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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 행하는 지혜(2009년11월 8일, 성령강림절후스물세번째주일)

하늘기차 | 2009.11.08 13:34 | 조회 2077


지켜 행하는 지혜

2009년11월 8일(성령강림절후스물세번째주일) 왕상 3:9-15

솔로몬이 다윗에 이어서 3대 왕이 되어 어떻게 왕위를 지켜나갈까 염려할 때에 솔로몬은 하나님께 "지혜로운 마음"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지혜로운 마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마음입니다. 모세는 신4:6에서
"너희는 이 규례와 법도를 지켜라. 그러면 여러 민족이, 너희가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이 이 모든 규례에 관해서 듣고, 이스라엘은 정말 위대한 백성이요 지혜롭고 슬기로운 민족이라고 말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사실 솔로몬의 간구는 이미 선 왕 다윗의 바램이기도 하였습니다. 왕상2에 보면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여 마지막 유언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때에도 어린 왕자에게 많은 조언을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윗은 한 가지 만을 유언으로 남깁니다. 왕상2:3에 보면
"그리고 너는 주 너의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고,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주께서 지시하시는 길을 걷고, 주의 법률과 계명, 주의 율례와 증거의 말씀을 지켜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를 가든지, 모든 일이 형통할 것이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이 지혜를 구하자 마음이 맞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보면 선왕 다윗과 솔로몬, 그리고 하나님이 모두 같은 마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지혜로운 마음은 이미 모세에게서부터 그 전통을 이어 왔으며, 오늘날도 이스라엘은 그 자녀들을 가르칠 때 신6:4-9을 볼 것 같으면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주는 오직 한 분뿐
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이 말씀을 마
음에 새기고,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 있을때나 일어나 있을 때나, 언제든지 가르쳐
라. 또 너희는 그것을 손에 매어 표로 삼고, 이마에 붙여 기호로 삼
아라. 집 문설주와 대문에도 써서 붙여라." 고 합니다.

지혜란 잠1:7 말씀에 볼 것 같으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에서부터 비롯된다고 하는데, 경외한다는 것은 한 마디로 무릎을 꿇는 것이지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나의 주인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주인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무릎을 꿇어 간구하는 것이야말로 지혜의 단초, 실마리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리석음의 실마리는 어디에서부터 일까요? 그 반대이겠지요. 역시 잠1:7은 어리석은 사람은 그 지혜와 훈계를 멸시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고 멸시하기 까지 하는 것일까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로 나아가 40년을 지내는 동안 줄곳 그래 왔던 것은 바로 원망, 시비, 불평, 불만이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솟아나왔습니다. 다소 배가 고플 수가 있고, 춥고, 피곤하여 고달프고, 따끈한 아랫목과 고기생각. . . 그리고 옛 날 애굽에서 생활할 때 즐겼던 일들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그래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가겠다는 마음은 갖지 말았어야 할텐데, 원망과 시비와 불평에서부터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려는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돌아가려는 마음이 어리석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집트가 아니라 가나안입니다.

원망과 시비와 불평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운 것입니다. 마치 구름이 태양을 가리우듯이 원망과 불평이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을 가리웠습니다. 구름이 태양을 가리운다고 태양이 없는 것이 아니듯이, 원망과 불평으로인해 사람들의 마음이 가나안으로 향하다가 애굽으로 향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죽은 것은 아닙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40년 동안 중심없이 이리저리 흔들린 것은 하나님과의 약속에서 비롯된 가나안에대한 꿈이 상실되었기 때문입니다. 앞을 향한 소망과 비죤이 말씀으로부터 흘러나오는데 그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려는 마음이 없어지니 그 말씀으로부터 나오는 소망을 막아버린 겪이 된 것입니다.

고대의 박사를 지혜자, 현자라고 하는데, 이들은 한결같이 꿈을 잘 해몽하는 자들이라 했습니다. 그 당시 꿈은 지혜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구약의 족장시대의 꿈쟁이는 단연 요셉이었습니다. 요셉은 어려서 하나님이 주신 꿈을 꾸고 그 꿈을 마음 속에 꼭 간직하였습니다. 그가 꾼 꿈을 어떻게 잃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변치않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부터였습니다. 형들의 미움을 사고, 애굽으로 팔려 보디발 장군의 집의 노예로 있을 때에,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혀있을 때에도, 바로에게 불리워 갔을 때에도, 형들과의 극적인 대면 장면 중에서도 늘 요셉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 있음을 봅니다.

