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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보존하려고(2009년11월 1일, 성령강림절후스물두번째주일)

하늘기차 | 2009.11.03 09:33 | 조회 1861


생명을 보존하려고

2009년11월 1일(성령강림절후스물두번째주일) 출1:6-14

지난 주 우리는 요셉 이야기를 통해 이집트와 같은 세상, 가믐이 극심한 세상에서는 은혜에대한 감사로 살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받은 은혜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서 받은 은혜는 이야기 하지 않고, 세상이 이래서, 직장 상사가 그래서, 남들도 다 그렇게 살기 때문에, 원망하고, 시기하고, 미워하고, 증오하였다고 말 할 수 있을까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주신 은혜로 감사한 삶을 살았다고 말하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을까요? 요셉은 형들과 만났을 때 "그러나 이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책하지도 마십시오. 형님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아 넘기긴 하였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이, 형님들 보다 앞서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라고 합니다. 그 한 마디에 모든 것들이 눈 녹듯이 녹아 하나가 됩니다.

그런데 요셉이 이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바로 '꿈'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식구들은 그 꿈을 싫어하였습니다. 요셉의 꿈은 가족에게 갈등, 분열을 주었습니다. 요셉이 꿈을 꾸지 않았다면 파란만장한 드라마는 펼쳐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꿈은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보여준 장차 이스라엘의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귀중한 꿈이 당시에는 가족들을 분열시키고 증오하게 만들었습니다. 모두 싫어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 고귀한 은혜를 깨닫지 못 할 때 그 은혜는 우리에게 짐이 되고, 사회와 가정에 갈등을 잃으키기도 합니다. 이 시대의 꿈쟁이를 말 해 본다면 단연 통일 꿈쟁이 문익환 목사님이십니다. 지금도 통일의 꿈은 사회적 갈등을 야기시킵니다. 바다 건너 미국의 흑인 꿈쟁이여였던 마틴 루터 킹 목사님도 바로 그러한 꿈쟁이였습니다. 킹 목사님은 흑인과 백인이 하나되는 꿈을 꾸어 결국 죽음을 맞이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꿈은 아마도 지금 이 시대의 미국 흑인 대통령 오바마를 탄생시킨 단초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입니다.

이렇게 하나되는 꿈쟁이의 원형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엡3:16은
"또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느님과 화
해시키시고 원수되었던 모든 요소를 없이하셨습니다. 이렇게 그리
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하느님과 멀리 떨어져 있던 여러분에게
나 가까이 있던 유다인들에게나 다 같이 평화의 기쁜 소식을 전해
주셨습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요셉은 이 꿈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당하였는데, 그러나 그 어려운 고통 속에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에대한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창45:5,7에 2 번 언급되고 있듯이 "생명을 보존하시려고. .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동행하시면서 요셉의 가정 안에서 꿈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을 협력하여 선하게 하십니다. 형들의 음모, 아버지의 슬픔, 요셉의 복수심,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 하나님께서 나를 형님들 보다 먼저 보냈다"는 요셉의 신앙고백 등. . . 이 모든 것을 합하여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동생 요셉이 죽었다는 거짓 소식, 아들 요셉이 죽었다고 완전히 믿고 있던 아버지 야곱에게 요셉은 살아 돌아 왔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도 같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예수님은 죽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예수님은 살아나셨습니다. 요셉은 죽었으며, 죽은 걸로 간주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죽었다고 생각하며, 믿고있던 요셉을 살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보존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시작과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어가는지 어두움 속에 가려져 있지만, 침묵 속에 기다리면 하나님께서 일하시어 선하게 인도하시는 것을 반드시 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가나안으로 향하다가 홍해를 만나 이러지도 저로지도 못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밤 새 동풍을 불러 홍해를 갈라 길을 내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가 모르는 밤 새에 어두움 속에서 일을 하십니다.

