹이 기독교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이북에서 드러내고 활동할 형편은 아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보수와 진보를 떠나 인도주의적인 측면에서 이북에 대한 물질적인 지원을 하고 있지만, 조선그리스도연맹의 위상과 역량이 미흡한 관계로 그 밖의 다양한 루트를 통해 참여하고 있다. 더욱이 한국교회의 지원은 개별 교회나 개별 기독교단체 위주로 실행되어서 효율적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루트로 분산되어서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특징이 있다. 물론 교회가 하는 일에는 오른 손이 하는 일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겸손함이 필요하지만, 아름답고 선한 일은 다른 사람들이 인지하고 동참하도록 도전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이북에 대한 지원을 한국교회 공교회 차원의 공식 기구로 수렴해서 이북교회 공교회 기구인 조선그리스도연맹을 통해 실행해야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조선그리스도연맹이 이북사회와 이북동포들에게 공신력을 얻도록 하는데 기여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주의할 것은 대북지원이 단순한 물자전달 방식으로 머물기보다는 지속가능한 개발협력과 인력개발의 방식으로 전환해야 하는 것이다.
한국교회 일각에서는 아직도 북한교회 재건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일부 교회들의 경우에는 이북의 특정지역을 이미 할당받은 상태이기도 하다. 그러나 북한교회 재건운동은 과거로 회귀하려는 발상이자, 지금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통일된 후에야 무언가를 하겠다는 발상이다. 한국교회가 북한교회 재건운동에 머물러 있는 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과 사랑을 전해야 하는 교회의 사명을 유보하는 것이 되고, 훗날 이북에는 한국교회의 분열된 교파와 교단을 이식함으로써 이북동포들로 하여금 교회에 대한 혼란과 혐오감을 자아낼 우려가 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이북교회의 입지를 ‘세우는’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이북에 존재하는 봉수교회와 칠골교회가 기회일 수 있다. 한국교회는 봉수교회와 칠골교회가 ‘타자를 위한 교회’의 사역을 사회에서 잘 감당하도록 지원함으로써 ‘기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는 편견을 극복하고, 기독교 친화적인 환경이 생성되도록 기여해야 한다.
동서독 교회는 자문단과 협의단을 구성하고 정기적으로 만났을 뿐만 아니라, 서로 연대해서 루터출생 500주년기념 국제대회를 의미있게 치러냈고, 그 결과 동독교회는 동독사회의 신뢰를 얻으면서 동독의 변화를 가져왔다. 한국교회도 이북의 조선그리스도연맹이나 평양신학교 또는 봉수교회나 칠골교회 등과 연합해서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을 발굴해야 한다. “주기철 목사 기념대회”나 “기독교 평화포럼”이라든지, “일제하 교회의 공적과 과오”, “초창기 한국교회의 사회적 기여”, “소래교회의 역사적 고찰”, “평양 기독교 부흥”, “일본의 정신대에 대한 비판과 과제”, “한국전쟁과 기독교”, “주체사상과 기독교”, “기독교와 사회주의”,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교회의 과제” 등을 주제로 한 학술 심포지엄이라든지, 또는 초창기 한국교회의 유적지를 발굴하거나 복원하는 공동사업이라든지, 어떤 형태로든 자주 만나 친교를 나누고, 생각을 공유하고, 한 형제자매임을 확인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3. 통일 과정(1989-1990)의 독일교회와 그에 비추어 본 한국교회의 과제
3.1. 동독교회의 체제변혁을 위한 노력