요셉이 바로의 꿈을 해몽하기위해 바로 앞에 섰을 때에 요셉은 "저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임금님께서 기뻐하실 대답은, 하나님이 해주실 것입니다." 라고 합니다. 또 꿈을 해몽하는 중에도 "임금님께서 두 번 꾸신 꿈의 내용은 다 같은 것입니다. 임금님께서 장차 하셔야 할 일을 하나님이 보여 주신 것입니다. "라고 합니다. 또 형님들과 만났을 때에도 "그것은 하나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요셉이 어릴적 꿈을 끝까지 잊지않은 결정적인 요인은 바로 하나님을 향한 요셉의 변함없는 마음인 것입니다.

요셉의 삶의 여정 중에 특히 돋보이는 아름다움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요셉의 말과 행동을 통해 하나님을 본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꿈을 해몽하면서 어떻게 꿈을 해몽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바로가 마음의 감동을 받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감동시키시겠지만 바로가 지금 누구와 대면하고 있습니까? 말씀을 따라 하나님을 향한 삶을 살고있는 요셉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요셉이 하나입니다. 솔로몬이 지혜를 구할 때 하나님이 마음에 들었다고 하였으며, 또한 선왕 다윗도 솔로몬에게 마지막 유언으로 말씀을 지켜 행하라 할 때에 그 마음이 또한 하나입니다. 다윗과 솔로몬과 하나님이 모두 하나입니다.

여기서 지혜의 샘이 솟아나고, 그 맑고 시원한 삶, 그리고 신앙의 지혜와 소망이 생겨나고, 그리고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요셉이 그의 앞길을 가로막는 그 무수한 어려운 시험, 고난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가 끝까지 그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여 하나님이 그에게 은혜로 주신 꿈과 소망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우여러분! 우리 앞에 놓여진 삶의 길을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나요? 무엇보다 가정, 그리고 일터, 그리고 교회에서 어떤 꿈과 소망을 품고 살아갑니까? 꿈 같은 것 이미 잊은지 오래 되었다구요? 이 나이에 하시나요? 엊그제 소리의 향기 주관으로 발표회가 있어서 갔었습니다. 우리 교회와 지역분들은 아직 새내기이지만 그저 무대에 서 있는 것 만으로도 흐믓하였습니다. 근데 그 출연하시는 분 중에 94세되시는 할아버지께서 무대에 나오셔서 소리를 하시는데, 야!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무색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망과 꿈은 그 소망과 꿈을 꾸는 사람의 것인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남편 잘 못 만나서야 랄지, 부모를 잘 못 타고 났어 랄지, 때를 잘 못 타고 났어 등의 이야기들은 가만히 보면 하나님 아닌 것 바라보는 것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원망과 시비와 불평은 어리석은 삶의 실마리가 되는 것입니다. 민수기 21:4에 보면 "백성이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홍해 길로 좇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 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길로 다니지 않고 어찌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사람 만나고, 일하고, 놀고, 먹고 마시고 하는 것 다 길에서 이루어지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바로 그 길이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는 것입니다. 시험에 들게 하는 것이지요. 섭섭함을 주기도 하고, 분통을 터뜨리게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는 것입니다.

