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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피하여 소망을 붙드는 자(2010년6월 6일, 성령강림절후두번째주일)

하늘기차 | 2010.06.06 14:04 | 조회 2164


세상을 피하여 소망을 붙드는 자

2010년6월 6일(성령강림절후두번째주일) 히6:13-20

히브리서는 초대 교회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면서 야기되는 유대교와의 갈등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의 성도들에게 유대교의 거짓 교사들이 나타나서 복음의 말씀만 가지고는 무언가 2% 부족하니 할례도 행하고, 제사도 드리고, 십계명도 지키고, 천사도 숭배해야하고, 2원론의 논리를 바탕으로한 영지주의자들 처럼 무언가 더 깊이 말씀의 도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교의 전통을 다시 되찿자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종교의식으로 보면 개신교 만큼 밋밋한 종교도 없을 것입니다. 예배 시간 동안, 그것도 1 시간 동안 그저 조용히 기도, 찬양, 말씀 듣고 그리고 축복기도로 예배가 끝나는 것이 무언가 좀 하나님께 마음을 드린다고 할지 드린다는 것에 영 허전한 느낌이 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당시의 성도들에게도 이러한 의식이나 구원의 과정이 너무 싶게 보여질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기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사 보다, 모세 보다 뛰어나신 분이라는 것을 논증합니다. 특히 제사와 관련하여서 보더라도 유월절 절기 때의 1주일 절기를 지키는 과정을 보면 1주일 내내 예루살렘에 제사드리는 동물의 피 냄새, 제물을 번제로 드릴 때 피어나는 연기와 동물 태우는 냄새가 온 예루살렘을 뒤 덮었으니까 사람들의 마음에 종교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넉넉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 뿐입니다. 그 이상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인간의 종교심만 만족시키는 것에 머물렀습니다. 바로 이스라엘이 그 제사, 그 엄격한 율법, 그 성정으로 망했습니다. 그런데 거짓 교사들이 또 슬그머니 유대교의 제사, 율법을 성도들에게 특히 유대인뿐 아니라 헬라 문화에 익숙해 있는 유럽과 소아시아 사람들에게 넌지시 들여 밀 때 바울을 포함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구원의 진리로 받아들이고 전파하는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는 참으로 남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히5-7의 내용을 보면 예수가 유일한 단 한 분의 인류의 죄를 속죄하신 대제사장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족장시대의 살렘 왕 멜기세덱을 인용하면서 유대인들이 떠 받드는 모세가 태어나기 전 이미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그 멜기세덱 왕에게 자신의 십의 일을 드렸는데 바로 그 멜기세덱은 족보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시작도 생명의 끝도 없는 그러한 분이라 하면서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의 계통은 유대교 전통 제사장 계열인 레위지파의 계열을 따르지 않고 시110:4에 근거하여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라 영원히 제사장이다’라고 합니다. 이렇게 유대교의 중심인 율법과 성전과 제사를 배제시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이며, 성전이며, 제사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도 그 말씀, 언약, 약속에대해 강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18절은 우리를 “앞에 놓인 소망을 붙잡으려고 세상에서 피하여 나온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소망을 붙잡으려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소망이 무엇일까요? 사실 소망이라 하면 참 막연합니다. 알듯 할 것도 같은데, 소망을 붙잡으려고 세상을 피하여 나왔다는 말을 보니 아브라함이 생각납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라고하는 우상의 땅에서 하나님의 약속만을 믿고 떠나 왔습니다. 아브라함은 무엇을 바랐을까요? 아브라함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식을 바라게 하셨습니다. 창11:30에 보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자식을 낳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사는 동안 아마도 아브라함은 자식에대한 소망을 포기하였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자식에대한 소망을 불러 일으키신 것입니다.

복음서에서도 18년동안 혈루증을 앓으며 절망적인 삶을 살던 여인이 예수님이 마을로 지나간다는 소식에 치유의 소망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은 베데스다 연못의 38년된 환자에게 다가가서 “네가 낳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시며 소망없이 살아가던 중풍병자에게 소망을 불어 넣으셨습니다.

교우여러분 여러분은 무슨 소망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는지요? 혹시 포기하고 살고 있지는 않는지요? 어쩌면 우리는 아브라함 처럼 하루 하루 살기에 바뻐서 마땅히 그리고 가장 소망해야할 것을 소망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처럼 세상에서 피하여 나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세상의 일에 붙들려 연연한다면 그것은 마치 오늘 히브리서의 말씀처럼 유대교에서 벗어나서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붙잡았는데 다시 유대교의 종교적 전통으로 죽으로 들어가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말하면서도 자기 모순에 빠지는 것은 아브라함이 소망한 것이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식을 소망하는 일이 사실은 세상적인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14절도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을 주고 복을 줄 것이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겠다”고 합니다. 세상이 바라는 것과 지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무슨 차이가 있나요? 글쎄요 저는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합니다. 자식 없어 뒷 마당 장독대에 정한수 떠다놓고 보름달 바라보며 비는 것 과 무슨 차이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성도들을 소망을 붙잡으려고 세상에서 피하여 나온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소망한다는 말의 사전적 의미를 보면 ‘바라는 것, 기대하는 것’이라 되어있습니다.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라는 것, 기대하는 것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바라고, 기대하느냐 라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잘 새겨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피하여 나왔지만 그러나 세상의 것으로 먹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는 사람들과 믿지않는 사람들의 바라는, 기다리는 행위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자식을 얻으리라는 소망을 품고 갈대아 우르를 떠난 아브라함에게 큰 위기가 닥칩니다. 아브라함이 정착하고 있던 지역에 큰 전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립니다. 조카 롯도 소돔 땅에 정착하여 잘 살다가 그만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롯도 포로로 잡혀갔는데 아브라함이 자신의 사병을 거느리고 쫓아가 롯과 그의 가족들, 그리고 빼앗겼던 모든 재산을 다시 찿아 돌아오는 개가를 올립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부터입니다.