1985년 3월 고르바초프가 소련의 공산당 서기장에 선임되었고, 그는 계획경제가 가져온 경제적인 파탄과 관료주의로 인한 정치적인 부패, 그리고 실업과 매춘 등으로 야기된 사회적인 문제 앞에 직면해서 대안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고르바초프는 ‘위로부터의 혁명’을 내걸고 개혁을 기치로 하는 페레스트로이카 정책과 개방을 기치로 하는 글라스노스트 정책을 수립했다. 고르바초프의 두 정책은 경제구조를 재편성하고, 서구적인 민주주의를 도입하며,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방향과, 외교정책의 도구였던 군사력을 배제하고, 모든 국가의 평등성을 유지하며, 국제관계의 이데올로기적인 접근을 거부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 결과 동독을 포함한 동유럽의 국가들은 소련과의 동맹과 사회주의적 대의가 약화되거나 무너지면서 ‘아래로부터의 혁명’, 변혁의 새로운 물결을 일으켰다.
1983년 가을 동독 라이프찌히(Leipzig)의 한 광장에서 청년 50여명이 모여 군비증강에 반대하는 촛불시위를 감행했다. 그들은 나토의 이중결정에 따른 핵미사일 배치로 인해 동독에 소련의 단거리 핵미사일이 배치된 것을 반대하고자 촛불을 들고 침묵 가운데 서 있었다. 그러나 경찰은 그들을 체포하기 시작했고, 광장 가까이에 있던 니콜라이 교회의 목사와 직원들은 쫓기는 시위대를 보호하기 위해 교회의 문을 열어주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청년들의 일부가 교회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고, 월요일마다 평화를 위한 기도회가 진행되었으며, 교회는 정보와 성명서를 교환하는 장소로 이용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 사회 속에서 국가에 종속되지 않은 유일한 자유공간이었던 동독교회는 국가 이데올로기에 종속되지 않기를 바라던 그룹들의 보호처이자 실험무대로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에 따라 평화를 추구하는 그룹, 군대를 거부하는 그룹, 환경과 인권문제에 관심을 표명하는 그룹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특히 1989년에는 자유로운 외국여행을 원하는 그룹들이 동독교회로 몰려왔다. 교회를 찾아온 이들 모두가 기독교로 개종하거나 교인이 된 것은 아니었지만, 기독교에 대해 친근감을 갖게 되었고, 정의와 평화, 경제적 책임이라는 인간적인 과제를 감당하는 파트너로서 함께 일하기를 원했다.
1989년 9월 해외로 자유여행을 원하는 그룹들이 많이 생겨났지만, 그들과는 달리 ‘우리는 여기에 머무르겠다’(Wir bleiben hier!)는 그룹이 평화를 위한 기도회를 마치고, 개혁을 향한 자신들의 뜻을 밝히기 위해 시위를 했다. 그런데 국가권력은 그들에 대해서 폭력과 투옥으로 응답했다. 이에 대해 라이프찌히 주민들은 교회창문을 꽃으로 장식하고, 수백 개의 촛불을 켜둠으로써 국가권력의 부당함을 항의했다. 1989년 10월 7일 고르바초프는 동독 건국 40주년 기념식에 참석했고, 그곳에서 “지각하는 자는 대가를 치른다.”는 의미심장한 연설을 했다. 이로 인해 공개적인 발언과 토론, 의사를 표시하기 위한 각종 집회에 많은 주민들이 참석하기 시작했다. 라이프찌히 주민들만 해도 10월 9일 10만 명의 대규모 시위를 필두로 해서 10월 16일에는 11만 명, 10월 23일에는 23만 명, 10월 30일에는 35만 명, 11월 6일에는 45만 명까지 시위에 참가했다. 그러나 당시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은 철저히 비폭력을 고수했고, 경찰은 자신의 아들딸이자 친척 또는 친구인 시위자들에 대해서 공권력 행사하는 것을 자제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개방될 때까지 동독 주민들의 최대 요구는 사회주의를 개혁하고 자유를 실현하는데 있었다. 이때를 전후해서 동독지역의 소도시든, 대도시든, 아니면 시골마을이든 의견을 수렴하여 협의하고 결정하기 위한 공의회적인 원탁회의가 진행되었다. 모든 원탁회의에서는 민주적인 훈련과 절차를 이미 경험한 목사나 기독교인들이 주로 사회를 보았고, 교회는 민주주의의 모델이 되었다. 사회주의 속의 교회로서 동독교회는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들을 대변했던 역할과 공공의 공간을 제공하고 토의하는 과정을 이끌었던 역할 등의 경험으로 동독주민들에게 신뢰를 얻었다. 만일 동독교회가 사회주의 속에 적응한 교회로 머물렀다면 결코 이루어낼 수 없었던 역사를 동독 주민들은 동독교회와 함께 이루어냈던 것이다.