바위를 타다가 일어난 이야기인데요, 초보자였던 이 여자는 수직에 가까운 암벽을 후둘거리는 다리를 자제하며 로푸에 몸을 의지하며 조금씩 암벽을 올랐다고 합니다. 어느정도 오르다가 바위턱에 도착하여 한 숨을 돌리는데 위의 절벽에서 로오프를 잡고 있던 사람의 실수로 이 로오프가 이 여자의 눈을 때려 콘텍츠 렌즈를 떨어뜨렸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이 콘택츠 랜즈가 얼마나 작고 투명하여서 그것을 찿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지 잘 알 것입니다. 그래도 이 여자는 어떻게 해서든지 콘택츠 렌즈를 찿고자 이리저러 생각을 하며 또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혹시 렌즈가 눈 한쪽으로 치우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상에 오르면 먼저 올라간 사람에게 눈을 봐 달라고 해 보았는데, 역시 눈에서 렌즈를 찿을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여자는 먼저 오른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머지 사람들이 암벽을 오르는 것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굽이굽이 펼쳐있는 먼 산들을 바라보면서 "주님, 당신은 이 산 전체를 보실 수 있습니다. 당신은 저 산들 위에 있는 모든 돌맹이와 잎사귀를 아십니다. 그리고 저의 콘택츠 렌즈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도 아십니다."라고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드디어 내려갈 시간이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는데, 새로운 구룹이 그 암벽을 또 등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의 하나가 암벽면을 올라오면서 소리쳤답니다. '어이, 누구 콘택츠 렌즈 잃어버린 사람 없어요?"하는 것이었답니다. 그 등반팀 중의 한 사람이 그 콘택츠 랜즈를 찿은 것입니다. 참 놀랍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어떻게 이 렌즈를 찿을 수 있었을까요? 이 사람은 마침 이제 막 로오프를 잡으려고 하던 중에 한 마리 개미가 그 콘택츠 렌즈를 끌고 암벽을 천천히 가로 질러 가는 것을 본 것입니다. 너무나도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정말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시는 하나님, 참새 하나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이 여자의 아버지가 만화가였다고 하는데,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그 아버지에게 다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 만화가 아버지는
“주님, 저는 왜 당신이 제게 이 물건을 운반하게 하시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것을 먹을 수도 없고 또 이것은 엄청 무겁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제가 이 일을 하는 것을 원하신다면 저는 당신을 위해 이것을 운반할 것입니다.” 라는 글과 함께 콘택트렌즈를 끌고 가는 개미를 그렸다고 합니다. 그 초보 등산가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하느님, 당신은 왜 제가 이 짐을 지고 가기를 원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저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되고 이것은 엄청 무겁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제가 그것을 운반하기를 원하신다면 저는 할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마도 우리의 삶의 고백이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능력이 있는 사람을 부르시지 않고 불림을 받은 사람에게 능력을 부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향해 있는 지혜로운 자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에게 닥친 일을 감당 못하여 원망과 분쟁으로 나아갑니다. 이게 다 길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스스로 감당을 못하니 그 일이 자기 자신을 아프게 합니다. 그런데 그다음이 문제입니다. 그 다음은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아프게 하고 찌릅니다. 교우여러분 어리석은 자는 찌르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푸르게 합니다. 이게 내 이야기가 아닙니다. 시1편에 복있는 사람은 말씀을 따르며 지켜 행하는데 마치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다고 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소홀히 하며, 멸시하기 까지 한다면 그는 마치 시냇가가 아니라 사막에 심기워진 선인장이 아닐까 싶은 것입니다. 사막의 선인장은 물을 끌어 올리지 못해 잎이 가시로 변해 자신을 방어하며 겨우 살아갑니다. 살기위해 가시로 변한 것입니다. 그 가시가 사람을 찌릅니다. 그러나 시냇가에 심기워진 나무는 가믐이 심할 수록 더 푸르릅니다. 더 실하고 좋은 열매를 많이 맺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부딪기며 살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나의 마음이 가시처럼 날카로워져 자신은 물론 가까운 사람들을 찌르기 시작합니다.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며 심기를 불편하게 합니다. 말에 가시가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 즉 말씀을 지켜 행하려는 마음은 푸르른 마음입니다. 끝 없이 솟아나는 샘과 같이 갈증을 풀어줍니다. 복있는 삶의 지혜입니다. 말씀드렸지만 원망과 시비하는 마음은 삶의 소망을 잃게합니다. 삶을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사탄 마귀가 그 원망과 시비, 불평을 타고 들어와 사람을 죽게 합니다. 병들게 합니다. 옷에 좀이 들때 한꺼번에 드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씩, 조금씩 좀이 드는 것입니다. 강 뚝이 무너질 때 한꺼번에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약하고 허술한데 부터인 것입니다. 원망과 시비와 불평은 그렇게 우리의 삶의 소망을 조금씩 갉아먹습니다. 여기에 대항할 장사가 없는 것입니다. 모세도 이 덧에 걸려 결국 가나안 문턱에서 가나안 땅을 바라 보기만 하였습니다.

삶이 오래다 보면 원망과 시비와 불평, 분쟁의 틀에 갇히게 됩니다. 그 삶의 자리에는 시편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줄로 재어준 그래서 아름다운 자리는 없습니다. 말씀을 버리고 애굽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에게 물질적인 풍요는 있을지 모르지만 이기적인 자기 만족이 있을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의 육신과 함께 곧 무너져 없어잘 것들로 가득찬 삶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지혜자의 삶의 실마리, 반석위에 집을 짓는 지혜의 첫 발걸음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기도요 간구인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그랬고, 솔로몬이 그랫고, 한나가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셨을 때 성전 뜰이 장사치들로 아수라장이 되었을 때에 그들을 모두 쫓아내셨습니다. 쫓아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하셨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에 파고든 잡다한 것들을 무엇으로 물리칠 수 있을까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하였습니다. 내 마음으로, 내 마음의 성전으로 그동안 잡다한 것에 마음 팔았던 것을 몰아내고 돌이켜 말씀을 지켜 행하는 마음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합시다. 잠언 4:23은
"그 무엇보다도 너는 네 마음을 지켜라. 그 마음이 바로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지켜 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제 마음이 성전이라 하였습니다. 우리 마음이 기도하는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마음이 지켜집니다.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말씀을 하시고 나서 마지막으로 마28:20에서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지키게 하라는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지키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마음을 지키지 않고 어떻게 이 인생길에서 말씀을 지켜 행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마음을 길에 두지 말고, 그래서 원망 시비 하지 말고, 하나님께로 향하여 말씀을 지켜 행하기를 바랍니다. 지혜로운, 복된 삶을 살기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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