결국 야곱의 가족은 극심한 가믐을 벗어나 이집트에서 살게 됩니다. 그런데 이집트에서 생활한지 거의 400여년이 지나면서부터 문제가 발생합니다. 처음에 이집트로 야곱의 가족이 올 때에는 70 명 밖에 되지 않았지만, 한 세대가 지나고 계속해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면서 이집트에 새로운 왕이 나타나서 이집트를 통치하게 되었는데, 그 왕은 요셉을 모르는 왕이었습니다. 이집트의 역사 중에 아시아의 힛소스 족이 이집트를 침공하여 이집트에 왕조를 세운 때가 있는데, 그 때가 바로 이집트 역사 중에 15, 16 왕조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17 왕조 때에 이집트 인들이 다시 왕권을 장악하고 18 왕조 때에는 힉소스 민족을 이집트에서 몰아 냈으며, 19 왕조의 세티1세와 라암세스 2세는 왕권을 강화하고, 부국강병책을 통해 이집트 왕국을 일으키면서 이집트의 이방인들을 몰아내며 배척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당시의 문서를 보면 라암셋2세가 라암셋에 국고성을 세우고 있는 기록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집트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요셉이 이집트에서 총리를 하던 시대를 바로 아시아의 힉소스 족이 통치하던 시대로서, 이방인들에게 호의적이었던 시대인 반면에, 400년이 지난 즈음에는 이집트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 이방인들을 쫓아내던 시대인 바, 그 당시의 왕은 "요셉을 모르는 왕"이었습니다. 오늘 말씀 9절에 보면 파라오가 신하들에게 말하는 내용 중에 "이 백성, 곧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수도 많고, 힘도 강하다." 라고 합니다. 7절에도 "자녀를 많이 낳고 번성하여, 그 수가 불어나고 세력도 커졌으며, 마침내 그 땅에 가득 퍼졌다"고 합니다. 이 말을 우리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을 통해 거듭 확인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창28:14에서 "너의 자손이 땅의 티끌처럼 많아질 것이며, 동서 남북 사방으로 퍼질 것이다. 이 땅 위의 모든 백성이 너와 너의 자손 덕에 복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축복해 주십니다. 이 축복은 더 윗 조상 노아와 아담에게 까지 뻗어 있는 것을 우리는 성서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은 소멸되지 않습니다. 축복은 중간에 끊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무엇으로 이 축복을 받을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믿음입니다. 행3:25,26에 보면 "아브라함의 씨"로 인하여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 믿음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는 신앙 고백 속에서, 또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는 속에서 드러났고, 무수한 믿음의 조상들이 각 시대에 따라, 삶의 상황에 따라 하나님을 향한 마음으로 표현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성서 속의 축복은 지금도 우리들에게 이 시간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집트의 이스라엘 백성의 수가 많아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성취해 나가는 모습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힘도, 권세도 자연적인 재해도, 질병도 하나님과 우리와 맺은 언약을 깨뜨릴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그리스도와 우리 와의 사랑을 끊을 수 없습니다.

창세기에서 출애굽기 넘어 오면서 우리는 시대가 족장 시대에서 민족 시대로 넘어가는 것을 봅니다. 출1:1-7은 이스라엘 지파의 족보를 언급하면서 이스라엘 민족의 근거가 야곱의 12 형제에게서 비롯 되었으며,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9절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이 지파난 가족이 아니라 '백성'으로 호칭이 바뀌고 있음을 봅니다. 그런데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의 가믐을 피해 400여년 전에 생명을 얻기 위해 이집트로 내려 와서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왜 이러한 핍박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려졌을까요? 요셉이 꿈으로 인하여 고난을 받았듯이 이제는 이스라엘이 인류 구원의 계시를 보여줄 백성으로 택함을 받아 이집트에서 고난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인류 구원의 꿈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보존키 위해 한 민족을 택하셨는데, 그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감당해야 할 부분이 있는데, 바로 고난입니다. 마치 그것은 인류 구원을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한 것 과 같습니다.

이집트의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번성해 가는 것을 보고 겁을 냅니다. 출애굽 당시의 이집트의 라암셋 2세는 중동지역의 가장 비옥한 땅인 가나안의 '초생달과 같이 생긴 옥토'를 얻기 위해 아시아 정벌을 시작했으며, 도시를 증흥하고, 그래서 거대한 곡식저장 창고의 건설 등 많은 일들을 착수하였습니다. 이집트의 흥왕기였습니다. 이 때의 골칫거리가 하나 있었는데, 유독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번창해 9절에 보면 '우리 보다 강하다'고 합니다. 밖으로 뻗어 나가기 위해서는 안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이집트의 바로는 이스라엘 때문에 골치를 앟게 됩니다. 그래서 바로는 묘안을 생각합니다. 10 절에 ' 신중히 대처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로는 라암셋과 비돔에 곡식을 저장하는 성을 세우기로 하고 이스라엘을 그 건축에 참여시켜 심한 노역을 시킵니다. 바로의 학대는 점차 가중됩니다.