3.2. 서독교회의 동독 이탈주민을 위한 배려

독일은 전범국가로서 분단되었고, 동족상잔의 전쟁 경험도 없었기 때문에, 동서독 간의 철의 장막은 남북한 사이의 휴전선 장벽보다 굳은 것은 아니었다. 동서독은 1951년 9월 베를린 협정 이래로 물자교류와 인적교류가 대단히 활발했고, 특히 동독주민들은 서독의 라디오를 청취하고 텔레비전을 시청할 수 있었던 관계로 서독에 대한 선호도가 높았다. 동독 이탈주민들은 동서독이 분단된 직후부터 생겨났는데, 1961년 8월 13일 베를린 장벽이 설치되기 전까지는 매년 20만 명이나 되었다. 베를린 장벽이 설치된 이후에도 1988년까지 동독 이탈주민 수는 62만 명이나 되었고, 그중 70%는 고령자(남자 65세 이상, 여자 60세 이상)로서 합법적인 이주자였고, 나머지는 동독정권으로부터 추방당한 정치범이나 저항적 문필가 또는 지식인들이었다. 물론 그 중에는 생명을 걸고 베를린 장벽이나 국경선을 넘어서 탈출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1989년 여름 브레즈네프 독트린이 폐기되자 유리한 국제환경을 이용해서 대규모로 탈출하는 동독 이탈주민들이 많이 생겨났다. 그들은 동독지도부가 개혁 개방을 거부하는 것에 대한 집단적 저항의 표시로 일단은 동구권 국가로 휴가를 갔다가 그곳에 있는 서독대사관을 통해 서독으로 이주를 감행했다. 이렇게 동독을 이탈한 주민들은 불과 몇 달만에 약 34만 4천 명에 이르렀다. 그 후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개방되자 동독주민들의 자유로운 서독이주가 가능해졌는데, 동독의 경제사회적 불안과 서독의 수준 높은 생활에 대한 기대심리로 인해 1990년 6월 30일 동서독의 화폐 경제 사회의 통합이 발표되기까지 24만 명의 동독주민들이 서독으로 이주했다. 물론 1990년 10월 3일 독일이 통일 된 이후에도 옛 동독주민들이 서독 지역으로 이주하기는 했지만, 그 이전의 탈출이나 이주와는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동독 이탈주민들이 서독에 정착하고 통합되는 과정에서 서독 정부와 관공서들의 역할이 작지 않았고, 민간차원에서는 독일적십자사(Deutsches Rotes Kreuz), 독일 카리타스연맹(Deutscher Caritasverband), 그리고 디아코니사업회(Diakonisches Werk) 등의 역할이 지대했다. 그중 개신교가 운영하는 디아코니사업회는 동서냉전과 동서독 분단이 중첩된 시기에 다양한 인도주의적 사업들을 전개했다. 동서독 교회가 ‘특수한 공동체’로서 파트너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서독의 디아코니사업회는 동독의 디아코니사업회에 물질적으로 지원했고, 활발한 교류를 유지했다. 독일개신교협의회(EKD)와 그 산하 기구인 디아코니사업회는 동독 이탈주민들에 대해서 그들을 보호하고 지원하고 통합하는 다양한 활동 역시 활발하게 전개했다. 사회적 상담, 법적 소송상담, 이주상담, 가족상봉을 위한 지원, 귀환하는 이들에 대한 지원, 언어학습과 일반학습, 공공단체사업, 자활사업, 직업교육, 이탈주민 가족을 위한 협력관계 설정 등의 활동이 그것이었다.
디아코니사업회는 동독 이탈주민이 서독에 도착하면, 연방긴급수용소에서 3주에서 6주 동안 전반적인 자문과 긴급지원 그리고 관련활동을 수행했다. 주민신고 및 서류작성, 노동청과 일자리 중개소에 등록, 아동수당 수령을 위한 청구서 신고, 지역공공의료보험신고, 사회복지청에 연금 및 실업수당 신청, 전쟁희생자 복지청에 생계지원 신청, 학업 자문, 학업지속을 위한 과외수업 중재, 청소년들 실습훈련직 준비, 시장과 가게에서 생필품 구매하기, 병원방문과 입원돕기, 교회안내 및 세례받기, 기본법과 주법률 그리고 지방자치제도 설명하기, 교회 내지 사회행사들, 이탈주민들과 서독 주민들사이의 교제의 밤, 새로운 주거지로의 이사준비 및 이사돕기 등이었다. 그리고 동독 이탈주민이 연방긴급수용소를 떠나 임시숙소지나 장기거주지로 옮기게 되면, 그 지역의 디아코니사업회 지부가 상담 및 지원 활동을 계속 전개했다. 상담과 지원은 구직활동, 소비자권리문제, 금융 보험 조세문제, 사회복지제도, 주거지문제, 결혼과 가족문제, 부채문제, 직업생활과 직장환경, 생활법률문제, 주민권문제, 건강문제, 교회와 종교생활문제, 휴가와 여가생활, 교육과 문화, 가족 성원간 관계문제, 주말세미나, 청소년을 위한 여가시간 활용 프로그램 등의 영역에서 이루어졌다.
이처럼 서독교회는 동독 이탈주민을 위한 상담 및 지원 활동을 동서독 분단 이래로 계속 수행했지만, 특히 1989년과 1990년 2년 동안은 활동의 필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긴박했다. 물밀 듯이 밀려온 60만 명 가까이 되는 동독 이탈주민 및 이주민들을 감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독교회는 그동안의 경험과 노하우를 가지고, 다양한 사안들에 대해 총체적인 활동과 원터치적인 봉사를 수행했다. 서독교회의 지원은 단순히 자선적 차원의 부수적, 부분적, 임의적인 것이 아니었고, 전문적 역량과 준비를 갖춘 종합적이고 책임의식으로 가득한 것이었다. 또한 서독교회는 서독의 교인들이나 주민들이 동독 이탈주민들을 자연스럽게 접촉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해서 서로 이해하는 기회와 사회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기회를 제공했고, 그것은 동독 이탈주민들의 부드러운 통합에 크게 기여했다.