큰 전쟁을 치르고 나서 아브라함은 불안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창15:12에 보면 그 두려움이 얼마나 컸는지 깊은 어두움과 공포가 그를 짓눌럿다고 합니다. 15:1에서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두려워말라고 합니다. 무엇이 그렇게 두려웠을까요?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에게 가장 큰 고민은 후계자 문제였습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에도 오직 그 약속 하난 바라보고 떠났는데 여전히 자식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동안은 그럭저럭 지내왔지만 이번 큰 전쟁을 치르고 나서는 자기가 거느리는 부족에게 후계자가 없다는 것이 자기자신과 부족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것인가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동안 나름대로 생각해 두었던 비장한 카드를 꺼내들어 하나님께 내 밉니다. 바로 언제나 항상 늘 한결같이 충성을 다 하는 엘리에셀을 자신의 후계자로 세우겠다는 것이었습니다. 15:3에서 아브라함은
“주께서 저에게 자식을 주지 않으셨으니, 이제, 저의 집에 있는 이 종이 저의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무어라 말씀하셨습니까? 4절입니다.
“아이는 너의 상속자가 아니다. 너의 몸에서 태어날 아들이 너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데리고 밖으로 나갑니다. 그리고 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보게 하면서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하시고는,
“너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중동의 그 광활한 모래밭, 그 하늘 위에 끝 없이 펼쳐진 별, 은하수를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고기리에 처음들어 왔을 때, 아직 분당이 개발되지 않았을 때에는 이 곳에서도 별은 물론이고 은하수를 볼 수도 있었습니다. 하물며 그 캄캄한 대지에서 그 하늘의 별들을 바라 본다면 그 느낌이 어떨까요?

하여간 여기서 아브라함은 중요한 선택을 합니다. 처음 갈대아 우르를 떠나며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깰려고 했지만 하늘의 별을 보며 오늘 히6:13이하의 표현처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맹세한 언약을 다시 갱신하고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제의를 다시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다시 기다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소망한다는 것은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약속한 것을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기다림에 한 번 더 위기가 닥쳐오지요 바로 이스마엘의 탄생입니다. 아내 사라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아브라함과 사라는 사라의 몸종 하갈을 통해 86 나이에 아이를 낳습니다. 그 아이가 바로 이스마엘입니다. 아브라함은 또 한번 하나님께 자기가 정한 사람으로 즉 지금 자기 품 속에 있는 이스마엘을 후계자를 삼겠다고 하나님께 말하지만 하나님은 역시 안된다고 하십니다. 약속대로 아브라함에게서 난 아들이 후계자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스마엘로 인하여 나중에 가족이 파탄되고 이스마엘은 어머니 하갈과 함께 아브라함을 떠납니다.여기서 소중한 지혜를 얻습니다. 오늘 말씀처럼 앞에 놓인 소망을 붙잡는 사람은 하나님과 맺은 약속을 기다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19절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우리에게는 이 소망이 있으니, 그것은 안전하고 확실한 영혼의 닻과 같아서, 휘장 안에까지 들어가게 해 줍니다”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피하여, 그러니까 세상의 물질 가치에서 벗어나서 소망을 붙잡으려하는 사람에게 약속과 말씀은 영혼의 닻과 같다는 것입니다. 배가 항구에 안전하게 정박을 하려면 닻을 내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배가 파도에 따라 이리 저리 흔들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지만 아브라함이 쫓은 소망이 무엇인가요? 자식에대한 소망이었지요, 사실 그 소망 하나로 보면 세속의 바램과 아무런 구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미 포기해 버린 소망을 다시 일깨우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차이가 날까요 기다림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 약속을 이끌어가십니다. 아브라함은 그저 아들 하나 바라는 그래서 그 부족을 그 지역에서 강하고 부하게 세우려는 정도였을 것입니다. 실제 친 아들 이삭 보다는 엘리에셀이나 이스마엘이 부족을 강하게 이끄는데는 보다 적격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삭은 후에 보면 너무 온순해서 싸움이 벌어질 때 마다 뒤로 후퇴하고, 양보하고, 가진 것을 다 내어주는 모습을 보이는 아주 순하고 여린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획은 거기에 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과 맹세를 통해 인류 구원의 초석을 다진 것입니다. 그런데 우여곡절을 격기는 하였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위기 때마다 거듭 갱신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기다려 아들 이삭을 100세에 얻습니다. 기다리는 것이 차이입니다. 자기 뜻 버리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기다림 그것이 희망인 것입니다.

이렇게 언약과 말씀의 닻을 심령 속에 깊이 품고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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