처음에는 비돔과 라암셋에 곡식 창고를 짓는 일을 시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의 왕성함은 그 기세가 꺽일 줄을 모릅니다. 결국 바로는 '영아 살해'의 명령을 내립니다. 이제 억압의 두 번째 단계로 들어갑니다. 바로는 그 명령을 히브리 산파들을 통해 내립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을 볼 것 같으면 히브리 산파는 이집트왕의 명을 어기고 애기들을 살립니다. 바로가 산파에게 왜 아기들을 죽이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 산파들은 히브리여인들이 건강하여 자신들이 도착하기 전에 먼저 해산한다고 말합니다. 지혜로운 대답입니다. 바로는 10절에서 이스라엘이 번성하는 것을 보고 '신중히 대처하여야'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로의 극악무도함은 지혜로운 2 여인에 의해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바로의 지혜는 인간의 교만에서 온 것이고, 산파의 지혜는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것에서 왔습니다. 자신의 명령이 산파들에 의해서 무너지자 이제는 그 악날함이 극에 달하여 자신의 신하들과 이집트인들에게 아이를 강에 버리라고 명령을 합니다. 모세는 바로 이렇게 억압이 아주 극렬해진 때에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바로의 억압이 다양한 방법으로 점차적으로 가중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스라엘이 처음에는 곡식창고를 짓는 일에 투입되면서 감독들에의해 억압을 당하고, 처음에는 벽돌을 제공하며 창고를 짓게 했는데 나중에는 진흙과 볏집을 주며 벽돌을 만들어 창고를 건축하라고 하였으며, 이제는 농사일 까지도 하게 되었고, 급기야 영아살해의 명령이 산파들에게 떨어지고 나중에는 이집트 백성들이 이스라엘을 학대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악의 힘은 이스라엘을 구원할 모세가 태어날 것을 알고 영아살해를 일으키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살해 현장 속에서 모세를 구출해 냅니다. 신약에서도 이러한 살해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때에 있었음을 봅니다. 이러한 살해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어느 곳에서나 일어납니다. 최근에는 아프리카, 아프카니스탄 같은 지역에서 영아들이 영양실조에 걸려, 풍토 병에 걸려 손 한 번 써 보지 못하고 죽어갑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좀 민주주의의 싻이 돋아 나는가 싶었는데 자라지도 못하고 그 밑둥이 잘려나가는 것 같습니다. 언론법과 미디어법의 헌재 결정이 나왔습니다. 과정이 잘 못 되었지만 법은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새벽 마다 기도하고 있는 용산 유가족들이 기다리던 용산 철거민에대한 판결이 모두 유죄 중징계 였습니다. 법만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득권 위한 법만 있습니다. 어떤 분이 칼럼에 왜 철거민들에대한 충분한 보상을 못해주고 강제철거를 하느냐 라는 것입니다. 4대강 만 해도 누구를 위한 개발이냐라는 것입니다. 명분도 실리도 없고 그저 돈만 있는,지주들을 즐겁게 해주는 개발에 4대강 유역에서 순하게 농사짓는 주민들의 마음만 새카맣게 타들어 갑니다.