3.3. 통일의 과도기에 보여준 동서독 교회의 입장

독일의 통일 이전에 동서독의 지식인들과 다수의 주민들은 통일보다는 평화를 최고의 가치로 지향했다. 통일로 가던 과도기 시절의 동독 주민들은 “우리는 인민이다.”(Wir sind das Volk.)라는 구호로 자신들의 입장을 표출했다. 이 구호는 정권의 관리 대상으로 전락했던 주민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확인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구호였다. 이 구호와 함께 그들은 정치적인 객체에서 주체로 전환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의 구호는 오래지 않아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다.” (Wir sind ein Volk.)라는 구호로 바뀌었다. ‘하나의 민족’이란 구호는 개혁의 입장에서 통일의 입장으로 바뀌었다는 의미인데, 동독 주민들은 더디고 힘들더라도 자신의 힘으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실험을 원치 않게 되었다는 것이고, 서독 자본주의의 풍요로움에 깊이 빠졌다는 것이다. 동독 주민들은 체제이행을 자기 힘으로 이끌 수 있는 능력과 정당성을 가진 믿을만한 세력을 동독에서 찾을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독일의 통일을 흡수통일이라고 지칭한다. 물론 제3자가 외형적으로 볼 때, 독일의 통일은 동독의 사회주의 체제가 서독의 자본주의 체제로 편입된 흡수통일이었다. 그러나 독일의 통일은 서독의 압력이나 유도 또는 승낙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동독 주민들의 선거를 통한 자발적인 선택의 결과였다. 이는 착실하게 민주적인 변화를 위해 노력하던 사람들이 서독을 신속하게 수용하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추월을 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체제가 다른 동서독이 전쟁이나 폭력을 거치지 않고 통일을 이루어낸 것은 무혈혁명이라 할 수 있고, 세계사의 이정표로서 손색이 없는 사건이었다.
독일의 내부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던 시점에 서독의 개신교협의회 지도부와 동독의 개신교연맹 지도부는 1990년 1월 15일~17일 로쿰(Loccum)에 있는 개신교 아카데미에서 비공식적인 회의를 했고, 그 회의를 마감하면서 로쿰 공동선언서를 발표했다. 공동선언서에서 그들은 동독의 비폭력 시위가 성공하고 새로 자유를 얻게 된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들은 동독의 변화를 초래하는데 교회가 기여한 점을 평화를 위한 기도회, 중보예배, 교회에서의 대화모임들, 각 교단의 총회 성명서, 에큐메니칼 대회, 교회 직원들과 교인들의 참여 등에서 찾았다. 그들은 “독일 전체 개신교인들의 특수한 공동체성”이 분단된 독일인들 사이의 연결쇠 역할을 하면서 정치적인 효과를 가져왔다고 자평했다. 그들은 분단 가운데 생겨난 동서독 교회의 경험과 차이점들을 주의깊게 다루면서, 하나의 교회 조직을 만들겠다는 의도를 드러냈다. 그리고 그들은 동서독 간의 주제가 아무리 중요하다고 할지라도 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소홀히 할 수 없음을 명백히 하면서,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을 위해 기도하고 노력할 것을 다짐했다.
그러나 로쿰 공동선언서에 문제를 제기한 신학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로쿰 공동선언서가 동서독 교회의 차이를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았음을 인식했고, 동서독 교회의 급속한 통합과정에 우려와 두려움을 표명했다. 그들은 ‘특수한 공동체성’을 강조하기보다는 동서독 교회의 ‘특수한 책임성’을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들은 유럽의 정치적인 분열을 동서독 교회가 감당해야 함을 제안했다. 그들은 그리 할 때만, 강한 쪽에서 약한 쪽을 흡수하는 통일과 문제성 있는 민족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고 했고, 독일교회가 다른 교회들과 함께 에큐메니칼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했다. 그들은 독일인들 스스로 자신의 역사를 재생하고, 과거를 정리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서는 급박히 진행되는 통일과정이 억제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두 개의 정치 경제적 체제에서 서로 배우지 않고는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고 했다.
로쿰 공동선언서는 독일 역사의 급박한 과도기에 동서독 교회의 통합에 대한 관심을 가졌지만, 동서독 전체의 통일에 대한 비전까지 드러내지는 않았다. 로쿰 공동선언서를 반대한 베를린 선언서는 동서독의 정치 경제적 통일은 물론이고, 동서독 교회 간의 통합조차 성급하게 진행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동서독 교회는 독일의 통일을 의도적으로 앞당기기 위해서 노력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동서독 교회는 분단 이래로 독일의 통일을 준비하는 역할과 토대를 물질적 재정적 지원과 인적 교류를 통해서 오랫동안 실질적으로 감당해 왔고, 때문에 동서독 교회는 동서독의 통일을 이루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3.4. 한국교회의 자기반성과 과제

