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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나타나신 주님(2010년 4월11일, 부활절후첫번째주일)

하늘기차 | 2010.04.11 15:53 | 조회 2272


또 나타나신 주님

2010년 4월11일(부활절후첫번째주일) 눅11:1-34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랍비요, 의회원이요 선생인 니고데모와 대화하는 중에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 당시에나 지금도 끝없이 하늘, 천국, 기적, 신비, 예루살렘 성전에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역설적으로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무척이나 힘들어 하는 이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하늘 보좌를 버렸다는 것은 글자 그대로 이 땅에서 벗어나려 하는 편만한 종교성을 뚫고 이 땅에 구체적인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부활 주간을 보낼 때면 늘 생각하게 하는 것은 그 부활이 나에게 지금 어떤 생명의 일로 다가 오는가 라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찬찬히 잘 살펴 보아야 합니다. 종종 말씀드렸지만 주님의 부활은 죽은 자가 관 뚜껑 열고 다시 일어나는 납양 특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바라보기 일 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어 돌아가신 이후 제자들은 무서워 한 곳에 모여 문 걸어 잠그고 무서워 떨고 있을 때 주님께서 그 곳에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어라”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눅24:37에 보면 제자들은 ‘놀라고, 무서움에 사로잡’혔 다고 합니다. 특히 자신들이 보는 것이 영이 아닌가, 쉽게 말해 몸이 없는 귀신이 아닌가 하자 주님께서 친히 손과 발을 보이시며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다 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다’라고 까지 말씀하시며 함께 음식을 나누었습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부활에, 생명에 몸이 함께 붙어 있지 않으면 그것은 귀신이야기 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말씀드렸지만 부활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죽음에서 건지어, 생명으로 나오셨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무엇으로, 어떤 과학으로, 어떤 논리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일 이기에 걸려 넘어질 수 밖에 없고, 그래서 부활은 낯설고 익숙치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부활을 처음 목격한 여인들, 그리고 그 소식을 여인들에게 전해 듣고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간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요한복음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첫 번째, 그리고 두 번째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부활을 나타내셨지만 제자들은 그 부활을 감당하지 못하였습니다.

부활은 신앙이지, 사상이나, 철학이나, 삶의 경험, 시대 정신, 또는 의지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문 꼭꼭 걸어 잠그고 몸사리고 숨어 있는 곳에 부활하여 변화하신 신령한 몸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손과 옆구리를 보이셨으며, 또한 제자들도 “주를 보고 기뻐”했다고 했는데, 그러나 믿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도마, 참 이스라엘이라는 칭찬을 받은 나다나엘도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또 다른 두 제자가 베드로의 말 한 마디, 즉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간다”는 말에 모두 동조하여 떠나는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 만지고 들었는데도 믿지 못합니다. 아마 그래서 주님은 첫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 같습니다

제가 부활은 신앙이지 사상이나, 철학이나, 시대정신, 또는 의지가 아니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부활이 그러면 공중에 떠 있는 하늘의 일로만 바라 보아야 하겠는가 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역으로 부활이 이 땅에서 어떻게 생명으로 드러날 수 있겠는가 라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본 제자들이 유령이라 하는 것 처럼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에스겔이 본 환상에서 마른 뼈들이 일어나 근육이 붙고, 살이 입혀지고 긍국에 생기가 불어 넣어지듯이 부활은 그저 바라보는 부활이 아니라 예수의 신령한 몸의 부활로 우리 가운데, 우리의 삶 속에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최근 시민단체 사람들과 자주 만날 기회를 갖는데, 진보적인 삶이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였습니다. 그 때 진보는 ‘삶’이다 하였습니다. 거친 문구의 플랭카드나 구호, 빨간 머리 띠로 상징되는 것도 있지만 삶 속에서 어떻게 진보적인 삶의 가치 즉 생명 가치, 인문 가치가 실현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학원 이야기, 먹거리 이야기 등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언젠가 읽은 신문에서 한 사람이 저녁에 배가 고픈데 돈은 없고 해서 간단히 패스트 푸드 점에서 한 끼를 떼우려고 어느 햄버거 집에 들어가 막 주문을 하려는 순간, 너무 부끄러워 눈물이 쏙 빠질 지경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집에서 쓰는 토마토가 이주 노동자들을 착취한 결과물이라는 것, 또 거기에 들어가는 재료들이 어떤 식재료인지 인체에 건강치 못한 나쁜, 가공된 재료라는 것을 인식하고서는 그냥 집에 돌아와 집에 있는 빵에 잼을 발라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삶 속에 어떻게 진보적인 가치를 실현하고 있는가 라고 하는 화두는 우리의 삶을 그리 쉽지는 않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 인문과 생명의 가치를 위해 불편을 감수한다는 것입니다. 하여간 그렇게 어떤 가치이든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한다는 것을 고민하는데,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몸의 부활이, 이 땅에 내려 오심이 우리들의 삶 속에서 어떻게 실현되는가 라는 것입니다.