지난 주는 우리교회가 지키는 추수감사주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매 10월 마지막 주는 한 편 종교개혁 주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루터와 칼빈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종교개혁주일을 기념하는 것일까요? 카톨릭이나 유대교는 전통을 중요시합니다. 그래서 카톨릭은 교황과 교회가 내리는 칙령이나 교서는 성경의 말씀과 동등한 권위를 갖습니다. 그렇다면 개신교는 무엇을 중시여기는 것일까요? 바로 개혁입니다. 장로교는 개혁교회의 정신을 이어받은 교회입니다. 날마다 새로워 져야 하며, 시대의 흐름에 도전하는 정신으로 개신교는 새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개혁과 변화를 잃어버리면 교회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양은 교회이지만 내용은 교회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오늘 이 시대를 바라보는 교회는 어떻게 새로워지고 개혁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며 결단하고 스스로 체질을 개선하고 시대를 앞서가는 모습이어야 개신교 교회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한 달에 한 번 뜻이 맞는 목회자 몇 분과 작은 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는 참 귀한 어른을 만나 뵈었습니다. 조촐한 저녁 식사자리였는데, 미국연합장로교회의 총회장을 역임했고, 미국 교회 NCC의 총회장이셨던 이승만 목사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이런 귀한 분을 사석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도 어찌 보면 행운이라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승만 목사님은 군부독재의 서슬이 시퍼렇던 80년대에 자신의 지위와 미국시민권자라는 것을 십분 발휘하여 북한과의 대화, 평화 통일을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북한을 드나들며 수고를 하셨던 분입니다. 지금 이만큼 그나마 북한과의 관계를 유지하게 된 것에는 그분의 노력이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석의 자리에서 이승만 목사님은 지금 대한민국 사회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교회가 교회 역활을 못한다고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교회가 대중화, 즉 Popularism에 빠져 말씀도,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도, 하나님 나라와 그 뜻은 다 사라지고, 행복, 축복, 성공 등 그리고 엉뚱한 프로그램들만 가득 찼다고 안타까워 하시며, 지금 이럴 때 일 수록 마이너리티, Minority가 소중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최근 김진홍 목사님이나, 서경석 목사님 겉은 분이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결국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였기 때문인데, 오늘 이 시대에 교회는 오히려 작은 교회, 소수의 참 신앙인, 남은자 신앙 고백자가 귀하다 하시며, 이 전에는 그 소수자들이 발언을 하면 다수자들이 그 소리에 떨려하기도 하였는데, 이제는 소수자도, 그리고 예언자의 메시지도 다 사라졌다고 개탄하였습니다.

바로가 '지혜롭게 해 보자'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이 시대도 역시 마찬가지 인 것 같습니다. 엊그제인가 이 명박 대통령께서 관료들과 함께 청개천을 평화롭게 걷는 모습을 언론 매체를 통해 보았습니다. 마치 아무 일 없는 것 같은 그러한 모습, 환하게 웃는 모습을 사진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곳에서 조금만 등을 돌려도 재개발의 폭력에 참담하게 죽어간 그래서 아직 장례도 치르지 못한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하루 하루를 넘기는 곳이 코 앞에 있는데, 나라의 지도자가 그들의 눈물을 씻어주지는 못할 망정 바로 가까운 곳에서 웃음을 머금고 거짓 평화의 몸짓을 보이는 것을 참으로 눈 뜨고 볼 수가 없습니다. 4대강도 그렇고, 행정도시 문제도 보면 참 교활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정권은 계속 '교활하게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기득권을 불려 나가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 지혜는 바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지혜인데, 그러나 이집트의 바로가 통치하던 당시의 산파들은 이러한 세상 권력의 폭력에대해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지혜로 맞섰습니다. 이 어둠의 세력과의 싸움에대해 요한계시록은 '악의 세력과의 우주적인 싸움 즉 '여자가 해산한 아이를 용이 삼키려'하는 이 위기에 직면한 영적 싸움에 대해 묵시로 이야기 합니다. 계시록이 보여주는 싸움의 구도는 역사에서 역사로 흘러 왔지만 지금도 여전히 그대로 유효합니다. 늘 약함과 강함의 싸움입니다. 강한 것에 지혜가 더하여 집니다. 이 싸움을 이 생명을 보존키 위한 싸움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가 바로 오늘 우리의 화두이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생각이 듭니다.

요셉이 고통을 받고, 이스라엘이 400년의 이방지역에서의 노예생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이 모두 생명을 보존키 위한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용산의 유가족들의 고난은 오늘 이 시대를 옳 바르게 바라 볼 수 있게 하고 판단할 수 있게 하며 행동할 수 있게 하는 생명을 보존하는 고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고기교회도 이 고통을 고통으로 보며 함께하며, 긍휼과 자비를 구하고, 특히 이집트의 산파와 같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지혜 안에 머물러 생명을 보존하는 신앙, 삶을 살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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