독일의 통일은 제2차 세계대전 전의 독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재통일(Wiedervereinigung)이라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독일의 통일은 1949년 연합국에 의해 세워진 두 개의 독일 국가들, 서독의 연방공화국(BRD)과 동독의 민주주의 공화국(DDR) 간의 통일(Vereinigung)이었다. 그러나 독일의 통일은 1 + 1 = 2식의 통일이 아니라, 서독이라는 큰 1에 동독이라는 작은 1이 그대로 편입되어 1 + 1 = 1식의 통일이 되었다. 동서독의 지식인들과 선각자들이 성급한 통일의 과정이라 염려한 그대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한반도의 통일이 독일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지금도 한국교회는 분단 이데올로기로 인해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편견이 있다. 공산주의 국가의 현실과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이론을 동일하게 보고 있고, 남북분단 직후 이승만 정권의 반공주의와 냉전시대 박정희 군사정권의 승공주의 그리고 동구유럽 쇠퇴기 때 전두환과 노태우 군사정권의 멸공주의 등의 영향이 각인되어 있다. 한국교회는 이데올로기의 이분법적인 도식 속에서 공산주의는 무신론이고, 공산주의자는 뿔이 달린 빨갱이이며, 북조선은 언제나 적화야욕 가운데 호시탐탐 전쟁을 획책하는 마귀집단이라 보고 있다. 동시에 한국교회는 자본주의만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보장하고, 자본주의자만이 국가와 사회를 발전시키며, 자본주의 국가인 한국만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살만한 인간 공동체라고 여기고 있다. 이처럼 한국교회와 한국사회가 이데올로기의 이분법적인 도식 속에 머물러 있는 한 한반도의 통일은 독일의 흡수통일 방식을 뛰어넘지 못할 것이다.
한국교회는 독일보다 나은 통일을 모색해야 한다. 한반도의 통일은 1 + 1 = 2 + α식의 통일이 되어야 한다. 마치 한 남성과 한 여성이 부부로서 결합하면, 수학적인 2가 아니라 2 + α의 시너지를 창출하는 것처럼, 한반도의 통일은 이남의 자본주의 체제와 이북의 사회주의 체제가 결합하여 상호시너지를 얻는 통일이 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교회는 한반도의 통일을 영원한 “과정으로서의 통일”로 설정하고, 평화공존과 남북연합 그리고 연방제국가의 과정을 상정하면서 궁극적으로 한반도식의 독특한 체제를 담은 통일이 되도록 기여해야 한다. 평화공존은 서로 만나 화해함으로써 긴장을 완화하고, 교류와 협력을 활성화하며, 두 지붕 아래 이웃으로 사는 것이다. 남북연합은 서로의 다른 체제를 인정하되, 민족공동체헌장에 기초해서 남북정상회의와 그 실행기구로서 남북각료회의나 남북평의회 등의 공동기구를 설치하고, 보다 적극적이고 긴밀한 교류와 협력을 실천하는 두 지붕 아래 형제자매로 사는 것이다. 연방제국가는 서로의 다른 체제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남북연합과 동일하지만, 다양성을 사회통합과 발전의 동력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보다 적극적이고, 대외적인 관계에서는 하나의 일치된 입장을 드러내는 한 지붕 아래서 다른 방을 사용하는 형제자매로 사는 것이다.
이처럼 한반도의 남과 북이 과정으로서의 통일의 길을 가다보면, 마지막 시점에는 한 지붕 아래 한 방에서 부부로 함께 살며 최고의 시너지를 창출하는 통일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교회는 과정으로서의 통일을 도전하는 가운데,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상호보완, 상호수렴, 제3의 이데올로기 창출의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이 때 과정으로서의 통일은 통일의 과정도 평화이어야 하고, 통일의 지향점도 평화이어야 한다. 과정으로서의 통일은 인간이 이데올로기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가 인간을 위하는 인본주의적인 이데올로기를 지향해야 한다. 과정으로서의 통일은 한민족의 이기적인 민족주의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민족과 주변 국가 그리고 세계 공동체를 섬기는 호혜적인 민족주의로 실행되어야 한다. 그리 될 때 한반도의 통일은 신자유주의의 병든 자본주의로 고통당하는 세계 공동체를 향해서도 새로운 희망의 빛을 비출 수 있을 것이다.

4. 통일(1990년 10월 3일) 이후의 독일교회와 그에 비추어 본 한국교회의 과제
4.1. 동서독 교회의 통합과 동독교회의 과거청산 그리고 교인감소