수요일에 요한 계시록을 함께 읽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는 5장을 읽었습니다. 1~3장은 소아시아의 7 교회에대한 권면과 칭찬 그리고 책망에 이어 꼭 승리할 것을 당부하는데 4장으로 넘어가면서는 본격적으로 사도 요한이 환상가운데 본 하늘 교회, 하늘 보좌에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5장의 환상 가운데 가장 으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하늘 보좌가 있는 곳에 어린양이 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어린 양이 죽임을 당한 것 같은데, 보좌에 앉아계신 분이 들고 있는 두루마리의 일곱 봉인을 떼고, 그 내용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분이 바로 이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이 어린양을 둘러 쌓고 있는 4 생물과 24 장로들이 그 어린 양을 찬양하는데 거기서 주시할 것은 새 노래로 찬양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인 즉슨 그가 자신의 피로 댓가를 지불하고 우리를 사서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과 그래서 그 일곱봉인을 뗄 자격이있는 유일한 분이며, 우리가 그렇게 대속을 받았으니 하나님 앞에서 나라가 되고, 제사장되어 땅을 다스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천사들이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의 권세와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고 온 우주적인 찬양을 드립니다. 온갖 피조물과 교회와 그리고 온 우주의 구석 구석 어느 하나 빠짐이없이 죽임당하신 어린 양 예수를 향하여 찬양을 드리는 놀라운 비죤입니다.

교우여러분 우리가 바로 이 비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희망, 삶의 기쁨, 나눔과 사랑, 의로움과, 평화 . . . 용서와 관용 일상의 작은 일에서부터 깊은 생명의 일에 이르기 까지, 삶의 구석 구석의 희로애락이 바로 여기서부터 흘러 넘쳐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비죤은 그저 바라만 보는 것이 아니라 계5:10 말씀처럼
“주님께서 그들을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가 되게 하시고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땅을 다스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 속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나가며 제사장, 즉 중보의 역할을 한다는 놀라운 비죤을 우리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우리는 계5장의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의 비죤을 통해 우리가 ‘땅을 다스릴 것’이라는 비죤을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하시고 부활하신 후에 승천하셔서 계시록의 환상에서 보는 것 같이 하늘의 보좌에 계시는데,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하늘을 바라 보는 제자들에게 무어라 말씀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행1:11에 보면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하늘을 쳐다보면서 서 있느냐?”하셨습니다.

주님은 올라가신 것 그대로 또 다시 내려오실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 땅에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땅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가, 생명의 일들이 일어나고 세워지냐는 것입니다. 말씀드렸지만 사람들은 하늘, 천국, 기적, 신비, 예루살렘 성전에대한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렸다는 것은 글자 그대로 이 땅의 것을 벋어나 보려고 하는 편만해 있는 종교적 생각을 뚫고 이 땅에 구체적인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인간의 합리성, 논리, 철학과 사상, 시대 정신, 인간의 자기 감정과 연민을 뚫고 하늘 보좌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생명 현상은 우리의 합리성이나 과학으로, 논리로는 도저희 알 수 없는 생명체제인 것입니다. 우리를 제한하는 우리의 유한성을 뚫고 온 우주적인 비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비죤은 계시록의 말씀과 같이 죽임당하신 어린양의 비죤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억압하며, 분쟁케 하며, 폭력적이며, 어둡게 하는 힘을 뚫고 하늘의 죽임당하신 어린 양의 비죤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보리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천명을 먹인 기적을 통해 배부른 것을 보지말고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우리 가운데 임하는지 그 벅찬 감격을 맛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5병2어의 기적을 베풀 때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였듯이 온 몸으로 온 우주와 자연 피조물 그리고 교회를 품는 그 큰 비죤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이렇게 하늘만을 향하는 종교적 편향심과 아니면 땅에만 묶여있는 연민의 굴레를 끊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이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우리는 죽임 당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의 비죤과 그 비죤을 통해 이 땅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지를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죽임당한 어린양의 비죤만 바라 보고 있을 것인가라는 것입니다. 그 어린양이 어떻다는 것인가요? 어쩌란 말인가요? 왜 하늘 나라에서는 모든 피조물과 24 장로와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천사들이 죽임당한 어린양께 권세와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양을 우주 전체에서 돌리고 있을까요? 그것이 무슨 위미가 있는 것일까 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죽임당한 것 같은 어린 양의 모습은 충격적이게도, 아니 우리가 무관심해서 그렇지 이 지구상 어디에서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대한 민국에서도 지금도 구석 구석에서 편만하게 행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전에 어느 다큐 영화에서 태국에서 장기 매매가 이루어지는 놀라운 사실을 폭로하는 다큐영화가 상영되었습니다. 거기서 어린 아이들이 다른 사람의 생명을 연장 시키기 위해 죽임을 당하여 쓰레기 장에 비닐 포대에 쌓여서 버려지는 충격사실을 보았습니다.