동서독 교회는 1991년 코부르크(Coburg)에서 개최된 동서독 교회의 통합총회에서 독일개신교협의회(EKD)로 합병되었다. 동독이 서독 체제에 편입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동독의 개신교연맹(BEK) 역시 서독의 개신교협의회(EKD)로 그대로 편입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통합과정에서 세 가지 갈등이 제기되었다. 첫째는 교회세(Kirchensteuer) 문제였다. 주민등록할 때 종교를 개신교인이라고 기록하면, 월급에서 자동적으로 교회세를 떼어갔기 때문에, 교회세의 경험이 없었던 동독출신의 교인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공립학교에 종교교육을 도입하는 문제였다. 동독시절에는 공립학교에서 종교교육이 폐지되었기 때문에, 교회가 신앙교육을 위해서 교회학교를 운영했는데, 목사들 가운데는 교회 밖의 종교교육에 반감을 갖는 목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는, 군목제도의 문제였다. 정부가 재정을 부담하는 군목은 재임기간 공무원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교회가 국가에 종속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일교회는 갈등의 와중에 제도로서의 교회를 점검하고 개혁하는 기회를 얻었지만, 그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지는 못했다.
독일의 통일과 함께 동독지역의 교회에 제기되었던 문제는 과거청산의 문제였다. 특히 교회의 목사들과 직원들이 비밀경찰 안기부와 어떤 관계에 있었느냐 하는 문제였다. 동독 시절 동독 정권은 전체주의적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비밀경찰 안기부를 전방위적으로 운영했고,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큰형(Big Brother)의 사회체제를 만들었다. 이러한 사회체제에서 교회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리챠드 슈뢰더 교수에 의하면, 비밀경찰 안기부와 접촉한 교회 인사들은 세 부류였다. 첫째는 비밀경찰 안기부로부터 특정한 정보를 제공하도록 요청받았던 경우이다. 이들은 요청을 거절하면 어려움을 당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응답했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비밀경찰 안기부의 비공식적인 동료로 분류되었다. 둘째는 비밀경찰 안기부와 함께 일하도록 공식적으로 요청받았던 경우이다. 이들은 자발적으로 서류에 서명했고, 비밀경찰 안기부에 주기적으로 보고하는 적극성을 띠었고, 당연하게 비공식적인 동료로 분류되었다. 셋째는 안기부의 직원이 교회의 인사로서 일했던 경우이다. 이들은 교회와 교인들을 확실히 농락했던 스파이였다. 세 번째 경우는 교회에서 즉각 축출되었고, 두 번째 경우는 징계에 회부되기 전에 스스로 물러났고, 첫 번째 경우는 교회가 관용을 베풀었다. 이러한 과거청산의 과정에서 동독 교회는 동독주민들의 실망과 불신에 직면해야 했다.
독일의 통일 이후 교회에 대두된 괄목할만한 현상은 출석교인이 감소하고, 수백만의 교인들이 교회를 이탈해서 더 이상 교인으로 남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독일 개신교협의회의 교인들에 대한 연구자료에 의하면, 동서독 출신자들이 교회를 이탈하는 이유에는 차이가 있었다. 먼저 서독출신자들의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다양한 이유들이 있었지만, 7점 만점에 4점 이상을 받은 비중있는 이유들만 언급해본다). “교회세를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5.27), 교회 없이도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5.14), 교회가 자신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5.01), 교회의 영향보다는 인본주의적이고 윤리적인 것의 영향을 더 중시하기 때문이다(4.77), 교회가 계속 죄의 짐을 부과하고 있어 더 이상 믿을 만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4.72), 인생에 어떤 종교도 더 이상 필요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4.55), 신앙을 갖고는 어떤 것도 더 이상 시작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4.48), 교회의 공적인 입장이 화를 나게 했기 때문이다(4.38).” 다음으로 동독출신자들의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교회가 자신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7점 만점에 5.17), 인생에 어떤 종교도 더 이상 필요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5.15), 신앙을 갖고는 어떤 것도 더 이상 시작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4.93), 교회의 영향보다는 인본주의적이고 윤리적인 것의 영향을 더 중시하기 때문이다(4.84), 교회세를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4.28), 교회가 계속 죄의 짐을 부과하고 있어 더 이상 믿을 만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4.00).” 서독 출신자들이 교회를 이탈하는 가장 높은 이유는 교회세에 있었고, 동독 출신자들이 교회를 이탈하는 가장 높은 이유는 교회의 중요성 상실에 있었다. 서독 출신자들은 독일 통일 후에 높은 세금과 그에 따른 교회세의 증가가 부담이 되었던 것이고, 동독 출신자들은 통일 이전에 의미 있어 보이던 교회가 통일 이후 변화된 상황에서 적절한 기여를 하지 못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4.2. 옛 재산권 분쟁으로 인한 독일인 내부의 갈등

동서독 간에 통일의 협약을 맺는 과정에서 어려웠던 옛 재산권 문제는 1990년 6월 15일 “미해결재산문제의 처리에 대한 양쪽 독일 정부의 공동성명서”로 합의되었다: “1945년부터 1949년까지 소련의 토지개혁으로 몰수된 재산들은 원상회복시킬 수 없다. 동독으로 탈출했거나 다른 이유로 인해 국가관리로 이전되었던 재산은 원소유자에게 반환한다. 현재 토지나 건물이 공동으로 사용되는 경우에는 국가가 보상을 한다. 동독 주민이 정당하게 취득한 재산에 대해서는 원소유자에게 돌려주는 대신 다른 토지로 교환해주거나 보상한다. 원소유자나 상속인은 반환을 청구하지 않고, 보상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재산의 반환원칙은 동독지역의 경제재건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기업가나 일반 투자자들의 투자를 주저하게 했고, 결과적으로 경제를 저해하는 요소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로 인해 1994년 9월 27일 “미해결재산의 문제처리를 위한 법률”이 새로 제정되었다. 이 법률은 이전의 반환원칙이 동독지역의 경제를 재건하는데 장애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서독 사람들 간의 내적인 갈등과 특히 동독인들의 심리적 박탈감을 심화시켰음을 보고, ‘보상보다는 반환’의 원칙을 ‘반환보다는 투자’의 원칙으로 바꾼 것이었다. 사실 동독을 이탈하고 서독에 통합된 서독인들에게 재산을 반환하게 한 조치는 동독인들에게 점유되었던 토지, 건물 등의 재산이 대대적으로 서독인들에게 이전되는 것을 의미했고, 때문에 반환의 원칙이 시행되는 동안 동독에서는 “동독은 서독의 식민지”라는 용어가 등장하기까지 했다.
독일의 통일 이후 독일정부는 동독지역의 경제적인 회복과 사회적인 통합을 위해서 1991년 이래로 연간 1000억 마르크 이상을 지속적으로 투자했다. 지금 통일된 지 20년이 되어가는 독일은 동독지역을 서독지역 못지않은 곳으로 만드는데 성공했고, 아직도 새로운 도시계획과 개발 그리고 최신의 인프라 구축이 동독지역에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통일 직후에 토지문제로 생겼던 동서독 주민들 간의 갈등은 여전히 모두의 상처로 남아 있다. 더욱이 아쉬운 것은, 1965년 10월 1일 동구사회백서를 통해 폴란드 땅이 된 독일의 옛 영토를 포기하도록 제안함으로써 동구와의 화해에 크게 기여했던 독일교회가 서독인이 된 옛 동독인들의 옛 재산권에 대해서는 어떤 제안도,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하고, 그저 정부의 결정을 바라보아야만 했던 것이다.

4.3. 사회통합을 위한 독일교회의 노력

독일이 통일되고, 자유로운 이주가 가능한 독일이 되었지만, 서독지역의 주민들은 동독지역을 위해서 투자되는 비용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점과 동독지역 주민들의 기여도가 부족하다는 점 때문에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동독지역의 주민들은 잘난 척을 하는 서독인들에 대한 반감과 2등 국민이 되었다는 열등감으로 인해 불만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독일이 동독과 서독의 지리적인 통일을 이루었다고 하지만, 동독 주민들과 서독 주민들 간에 사람의 통일을 아직 이루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독일의 통일 이후 동독지역의 도시들에서는 네오나치즘 현상과 공산주의로 회귀하려는 현상이 대두되었다. 통일비용을 감당해야 하는 부담감과 실업증가, 주체성의 상실감과 위축감 등이 일부 독일인들을 자극했고, 그들은 독일에 살고 있는 외국인 망명자나 이주노동자 또는 관광객을 희생양으로 삼아 테러를 감행했다. 분단시절 서독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난했던 동독이지만, 동독의 주민들은 주택과 직장 그리고 연금 등 각종 사회제도를 보장받았다. 그러나 통일 후 동독출신의 주민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는 것 자체가 녹록치 않았기 때문이다.
1991년에서 2003년 사이 독일의 민주주의에 불만을 표시한 독일인의 비율은 서독은 30~50%였던 반면 동독은 50~70%나 되었다. 동독이 훨씬 높게 나온 현상은 사회화 테제, 상황 테제, 무너진 기대 테제, 행동 테제 등으로 설명될 수 있다. 사회화 테제는 동독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각인된 가치관이 쉽게 바뀌지 않은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상황 테제는 서독보다 낮은 동독의 경제상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무너진 기대 테제는 서독인과 비슷한 생활을 향유하게 될 것에 대한 기대가 충족되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행동 테제는 서독 엘리트들의 주도에 밀려 주체적 역할을 하지 못한 불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요인이 가장 중요한 지는 학자들의 입장에 따라 다르지만, 동독 지역과 서독 지역이 아직 완벽한 통합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독일이 통일된 직후 설정된 독일의 과제는 동독에 있어서는 과거의 동독체제를 청산하고 가능한 한 빠르게 서독체제에 동화하는 것이었고, 서독에 있어서는 이질적인 동독체제의 부담을 줄이고 수용하면서 서독체제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이는 동독이 서독에 철저히 편입됨을 의미했다. 아직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완전한 편입, 완전한 평등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동독주민의 90%에게 정신적, 물질적인 이득을 가져다주었다면, 그것만으로도 독일의 통일은 큰 성공이었다. 그러나 진정한 통일은 사회적 통합과 문화적 통합까지 이루어질 때 완성될 수 있다. 바로 이 일을 위해서 독일교회는 동독 주민과 서독 주민이 함께 참여하는 세미나와 각종 모임을 통해서 상호 이해하는 노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4.4. 한국교회의 자기반성과 과제