또 일본의 타이지라는 작은 마을에서 매 년 수 많은 돌고래들이 돌고래 쑈와 회감으로 남획되고 죽어간다는 사실이 다큐로 찰영이 되었는데, 도륙이 되는 날에는 그 마을 전체 바다가 피 바다가 되는 믿기 어려운 참혹한 현실을 보았습니다. 그 뿐이겠습니까? 이 세상 구석 구석에서 이러한 참혹한 죽임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단지 우리가 하늘 보좌에 앉은 죽임 당한 어린양의 비죤을 보느라 하늘 만 처다 보고 있다면 이 것 또한 무슨 종교적 편향심이겠는가 라는 것입니다.

지난 번에 우리 교회에서 용인 지역의 시민단체 대표들의 모임이 조촐하게 있었습니다. 한 이 삼명의 분들이 오셨습니다. 그 중에 ‘내리 사랑’이라는 사회적 일자리를 창출하는 친환경 먹거리 가계를 책임지고 있는 장애인 대표 한 분도 오셨었습니다. 휠체어를 타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큰 방에 들어 올 때 여러 힘센 남자들이 함께 거들었습니다. 그 때 느낀 것은 장애인이 편하게 큰 방이나, 예배당에 편하게 출입 할 수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 하늘 보좌에 앉은 죽임당한 어린양의 계시록5장의 비죤이 이 땅에서 휠체어에 앉아있는 장애인의 모습과 교차되었습니다. 오늘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건강하고, 가졌고,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의 무관심과 편향, 그리고 편리함 때문에 얼마나 인간적인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임 당한 어린양과 같이 소외되고 홀로이 고통스러워 하며 사라져 가는가 라는 생각이 들어 부끄러웠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이렇게 하늘만을 향하는 종교적 편향심과 아니면 땅에만 묶여있는 연민의 굴레를 끊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이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우리는 죽임 당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의 비죤과 그 비죤을 통해 이 땅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지를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늘의 놀라운 비죤과 드러내심을 통해서도 우리는 좀처럼 믿음을 고백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막16:13에 보면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부활 예수 만나고 돌이켜 제자들을 찿아 가서 증거했을 때에 “제자들은 그들의 말도 믿지 않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말씀드렸지만 결국 제자들은 고기잡으러 갈릴리로 떠났습니다.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교우여러분! 이것이 부활없는, 아니 부활 신앙 없는 삶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패배주의요, 사탄의 계획에 무릎을 꿇는 것이요, 죽음에 메일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삶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하실 때 사람의 생각이나 판단에 머무르지 않으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오늘 읽은 21:1 말씀과 같이 디베랴 바다에 또 나타나셔서 제자들을 만나셨습니다.

교우여러분! 주님께서는 갈릴리 바닷가로 돌아간 제자들에게 또 나타나셨습니다. 또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또 나타나실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베드로가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갔지만 “그 날 밤에는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베드로가 예수 처음 만날 때의 상황과 똑 같다는 것을 보게 되는데, 예수 없는, 예수 떠난 인간의 참담함을 봅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와 같은 모습, 가시 넝쿨과 엉겅퀴 같은 모습 처럼 아무것도 잡지 못한 초라한 베드로의 모습, 실패한 베드로의 모습을 볼 때 차라리 3년 동안 고기나 열심히 잡았더라면 가족이나 잘 먹여 살렸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때에 주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부활입니다. 모든 우리의 번민, 두려움, 외로움, 공허함, 근심, 게으름, 거짓. . . 무수한 죽음의 냄새, 십자가를 향하여 한 걸음씩 나아가려는 우리의 발목을 끝까지 잡으려는 사탄의 권세, 궤계를 물리칠 수 있는 것은 주님의 부활입니다. 부활은 우리에게 찿아 오기 때문에 부활입니다. 한 번 이라도 더 우리에게 찿아오셔서 부활이라 하십니다. 이렇게 또 나타나셨다는 것이야 말로, 우리를 부활로 살게 하는 원동력이며 복음인 것입니다. 죽임당하신 어린양의 십자가를 볼 수 있고, 온 우주에 편만해 있는 보좌에 앉으신 죽임당하신 어린양에대한 찬양을 들을 수 있는 것도 바로 부활이 찿아오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부활의 은혜가 여러분의 삶 구석 구석, 머리카락 하나에 까지 임하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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