한반도의 통일이 이루어지면, 아마도 한국교회는 교회 외적인 차원에서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한국교회는 분단현실을 거부하고 통일을 위해서 노력하고 기여했는지, 아니면 분단현실을 강화하고 통일에 장애가 되었는지 평가받을 것이다. 한국교회는 정치적 특권을 누리려고 분단현실을 악용한 정권에 대해서 예언자적인 사명을 감당했는지, 아니면 분단현실에서 정치적 특권을 누리는 정권에 편승해서 자신의 이해관계를 얻는데 급급했는지 평가받을 것이다. 또한 한국교회는 통일을 소망하고 통일을 준비했는지, 아니면 통일에 무관심하고 아무 준비를 하지 않아 우왕좌왕하고 있는지 평가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교회 밖에서 지금 교회가 어떤 평가를 받고 있고, 앞으로 어떤 평가를 받을 것인지에 대한 자기진단의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한국교회는 통일된 독일에 대두되었던 재산권 분쟁을 준비하지 않는 한 통일될 한반도에도 그대로 재현될 것을 예상하면서, 독일교회가 폴란드 땅이 된 독일의 옛 영토를 포기하도록 제안했던 것처럼,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미리 방향을 잡을 필요가 있다. 이북에 두고 온 교회의 재산에 대해서 이북노회에 속한 교회들이 재산권을 포기하는 것, 개인적으로 땅문서와 집문서를 보관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재산권 포기를 선언하는 것, 재산권을 행사할 가능성이 있는 실향민들에게 재산권을 포기하도록 서명받는 것, 국회로 하여금 이남의 실향민들이 이북에 두고 온 재산권을 포기한다는 법률을 제정하도록 요구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이 일은 통일 이후에는 불가능 하겠지만, 아직 통일의 시점이 막연한 상황 속에서는 보다 쉽게 실행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이남정부는 통일과 관련한 다양한 시나리오를 예상하고 통일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 전개될 상황을 예상하고 통일을 소극적으로 준비하기보다는 통일을 위해 전개되어야 할 상황을 조성하며 통일을 적극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교회 역시 통일된 후에 어떻게 하겠다는 통일의 수동적인 입장보다는 바람직한 통일의 내용을 설정하고 능동적으로 통일을 만들어가야 한다. 지금 이대로의 상황이 연장되어서 언젠가 한반도의 통일이 이루어진다면, 국토의 통일과 정치경제적인 통일에는 이를 수 있을지 몰라도, 사람의 통일과 사회문화적인 통일에까지 이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를 위해 한국교회는 이미 한국에 들어와 있는 탈북 새터민들에 대해 사랑의 관계를 설정하고, 조건 없이 사랑하고 배려하는 훈련을 실행할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노회를 단위로 해서, 이북의 특정 도시나 지역과 자매결연의 관계를 맺고, 다양한 교류와 협력과 지원을 통해서 상호 신뢰를 쌓아가는 노력을 최대한 실행할 것을 제안한다.

5. 나가는 말

역사에는 실험이 없다는 점에서 독일의 통일은 우리 한국을 위한 행운이자 기회이다. 우리 한국이 독일의 통일사례를 잘 분석하고 활용해서 한반도의 통일을 준비한다면, 한반도의 통일은 독일의 통일보다는 ‘더 나은’ 통일에 이룰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독일의 통일은 동독주민들의 평화적 혁명과 서독 주민들의 아낌없는 지원을 통해서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성취된 통일이었다. 독일의 통일정책은 정권에 따라 흔들리지도 않았다. 정권과 상관없이 언제나 일관성을 지니고 있었다. 독일의 통일 이래로 사회문화적인 통합이 쉽지 않아 아직도 독일에는 긴장과 갈등이 존재한다고 하지만, 독일인들 가운데 그 누구도 통일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독일의 통일이 성공한 통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국교회는 독일의 통일과정에서 동독교회와 서독교회의 역할이 지대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동독교회는 동독의 민주화를 이루는 산실이었고, 서독교회는 동독교회를 매개로 동독에 대한 지원과 함께 평화를 추구하는 일에 앞장섰기 때문이다.
한국의 어떤 사람들은 독일이 통일 후에 감당해야 했던 천문학적인 통일비용을 운운하면서, 한반도의 통일을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분단비용 역시 만만치 않음을 알아야 한다. 설사 통일비용이 분단비용보다 훨씬 크다고 할지라도, 속히 통일에 도달하고 통일비용을 감당하는 것이 보다 큰 의미가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이산가족의 아픔, 이념의 갈등, 남북긴장, 남남갈등, 군사비의 부담, 핵무기와 전쟁의 위협, 인권침해와 기아로 죽어가는 이북동포들, 휴전선 이북이 차단된 관계로 인해서 반도도 섬도 아닌 이상한 국토현실... 이 모든 것이 분단으로 인한 고통이 아닌가?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고, 희년의 비전을 한반도에 실현하고, 동북아 공동체와 세계 공동체에 메시아적인 희망을 담아내는 남북통일을 신앙의 과제로 설정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자기정체성을 실현하기 위해 타자를 위한 하나님의 교회로서 통일에 기여했던 독일교회를 거울삼아서 독일의 통일보다 더 나은 남북통일을 만드는 일에 전심전력해야 한다. 남북통일의 과제는 국가적이고 민족적인 과제일 뿐만 아니라, 평화를 만들어야 하는 하나님 자녀들의 신앙과제이기 때문이다.

footnote는 생략하였습니다. 잘 올라가지가 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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